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90일만 더 살아볼까
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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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떨어 질려면 한참 가야 함"이란 원제의 책이다.

12월 31일 ,자살을 결심하고 우연히 한 아파트의 지붕위에 모인 각각 다른 사연의 네 남녀가 우선 하루 만이라도 자살을 연기해보자고 합의를 한 뒤 벌어지는 사건들을 다룬 것이다.

 

1.제스--17살, 세살 터울의 언니가 갑자기 실종이 되자 아예 방황과 반항의 길로 나선 아이.

교육부 장관의 딸네미나 그에 걸맞지 않는 욕설과 직선적인 태도로 사람들의 눈총을 받는다.

2.모린--한번의 실수로 가진 아이가 장애아로 태어나는 바람에 인생을 저당 잡힌 50대의 여자.

3.마틴--잘나가는 아침 방송 진행자였지만, 15살짜리와 자는 바람에 졸지에 인생의 나락으로 쳐박힌 사람.

4.제이 제이--그럭 저럭  잘 나갔던 밴드의 일원이었으나 밴드는 해체되고 여자 친구는 떠나자 피자 배달원을 하며 살고 있음.

 

이상 넷이 자신만은 죽을 이유가 있다고 주장을 하는 가운데 서로의 자살 방지를 위해 뛰어 다니다가,석달 후 그래도 살아 보기로 하는 걸로 끝을 맺는 소설이다.

한때 난 닉 혼비를 좋아했었다.

유머 감각 있지, 날카롭지, 삐딱선을 줄곧 타는데도 밉지 않지, 나름 소신을 가지고 일탈을 해대면서도 그걸 귀엽고 처량맞게 설명을 하는 바람에 완전히 설득을 당하고 말지.

그때만 해도 매력이 넘치는 글쟁이가 틀림 없었다.

그런데 요즘 새로 내놓는 책을 읽어 보면 일단은 꾸준하게 퇴보의 길을 걷고 있는 걸로 보여진다.

소재의 빈곤? 상상력이 바닥을 치고 있나? 아님 산다는게 마냥 쉬워 보여서?통찰력 부재 때문에?

 잘 웃긴다고 박수를 쳐 주었더니 도를 넘어서고 있다.

자살이 조롱이나 우스개 거리가 되버렸다면 너무 한거 맞다.

물론 자살이 겉보기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때  땡깡 부리는 심정으로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인간에겐  목숨이 단 한개다.

그러니 숫자를 셈 할 수 있는 지능만 있다면 당사자에겐 힘든 고민을 거치는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소풍 나온 마음가짐으로 자살 하러 올라가고,또 그 고비만 넘기면 삶은 살아볼 만한 것임을 알게 된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혼비에겐 그런 자살자의 절박함과 고통스러움이 없었다.

자살 미수자의 대부분이 다시 자살을 시도하고 ,그것은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것에 대한 반증이라는 것을 모를만큼 그는 무식한 것일까.

자살을 다룰 생각이었다면  취재만이라도 성실히 했어야 했다.

그의 상상력으로는 자살자의 내면을 탐지하기에 부족했으니 말이다.

로맨스 소설은 사랑을 눈요기 거리로 만들고 사랑에 대한 환상을 전파한다.

이 책은 자살을 눈요기 거리로 만들고 삶에 대한 환상을 전파하고 있었다.

자살은 낭만적이고 순간적인 일탈이 아니다.

소재에 대한 이해도 없이 착상이 좋다고 책을 써내다니.

혼비씨. 철 좀 드셩! 이젠 진지해져도 좋을 나이 아닌가요?

나이가 들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고 책임감이 많아지는 모습이 아니라 그저 조롱이 늘고 생각없이 툭툭 뱉어내는 말이 많아지는 것을 보자니 심난했다.

자라고 싶어하지 않는 피터팬을 보는 듯해서.

동화속의 피터팬은 귀여울지 모르나, 현실속의 피터팬은 한심해 보일 뿐이다.

이 책은 영화화 되고 있다는데, 조니 뎁이 나온다니 그래도 기대가 된다.

자살을 함 해봐? 라고 생각만 했던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겐 위로가 되겠지.

하지만 정말로 자살을 하려 했던 사람들에겐 이 책은 터무니 없어 보일 것이다.

<널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널 맡기지 말라.>고 지인이 내게 충고를 해준 적이 있다.

잘 모른다는 것, 이해의 부족은 상처를 남긴다고 말이다.

그 말이 새삼 생각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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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믿음의 글들 240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강유나 옮김 / 홍성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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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시케의 신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c.s.루이스의 작품이다.

본질적으로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의 평생에 걸친 분석이 담겨져 있는 책이다.

 

왕의 첫째 딸로 못생겼지만 똑똑한 마야는 여우 선생이란 그리스 노예로부터 지식와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을 배운다.

