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뉴요커 정말 흥미로운 도서 리뷰


케이트 라일리의 데뷔소설 Ruth에 대한 맛깔나는 뉴요커풍 리뷰다.


1960년대 미시간 재세례파 공동체의 일상적이고 소소한 삶을 그려내는 이 소설은 갈등이나 드라마틱한 전개보다는 맛있는 디저트를 위트있고 화려한 문체로 묘사한다는 데 특징이 있다.


달콤한 음식과 정돈된 규율이라는 신앙 공동체의 양면적 세계를 정교하게 포착하면서 그 이면의 억압, 긴장이나 정치적 무게는 빵 속 크림처럼 감추어 두었기에 웨스 앤더스 같은 스타일의 미학을 추구했다고도 볼 수 있다. 


스타일과 질서와 매혹을 탐구하는 작품을 읽으며 다루지 않은 더 깊은 진실을 갈망하게 되는 셈. 


한국 사이비를 다룬 넷플 다큐 <나는 생존자다>나 미국 보수 기독교를 다룬 <더 패밀리>, 영화 <데어윌비블러드>와 페어링하기에 좋아보인다.


뉴요커는 문단 별로 줄을 치면서 읽고 싶을 정도로 스타일리쉬한 영어 표현이 많은데 예를 들어


insular religious community

섬 같은 (폐쇄적) 종교 공동체


irresistible pleasure of making up rules

규칙을 만드는 저항 불가능한 즐거움(규칙 제정의 기묘한 매력)


irreverent longings

불경한 동경(외부 세계에 대한 금기된 욕망)


at the behest of

~의 명령에 따라(교회 지시에 의해)


at the drop of a hat

모자를 떨어뜨리자마자(즉시, 갑자기)


inflexible vision of domesticity

융통성 없는 (경직된 가부장적) 가정상


humble escapades

소박한 소동들


effete description

기운 빠진 묘사


apotheosis of twee

귀여움의 신격화(극치)


petit-four politics

쁘티푸흐 정치(디저트 같은 소규모 정치)


shamefaced pleadings

부끄러운 호소


fleeting ancillary characters

잠깐 나타나는 보조 인물들


like ducklings marching in lockstep

오리 새끼들이 발맞춰 행진하는 것처럼 질서 정연한 움직임


풍자하는 표현 두 가지

1) hot cross bun marathon

핫 크로스 번 마라톤(공동체 이벤트인 과장된 음식행사를 풍자)


2) pies of breathtaking uniformity

숨 막힐 정도로 균일한 파이(지나친 규격화 풍자)



그리고 두운alliteration활용하는 좋은 표현 두 가지

1) familiarity without favoritism

친밀하되 편애는 없는 상태(공동체적 균형 추구)


2) This finicky, formal style coats every page of the novel with an impressively even surface

이 까다롭고 격식을 갖춘 문체가 소설의 모든 페이지를 놀라울 만큼 균질한 표면으로 덮는다


https://www.newyorker.com/books/under-review/pictures-of-life-on-a-christian-comm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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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카토르 독법이 원래 대륙 사이즈를 반영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며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세계지도 바르게 하기 운동이 확산중이다


실제로 아프리카 대륙이 큰 것은 맞고

기존 세계지도에선 북반구 캐나다, 러시아, 특히 그린란드가 과하게 강조된 것은 사실이다.

아래 사진만 봐도 스칸디나비아가 얼마나 쪼그라들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서양중심에서 아프리카중심으로 체스판의 중심을 이동하고 싶은 것이라며 다른 나라들은 굳이 관심을 두지 않을테니

이것은 다양성을 표방하는 모든 운동의 문제점이다


주류집단이 대표적이고 보편적이지 않으며 그 집단도 전체의 한 부분집합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혁명을 일으켜 그 중심성을 옮겨오고 싶다면 과연 비주류집단 중 누가 그 주류를 차지할 것인가?


즉, 기존의 그 왕좌는 수많은 가신 중 누가 차지할 것인가?


