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부고니아> 보고 왔다. <가여운 것들(Poor Things, 2023)>를 연출한 그리스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신작이다. 막이 전환될 때 스틸컷과 함께 저음의 호른이 울려펴지는 브라스음과 폰트의 특이한 활용이 주특기다.


<유전(2018)> <미드소마(2019)> <보이즈어프레이드(2023)>을 연출한 아리 애스터 감독이 프로듀서로 참가했다. 시대를 잘못 만난 희대의 명작 <지구를 지켜라>에 둘의 취향이 버무려졌다.


엔딩 크레딧에 보니 로케는 영국 런던과 미국 애틀랜타 그리고 그리스의 마일로스섬이다. 애틀랜타 유닛과 그리스 유닛이 나뉜 것을 보니 애틀랜타에서 테디네집을 많이 찍고 그리스 유닛은 엔딩에 나열된 죽은 사람들 컷을 많이 찍었을 것 같다. AT필드 깨트리는 것처럼 톡하고 지구 대기권의 방어막을 뚫자 모든 인류는 전멸한다. (이때 등장하는 지구 모형도 구형 지구가 아니라 지구평면설에 의거한 납작한 대륙이다) 이 허망한 죽음을 정지장면으로 잘 표현했다. 모스크에서 기도하다 죽고 성관계하다 죽고 결혼식 준비하다 죽고 회의하다 죽고 선탠하다 죽고 수술하다 죽고 생선팔다 죽고 배달 패키징하다 죽고 배 운항하다 죽는다. (또 뭐가 있었더라)


에코 채임버 이펙트 등 여러 심리학 용어로 진단할 수 있는 고립된 저학력 저임금 계약직 지방 청년 테디와 약간의 지능 장애가 있는 돈은 넷플 <소년의 시간>의 주제가 생각난다. 


사람 납치해서 지하에 가두고 잘 짜인 대사로 승부한다는 점에서 스콧 벡 브라이언 우즈 듀오감독의 <헤레틱(2024)>도 생각난다. <노팅힐>의 그 휴 그랜트가 나오는 영화로 마지막에 끔찍한 납치감금의 결과가 나온다는 점도 동일하다. 미쉘이 발 잠금 장치를 풀고 비밀 장소에서 안드로메다인 둘을 죽인 결과를 보고 각성해서 총든 테디를 위협하는 신에서 테디와 미셸의 얼굴이 교차편집되며 공룡부터 노아의 방주에 이은 외계인의 인류실험사를 구술한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의 인류진화사 시나리오를 묘하게 닮았는데 리처드 셴크만 감독의 <맨프롬어스(2007)> 같은 대체역사다. 


차이점은 후자는 시드니 루맷 감독의 <12인의 성난 사람들(1957)>처럼 카메라 위치를 바꾸어가며 자칫 지루할 수 있는 대사 나열에 연출적 리듬을 준다. <부고니아>는 시각적 임팩트를 위해 강한 렘브란트식 강한 음영을 미셸 위에 쏘아 각진 그림자를 만들고 피랍자에서 외계인 여황으로 전복된 권력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엠마 스톤 얼굴을 로우 앵글 샷으로 잡았다. 이는 초반에 작당 모의하며 화학적 거세 약물 투입할 때 모닥불 앞에서 테디와 돈의 얼굴이 같은 카라바죠식 강한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chiaro陽+oscuro陰)로 연출된 것과 대조적이다. 영화의 방점이 테디와 돈에서 미셸로 옮겨가는 순간이다.




극장에서 들은 이 화학적 거세약물(chemical castration substance)는 메드록시프로줴스테론..어쩌구로 였는데 돌아와 찾아보니 아세트산 메드록시프로게스테론Medroxyprogesterone acetate이고 테스테론 생성억제 및 성욕감퇴용이고 약물투여중지하면 효과는 없어진다. 돈이 투여 후 마음이 들쑥날쑥하고 조금 슬프다고sad하다고 말했을 때는 리비도 감소효과 때문에 그럴 것이다. 과거 궁정출납을 위한 환관처럼 아예 물리적으로 거세하는 것은 아닌데 이 부분이 중요한 이유는 그저 피랍자에게 성적 관심을 끊고 더 숭고한 이유(외계인 알현)를 납득시키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물론 이런 어려운 그리스어가 포함된(화학물질명에서 합성어 연결시 o를 활용하는) 약물명을 읊는 것은 자신의 그리스 출신임을 드러내면서 일상 속에서 관료적이며 건조한 공포를 만드는 란티모스 감각과 맞물려있긴하다. 그러나 픽션 내부적으로는 개인의 생식 능력을 포기해야 외계인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연출적 장치다. 이게 무슨 말이냐?


