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제로 편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개정판)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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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 I 채사장 I 웨일북




"자아와 세계는 하나다."

우주의 창조와 소멸을 말하고 물질의 탄생과 생명의 의미와 모든 존재하는 것의 가치를 논하는 자,

이렇게 놀라운 초월적 존재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당신이다.

당신이 세상을 보는 유일한 자이고, 세상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최후의 존재다.




저자는 이번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에서 세계와 자아는 하나다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는 왜 이야기 하려고 하는가? 바로 인문학이라는 거대한 사유가 다루는 세 가지 범주가 이 명제 안에 함축되어있기 때문이다. 세계란 무엇인가, 자아란 무엇인가, 세계와 자아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가 바로 그것이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1>은 한 권으로 현실 세계를 통달하는 지식여행서,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2>는 한 권으로 현실 너머를 통찰하는 지식 여행서라는 부제가 달렸었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은 지혜를 찾아 138억 년을 달리는 시간 여행서라는 부제가 달렸다. 다시 말하자면 지대넓얕 1은 현실세계를 지대넓얕 2는 현실 너머를 다뤘는데 시기 상으로는 고대, 중세, 근대, 현대를 다뤘고 세계관은 이원론의 시대였다. 지대넓얕 0은 고대부터 고대 이전까지 다루며 이 시기의 세계관은 일원론(세계와 자아는 하나다)의 시대였다. 지대넓얕 0은 우주, 인류, 베다, 도가, 불교, 철학, 기독교에 대해 다룬다.  



다시 저자의 이 책에 대한 주제로 넘어가서 말하자면 세계와 자아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며 그것을 위대한 스승들의 거대사상을 통해 밝히려한다. 그는 세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때문에 우주부터 살핀다. 오랜시간동안 우주는 유일하고 시간의 시작이 빅뱅부터라고 생각해왔지만 최근의 연구로는 시간 이전의 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 다중 우주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이런 우주를 이해하려는 것, 왜 우주를 이해하려는가에 대한 답으로 "그것은 우주의 자기반성 과정이다."라고 한다. 그는 이제 인류에 대해 얘기한다. 138억년의 시간 속에 지질 시대를 살펴보며 최초의 생명 탄생을 지켜보았다. 인류의 조상을 만났고 문명이 탄생되며 문명으로 인해 인간은 유례없는 풍요와 안전을 보장받았지만 인간 사이의 거리는 가까워졌고 이로 인한 새로운 갈등과 욕망이 인간의 내면에 자라나기 시작했다. 고대인의 삶도 지금 현대인의 삶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저자는 베다와 도가, 불교, 철학, 기독교를 통해 위대한 스승들을 알아본다. 그들은 축의 시대에 등장했다. 축의 시대란 카렌 암스트롱에 따르면 인류 정신사에 거대한 전환점이 된 시대였다. 4천 년 전, 인도 서북부 지역에 정착한 아리아인의 경전이었던 베다는 인도 사상의 근간을 이루며 베다, 우파니샤드, 힌두교로 전통이 이어졌다. 그 핵심은 범아일여였다. 범아일여란 '세계와 나는 하나다'라는 의미이다. 첫 여행지로 인도 대륙을 횡단했고 다음은 중국 사상의 대륙을 횡단한다. 바로 도가에 대해서 알아보는데 노자와 공자, 그들이 가졌던 근본물음은 동일했다. 중국 사상에서는 인도의 범아일여 사상처럼 우주와 자아의 관계를 밝히고 자아의 내면에서 우주의 본질을 밝히고자 하는 시도를 만나보았다.



불교를 통해 붓다의 가르침과 독립해서 존재하는 세계나 자아를 인정하지 않고 자아의 내면 안에서 세계의 실체를 이해하려는 일체유심조를 알아보았다. 인도와 중국을 아우르는 고대 동양의 근원적인 사유방식은 자아와 세계를 분리하지 않고 통합적으로 고려하는 일원론에 기반을 둔 것을 알아보았는데 과연 서양은 어떨까? 서양은 동양과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고대에서 시작된 이원론적 세계관은 철학과 종교에 깊은 영향을 미치며 근대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18세기 칸트가 초월적 관념론을 제시함으로써 일원론적인 탐구를 시작했다. 동양은 고대의 일원론으로 시작해 근현대에 그것을 잃어버리고 서양의 이원론을 받아 들인 것에 비하면 서로 상반되는 것이다.