기존에 백인 남성 서유럽미국 중심으로 짜여져있는 주류 구도를 글로벌 사우스로 옮긴다고 차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구조의 문제다


https://correctthemap.org/


https://equal-earth.com/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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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koreatimes.co.kr/lifestyle/arts-theater/20250828/frieze-2025-kim-tschang-yeul-the-painter-who-made-fleeting-waterdrops-eternal


더코리아타임즈 주말판 믿음직한 박한솔 기자의 국현미 김창열전 리뷰 기사다


우수한 영문 저널리즘에서 그러하듯이 핵심 단어인 물방울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수없이 반복하며 단어의 외연을 풍부하게 더했다. 예를 들어


A drop of water → 물 한 방울

fleeting beads → 덧없는 구슬들 / 순간적인 알갱이들

the glistening droplets → 반짝이는 물방울

they perched weightlessly~ → 물방울은 무게 없이 얹히고

slide downward~forever suspended in motion → 아래로 미끄러지다 멈춘 방울

a single bead of water → 단 하나의 물의 구슬

a single, suspended tear-like bead of water → 공중에 매달린 눈물 같은 단 하나의 물의 구슬

pearl-like drops → 진주 같은 방울들

his ephemeral beads → 그의 덧없는 구슬들


그리고 마지막 문단에서


a lifetime spent chasing these transient forms 이 덧없는 형태를 쫓았던 인생

이런 다양하고 풍부한 동의표현이 글에 원어민적 감각을 더한다.



다음은 채선생에게 좋은 문단만 일부 복붙해서 번역해잘라고 부탁한 결과다.


첫 네 문단 번역


유리 위를 미끄러져 내려가고, 땅속으로 스며들며, 공기 속으로 증발해 사라지는 물 한 방울. 김창열(1929–2021)은 이 덧없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구슬들을 붙잡아 영원으로 만들었다.


반세기 동안 그는 수도승 같은 헌신으로 반짝이는 물방울을 되풀이해 그렸다. 때로는 갓 떨어진 듯 가볍게 캔버스 위에 얹혀 있었고, 때로는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다 영원히 멈춘 것처럼 보였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극사실적 환영의 성취를 넘어선다. 김창열에게 물방울은 전쟁과 유랑의 말해지지 않은 상처의 상징이었다. 그 여린 곡선 안에는 상실의 고통과 더불어 위안의 가능성, 지워짐과 초월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그러나 물방울의 힘이 아무리 강렬하다 하더라도, 그것만을 응시하는 것은 그 뒤에 있는 사람과 그가 자신의 상징적 모티프로 나아가게 된 길고 우회적인 여정을 가려버릴 위험이 있다.


중략


그 후 10여 년 동안, 그는 자신의 고통과 절망을 음울한 앵포르멜 추상에 쏟아부었다. 다수가 「의식(Rite)」이라는 제목을 공유하는 이 초기의 어두운 색조 작품들은 거칠게 내리친 흔적과 원형의 압흔을 담고 있다. 그것들은 마치 탱크의 무한궤도와 총탄이 살을 찢는 흔적을 불러일으킨다.


중략


돈도 거의 없고 인정을 받을 뚜렷한 길도 없었던 그는 점차 새로운 양식으로 기울었다. 밝고 유동적인 형상을 불러내며 기묘한 생명력으로 고동치는 듯한 형태들 — 살아 있는 창자가 쏟아져 나오는 것 같은 형상들이었다. 그는 그것을 “창자 그림(intestine art)”이라 불렀다.


중략


그 고요한 고독 속에서 비전이 찾아왔다. 어느 새벽, 밤새 작업을 마친 뒤 그는 캔버스에 매달려 있던 단 하나의 물방울이 여명 속에서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 덧없는 광경에서 탄생한 것이 「밤의 사건(Evenement de la nuit)」(1972) — 캔버스 위에 매달린 눈물 같은 한 방울의 물이었다.


오랫동안 그의 최초의 물방울 그림으로 평가받아온 이 작품은, 서울 회고전에서 새롭게 맥락화된다. 그곳에서는 한 해 전 이미 구슬 같은 방울들이 빛나고 있던 두 점의 미공개 캔버스가 함께 전시되고있다.


중략


그는 대마 캔버스, 신문지, 그리고 한국의 전통닥나무 한지를 비롯한 다양한 지지체 위에 다시금 그 덧없는 구슬들을 불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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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 타는 감자 할멈 문해력 한입 꿀꺽
홍주연 지음 / 비룡소 / 2025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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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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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https://blog.aladin.co.kr/797104119/16701466


이어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글을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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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을 불행했던 가족관계와 트라우마로 해석하는 방식은 선명하지만 충분하지 않다는 글을 쓰다가 역에 도착해서 급히 포스팅 업로드 버튼 누르는 바람에 감질나게 글을 마쳤죠.


개인의 생애사는 중요하나, 그것만으로는 그녀의 작품세계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지요. 오히려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가족, 부모 서사 중심의 해설은 납작한 언어로 스테레오타입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인간은 생애 주기마다 변하며, 개인의 트라우마는 극복될 수 있고, 실제로 부르주아 역시 긴 시간 동안 작가로서 행운과 성공의 시기를 거쳤습니다. 그런데도 해석은 여전히 불운한 시기에 경험했던 가족 관계의 트라우마로 수렴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그녀의 아픔이 존재하지 않았다거나, 그 상처의 강도가 얕았다라고 말하느 것이 아닙니다. 왜 전시의 해설은 반복적으로 한 메뉴만 제공되는가, 에 대한 정당한 의문이지요.