왕은 재혼을 해서 셋째 딸인 프시케를 얻지만, 아들이 아니란 이유로 관심 밖으로 내쳐지고,할 수 없이 마야가 엄마처럼 그녀를 키우게 된다.

프시케의 남다른 미모와 기품,그리고 남을 배려하는 성품은 곧 다른 이들의 사랑과 주목을 받고, 그것을 시기한 둘째딸과 사제들은 모략을 꾸며서 그녀를 산제물로 신에게 바쳐지도록 하는데..

 

프시케의 신화와 루이스의 다른 점은 신화에서는 두 언니가 질투로 인해 프시케를 파멸로 이꾼다면, 이 책에선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그녀를 지키려다 파멸로 이끈다는 점이다.

루이스가 하고자 하는 말은 사람들은 사랑으로 산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사랑을 얻기 위한 것이건, 사랑을 지키기 위한 것이건 말이다.

그러나 사랑을 위해 우리가 하는 희생이나 배려가 오히려 그들을 고통과 파멸, 외로움으로 몰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면서 ,루이스는 말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조차 모르는 인간이 어떻게 사랑을 이해한단 말인가 라고.

사람들의 모든 행동 뒤에는 바로 사랑을 향한 무궁 무진한 욕구가 숨어 있다고 통찰한 그는,그런 면에서 보면 그 누구도 열등하지도 우월하지도 못되지도 불쌍한 것도 아니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선하단 전제에서 그는 사랑을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고통을 감싸고 이해할 것을 당부한다.

그것이 불완전한 우리 인간들이 다른 인간에게 해야 하는 일이라면서 말이다.

어쨌거나 우린 신은 아니지 않는가 ...

 

루이스에 대한 나의 애정은 좀 설명하기 복잡하다.

그는 언제나 날 기분좋게 놀라게 하는 사람인데, 반세기 전의 사람이 영혼에 대해 생각을 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어떻게 영혼에  관심을 가지고, 느꼈으며, 확신을 가졌고 ,영혼의 성장이란 것을 인지하고 있었을까 하는 것들이 그를 대할 때마다 신기하게 여겨지는 부분이다.

그는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었을까.

단지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걸 논리적으로 글로 써서 남을 설득할 줄 알았던 사람.

혁명은 믿어도 영혼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상대로 말이다.

그가 믿었던 것들과 통찰했던 것들에 대해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사람인 루이스.

이 책은 기독교 적인 색채가 나긴 하나 기본적으로는 사랑에 대한 고찰로 그가 겸허하게 인간에게 눈 높이를 낮춰서 바라본 사랑의 모습들이 담겨져 있다.

난 그런 그가 여전히 좋다.

하지만 아마도 그런 그를 이해하려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란 생각에 추천애매작으로 넣는다.

루이스를 좋아하지도 그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은 이 책을 관심 밖으로 두는 것이 낫다는 걸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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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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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마르께스의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를 앞에 두고서도 자꾸 눈이 가길래 읽어 버렸다.

아르곤, 수소,아연으로 시작해 탄소에 이르는 21개의  원소를 가지고 각각의 원소를 주제로 연상되는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 책이다.

도무지  화학 원소를 가지고 풀어나갈 이야기가 있는지, 어떻게 풀어 나갈지가 궁금해서 집어 들었는데 멋지게 한방 먹은 기분이다.

이렇게 완벽하고 멋지며 감동적이고 인간적인 주기율표는 처음 봤으니까...

 

이 책은 작가의 작은 역사다.

1919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대학 시절 화학을 전공했고, 파시즘과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남았으며, 그 다음엔 죽지 않기 위해 생활 전선에서 아둥 바둥댔던 이야기들이 고스란이 원소들에 대한 추억들과 더불어 그려 지고 있었다.

그 자신  자서전은 아니라고 했고 내가 보기에도 자서전은 아니다.

그렇다고 제목처럼 (원소들의) 주기율표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그의 인생을 관통한 사건들과 꿈과 상상력과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들이 원소들과 더불어 전개된다는 것일뿐.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그를 구해준 것도 그를 평생 먹여 살린것도 그가 화학자란 우연때문이여서 그런지  그의 원소에 대한 애정은 남 달랐다.

그리고 그만의 그런 애정이 바로 이 책을 빛나게 하고 있었다.

그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원소를 가지고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

게다가 지성적이고, 인간적이며,애처로울만큼 초연한 자세와 정신의 유연함이 그대로 묻어 나는 글들속의 주인공이니,만일 원소들에게 단체가 있다면 그들을 빛내 준 이 작가에게 공로상을 주겠다고 거품을 물지 않을까 싶다.

