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어는 다른 유럽어와 다르다. 대개 SVO 어순의 직선적인 문형이 특징인 유럽어에 비해 행위주체인 주어를 강조하지 않고 수동태나 사역형을 활용해 행위자를 생략하고 사건을 강조한다.
예컨대
John broke the window 존이 창문을 깼다
를 직역한 Juan rompió la ventana보다
la ventana se rompió 창문이 깨졌다가 자연스럽다.
물론 프랑스어에도 네가 보고 싶어=I miss you를 Tu me manques라고 뒤집어 표현해 너는 나를 그립게 만들어, 라는 로맨틱한 표현이 있지만 인과관계보다 행위의 매개적 성격을 부각시키는 표현은 스페인어에 훨씬 많다.
우선 se가 다른 유럽어에 비해 재귀인칭대명사일 뿐 아니라 무인칭(다들 그렇다), 수동(~되었다) 등 다양하게 쓰인다. 다른 언어에서는 poderse처럼 can에 itself가 붙어있는 표현이 없고, verse처럼 see oneself가 되었다라는 의미로 쓰이지 않는다.
무인칭, 중간태, 재귀, 주체 후위화를 모두 포괄하는 스페인어만의 독특한 매력이다. 그래서 se puede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가 가능하다로 해석되고, verse(보통 se vio로)는 '(자연스럽게 혹은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다, 나타난다, ~보인다, ~듯 하다'로 옮겨진다. 이런 표현법의 특징은 목적어나 사건 자체가 주어처럼 문두로 올 수 있으며 행위자는 생략하고 상황을 강조하며 동사와 붙어 무인칭 수동 구조를 만든다는 것이다.
영프독에는 정확히 대응되는 직역이 없다. 옮기려면 항상 가상의 주어 또는 문어적 구조가 필요하다. 없던 주체를 발굴하는 등 구조를 꺾어야한다.
이런 스페인어는 711년부터 1492년까지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한 아랍인의 언어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아랍어도 동사를 먼저 쓰고 주어는 종종 가려지기 때문이다 VSO 혹은 VO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또한 아랍어 동사 10변형 중에서 스페인어와 같은 특징을 보이는 표현이 많다. 예컨대
아랍어 동사 10변형 개요에서 9번을 제외한 모든 것이 다 그런 뉘앙스다 (대략 아랍어과 2학년 진도)
I (فعل) 기본 의미, 단순 동사
II (فعّل) 사역 / 강화 / 반복
III (فاعل) 상호적 / 상호작용
IV (أفعل) 사역 / 강제
V (تفعّل) 재귀적, 자기행위 강조
VI (تفاعل) 상호적 재귀
VII (انفعل) 수동 / 자기발생 / 상태 변화
VIII (افتعل) 반사적 / 자기 관련 / 재귀
IX (افعلّ) 색·상태 관련 (형용사적)
X (استفعل) 사역적·요청적 / 얻다, 구하다
동사 수준이 아니라 문형 수준에서 보자면 아까 읽었던 히스토리아 아르떼의 도라 마르 글에서 보면 이런 표현이 있다.
Los últimos años de esta fotógrafa olvidada los pasa en su casa, con un círculo reducido de amistades.
한영으로 자연스럽게 번역하면
This forgotten photographer spent her final years at home with a small circle of friends.
(혹은 더 원어민스럽게 자연스럽게 바꾸면, In her final years, this forgotten photographer lived quietly at home, surrounded by a few close friends)다.
이 잊힌 여성사진작가는 말년에 집에서 가까운 몇몇 친구들과 조용히 지냈다.
물론 reducido에는 줄어든 친구라는 뉘앙스가 있긴 한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건 문형이다.
스페인어의 문구를 그대로 한영으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 잊힌 여성 사진작가의 마지막 몇 년은) 그녀는 (집에서 보낸다) (작은 친구들의 모임과 함께)
(The final years of this forgotten photographer) (years) she spends at home이다.
특이한 구조다.
주체인 사진가가 아니라, 시간을 보내다라는 행위의 목적어가 도치되었고(토픽강조) 주어인 그녀는 동사에 포함됐다. 원래 스페인어는 동사 어미에 주어가 표현되어서 she spends가 아니라 spends(pasa)라고 쓰였다.
게다가 years도 대명사los로 한 번 더 반복되었다.
