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나도 봤다, 곡성! 을 외치고 싶어서 보게된 작품. 원래 공포 영화는 취향이 아니라 잘 안 보는데, 왠지 이 영화는 그걸 넘어서 봐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생겨서 말이다. 말하자면 뭣이 중한디? 라는 말의 의미 정도는 알아듣고 싶었다는 뜻. 줄거리는 이미 여기저기서 흘러 나왔기 때문에 구구절절 나열할 필요는 없겠다 싶고, 해서 대략적으로 느낀 점만 풀어 놓는다면...


1. 첫 도입부부터 성경 구절을 인용되는데, 그 구절을 아무 생각없이 따라읽다가 예수가 좀비들의 조상격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실소하고 말았다. 우리가 좀비들을 무서워 하면서도 그렇게 매혹적으로 느끼는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듯. 예수에게 매혹을 느끼는 이유도 어느정도는 그가 죽었는데 살아돌아왔다고 주장하는 것에서 시작하니 말이다. 어쨌거나 그저 연쇄 살인범에 대한 이야기일거라 막연하게 생각하고 봤다가, 성경을 정반대로 비틀어놓은 내용이라는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2. 예수가 우리 앞에 나타났을때 아무도 그를 믿지 않았다. 걍 믿으라고 해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는 증거를 내놓아야 했었는데, 그중 최고봉이 바로 마지막 기적, 즉 죽은 자에서 돌아온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예수가 다른 수많은 사기꾼들과 다른 진정한 예언자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백한 증거였나니, 그의 평범하지 않은 언행과 기행에 마음을 빼앗기긴 했으나 진짜 이 사람이 그 사람인지 믿음이 가지 않았던 사람들 모두를 한방에 무릎 끓게 만든 사건이지 않았는가 한다. 그렇게 증거가 없다면  우리는 예수가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믿지 않는다. 그것이 인간이다. 그렇다면 만약 악마가 등장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믿을 것인가. 그것이 현실적인 존재라고 받아들일 것인가? 라는 물음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내가 한 질문이었다.


3. 영화속 결론을 말해 보자면, 감독은 악마가 그 자신을 증명할 증거를 아무리 우리 눈앞에 들이민다고 해도 우리가 믿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하다. 왜냐면 악이나 선이 우리의 인식을 벗어날만큼 거대할 시 ,우리는 그것의 의미를 축소하거나 회피하거나 얘써 별 것 아니었다고 생각해 버리는 경향이 있어서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보좌신부와 외지인인 일본인과의 마지막 조우는 의미심장하다. 그간 본 것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일본인이 평범한 사람일거라 생각하는 보좌 신부와 그런 그를 못내 가소롭다는 듯 처다보는 일본인의 표정이라니...사이코패스가 양심을 인지하지 못하는 양심맹이라고 한다면, 어쩌면 우리 일반 사람들은 악을 인지하지 못하는 악맹들이 아닐까,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악의 모든 것을 보여줘도, 그것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뭔가 사연이 있을 거라고, 평범치 않은 악에 대해 평범한 일상성을 부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소심한 마음과 초파리같은 초치기 기억력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무리들에게 너희는 제대로 보라, 이것이 바로 악이다. 너희가 눈을 돌리고 부인한다고 해서 악은 사라지거나 물러서지 않는다고,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착해야 한다는 모토아래 위기시에도 안이하게 생각하고 판단한다면 어떻게 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던데, 너무 불안감에 절어서 생활하는 것도 문제긴 하지만서도, 불안과 공포심을 느끼고 행동에 나서야 할때 조차 그걸 억누른다면 어떤 파국이 도래하는지 잘보여주고 있었지 않는가 한다. 우리는 닭이 세번 울렸을때의 베드로처럼, 예수를 부인한 것 만큼이나 악마를 부인할 것이다. 그것이 어쩜 우리 인간의 본성일지도....