실제로 아팠을 것이고, 그 아픔을 부각해야 작품기획과 표현이 잘 매칭되어 해설의 지적해상도가 선명해지나, 그것만으로 완벽히 한 사람의 작품세계를 다 설명해내지 못하며 왜 장기간 동안 다양한 관객들마저 이토록 집착적으로 이 방식으로만 작품을 접근하는가, 를 감안하다면 하나의 해석은 충분하지 못하다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설령 처음엔 그런 선명한 설명으로 이해했어도 일방향 접근을 뛰어넘어 다른 식으로도 생각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제가 주목하고 싶은 지점은 일종의 사회적 맥락과 메타적 인식입니다. 왜 이 담론이 특정 사회적 맥락에서 구성되는가, 왜 같은 해설이 관객의 반향과 동의를 얻어 전시마다 반복적으로 제공되는가, 그 반복성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하는 문제입니다.


1. 우선 저는 트라우마는 주제나 메시지가 아니라 방법으로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르주아=트라우마 예술가라는 프레임은 선명한데, 이 프레임을 장시간에 걸쳐 작가, 비평가, 관객이 반복하는데서 저는 일단 트라우마는 메시지가 아니라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트라우마 극복을 위해 작품 제작을 방법으로서, 관객은 개인의 심리적 아픔을 타인을 통해 치유하기 위하며 전시공간은 일종의 카타르시스 해소의 굿판이 되는 것이죠.

작가에게는 작품 제작이 상처 극복의 수단이자 과정이었고, 관객에게는 개인의 심리적 아픔을 타인의 작품을 통해 해소하는 대리 치료의 경험이 되었으며, 전시 공간은 일종의 카타르시스의 장으로 기능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반복과 변형은 기억을 재현하는 장면이 아니라 기억을 가공하는 알고리즘이라 할 수 있습니다.


〈Destruction of the Father〉를 예로 들면, 제목만 보고 파블로프의 개처럼 즉각적으로 아버지의 폭력과 가족관계로부터의 상처를 호출하는 대신, 사운드, 동선, 가림막 같은 연출 장치가 감정보다 먼저 서사를 조직하는 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Cells〉는 조각이라기보다 (연극적) 장면 장치로 볼 수 있으며, 반투명 재질과 시점 차단, 입구와 출구의 구조가 관객의 체험을 비로소 심리 서사로 엮어냅니다. 그러면 작품을 만나기도 전에 먼저 해석을 들고 와서 때려넣는게 아니라, 감정이 이끌어져 나오는 과정을 존중하며 작품을 샅샅이 그리고 낱낱이 응시할 수 있겠죠. 무대 장치로 읽는다면 대상은 소품이 되고, 핵심은 관람 절차의 설계가 됩니다.


이렇게 이해했을 때 작품 외적인 설명을 들고와서 작품에 때려박지 않고 먼저 작품과 표현의도를 살펴볼 수 있게 되지요. 그렇게 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작품을 작품답게 바라볼 수 있으며, 어떻게 작품 안에서, 실제로 부르주아가 의도한 바대로의 불안한 감정이 형성되는지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편이 더 작가의 생각의 결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요


2. <마망>의 거미 역시 어머니라는 단선적 은유로 환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목은 선명하게 엄마라고 지칭하고 있지만요. 그 마망은 충격받았을 아이 시점에서 너무 거대하고 과하게 그로테스크하데, 억압적이지 않고 무해하고 다정한 듯하면서 무섭고 불안하고 위협적인 존재입니다. 그런 양가성을 지니는 거미의 다리는 물리적으로 가냘펴서 약간의 충격에도 으스러진다는 점이 마블에서 보이는 불끈불끈 힘세고 강하고 단.단.한. 적이 아닙니다. 남을 상처주면서 자기도 상처받는 존재를 상징하죠. <마망> 뿐 아니라 다른 작품의 집, 침대, 옷장, 천 같은 오브제는 모성의 은유로 바로 환원됩니다. 