 

그 모든 이야기들중에서 아우슈비츠에서 세명의 동료들과 살아 남기 위해 목숨을 걸고 도둑질--빵을 얻기 위한--을 했었던 이야기와 결국 자신만이 살아 남았던 것에 대한 처절한 비통함,그리고 20년이 지난 뒤 그 당시 그들을 지휘하던 독일 상급자와 조우하게 되었을 때의 기막혀 하는 것들은 마음을 울렸다.

자신의 의지완 상관 없이 한 세상을 험난하고 아슬아슬하게 살아온 그는 말한다.

<현실은 허구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덜 정돈되어 있으며 ,더 거칠고 덜 원만하다고...

그것이 같은 차원에 놓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이 정신 나간 세상을 분노로 일관하지 않기 위해 그는 열심히 골똘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책은 그런 그의 인간성과 지성의 성과물이며, 감히 단언컨데 승리물이다.

물질을 지배하는 것은 정신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건 전적으로 그에겐 옳은 말이다.

인간의 정신이 조용히 승리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이 책을 집어 드시라고 권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기립박수를 받아도 좋은 책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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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키드 런치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31
윌리엄 S. 버로스 지음, 전세재 옮김 / 책세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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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집안 출신의 하버드 졸업생인 작가가 마약 중독에 빠져 갖가지 인생 역정을 거친 뒤 45살에 중독에서 벗어나 쓴 책이다.

제목을 가지고 내용을 짐작하기 어려우실 텐데 이 책은 마약에 대한 입문서이고 청사진이다.

일단 마약에 빠지면 인간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는 반복해서 말한다.

당신이라도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 라고...

 

<절대적 욕구가 내뱉는 말은 "당신이라도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이다.그렇다 .당신도 그렇게 할 것이다.당신도 절대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거짓말을 할 것이고,속임수를 쓸 것이고,친구를 밀고할 것이고,훔칠 것이고,그 어떤 짓이라도 할 것이다.왜냐하면 당신은 절대적인 질병과 절대적인 소유의 상황에 처해 있어서 다른 방식으로는 어떻게도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마약 중독자는 자기가 현재 하고 있는것과 다르게는 행동할 없는 병자들이다.>

 

이것이 바로 네이키드 런치다.

욕구와 욕망이 인간을 집어 삼켰을때의 인간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나약하며 역겹고 추악해지며 갈때까지 가는지를 이 책은 설득력있게 보여 준다.

동성애, 강간, 폭행 ,강도,살인,시간은 애교 수준이고, 인간에게 가해지는 가학 행위의 끝은 어디까지인가 당신의 상상력으로는 근접도 못한 일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건,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건,마약을 하기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는 사람들.마약이 사람의 감각을 마비시켜 종국에는 수치심을 박탈시킨다고 하는데,수치심 죄책감의 결여가 인간을 어떤 괴물로 만드는지 보고 싶다면 이 책이 제격이다.

이 책도 그런 수치심이 결여가 아니라면 써내려 갈 수 없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59년 이 책이 나왔을 때 외설 시비로 법정까지 갔다고 하는데, 항문이니 똥이니 윤간이니 소아강간,남창,성기 ,오르가즘,음모,빨고 ,사정하고,쾌감과 흥분과 발기가 페이지마다 난무하는 책이었지만 외설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차라리 하이틴로맨스가 이 책보다 외설스럽다. 왜냐면 그 단어들이 의미하는 바가 성욕이나 성과는 관련이 없기 때문이었다.수치심이 없는 성은 무감각 그자체며, 자동적이고 기계적인 동작에 불과하기 때문에 외설을 말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음에도 그 당시엔 그것이 충격으로 다가 왔었나보다.

이젠 이 책에 외설시비를 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 본다.

마약 중독자의 처량맞은 인간 말종사에 불과한 책이란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당신은 어느 지점에서라도  '네이키드 런치'에 끼여 들수 있다.라고 이 작가는 경고한다.

그의 말이 경고로 들리지 않는다면 현명한 충고로라도 받아 들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작가도 마약이 아니라면 이렇게 살리 없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는 독자가 자신의 말에 현명하게 귀 기울이길 바라지만, 마약쟁이들이 그의 말을 듣기나 할지 의문이다.

잘 쓴 책이긴 하다.하버드대 출신답게 마약쟁이의 철저히 영락한 삶을 지성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마약계의 보르헤스라고 불리워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읽어 보시라고 권하고 싶지는 않다.

이 책의 진가나 작가의 명성이 과대평가 되었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감이다.

이 작품은 문학작품이라기 보단 르뽀다.다시 말하자면 겪은 일들을 쓴 것이다.

충격적이고 비참하며 믿기 힘들겠지만  그것이 마약의 속성인 것을 어쩌랴.

고로 마약에 대한 메카니즘의 비밀이란 없는 지금, 대단한 문학 작품이라고 보긴 힘들었다.