4. 이 작품에 대해 이런 저런 말들이 많았는데, 난 그냥 볼만했다. 이걸 보고도 밤에 잘 잔것을 보면 공포 영화에 대한 민감도가 생각만큼 높지 않았는가보다. 그렇다고 다른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가하면, 또 그건 아니고. 초반 도입부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폼새가 예사롭지 않았다는 점만은 나도 인정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 이 영화를 봤다고 해도 도입부부터 흥미를 느꼈을 것이다. 다만 등장인물들의 행동들이 왜? 라는 의문 부호를 달기에 충분하게끔 석연찮게 행동하는 경우가 많아서 흐름이 끊기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다 복선이었고, 알게 모르게 연결이 된것이다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서도. 그것을 찾아내기 위해 다시 한번 보겠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라서. 그냥 흐름이 끊기더라, 라는 정도로 기억하려 한다. 악은 악이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아무 죄 없는 자도 그들의 먹이가 될 수 있다. 왜냐면 그들은 그저 심심풀이로 낚시를 하고 있는 것이므로. 하니 그 미끼에 우연히 걸려 들은  우리 가여운 중생들은 너무 억울해 말거라, 라는 말을 하려던 것이라면 제대로 알아들은 듯하다. 그것이 아니라고 해도 뭐. 상관은 없고. 잘 만든 작품인가요라고 묻는다면 글쎄...라는 의문 부호가 따른다. 이런 내용으로 이야기를 하나 완성했다는 것만큼은 대단하다 싶긴 하지만 완벽하게 나를 설득하기엔 뭔가 부족했다. 마지막 부분들이 특히나 석연찮다. 과연 천우희는 악마들을 막을 진정한 계략이 있었던 것일까. 모든 정황을 의심의 길로 들게 만들고서는, 딸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인 아버지를 향해 나를 믿어라, 흔들리지 마라라고 말한들, 과연 그 말을 믿을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 천우희 자신은 도움을 주려 왔다고 했지만 결과론적으로는 의심에 불을 활활 지펴서 악을 향해 달려 가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믿음이 가지 않는다. 그녀는 과연 선인일까? 아니면 아담과 이브의 신화에 나오는 뱀같은 존재인것일까.  과연 우리는 무엇을 믿을 수 있고, 무엇은 믿을 수 없는 것일까. 참으로 골치아픈 명제다. 다만 그저 거대한 악을 마주했을때 그것을 악이라고 알아볼 수 있는 통찰력만은 내게 주어지기를, 하고 영화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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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빠 2016-07-04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믿음이 소중한 것처럼 대사는 나오지만 제가 보기엔 관객이 그런식으로 현혹하게 만든 영화같아요....독버섯에 의한 환영과 살인이라고 영화중간중간 나옴에도 신이나 어떤 대단한 존재를 바라는 노예습성을 가진 인간들을 비꼰 영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네사 2016-07-05 11:28   좋아요 0 | URL
아, 그렇게 보셨군요. 이 영화를 보는 시선이 다 다르다고 하던데, 그 말이 맞나 보네요.
전 그런쪽으로는 생각해보지 않았었거든요. 각자의 시선에 따라 다른 해석이 나온다니...
과연 이 영화가 잘 만든 작품이긴 한가 보네요.^^

보빠 2016-07-05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해석의 여지를 여러가지로 준 작품이죠. 보통 좋은 소설이나 영화는 관객이 자기가 보고싶어하는 방향으로 잘 유도하지만 약간의 의아심이나 찜찜함 불쾌함 놀라움을 남길때 좋은 작품이라고 하지요..

제가 그렇게 해석 한 근거는
1. 신문기사나, 딸이 병원에 있을때 가끔 나오는 독버섯이야기
2. 목사(신부)님이 주인공한테 ˝눈으로 봤냐?˝말하는 것
3. 주인공 딸이 나아졌다가 할머니가 약을 다시 먹이면서(독버섯이 들어간 것이 아닐까??) 환영을 본것
4. 일본인이 낭떠리지에서 마을 아저씨들을 피해 숨을때 눈빛은 겁에 질린 보통사람.
그리고 일본인 방에 있는 사진을 경찰관 한명이 보고 놀라는데 일본인은 평범한 사진을 보는 듯한 눈빛
=> 즉 환영의 독버섯을 먹은 사람들한테만 의심을 정당화하는 환영만 보임.
4. 결정적인 것은 좀비가 나타났는데 마을 사람들이 단 한명도 ˝너...누구누구 아니냐?˝ 묻지 않습니다.
마을사람이 좀비가 되어있는데 이름을 안부른다는 것은 그 일본인 잡으러 간 동네사람들이 환영에 걸린것.

추가로: 주인공 친구가 정육점하는데, 화면 곳곳에 돼지 축사가 보여요..즉 독버섯 먹은 돼지로 통해서 일부는 감염되지 않았을까???

우리가 어떤 사실을 보더라도 실제로는 자기가 보고싶은 환영을 정당화하는 것 뿐이라는 `유식불교`책에 있는 경구가 생각나게 하는 영화인것 같습니다.