화학적 거세약물을 투여해 인간의 생식 능력을 자발적으로 끄는 행위가 곧 외계인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행증이라는 말이다. 재생산의 중단이 외계 지성에 접근하는 문턱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수사나 불교의 스님이 번식 능력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항백룡의 방식(강호동양학자 조용헌의 표현)으로 신에게 가까워지는 것과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다.


영화 속 외계인은 인간의 개체보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 전체가 어디로 흘러가는가에 더 관심을 둔다. 양봉업자 테디의 고민과 결이 같다. 벌 하나 하나보다는 벌 전체의 개체수 감소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그 원인을 살충제의 사용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생태학자 최재천의 사유 방식이다.


개체보다 집단의 동역학에 초점을 두는 냉정하고, 통계적이며, 무차별한 번식논리다. 그런데 이때 개인적 성적 기능을 비활성화했다는 것은 인간 개체의 번식 욕구를 잠시 제거함으로써 인간을 외계인의 관찰 스펙트럼 안으로 끌어들인다. 성적 본능, 후손을 남기려는 충동, 자신의 유전적 계보에 대한 애착 같은 종의 번성에 대한 사적 욕망이 억제된 상태로 호모 사피엔스 종의 번식 체계에서 일시적으로 이탈한 존재다. 이렇게 개체적 욕망을 걷어내야 외계인이 마주하고 싶은 순수한 관찰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생존과 번식이라는 동물적 충동에서 잠시 벗어난 테디와 돈은 외계인의 실험환경을 교란하지 않고 종 전체를 바라보는 외계인의 관점과 더 가까운 위치로 이동한다.


어떤 점에선 자연 선택과 성 선택의 질서에서 잠시 분리된 인간이 되어 외계인이 논문 작성하듯 다루기 좋은 표본이 되는 셈이다. 영화의 초중반은 테디를 납치범에 잘못된 음모론에 경도된 캐릭터로 그리고 있기에 이 부분이 주목되지 않으나 사실 영화 안에서는 중요한 장치인 것이다. 테디의 바람대로 함으로써 외계인 황제를 알현할 수 있었다. 화학적 거세약물 투입은 그냥 지나가는 장면이 아니라 생식, 종족, 지속성에 대한 은유로 정교하게 읽어낼 수 있다.




대사가 많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영화상 필요했다. 성공한 CEO가 할만한 배운 영어로 각본을 아주 잘 다듬고 엠마 스톤이 훌륭한 딕션으로 잘 전달했다.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버드맨(2014)>때 부터도 이미 대사 딜리버리는 좋았었다. 테크, 경영, 심리학, 화학 등 고급 영단어가 많아서 뭉개면 그 의미가 퇴색되는 대사다. 또한 엠마 스톤은 납치된 것을 깨닫고 정확히 상황파악한 후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지지 않고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로 피랍범과 대화하는 장면도 잘 살렸다. 마취에서 깨어나는 클로즈업 장면에서 눈 연기가 훌륭하다.



미셸 풀러의 회사 Auxolith는 어벤저스 헤드쿼터나 최근 개봉한 <F1더무비(2025)>의 회사를 닮았다. 이런 저층에 유리로 된 깔끔한 회사건물은 아마 애플 건축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과거였으면 메트로폴리탄의 고층빌딩이었을 것이다.


테디와 돈의 집은 <원배틀애프터어나더(2025)>의 집도 생각난다. 전형적인 미국 목조주택이다. 돈은 억양에서 r이 강하게 묻어나는 남부 사투리다. 영화 로케를 미국 동남부 조지아주의 애틀랜타로 잡았기 때문이다. 총기로 집을 지키는 것도 그러하고.


윤기나는 검은색의 메르세데스벤츠 G클래스 지프에서 내리는 미셸을 납치하며 티격태격하는 신은 미국의 전형적 우왕좌왕 B급 코미디로 처리할 수 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감독의 스타일이 지향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 심장을 죄여오는 듯한 과한 긴장감도 지양한 편이다. 영화에서 질리는 맛이기에. 대신 테디의 믿음에 대한 의심과 불신에서 미셸의 태세변환으로 정황상 믿음, 그리고 확신으로 넘어가는 크레셴도가 좋다.



<가여운 것들>에서는 장소명으로 <부고니아>에서는 월식 3일전, 2일전 하는 스틸컷으로 막을 표현하는데 전혀 끊긴다는 생각이 없고 거슬리지 않는다. 또한 인물과 전체 관계를 대각선에서 3D 카메라구도로 표현했다. 주특기다



흘러나오는 노래는 Marlene Dietrich의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1963)다. 생태위기로 재해석되는 노래다. 영화는 외계인 음모론에 담았지만


https://www.youtube.com/watch?v=kveooWmqqr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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