충격적 소재 일색이나 소년에 대한 노골적인 동성애적 시선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그런 가학행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미화하는 작가를 보면서 그래도 이 작가는 말년에 대단한 문학가라면서 존경을 받았겠지...하는 생각에 씁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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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립자 Mr. Know 세계문학 29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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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의 추천이 아니었다면 아마 보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선 제목부터가 전혀 구미에 안 당긴다.

소립자?

과학 저서도 아닌 소설에 소립자란 제목을 쓰다니,거기에  작가의 자부심이 숨어 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아닐 것이다.

대단한 책이란 것은 틀림 없으니 말이다.

 

오로지 성(sex)에 집착해서 사는 형과 sex엔  관심 없이 사는 이부 동생의 이야기가 대비되서 전개되는 소설이다.

자식을 키우는 것은 뒷전이고 젊은 남자만 쫓아 다니는 엄마, 부재중인 아버지들, 1960년대와 70년대 서구를  휩쓴 쾌락적이고 방종적인 사회 분위기속에서 자라난 두 형제 브뤼너와 미셀은 얼핏 보기엔 공통점이라고는  없어 보이나 고독하고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는 점에서 똑같다.

교사인 브뤼너는 성적 모험을 즐기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지만 결국 정신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고, 과학자인 미셀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아나벨을 밀쳐내면서 일에만 몰두하지만 결국 자신의 업적을 완성한 뒤 자살을 한다.

이 세사람, 브뤼너, 미셀, 아나벨이 추구하는 것은 각자 극명하게 다르다.

성과 일과 사랑.

하지만 그 어떤 것에서도 행복을 찾지 못한다는 점에서 보면 닮은 사람들이다.

그 닮은 점이 바로 이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하든 추접할 정도로 비참한 존재라는 시각 말이다.

결국 이 작가는 인류의 종말로 끝을 맺는다.우리 인류가 기쁘고 다행스런 심정으로 우리 종의 종말을 받아 들인다는 미래의 뉴스로 에필로그를 장식하며.

인간종이 얼마나 타락 했고,비참 하며, 불행 한데다, 더 이상의 구원이 없을 정도로 갈 때까지 갔다고 생각하기에 "종말도 행복해요" 하는지 궁금하신 분은 이 책을 보시라.

그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설득력 있다.

 

(성의)해방이 방종으로 치닫다 못해 종래 인간을 사물시 하는 상태가 되어가면서도 브레이크가 안 걸리는 유럽 사회의 모습을 대변하는 브뤼너, 그런 사회를 냉정을 넘어서 자페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결국 인간종을 멸종으로 이끄는 생물학적 이론을 내놓아 학계의 총아가 된 미셀,여성다운 천진함으로 사랑만을 믿었다가 파괴되어 버리는 아나벨.

이 책엔 사랑이란 감정은 없다.

섹스의 과잉과 부재가 있지만 사랑과는 관련이 없고, 도덕의 황폐화와 시대의 종말적 징후를 드러내 보여준다는 점에서 동의어로 표현이 될뿐이다.

결국 형제를 통해  작가는 우리 시대의 미래 없음을 통렬하게 보여 준다.

우울하고 암울한 미래,인간종의 말살이 오히려 지구에겐 희망일지도 모른다는 메시지를 냉소적으로 전하면서.

 

종종 한번에 읽어 내려갈 수 없는 책들을 만난다. 

감동적이거나, 무섭거나, 지루하다거나 ,통찰력에 경도 되었거나 등등의 이유로.

그런데 이 책은  성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게 적나라하고 집요했던 탓에 질려서 한번에 읽을 수 없었다.

섹스에 대한  집착들을 결국 죽음과 멸종으로 연결을 시킨더라는 것이 이 작가 특유의 흥미로운  견해였긴 했지만,모든 것을 sex라는 필터로 해석해낸더라는 것은 공감할 수 없었다.

 

자신의 생각을 철저하게 이 책 안에 쏟아 부었다는 것,주제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철학과 과학, 종교, 역사를 심도 있게 버무려 자신만의 이론으로 내 놓았다는 것엔 작가의 지성에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작가의 시선에 공감 하기가 어려웠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짧고 순진한 내 소견으로는 작가가 인간의 생명력과 탄력성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는가 싶다.

결국 대단한 통찰력과 집중력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대가다운 시선은 모자랐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에 대한 연민이 빠진,작가의 통찰력에 대한 경이와 씁쓸함과 불쾌함이 공존했던 책이라나 할까.

이 작가가 미래에 자살을 했다는 뉴스를 접한다해도 난 전혀 놀라지 않을 것이다.

인생에 대해 자부심과 집착과 사랑이 없어 보여서 말이다.

결국 삶이란 자신의 생각대로 펼쳐가는 것이 아니던가.그게 먹히든 안 먹히든 간에 말이다.

어쨌거나 놀라움과 역겨움이 교차하던 책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내겐 역겨움이 더했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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