이네사 2016-07-05 12:26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2016년의 최대 기대작인 <쥬토피아>를 보고 왔다. 아이들을 상대로 만든 것이 분명할텐데  굳이 키즈 프리 이벤트로 시사회를 진행해서 조금 의아하더니, 보고 나니 주최측이 왜 그런 이벤트를 고안하게 된 것인지 이해가 간다. 애니긴 한데, 더군다나 아이들이 홀딱 반할만한 동물들이 주인공임에도, 내용이 초등학교 아이들이 이해하기엔 조금 어렵다. 이런걸 보니 애니를 만드시는 분들이 어떤 고민을 하실지 짐작이 간다. 아이들 수준에 맞추자니 어른들이 유치하다고 난리고, 그렇다고 어른들 수준에 맞춰주자니 아이들이 이해를 못해 애니의 최대 관객층인 그들을 끌어모을 수 없다는 문제가 있겠다는 것을 말이다. 어른과 아이들, 둘 다의 이성과 감성에 만족을 주는 애니를 만든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프로젝트가 아니겠구나 싶더라. 그런걸 보면  <인사이드 아웃>이나 <겨울 왕국>같은 애니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일른지 모른다. 배은망덕한 관객들 입장에선 그런 어려움이 보일리 없을테지만서도... 해서 키즈 프리라는 이벤트 덕분에 아이들 없이 애니를 감상한 첫번째 영화인 이 작품의 장점을 들자면, 영화관이 무척이나 조용해서 좋았다는 것이다. 애니를 보면서 주변을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적응이 안 될 정도로 조용했다. 떠들어야 한다고 온 몸으로 표현해주는 아이들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 편안한 것이로구나 새삼 깨달았다. 보통 15금 영화를 보면서도 이렇게 조용하다고 느낀 적이 없는데, 이번 영화에서 유독 그렇게 느껴진 것은 만화영화라는 특성상 조용하다는 것이 내게 생소해서 더 그랬던 듯하다. 이에 반해 단점이라면 바로 그 조용하다는 것에 있었다. 반전의 묘미로 웃기는 장면이 꽤 되었었는데, 아이들과 같이 봤다면 함께 왁자지껄 터지는 웃음 소리에 각자의 훈수까지 곁들여 아주 난리가 났을텐데, 웃는 소리마저 머뭇머뭇 간간히 터져주니 영화를 보는 흥이 별로 나질 않았다. 그런걸 보니, 또 굳이 아이들을 빼놓고 애니를 봐야 하나? 라는 의문이 들더라. 왜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볼 마음의 여유마저 없는 것인지, tv속에서 아동학대에 대한 사건이 나올때마다 한목소리로 난리를 쳐대면서도 정작 아이들하고 어울리는 것은 극도로 꺼리는 사람들을 보면 웃긴다 싶다. 더군다나 아이들을 상대로 팔 물건으로 이 작품을 만들었으면서도 정작 아이들은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의 거만은 어떻게 해석해야 좋은 것인지....뭐, 그들의 영화니, 어떻게 하건 그들 마음인 것이겠지만서도.


해서 보고 난 결론은 과연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할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는 것이다. 잘 만든 애니라는 것은 분명한데, 과연 이 영화의 주요 타켓층을 어디로 봐야 하는 것부터 애매하다. 애니라면 무조건 봐야 한다고 생각할만한 초등학교 학생들은 이 영화를 이해 못할 것이고, 이 영화를 단박에 이해할만한 어른들에겐 애니란 조금 시시한 장르라서 굳이 영화관에 가서 봐야 한다는 생각을 안 할테니 말이다. <인사이드 아웃>은 분명히 어른들이 환호할만한 장점이 존재했고, <겨울 왕국>이 흥행에 성공한 것은 레잇고와 엘사에게 반한 아이들의 손에 질질 끌려다닐 수밖엔 없었던 어른덕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도저도 아닌 이 영화가 과연 어떤 연령층의 마음을 끌어모으게 될지 저의기 궁금했다. 내가 제작자라도 누구에게 맞춰야 할지 고민이 되겠다 싶다. 과연 이 영화는 어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이 아동틱스러운 동물 주인공들의 매력이 과연 어른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지 결과가 궁금해진다.


