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를 중첩하는 방식 세 가지에 대한 생각의 실타래
1. 선화랑 이길우 향불 패치워크 콜라주


2.모란미술관 이용덕 입체적 역상조각의 볼륨감과 운동성


3.갤러리508 이길우 렌티큘러 속 비현실 픽션과 관음증voyeurism


인사동 선화랑은 지난 3-5월에는 프랑스 AI 아트 그룹 obvious전을 해서 인상적이었다. 이 거리에 있는 원투 어퍼컷은 라메르, 밈, 선인데 셋 중 최소 하나에서는 인상깊은 전시를 만날 수 있다. 선화랑에서 이번에 만난 이길우 작가는 향불로 그려 태워진 흔적과 오방색 패치워크, 자유롭게 잘라붙인 색지를 오버랩해 인간 군집이 중첩된 초상을 그린다, 아니 그린다기 보다는 만든다. 멀리서 하나의 조형처럼 보이지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면 두 이미지가 중첩되어 있고 익스트림 클로즈샷으로 보면 조형을 구성하는 점은 태워진 구멍임을 깨닫게 된다.
작가의 작업방식이 어떠하길래 이미지가 두 개가 보이는가? 우선 그을린 무채색의 이미지와 컬러감 있는 콜라주 이미지가 중첩되어 있다는 것는 쉽게 보인다.
전시 서문에서는 어렵게 써있지만 쉽게 말하자면 일단 먼저 향불로 종이를 태워 사람의 형상을 만든다. 이 과정에서 종이에 구멍과 탄 자국이 생긴다.
그 위(전면)에 스케치한 사람 그림이 있고 일부 겹치는 부분에는 오방색을 칠한다. 칠하지 않은 부분은 그냥 비워둔다. 그 뒤쪽(후면)에는 다른 그림이 있는 종이를 덧대어 붙인다(배접).
이렇게 하면 앞뒤의 그림과 태운 흔적이 겹쳐 보이면서, 하나의 이미지 안에 두 개의 장면이 동시에 나타난다. 즉, 앞쪽에는 태워진 사람 그림과 색이 있고, 뒤쪽에는 또 다른 그림이 있어, 보는 각도에 따라 앞뒤가 섞여 보이며 복잡하고 입체적인 화면이 만들어진다.
작가는 이렇게 전후면을 배접하는 방식을 통해 생성과 소멸의 시간층을 동시에 드러내고자 했다. 잘려진 조각보는 아작나고 부서진 오늘날의 사회적 관계성을 향불은 비어있음, 공, 허적과 종교 의례를 나타낸다.
한편 모란미술관의(물론 다른 곳에서도 보았지만 찍은 사진이 모란미술관 사진이라서) 이용덕의 역상 조각은 걸어가면서 볼 때 이미지가 나를 향해 움직이는듯한 운동감을 준다. 이 역시 이미지의 중첩이라 본다. 애니메이션이 초당8프레임으로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주는 것처럼 볼륨감 있는 이미지의 움직임도 프레임이 다중 중첩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겉보기로는 볼록한 형상이 사실은 오목한 음의 공간임이 인지할 때 우리의 지각은 그 역상조각이 환영임을 깨닫게 된다. 관객이 이동하면서 음영과 윤곽이 반전되어 형상이 뒤집히는데 조각의 빈 공간은 결여가 아니라 가능성이 거주하는 장(場, 필드)가 된다. 이 빈자리는 하이데거적 항아리의 비어있음이자 화엄의 상호침투라고 해석할 수도 있으며, 인식의 지평 속에 존재자들이 서로의 영역에 자유로이 스며드는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배준성은 비닐 필름과 렌티큘러를 매개로 두 개의 이미지를 동시 겹쳐 보이게 하는 회화적 장치를 만들어냈다. 투명성과 반사성으로 평면 위에 깊이뿐만 아니라 운동을 새겨 넣는다. 배준성을 세 번째 설명하는 이유는, 이길우의 중첩된 이미지와 이용덕의 이동하는 시점에 따른 이미지의 움직임을 모두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이 걸어가면서 시점을 옮기면 이미지가 전이되고, 실재와 가상이 한 화면에서 중첩되며 전통적 캔버스의 정지성이라는 개념을 무너뜨린다. 비닐의 물성이 회화의 붓질과 결합해 시간성과 공간성을 확장시키는 지점은, 고전적 화면을 복합적 시각체험으로 전환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전시장에서 봤던 도록의 프랑스인의 해제에는 관음증을 중심으로 설명했는데 관객이 회화를 보면서 동시에 몰래 들여다보는 시선을 하나 더 갖게 되는 구조를 강조했다. 관람자는 정면에서 보이지 않던 이미지가 시선을 옮길 때 드러나는 순간을 경험한다. 이때 보는 사람은 감춰진 장면을 엿보는 관음적 쾌감을 느끼게 되는데 프랑스 미술비평 전통에서 관음증(voyeurisme)은 성적맥락이라기보다 보여짐과 숨김, 시선의 권력 관계를 분석할 때 자주 쓰인다. 배준성 작품의 경우 렌티큘러 표면은 마치 커튼이나 얇은 막처럼 한 이미지 뒤에 또 다른 장면이 숨어 있는 구조를 만들고 관객은 움직이며 그 장면을 발견한다. 이러한 점에서 두 이미지의 중첩은 시각적 관음증의 체험을 제공하는 회화 속 은폐와 노출의 장치이며 같은 시공간에 동시에 존재하는 양자얽힘이다.
세 작업은 매체와 전략은 다르지만 모두 이미지의 겹침과 전환이 해석의 열쇳말이다.
이길우는 소멸의 흔적을 재배치해 시간의 이중구조를 보여주고, 이용덕은 물리적 공간의 음양을 뒤엎어 지각의 규범을 교란시키며, 배준성은 빛과 플라스틱으로 시점을 매개해 가시적 이미지를 전이시킨다.
한편 이길우는 태움과 배접을 통해 종교적 사회적 서사를 조각보처럼 이어 붙인다. 이용덕은 공간의 부재를 촉각적 불확실성으로 바꾸고 배준성은 평면에 내재한 심도와 반짝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관객 경험도 분명히 갈린다. 배준성은 시선의 이동으로 즉시적 변화를 제공해 시각적 스캔을 유도하고, 이용덕은 몸의 이동을 통해 믿음을 시험하는 실천을 요구하며, 이길우는 가까이 들여다보는 행위를 통해 이면의 흔적과 이야기들을 하나씩 열람하게 만든다.
배준성의 화면은 기술적 정교함과 빛의 장난으로 장르 경계를 흐리면서 시각적 쾌감을 제공하고, 렌티큘러와 비닐은 사진적 재현과 회화적 물성을 오가며 이미지를 유연하게 만든다.
이용덕은 비어있다는 관조를 촉발해 존재와 인식의 조건에 대해 묻고, 이길우는 조각보와 향불의 의례성을 빌려 사회적 다양성과 공존의 은유를 빚으며 태움의 무상함, 공허함에 대해 보여준다.
이미지의 중첩을 보는 관객은 보임과 안보임 사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된다. 서로 다른 시공간과 해석방식이 한 화면에서 공명한다. 시적이면서 엄밀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