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다는 건 명왕성을 향해는 것
누구도 완전히 공감할 수 없고 이해받을 수 없는 나만의 고독을 향해가는 길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간다
네가 가보지 않은 전시를 간다는건 너와 1시간 멀어지는 일
네가 보지 않은 영화 1편 본다는 건 너와 2시간 멀어지는 일
네가 읽지 않은 책 1권 읽는다는 건 너와 3시간 멀어지는 일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너와 나 사이의 거리는 무한히 멀어져간다
마치 한 점에서 360도 방향으로 각자 출발하는 달리기에서 1도의 차이가 처음에는 크지 않으나 거리가 멀어질 수록 큰 차이가 나듯이
시간이 지나며 점점 멀어져가고 그 사이는 밀도 없는 공간이 채운다
같은 책 같은 영화 같은 전시를 보아서 잠시잠깐 이야기가 통한 것은 분기점에서 잠시 마주치는 일
빗방울이 떨어지며 잠깐 궤적을 이탈해 마주치는 클리나멘의 세렌디피티
베이스캠프에서 삼삼오오 모여있다가도 서로 속도가 다르고 목표가 다르고 분기점에서의 선택이 달라 어느새 나는 홀로 자연과
마주하면서 걸어간다
공부도 그러한 일. 전공이 세분화되고 가방끈이 길어질수록 내 관심사를 이해해줄 사람은 전국에 몇 명, 전세계에 한 줌이다.
한 학과 안에서도 얇은 박막이 도포하듯 전공범위가 다 다르고, 나와 다른 관심사를 지닌 학생을 심사를 한다는건 그저 결과에 정련된 공부정도를 판단하는 일에 불과하 일
가끔 전문가는 교육자를 폄훼할 때가 있으나
아래에서 올라오는 양질의 학생이 없으면 전문적인 일도 불가능
베르누이의 정리와 나비에 스트로크 방정식을 이해하기 위해선 누군가는 삼각함수와 미적분 기초를 다져줘야한다.
초중고, 대학교양강좌 선생과 중간관리자와 비슷.
베이스캠프와 편의점 같은 역할. 누구도 정상까지 가는 도중에 있는 베이스캠프에서 5성급 호텔의 서비스와 시설을 기대하지 않는다.
가르침은 편의점처럼 모두가 동의하고 기대하는 맛을 제공하는게 목표
아무도 터미널에서 미슐랭급 참신한 음식을 먹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기계공학은 열역학이라는 랠리 포인트, 유체역학이라는 8부 능선에서 잠시 만나지만
의약사,생명공학자는 유기화학,생리학에서 잠시 만나지만 점차 멀어져 자신의 분야를 다지게 된다
라틴어를 배우러 기웃거리는 학생은 고명환이나 이지성의 책을 읽고 들어와 고전어를 배우면 머리가 좋아질 것이라 생각하는데
라틴어의 본령을 가르치는 사람은 실소할 일이다
그러나 그런 이들이 없었다면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테니 인정해야할 일이다
마치 일본어 원서를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수많은 입문자를 대상으로한 히라가나 가타나가 구별법 외우는 방법이 조회수를 올린다는 것을 무시하겠지만
누군가에겐 엄청 어려운 고민거리다
부모가 과학자더라도 초등 저학년 아이는 분모의 절댓값이 증가하면 작아지고, 분자의 절댓값이 증가하면 커진다는 사실을 배워야한다.
아이의 조그마한 깨달음을 부모가 무시하고 조롱하면 아이는 절대 성장하지 않는다. 전문가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더라도 입문자들의 관심사를 존중해줘야한다는 것. 무시하며 안된다는 것.
그건 미술사도 마찬가지다 경제학도 마찬가지다 모든 학문이 그렇다
너 이것도 몰라? 그게 뭐 어쨌다고? 너 잘못 생각했어 그거 아냐
라는 식으로 무시하면 중급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나의 존중하는 태도와 관련없이 학문의 어려움과 저마다의 사정 때문에 중간에 낙마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어차피 태반이 아이고 두야 하면서 초급에서 떨어져나가는데 어찌저찌 변화무쌍한 문법을 다 마스터하면 그제서야 시작이다
스도쿠 같이 계산식이 존재하는 헥사미터 등을 배우는 로마시를 읽은 것인지 작가별로 다 어휘와 문체가 다른 산문을 할 것인지 그리스어를 함께 배울 것인지 중세 라틴어 입말을 배울 것인지 분기점을 선택하고
그 다음부터는 홀로 원서와 씨름하며 아무도 공감받을 수 없는 바닷길을 항해한다 그 시점의 질문은 누구도 쉽게 해결해줄 수 없고 미래의 나만이 나에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
이제 여기까지 가면 초반에 라틴어에 관심을 갖고 들어 온 이유는 아예 사라지고 정상을 향해 진군하는 나의 발걸음만 남는다
이 과정은 한문과도 비슷하나
일반인에게 이 공부를 하면 도움된다고 약을 파는 입문서가 없다는 것만 차이. 마법천자문을 제외한다면
한자 급수의 문제가 아닌, 한문은 다른 영역이다
문리를 틔우기 위해 사서삼경의 문지방을 넘어보려는 자는 어찌저찌 있어도
논어 16000자 맹자 35000자를 수없이 반복해 상구하고 암송까지 하는 이는 적은데 그게 끝이 아니라 철학을 가미해야하는 알쏭달쏭한 삼경이 기다리고 고문진보나 고문관지를 읽고 나면 역사서냐 법전이냐 문집이냐 승정원일기냐 고려사절요냐 삼국시대냐 조선간찰이냐 금석문이냐 한시냐 전서 초서냐 전공에 따라 온갖 분기점이 기다린다.
모두 명왕성을 향해 가다가 문득 먼 은하를 향해 가는 길이었구나 깨닫는다. 한때 함께 했던 이들과는 전파신호로 안부를 묻고
영겁의 허적속에 유리되고 고독해진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