< 간단 줄거리>동물들이 저마다의 야생성을 잃어버리고 거의 인간화된 삶을 살고 있는 주토피아에서 최초로 경찰이 되고 싶어하는 토끼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하여 주디 하퍼~ 절대 경찰이 될 수 없다는 모두의 편견을 뒤로하고 노력에 노력을 한 결과 드디어 토끼 경찰 1호가 된 주디는 자신의 열정과는 달리 첫날부터 주차 티켓 발부 요원으로 배치받자 실망하고 만다. 주차 티켓을 끊고 있다 우연히 깜찍한 여우 부자(아버지와 아들)를 만나 도와주게 된 주디는 나중에 그들이 사기단이라는 것을 알고는 배신감에 분노한다. 하지만 포유류 실종 사건의 단서를 사기단의 아빠 여우 닉이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주디는 그를 찾아가 자신을 도와줄 것을 예의바르게(?) 부탁하는데...


예고편의 박장대소가 무색하지 않은 괜찮은 만화영화다. 예고편이 전부이면 어쩌나 걱정이었는데, 다행히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맛깔나게 버므려 놔서 재밌게 감상했다. 동물들의 깜찍함이나 귀여운 행동, 그리고 동물들 특성에 맞춘 캐릭터 선정은 엄지를 척 들어올릴만큼 잘 만들었지 싶다. 동물들의 특성을 반전매력으로 승화시킨 것이 웃음의 주요 포인트로 특히나 나무늘보를 잘 활용한 점에서만큼은 박수를 받을만하다. 토끼와 여우의 앙상블도 좋았고. 편견은 몸으로 부딪혀 없애야 한다는 교훈도 적절하다 . 주디와 닉의 이런 콤비 플레이라면 연작으로 만들어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 듯 싶었다. 한번 보고 말기엔 둘의 짝짜꿍이 너무 잘 맞아서 말이다. 다만 후속작을 내신다면 어린 아이들과도 같이 즐길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뭐, 그건 이 영화의 흥행에 따라 어떻게 될지 결정이 나겠지만서도. 적어도 분명한 것 한가지는, 이 영화가 충분히 매력있으며, 한번 쓰고 버리기엔 주토피아라는 곳의 매력이 무궁무진했다는 것이다. 이렇게나 공들여서 창조해낸만큼 다음 작품속에서도 그들을 충분히 활용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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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말을 기억해둬요, 한 아이를 키우는데 한 마을이 필요하다지만,  한 아이를 학대하는데도 한 마을이 필요하단 것을.--극중 변호사가 기자에게 내뱉은 말.


 2001년 미국 3대 일간지중 하나라는 보스톤 글로브내 <스포트라이트> 팀이 카톨릭 성직자 추문을 밝혀내는 과정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이야기는 보스톤 글로브에 새 편집자가 오게 되면서 시작된다. 그의 이름은 마티 바론, 유대인으로써 천주교 일색인 보스톤을 외부인의 시선으로 볼 수 있었던 그는 당시 떠들썩하게 소송중이던 성직자 성스캔들을 파볼 것은 <스포트라이트>팀에 지시한다. 그간 그 문제가 종종 제기되어 왔었고, 제보도 여럿 있었지만 그때마다 묵살되어 오던 것이 보스톤 글러브의 실정. 묵살 된것은 별 게 없기 때문이었겠지 하던 기자들은 사건을 파헤쳐 들어가면서 자신들의 생각이 안이했음을 알게 된다.  피해자들과 피해자들을 대변하는 변호인들, 피해자 단체들과 만남을 가지다보니 어쩔 수 없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아차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카톨릭 교단 내에서는 나쁜 양 한마리의 문제로 치부하는 성직자 아동 성추행 문제가, 사실 조직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보신 적이 없으신가? 만약 그 나쁜 양이 어쩌다 나온 한마리가 아니라, 전체의 6%를 차지한다면 우린 그걸 나쁜 양 한마리의 문제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이건 전적으로 시스템의 문제이며, 그걸 무너뜨리지 않으면 이런 범죄가 계속되겠다는 것까지 추리해 낸 스포트라이트팀은 최선을 다해 이일을 밝혀 내기로 마음 먹는다. 그리곤 놀랍게도, 성직자의 아동성추행이 계속되어온 관행이며, 바티칸을 비롯한 카톨릭 기관은 이를 알면서도 지속적으로 은폐하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었다는걸 알게 된다. 왜 아무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라는 물음에 피해자중 하나는, 우리가 내내 말을 했음에도 당신들은 듣지 않았다고 일갈을 하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두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하나는 나의 순진함이 깨지는 순간이었다고 해야 할까, 아하! 모먼트였다고 해야 하나, 그런 것이었는데,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세상이 일순간에 달라 보이는 경험을 내게 선사해줬다. 세상은 여전히 똑같은데 내가 그때까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걸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모든 단서들을 누군가가 열심히 흘려줬는데도 내가  제대로 꿰맞추지 못하고 있었구나 라는걸 깨달으면서 느껴지는 섬뜩한 기분...바로 내게 그런 기분을 선사한 장면은 피해자중 한 사람이 " 이 모든 것은 순결 서약에서부터 시작된 것" 이라는 말을 했을때였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니 당연히 성욕을 느낄 것이고, 그걸 풀 기회조차 막아 놓았으니 다른 해결책을 찾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피해자들 대부분이 남녀를 불문하고 가난한 집 아동들인 것도 그때문이라고. 성직자들이 그들을 고른건 그들이 쉽게 나서서 성직자들을 고발하지 않을 것이라는걸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순진하고 가난하며 기댈 곳이 없는 아이들에게 행해지던 이 추악한 짓이 사실은 오래전부터 계속되어온 일종의 패턴으로,  사제와 바티칸, 교구민과 피해자 가족들 모두가 알면서도 쉬쉬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이 충격이었다. 그렇다. 단지 동성애나 소아성애증에 걸린 사제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성직자들이 자신의 성욕을 해결하는 하나의 패턴이었을뿐. 이 얼마나 가공할만한, 그리고 기이한 해결방식이라는 말인가. 그 섬뜩함에 히드라 머리를 본 듯 나는 그대로 굳고 말았다.

