악보 장식에 회화가 함께 그려진 19세기 영국 삽화가 왈터 크레인의 그림이다. 추천받은 artvee를 매일 읽는데 어제는 이 예술가가 눈에 띄었다. 요즘 인풋이 너무 많은데 머리 속에서 죄다 충돌해 뇌내 글감들의 교통사고 수습이 안되고 있다가 음악과 미술을 좋아하는 지인이 이 삽화가에 관심을 가질듯하다고 운을 떼었는데 반응이 재밌어서 나도 그냥 우다다 폭풍우로 쏟아낸다. 이거슨 일필휘지. 다른 말로 아무말 대잔치







Baa! Baa! Black Sheep (1876)
Dance a Baby (1876)
Jack and Jill (1876)
Little Bo-Peep (1876)
Warm Hands (1876)
Dr. Faustus (1876)
https://artvee.com/artist/walter-crane/
그림을 보면 화려한 장식, 세밀한 선묘, 이집트벽화스러운 평면적 인물, 이상화되고 아름다운 여성과 목가적인 풍경 속 안온한 아이 같은 특징이 이전 포스팅에서 다루었던 전라파엘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존 에버렛 밀레이나 로세티 같은 전라파엘파의 삽화버전이랄까. 무하적 느낌도 있다. 악보에 회화가 묘사된 방식은 그리스로마 건축양식의 엔타블리쳐 위 프리즈(부조)를 닮았다.
나아가 일본 우키요예 판화에서 선명한 색면구획, 평행하면서 리듬감 있는 선을 배워온 듯하다. 이런 자포니즘으로부터의 영향은 여백이나 원경의 구도에서도 일부 확인된다. Jack and Jill (1876)와 Little Bo-Peep (1876) 같은 경우 말이다.
일반적으로 수학적 비례와 원근법에 입각한 유럽회화는 좌우균형이 돋보이나 크레인의 삽화들은 배경에 나무와 산세 같은 구도가 산수화의 영향을 받은 듯한 느낌을 준다. 이외에도 흩어진 꽃이나 인물의 측면 시선에서도 보인다. 무엇보다 악보와 그림의 공백은 동양회화의 의도적으로 공간을 비워두어 숨 쉬게 하는 여백의 미학을 떠올리게 한다.
크레인을 전라파엘파의 세례를 받은 인물로 이해하면 중세풍 목가적 세계를 재현하려는 프리라파엘파적 이상주의로 해석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아동용 삽화악보의 구매자가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라는데 착안하여
아이가 나무 앞에 서 있거나 여성이 정원과 동물 곁에 있는 장면은 놀이 장면이 아니라 자연 속의 순수한 교육과 무해한 성장을 추구하려는 서사 구조의 일환으로 이해해볼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을 끝까지 밀고 가서 비틀어 읽어보면 울타리에 주목해 정원을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노는 공간이 아니라 어른이 규율한 통제중심의 세계로 볼 수 있다. 그럼 정원 속 아이라는 모티프는 자연을 길들여 사회화하는 과정을 시각화하는 장치가 된다.
아울러 악보와 장식적 구성이 한 화면에 있어 연주하면서 동시에 그림을 감상할 수 있기에 예술과 생활의 통합을 추구하는 실천주의적 예술의 일환으로 읽어낼 수도 있겠다.
또한 사회주의에 경도된 작가의 이념에 주목해보면 모든 계층이 접근할 수 있는 보급형 예술을 추구했음이 확인된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 선생의 이상과 결이 같은 것이다.
아이들을 향해 다가오는 파우스트박사는 잠재적으로 위협적인 인물로서 의미심장하다. 본디 아동소설에는 이런 늙은 캐릭터가 있어 내면의 형언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상징하고 이와 대척점에 있는 평화로운 일상의 감칠맛을 살린다.
목가적인 정원을 산업주의와 도시에 지친 사람들의 심리적 도피처라고 이해하고 싶지 않다면 미래를 지향하는 선언적인 의미로서 정원의 의미를 풍성히 더해볼 수도 있다. 정원은 곧 이상사회, 어린이는 새로운 인간상, 이를 그린 그림은 모두 함께 하는 공동체와 이상적 교육으로.
그러나 나는 이렇게 작가주의적, 회화사적, 시대의 사회문화적, 정치적 접근방식을 생각해보는 것도 참 재밌지만
모두 어린이를 어른의 미니미로 여긴다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에
악보와 그림을 결합했다는 점에서 읽기-보기-노래하기-듣기 등 예술적 감각을 모두 동원하는 일종의 멀티모달 예술체험의 시초로 접근해보고 싶다.
그러면 이 어린이가 잃어버린 실낙원의 초상이냐 분진과 먼지에 찌든 산업주의 일꾼의 비가역적 원형이냐 로빈슨 크루소 같은 제국주의적 경영자의 자연길들이기냐,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회주의적 이상적 롤모델이냐 등등의 일방적 덧씌워 읽기의 한계를 넘어
어린이를 혹은 연주하는 이를 소극적 수용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자로 초청하고 전복시키는 미적 실험으로 이해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충 여기까지만 써야겠다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