플라톤 이후의 서양 철학이 세계를 이데아와 현실로 나누고 세계와 자아를 양분해 온 것처럼 기독교는 세계를 천국과지상으로 나누고 신과 인간을 양분해왔다. 이러한 면은 타 종교에 대한 불관용과 이단에 대한 엄격한 규정을 통해 이루어진 면이 있다.






채사장, 그와의 동행은 길었고 어려웠으며 반갑기도 했고 재밌기도 했으며 새롭기도 했다. 세 권의 여행을 통해 이 세상은 너무나도 복잡 다단하게 느껴졌으며 고대인들은 고민했고 그들은 지혜로웠다. 현대인의 고민은 고대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으며 고대인들보다 지혜로워지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고대인들의 지혜가 더욱 빛이 나는 듯하다. 지금까지 위대한 스승들의 거대사상을 통해 자아란 무엇인가? 세계와 자아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 단순하다고 생각되었던 세계관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우주의 빅뱅, 아니 그 이전의 우주부터 시작해서 인류와 스승들의 거대사상을 두루 알아보았다. 저자는 왜 21세기에 이 세계관을 들먹이며 알아보려고 한 것인가?라는 질문이 생긴다.



현재 우리는 이원론의 세계에 태어나서 그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죽는다. 자기 내면의 가려진 영역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우리가 이원론의 세계관 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세계와 자아가 하나라는 일원론의 세계관으로 들어가 그곳의 주인이 나 자신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기를 권하고 있다. 나 자신을 찾기 위해 그는 일곱 개의 준비운동을 추천한다. 나를 멈춰 세우는 운동으로 책을 통해 여러분이 확인하길 조심스레 권유해본다. 기나긴 여정을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것,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을 찾으라는 메세지로 들린다. 그리고 위대한 진실과 마주한 뒤 내가 깨달은 진실을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라 말한다, 위대한 스승들이 그러했듯.



책을 읽을수록 이 책을 쓰기 위해 저자가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검증했을까라는 생각때문에 저자의 책쓰기 과정에 대해 박수를 보내고 싶고 읽으면서 그의 똑똑함에 부럽기도 했다. 현대 우리의 인생은 배움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배움들이 어울려 융합이 되어 비경험에도 교훈을 깨닫는 사유를 하기 시작하는 때는 언제일까? 사람마다 그 시기는 다르겠지만 연륜이 쌓이는 그 시기는 아마 어느 정도의 지식 위에 그것이 지혜로 변해가는 시간이 더해져야 가능할 것이다. 나는 감히 지대넓얕 시리즈를 읽고 나면 바로 지혜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까지 내가 배웠고 배워야 했을 모든 것을 만나고 거기에 나의 자아까지 찾아볼 생각을 하게 해주는 책, 바로 <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시리즈, 감히 꼭 읽어보라고 추천해주고 싶다. 지식으로 만났지만 지혜로 마무리되는 너무나 훌륭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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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혼란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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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혼란 I 마거릿 애트우드 I 차은정 옮김 I 민음사




나쁜 소식은 예전에도 존재했고, 우리는 그것을 헤쳐왔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 또는 아직 손가락 빠는 아이였을 때 

일어난 사건을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말한다.

나는 그 표현이 아주 마음에 든다. 우 리는 그것을 헤쳐왔다.