두번째 장면은 샤샤라는 기자가 피해자를 인터뷰하는 장면이었는데, 나는 그만 눈을 돌리고 말았다. 공포 영화도 아니고, 잔인하거나 야하거나 하는 장면 하나 없이, 그저 옷을 다 차려 입은 두 사람이 까폐에서 만나 차를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전부인데도, 도저히 눈을 뜨고 바라볼 수가 없더라. 결국 외면한 채 한동안 마음을 진정시킨 다음에서야 볼 수 있었다. 이런게 가능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으면서,  인간이야말로 어쩌면 이 지구상에서 가장 잔인한 동물일지도 모르겠다 싶더라.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는 것보다 더 경악스러웠던 것은 기사화한다는 기자들에게 그저 모른척하라고 주문하던 카톨릭계 인사들과 아예 성추문 전담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던 바티칸의 위선이었다. 순진하고 어린 피해자들이 무한정 늘어날 것을 잘 알면서도 그들은 멈추려 하지 않았다. 잠잠해진 다음에 다른 곳으로 전출을 시켰을 뿐...카톨릭이라는 것이 결국엔 거대한 사기 집단이자 성범죄의 온상이었다는 사실은 나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해온 일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연 그들은 떳떳할 수 있을까? 그들이 어떤 장한 일을 해왔다고 한들, 한 어린 아이의 고통스런 눈물과 맞바꿀 수 있겠는가 말이다. 아이들을 자랄 뿐이고, 어린 시절의 기억은 잊혀질 것이라면서 단순히 별것 아니라고 하던 사람들의 생각은 얼마나 틀린 것이냐. 카톨릭이 세계적으로 신자가 줄어든다고 하던데, 현대인들의 믿음 없음을 탓하기 전에 어쩌다가 어린 아이들의 영혼을 짓밟는 가해자가 되었는지 심사숙고해볼 수는 없는 것인지 싶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시스템의 문제라면, 이제와서라도 바꾸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싶어서 말이다. 그것이 위선을 떨면서 뒷방에서 아이들을 쓰다듬는 것에 비하면 훨씬 떳떳한 일이 아닐까.

