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영화를 좋아한다. 요즘은 그런 영화를 별로 본 적이 없어서 심심해했었는데, 간만에 발견한 여성주의 영화. 이 아니 반가울쏘냐다. 80여분에 달하는 짧은 영화지만, 해야 할말은 다 한 듯한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영화, 내용에 들어가보면...36년을 함께 한 연인과 사별한 레즈비언 엘은 한때 유명한 시인이었던 전직 교수다. 현재는 올리비아라는 젊은 애인과 목하 열애중이었지만 아침 나절에 심하게 싸운뒤 그녀를 내쫓아 버린다. 감상에 젖어 있는 엘 앞에 나타난 귀여운 손녀는 자신이 임신을 했다면서 도움을 청한다. 600달러만 빌려 달라고 하는데, 이걸 어쩌나, 하필이면 엘에게는 현금도 카드도 없는 상태였다. 집에 있는 비상금을 탈탈 털어봐도 500달러정도가 모자라는 상태. 오늘 저녁까지 돈이 필요하다는 손녀의 말에 엘은 주저없이 그녀의 손을 잡고 돈을 빌리러 나서게 된다. 하루가 모자라는 시간 동안 돈을 빌리러 돌아다니면서 엘은 손녀에게 자신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의도치 않게 보여주게 되고, 그 과정속에서 엘 역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되는데...

흠...바람직하게 나이들면 이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싶던, 내가 엘 나이가 된다면 저런 어른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게 하던 성숙한 영화였다. 페미니즘이 시동을 한 이후로 두 세대가 흘렀던가? 이제 젊은 시절 페미니즘을 주장하던 세대들이 늙어서 젊은 처자들을 안스럽게 바라보는 시기가 되었다. 다시 말해 요즘 젊은 처자들에겐 다행스럽게도 그들에겐 영화속에 엘같은 그랜마를 가진다는 것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축복인지 가늠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엘이 그저 까칠하고 냉소적인, 성질 더러운 레즈비언에 불과할지 모르겠으나, 편협과 부정의속에 오랫동안 고통받고 살아온 한국 여자로써 나에겐 엘같은 그랜마를 그려낼 수 있는 현재의 시대상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위선적이지 않은 어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때론 내가 말을 하는 것인지, 누가 한 말을 따라 하는 것인지도 알지 못한 채 우리는 생각하지도 않은 채 주절 주절 말을 해댄다. 그것이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건 아니건 간에. 그런 관습에서 벗어나 누가 뭐라 하든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엘이, 가장 고집스럽고 불친절하며 퉁명스러워 보이는 엘이 사실은 가장 친절하고 너그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 그것만으로도 인생 잘못 살지 않았다는 증명이 되지 않을까 한다. 아마도 엘이 그런 사람일 수 있던 것은 그녀가 평생 투쟁을 하면서 살아온 투사였기에 가능한 것이었을 것이다. 하여간 그닥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중년의 전직 교수이자 시인을 보면서 흐믓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는 것만큼은 적어놓고 싶다. 요즘 나온 영화들 중에서는 비교적 짧은 상영 시간을 가진 영화지만, 공감가는 장면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젊은 애인을 찾아가 왜 자신이 그녀와 헤어지는걸 선택했는지를 설명하는 부분과 전남편과의 대화에서 난 늙은게 좋아, 젊은 애들은 멍청해, 하는 장면은 잊을 수 없다. 하나는 나라도 그럴 것 같아서 그랬고, 다른 하나는 이미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랬다. 이런 어른이 된다면 나이 든다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은 나이 드는 것에 관대해지는 느낌이었다. 제발 바라건데, 부디부디, 이런 현명한 어른으로 늙어가게 하소서, 나에게 주문을 걸어본다.

 페미니즘 영화가 대부분 그렇듯 출연진들의 연기가 좋다. 아마도 자신들의 이야기라서 별 과장없이도 편안하게 연기할 수 있기에 그런가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랜마 역을 맡은 릴리 톰린의 연기를 언급안하고 넘어가긴 아쉽다. 역 그 자체로, 어쩜 그리도 자연스럽게 배역에 녹아들던지...연기가 아니라 그녀의 일상 생활을 따라가는 듯 흥미로웠다. 그녀가 내뱉는 대사들이 좀처럼 얌전한 할머니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나름 파격적인 (?) 대사들이었는데, 어찌나 맛깔나게 구사를 하던지 홀딱 반하고 말았다. 이런걸 보면 인격이라는 것은 사용하는 언어로도 감출 길이 없는가 보다. 손녀의 난데없는 방문 덕에 하루 일정의 인생 되돌이 투어를 마친 엘이 마지막에 짓던 흐믓한 미소.  누군가 자신의 인생을 되짚어 봤을때 그런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생 헛산게 아니란 뜻이 아닐런지. 잘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고 싶다시는 분들에게  적극적으로 추천. 매우 깜찍하고 영리하며 아름다운 작품이다. 딱 내 취향 저격의 영화. 물론 보는 이에 따라서는 발칙한 영화라고 하실지도 모르겠으나, 이 정도 수준이 발칙하다면 그건 당신의 문제이니, 극복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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