넬이 열 한살 일 때 어머니는 여동생인 리지를 낳았다. 사춘기인 넬은 동생을 돌봄에 있어 힘에 부친다. 문학시간에 [나의 전 공작 부인]이라는 시에 대해 배웠다. 예전에 공작들은 전문적 독살자들이었다는 것을 역사 로맨스 작가들을 통해 알고 있었고 남자 친구인 빌은 다른 남자친구들처럼 떼를 지어 어슬렁거리며 여학생들의 가슴에 대해 소리를 질러 대는 그런 부류의 아이가 아니었다. 빌은 분명 다른 남자친구들처럼 연애의 일반적인 주기를 따르지 않는 아이였지만 부족한 그의 문학에 대해 도와주다 싸우게 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대학에 갔고 일을 하며 자연스레 독립하며 가정교사로 취급되는 누군가의 여자가 되었다. 시골의 농장으로 이사를 하고 아이들과 티그와 함께 살지만 그는 아직 유부남이었다. 주위에서는 둘의 관계를 궁금해했다. 커리어 우먼이었던 오나는 많은 남자들을 만났지만 정착하지 못했고 퇴직을 했으며 점점 빛을 잃어갔다. 나는 티그의 아이를 가졌고 오나가 집을 사달라는 요구에 집을 사줬지만 오나는 혼자서 죽음을 맞이한다.





<도덕적 혼란>은 마거릿 애트우드의 자전적 소설이며 단편집이고 연작소설이다. 굳이 단편별로 내용을 정리할 필요가 없었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작품들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시녀이야기>를 통해 접한 그녀는 무서운 작가였다. 디스토피아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우선지만 <시녀이야기>는 내게 굉장한 충격과 무서움을 준 책이기에 마거릿 애트우드라는 사람의 책을 읽기가 조금 망설여졌었다. 35년 만의 <증언들>을 통해 희망적인 이야기도 쓸 줄 아는 작가였음을 확인했고 이번 <도덕적 혼란>을 통해 이런 부드러운 이야기도 쓸 줄 아는 사람이었음을 다시 확인한 계기가 되었다.



<도덕적 혼란> 속 주인공인 넬은 중년의 어머니가 육아가 힘들어 사춘기의 그녀가 어린 동생을 돌봐야했고 엉뚱한 일로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전문직 여성이 되어 자신보다 연배가 있는 커리어우먼을 동경하지만 그녀의 남편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이 모습은 소설 속 남자친구와 다투며 시 속 여성을 욕했던 그 사춘기의 여성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그녀는 분명 테스나, 공작부인을 호구라 칭했다. 바보같이 남자를 너무 믿고 나쁜 남자들의 손아귀에 쉽게 걸려드는 것에 대해 왜 이런 불운하고 짜증스러운 멍텅구리 여자들에 대해 공부해야 하며 그녀들의 인생이 앞으로 나의 미래에 어떤 소용이 있는지 의문을 품었기때문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사춘기 소녀들의 흔한 생각과 억울함을 표현하는 부분에서 공감을 많이 느꼈지만 이런 여성이 성장해서 부부관계가 정리되지 않은 채로 유부남과의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넬의 모습은 안쓰럽다. 사랑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도출한 느낌이다.



<도덕적 혼란>은 주인공이 상황이 가져다주는 불합리성에 대해 고민하는 흔적들은 나의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게 하는 힘을 가졌으며 그녀의 생애를 통해 인생의 의외성과 애착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인공인 넬이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생을 천천히 지나오며 죽음을 목전에 둔 어머니를 통해 다시 한번 자신의 부모님의 삶을 짚어보는 모습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하는 모습으로 비춰져 그녀의 자신의 삶에 대한 애착을 느낄 수 있는 도서였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어떤 작품보다도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고 이제는 농익음의 시선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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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속도를 늦춰라 - 하버드대 행복학 명강의
장샤오헝 지음, 최인애 옮김 / 다연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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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속도를 늦춰라 I 장샤오헝 I 최인애 I 다연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인 하버드대학교의 탈 벤 샤하르 교수의 강의 중 하나가 '긍정심리학'이다. 첫 강의를 시작했을 때 겨우 여덟 명의 학생이이 수업을 들었고 그 중 두 명은 강의 신청을 철회했다고 한다. 그런데 두 번째로 강의를 열었을 때 무려 400명이 신청했고 세 번째 학기에는 855명이 신청했다고 한다. 학생의 부모와 가족 심지어 각종 매스컴 종사자들까지 강의를 듣겠다고 찾아왔었다는 그 유명한 강의를 바탕으로 저자 장샤오형은 <마음의 속도를 늦춰라>에서 말하고 있다. '행복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답을.