깊은 여운과 생각할 거릴 남겨준 수작이다. 보고 나서도 한동안 먹먹해서 애를 먹었다. 이 이야기가 실화라는걸 알고서 보니, 도저히 담담할 수가 없었다. 최대한 냉정하게 언급만 하려 한 것도 그때문이다. 언급했다시피,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 이야기의 전개가  매우 자연스럽다. 군더더기 없는 것이 아주 맘에 든다. 드라마틱한 장면이 별로 없음에도 끝까지 지루하지 않게 몰입해서 보게 만든다는 점도 장점. 배우들의 연기는 다 출중해서 누구 하나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사람이 없다. 그 중 가장 눈에 뜨이는 배우를 꼽으라면 마티 바론 역의 리브 슈라이버였다. 그간 연기를 잘 한다는걸 별로 느끼지 못했었는데, 이 역에는 딱이다. 이성적이고, 난센스가 끼여들 여지가 없는 머리좋고, 논리적인, 불필요한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목표물에 향해 달려가는 건조한 편집자 역을 훌륭하게 해내서 작품의 무게 중심을 잘 잡아준 듯하다. 그리고 스포트라이트 팀장 역의 마이클 키튼 역시 자신의 전성기를 다시 되찾고 있는 듯하다. 젊은 시절의 그를 좋아했던 나로써는 그의 이런 귀환이 매우 반갑다. 그리고 열혈 기자역의 마크 버팔로...왜 한국인들이 자신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토크쇼에 나와서 이야기를 하던데, 마크~~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건 당신이 선한 역에 잘 어울리기 때문이랍니다. 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의 선한 눈빛과 현직 헐크다운 욱함이 영화의 생기를 살려내지 않았는가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샤샤 기자역을 맡은 레이첼 맥아담스는 욕심내지 않는 훌륭한 팀웍을 보여주었고, 경험주의자적인 냉소와 따뜻한 인간애가 공존하는  변호사 역의 스탠리 투치 역시 자신의 몫을 십분 해내고 있었지 않는가 한다. 총체적으로 말해 연기의 어벤져스들이 모여서 꽤나 근사한 영화 하나를 만들어냈다고 보면 된다. 이 추악한 세상, 원래 그렇게 돌아가고 있던 것이니 더이상 문제 삼지 말자고 하는 대신, 이 추악한 세상을 바꾸어 보자고 나선 그들의 용기와 신념에 박수를...만약 우리의 세상이 좀더 나은 것이 되었다면 아마도 그런 이들의 보이지 않은 열정과 이성때문일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더불어 자칫 선정적으로 흐르 수 있는 소재를 차분하고 냉정하게 하지만, 사려깊은 톤으로 연출해 준 감독에게도 감사를 표하고 싶다.  그의 연출 덕분에 이 영화가 더욱 더 진정성있게 다가왔다. 성직자 추문 피해자들이 이 영화를 통해 많은 위로를 받았기를. 영화 말미에 자막을 읽어보니, 바티칸은 이 사건 후에도 달라진 것이 없는 듯하다. 우리가 내내 떠들었지만 당신들은 듣고 있지 않았다는 피해자들의 말은 여전히 진행형인 모양이다. 이 영화가 상영된 후에라도 과연 얼마나 세상이 달라져 있겠는가 싶어 암담한 심정이다. 그저 바라건데 더이상 자라나는 아이들이 어른들의 일그러진 욕망의 희생자가 되는 일이 없기를.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이 우리 어른들의 의무 아니겠는가. 방관자나 방조자 역시 가해자 못지 않게 나쁜 것이라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던데, 과연 나는 어떤 어른일까, 이 밤에 고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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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2-09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상깊은 영화소개 잘 읽고 갑니다.
네 이웃의 범죄 ㅡ만이 아니란 말이죠...^^;

이네사 2016-02-10 12:46   좋아요 1 | URL
네, 그런 이야기랍니다.
 




여성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영화를 좋아한다. 요즘은 그런 영화를 별로 본 적이 없어서 심심해했었는데, 간만에 발견한 여성주의 영화. 이 아니 반가울쏘냐다. 80여분에 달하는 짧은 영화지만, 해야 할말은 다 한 듯한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영화, 내용에 들어가보면...36년을 함께 한 연인과 사별한 레즈비언 엘은 한때 유명한 시인이었던 전직 교수다. 현재는 올리비아라는 젊은 애인과 목하 열애중이었지만 아침 나절에 심하게 싸운뒤 그녀를 내쫓아 버린다. 감상에 젖어 있는 엘 앞에 나타난 귀여운 손녀는 자신이 임신을 했다면서 도움을 청한다. 600달러만 빌려 달라고 하는데, 이걸 어쩌나, 하필이면 엘에게는 현금도 카드도 없는 상태였다. 집에 있는 비상금을 탈탈 털어봐도 500달러정도가 모자라는 상태. 오늘 저녁까지 돈이 필요하다는 손녀의 말에 엘은 주저없이 그녀의 손을 잡고 돈을 빌리러 나서게 된다. 하루가 모자라는 시간 동안 돈을 빌리러 돌아다니면서 엘은 손녀에게 자신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의도치 않게 보여주게 되고, 그 과정속에서 엘 역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되는데...