Los últimos años de esta fotógrafa olvidada
이 잊힌 여성사진작가의 말년을
los pasa en su casa
(그 시간을) 보냈다+<그녀는> 집에서
이를 통해 사건이나 결과가 먼저 나오고 부차적인 행위자는 생략가능한 주체 후위화의 언어적 특징을 읽어낼 수 있다.
또한 간접적 매개적 조정적 관점으로서 독립적인 개인이 주체적으로 했다라는 서유럽식 사고보다는, 그렇게 되었다라는 사건 자체에 주목하는 아랍어에 영향받은 사고방식을 읽어낼 수 있다.
또한 수동태나 중간태(무인칭) 활용을 통해 상태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변화에 초점을 두는 접근방식도 보인다.
이런 특징은 일본어에서도 보이는데 예컨대 직접적으로 사랑고백을 하지 않고, 분위기상으로 사귀게되어졌다라고 한다든지, 원하는 것을 직접 쟁취하지 않고 상황에 의해 그렇게 되어졌다고 말하는 방식이 비슷하다.
구체적으로
일본어에서는 꾈 유를 써서 사소우(誘う)같은 표현이 많이 보이는데
사소와레따(誘われた)라는 말은 권해졌다, 꾀어졌다, 불러내졌다라는 말이고, 피동형(국문법에선 수동태라는 말이 틀리다)이 자연스럽지 않은 우리식로 바꾸어보자면 (상황에 이끌려서) 가게 되었다, 즉 누군가가 나에게 그렇게 하자고 말했다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デートに誘われた
직역은 데이트에 권해졌다이고
데이트하게 되었다=자연스럽게 사귀게 되었다
라는 뉘앙스로 해석이되는데
이런 답답함이 싫어서 직설적 화법으로 바꾸자면
숨겨져있고 없던 주어를 복원해야한다.
"그가 나에게 데이트 신청했다"라고.
이와 비슷하게 지명되었다, 지목되었다(指名された)도 많이 쓴다. 이런 표현은 한 두개가 아니다.
사랑이나 관계에 있어서도 간접적 표현방식을 선호한다.
그런데 어쩐지 아랍-스페인-일본 모두 척박한 기후에서 종교의 역할이 강하고 압도적인 자연의 위력 속에 사람들은 순종적이되고 아무리 노력해도 방지할 수 없는 천재지변 속에 교단과 함께 대동단결해 상호부조를 하는 상황 속에서 발아된 공통적인 사고방식이 언어에 드러나는 것 같다.
자연환경과 기후가 인간의식과 언어표현 방식에 영향을 준다는 뜻이다.
행위자는 뒤로 빼고 감추고 직접 행동이나 발화보다 결과나 상황으로 사건을 묘사해서 감정적 사회적 완충장치를 만드는 언어는
주체의식이 뿜뿜 빛나고 자기 문제는 스스로 DIY로 해결하고 마음에 안 들면 다른 마을로 얼마든지 이동하는 북유럽식 사고와는 차이점이 있다.
아랍의 모래사막 척박한 땅에 인격화된 유일신 구원자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역시나 뜨겁게 작열하는 스페인의 기후에서 태동한 열렬한 가톨릭 신도들이 아메리카 대륙까지 전도를 나갈 정도였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습기가 많은 더위를 어떻게 해볼 수 없어 견디는 자들이 매년 태풍 쓰나미 지진의 자연재해를 견뎌야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불교나 신도의 조직력을 통해 어떻게든 마을 단위로 대동단결해 문제를 해결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이런 기후에 사는 사람들의 의식구조에는
자랑스러운 내가 이것을 혼자서 하였다. 라는 말보다는
우리 모두 다같이 하였다, 이런 식으로 되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집단이 하였다. 하는 식으로 말하게 되지 않을까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결국 집이 쓰러졌다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다시 복원되었다고
우리 모두 함께 한 결과 그렇게 되었다고
그런 결과 자연스레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기후와 생활방식이 언어와 사고에 영향을 미쳐 영향주체 후위화, 결과 사건 중심, 간접적 매개적 완충적 상황중심적 결과중심적 집단적 사고가 나타난다고 본다.
물론 일부의 특징으로 읽어낸 사례일 뿐 집단 구성원의 사고를 표준화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케바케 사바사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