그러데 거미는 이런 양가성의 상징으로 해석하는 것도 한 걸음 더 나아간 해석이지만 거미는 곧 어머니라는 단선적인 등치도 해체하고 마치 1층에 들어가 2층에서 나오듯 메타적으로 접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작품 외적 작가의 개인사를 들고 왔을 때 부르주아의 거미는 다정하면서도 위협적인 양가성을 지니지만, 우리 눈 앞에 보이는 거미 자체에 집중하면 실을 생산하고 끊임없이 수선하며 경계를 관리하는 건축가라는 점이 보입니다. 거미줄의 생산자, 그러한 실뜨기의 수선자, 거미줄이 상징하는 경계 관리자로서요. 보호와 위협의 양가적 상징을 넘어 유지와 운영의 전략자로도 바라볼 수 있다는 말이비다. 그렇다면 마망은 모성의 도식이 아니라 리스크 관리의 모델로도 읽힙니다.  


모성과 가정의 상징화에 대한 거의 편견급의 선호로 인해 마망은 거미고 거미는 어머니라는 등치는 빠르게 공감이 형성되지만 돌봄을 떠받치는 노동의 기술과 시간의 층위를 흐렸다는 점을 이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해석으로 작품을 보면 애초의 접근이 보지 못했던 다른 부분이 발견된다는 점에서 메타적 인식이죠.

그래서 돌봄을 가능케 한 구체적 작업 동작은 무엇이었고 어떻게 했으며 하나의 방에서 동선은 어땠고 거미의 다리의 무브먼트는 어떨 것이며, 그 동작이 형태와 비례를 어떻게 결정했나를 역으로 톺아볼 수도 있겠죠.


이렇게 볼 때 돌봄은 감정이 아니라 운영술(매니지먼트)로 드러납니다. 다른 작품에서의 봉합, 매듭, 묶기 같은 손동작의 계보는 의복, 항해, 외과, 목공 등등 다양한 분야의 기술자와도 연결되며, 이제 모성이 아니라 모든 형태의 수리, 돌봄노동을 하는 서비스직군의 피로와 트라우마에까지 작품의 외연이 확장됩니다. 거미=엄마가 아니라 거미=거미줄 직조=수리, 리스크 관리=수리, 돌봄노동, 이렇게요.


아울러 거미 다리의 깨지기 쉬운 취약성에서 약함 서사를 지우고 대신 가볍고 강한 연결구조의 공학적 장점을 부각시킬 수도 있겠습니다. 튼튼한 애자일 조직의 유연성으로요.


어쨌든 이런 방식으로 작품을 유년시절 트라우마 고백의 결과가 아니라 현재 반복 진행중인 트라우마 해소의 과정으로서, 유지 보수의 프로토콜로 본다면 돌봄은 엄마에 의한 것만이 아닌 서비스직군의 리스크 관리 운영술(매니지먼트)로, 돌봄은 감정이 아니라 노동과정으로서 바라볼 수 있어 더 확장된 의미를 지니게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3. 약간 김수자 선생님도 생각나는 부르주아의 섬유작업을 말년의 주변부, 회한의 회고가 아니라 무심한 직물가로서, 즉 심리투영없이, 천 조각의 패치워크와 초기 목조 조각의 결구 규칙 비교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부르주아의 섬유작업을 말년의 회고적 전환으로 규정하는 것은 기간화의 오류라고 봅니다. 묶기, 꿰매기, 봉합, 매듭은 이미 1940년대부터 지속된 조형 문법이었습니다. 따라서 섬유는 회한의 매체가 아니라 조각의 핵심 어휘를 재매핑한 장치로 보아야 합니다. 모듈성 탈부착 가변성 같은 속성 덕분에 부르주아의 조형규칙은 오히려 가장 투명하게 드러난다고 봅니다.


생물학적 몸이 아닌 사회정치적 폭력과 역사적 억압이 새겨진 텍스트로서 몸에 주목하는 바디올로지로서 페미니즘이 몸-마음의 이분법를 타파하고 접근성, 장애, 젠더를 모두 포함하는 것은 사실이나 이런 비평의 언어가 루이즈 부르주아의 트라우마서린 가족관계, 부모서사를 통해 작품을 설명하는 가장 빠른 경로로 택지고 이런 해석의 단방향 고속도로는 왜 이 형태인가 하는 시각분석, 조형적 질문을 나이브하게 뒤로 밀어내는 것 같아요


원래 결론을 쓰는 성격은 아닌데 마무리를 하자면 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을 가족 관계와 트라우마로만 읽는 방식은 선명하지만 충분하지 않다, 라는 말을 반복하겠습니다. 트라우마를 방법으로, 거미를 운영의 전략자로, 섬유를 조형 규칙의 재매핑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메타적 접근을 통해 작품을 너무 급하게 이해하지 않고 작품 외적 서사로 나이브하게 박제하지 않고 작품을 심리적 고백이 아닌 과정으로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조형과 연출, 운영(운영이 아니라 관리라고 했어야했나)과 돌봄노동과 공학적 기술의 층위에서 해석이 한 결 더 빛을 발하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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