흠...바람직하게 나이들면 이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싶던, 내가 엘 나이가 된다면 저런 어른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게 하던 성숙한 영화였다. 페미니즘이 시동을 한 이후로 두 세대가 흘렀던가? 이제 젊은 시절 페미니즘을 주장하던 세대들이 늙어서 젊은 처자들을 안스럽게 바라보는 시기가 되었다. 다시 말해 요즘 젊은 처자들에겐 다행스럽게도 그들에겐 영화속에 엘같은 그랜마를 가진다는 것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축복인지 가늠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엘이 그저 까칠하고 냉소적인, 성질 더러운 레즈비언에 불과할지 모르겠으나, 편협과 부정의속에 오랫동안 고통받고 살아온 한국 여자로써 나에겐 엘같은 그랜마를 그려낼 수 있는 현재의 시대상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위선적이지 않은 어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때론 내가 말을 하는 것인지, 누가 한 말을 따라 하는 것인지도 알지 못한 채 우리는 생각하지도 않은 채 주절 주절 말을 해댄다. 그것이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건 아니건 간에. 그런 관습에서 벗어나 누가 뭐라 하든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엘이, 가장 고집스럽고 불친절하며 퉁명스러워 보이는 엘이 사실은 가장 친절하고 너그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 그것만으로도 인생 잘못 살지 않았다는 증명이 되지 않을까 한다. 아마도 엘이 그런 사람일 수 있던 것은 그녀가 평생 투쟁을 하면서 살아온 투사였기에 가능한 것이었을 것이다. 하여간 그닥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중년의 전직 교수이자 시인을 보면서 흐믓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는 것만큼은 적어놓고 싶다. 요즘 나온 영화들 중에서는 비교적 짧은 상영 시간을 가진 영화지만, 공감가는 장면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젊은 애인을 찾아가 왜 자신이 그녀와 헤어지는걸 선택했는지를 설명하는 부분과 전남편과의 대화에서 난 늙은게 좋아, 젊은 애들은 멍청해, 하는 장면은 잊을 수 없다. 하나는 나라도 그럴 것 같아서 그랬고, 다른 하나는 이미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랬다. 이런 어른이 된다면 나이 든다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은 나이 드는 것에 관대해지는 느낌이었다. 제발 바라건데, 부디부디, 이런 현명한 어른으로 늙어가게 하소서, 나에게 주문을 걸어본다.

 페미니즘 영화가 대부분 그렇듯 출연진들의 연기가 좋다. 아마도 자신들의 이야기라서 별 과장없이도 편안하게 연기할 수 있기에 그런가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랜마 역을 맡은 릴리 톰린의 연기를 언급안하고 넘어가긴 아쉽다. 역 그 자체로, 어쩜 그리도 자연스럽게 배역에 녹아들던지...연기가 아니라 그녀의 일상 생활을 따라가는 듯 흥미로웠다. 그녀가 내뱉는 대사들이 좀처럼 얌전한 할머니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나름 파격적인 (?) 대사들이었는데, 어찌나 맛깔나게 구사를 하던지 홀딱 반하고 말았다. 이런걸 보면 인격이라는 것은 사용하는 언어로도 감출 길이 없는가 보다. 손녀의 난데없는 방문 덕에 하루 일정의 인생 되돌이 투어를 마친 엘이 마지막에 짓던 흐믓한 미소.  누군가 자신의 인생을 되짚어 봤을때 그런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생 헛산게 아니란 뜻이 아닐런지. 잘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고 싶다시는 분들에게  적극적으로 추천. 매우 깜찍하고 영리하며 아름다운 작품이다. 딱 내 취향 저격의 영화. 물론 보는 이에 따라서는 발칙한 영화라고 하실지도 모르겠으나, 이 정도 수준이 발칙하다면 그건 당신의 문제이니, 극복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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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루이스의 책 <빅 쇼트>가 영화화된다고 했을때 반가워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의아했었다. 왜 < 라이어스 포커>가 아니고 빅쇼트인가요? 라는 것에 대한 것.  왜냐면 책이라는 면에서 보자면 작품성이나 재미면에서 월등히 <라이어스 포커>가 우월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서프라임 모지기 사태라는 엄청난 사태를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빅쇼트가 선택되었는가 보다 짐작을 하면서도 아쉬움을 감출 길이 없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빅쇼트>에 명배우들이 줄줄이 출연을 하지 뭔가. 아쉬움을 단박에 잊어 버리게할만한 그런 출연진이라서 흥분할 수밖엔 없었다. 하여 커져버린 기대감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보게 된 결과는...

브래트 피트, 크리스찬 베일, 라이언 고슬링, 스티브 카렐등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을 해서 그런가 다행히도 책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줄거리는 간단히 이야기 하자면 2008년 일어난 서프라임 모지기 사태를 진작에 알아차린 몇몇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housing market는 절대 망할리 없다고 말하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아니라고 말했던 극소수의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알아차리고, 그 상황을 이용해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가 라는 것. 거대한 흐름에 꺼꾸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의 어려움을 몸소 보여주면서, 그 불가능에 도전을 해서 큰 돈을 벌어드린 기회주의자라면 기회주의자들의 이야기. 문제는 이들이 베팅을 했던 것이 자본주의의 몰락이었다는 것이여서 사실 도덕적으로  본다면 탐탁치 않기는 하다. 다만, 서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일이킨 주범이 따로 있는 마당에 그쪽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는 것일 뿐이지. 영화는 포스터에서 보이는 네 명의 주인공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천재 아스퍼거스로 인간을 대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던 마이클 버리는 인간 대신 아무 감정이 없는 숫자를 다루면서 안정감을 얻는 사람이다. 골방같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하드락을 들으며 펀드를 운영하고 있던 그는 모기지 보험 약관이 지나치게 두껍다는 것에 호기심을 느껴 파보기로 한다. 그리고는 깜짝 놀라게도 이것이 언젠가는 붕괴될 수밖엔 없는 구조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약관이 그렇게 두꺼웠던 것이 무리도 아닌 것이 그 적나라한 사기를 가리기 위해서는 이런 저런 주절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니 말이다. 변호사가 아니면 파보지 않는다는 약관을 들여다 봄으로써, 서프라임 모기지의 사기성을 단박에 알아챈 마이클은 서프라임 모기지 붕괴 시나리오에 모든 것을 걸게 된다. 이일로 그는 븅신에서부터 호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별명을 얻게 된다. 그 누구도 감히 그가 주장한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기지 사태를 예견한 사람은 비단 마이클만이 아니라서, 메릴린치에서 일하던 마크 바움 역시 그에 대한 정보를 자레드 버넷에게 얻게 된다. 처음 반신반의하던 마이클은 뜨악한 마음으로 현장 조사에 나섰다가 대경실색하고 만다. 실제로 주택 시장은 버블이었으며, 그것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붕괴 일보직전이었기 때문이다. 조사를 진행하면 할수록 사태의 심각성에 질려버린 마이클은 앞으로 이것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가 두렵기만 한데...

걸출한 네 배우들이 그들 이름값을 했다고 보면 되는 영화다. 서프라임 사태가 일어나게 된 배경과 진행 상황을 매우 깔끔하게 설명해내던데, 서프라임 모기지 사태 당시 설명을 들었던 사람들 모두, 들어도 들어도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는걸 감안하면 이해하기 쉽게 전개한 것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 진실은 시와 같다. 그리고 사람들은 시를 졸라 싫어하지.> 라는 문구가 중간에 삽입되어 있던데,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현실을 대하는 자세가 아닐까 싶더라.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이 외면받는 세상에서, 진실이 너무 끔찍할 시 우리는 사태 해결보다는 덮는 것을 더 선호하는 듯하다. 아무도 시를 좋아하지 않고, 아무도 끔찍한 현실을 좋아하지 않는다. 서프라임 사태를 예견한 마크 바움( 스티브 카렐)과 벤 리커트(브래드 피트)가 자본주의와 금융권의 부도덕을 설파하지만서도, 그들의 눈물이 안스럽게도 현실은 여전히 사기꾼들을 옹호하면서 흘러간다. 사태를 촉발한 주범들중 거의 누구도 단죄를 받지 않았다고 하던데, 그런 의미에서 영화속 마지막 멘트가 의미심장했다. 서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유발한 금융상품이 다른 이름으로 시중에 나돌고 있다는 것...과연 우리 인간은 과거의 실수에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것인지, 어쩜 그것이 인간의 운명인 것일까, 궁금해진다. 결국 이 영화가 주장하고 싶었던 것도 그것의 재발을 막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을런지...역사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는 점에서 괜찮은 영화였지 않는가 한다. 바라건데, 이런 과거를 통해 인간이 뭔가 배웠으면 하지만서도, 글쎄...그저 평범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소는 냉소적인 자세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다가 아닌가 한다. 보통은 영화보다 책이 더 재밌는 법이긴 한데, 이번만큼은 영화가 더 낫다. 하긴 이 배우들 가지고 재밌는 영화를 못 만든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지도... 하여간 그럼에도 책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찾아서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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