'행복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저자는 말한다. "나는 행복한가?"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과연 몇 명이나 행복하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 먹고 사는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다보면 자기계발에 소홀해지고 반대로 정신적인 수준을 높이는 데만 관심을 쏟으면 생계가 어려워질 수 있다. 모든 면에서 두루 균형 잡힌 삶을 원한다면 때때로 자기 자신을 점검해봐야 하며 스스로에게 자문하고 자신의 행복에 대해 고민하기를 멈추지 말라고 한다. 행복은 마음가짐이며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을 찾으라고 말한다. 나만의 장점에 집중하고 나답게 살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라고 말한다. 나 답게 살라는 말에 추가적으로 4강에서는 남과 비교하지 말라고 한다. 자기 인생에 전적으로 만족하며 사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남과 비교하다보면 자기 비하를 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자신은 불행하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남과 비교하기 보다는 앞서 말한 자신의 장점에 집중하고 자기 실수에 관대해지며 남이 아닌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라고 한다.




"남보다 뛰어난 것은 자랑거리가 되지 못한다.

진정한 자랑거리는 과거의 자신보다

뛰어난 것이다."

- 헤밍웨이




헤밍웨이의 말을 들어 설명한다. 인생에 승패란 없으며 승패를 겨뤄야 한다면 바로 자기 자신과 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이 자신보다 행복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의 재미있는 표현이 있다. 자신의 행복은 축소경으로 보고 남의 행복은 확대경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남의 떡이 더 커보인다는 말이 아닐까 싶어서 무릎을 쳤다. 맞는 말같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내가 남을 부러워할 때 누군가는 나를 부러워한다고 한다. 우리가 먼 곳의 풍경을 부러워하며 그곳에 시선을 뺏기느라 바로 눈앞의 행복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 어쩌면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 행복을 발견하는 눈일 것이다. 남의 정원에 핀 꽃을 부러워하느라 정작 자신의 정원에 핀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지 못하는 것, 누구나 하는 실수이지만 이제 알았다면 내 정원에 눈을 돌리자.



영화 [와호장룡]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고 한다. "네가 두 손을 꽉 쥐면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두 손을 활짝 편다면 세상이 너의 손 안에 있을 것이다."... 너무 멋진 말이다. 우리는 세상의 온통 수많은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돈, 명예, 권력, 지위 등등. 그러나 이런 것들은 아무리 욕심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다. 가진 것조차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데 움켜쥐고 놓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분에 넘치는 욕심은 깔끔히 포기하라고 한다. 포기하지 말아야 할 때 포기하는 것은 무능한 선택이지만 포기해야 할 때 포기하지 않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짓이라고 한다. 적절할 때 포기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마지막으로 베풀라고 한다. 힘들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이야말로 숭고한 일은 없으며 우리가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 것 네 것을 가리지 않고 베푸는 것처럼 다른 이에게도 베푼다면 분명 영혼의 기쁨을 선물로 받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1 장 1 장이 모두 좋은 이야기로 넘쳐나는데 이런 책은 빨리 읽어버리면 좋은 의미가 희석되고 날아가 버릴까 싶어 매일 조금씩 읽으니 다 읽고난 지금 행복이 넘친다.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그 속에 어울리는 일화와 유명인사들의 말이 같이 담겨 좀 더 내용이 와닿는다. 또한 뜬구름 잡기식으로 그저 '베풀라, 비교말라, 행복해라' 의 이야기들이 아니라 과감히 포기할 것은 포기하라고도 하는 채찍질이 훨씬 현실적이었다. 매일 한참 바쁘고 시간에 쫓기며 내가 도대체 뭣 때문에 지금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고 힘드나? 라고 생각되는 시간에 잠깐 <마음의 속도를 늦춰라>를 보게 되면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지고 조성진의 피아노 연주라도 들은 듯 마음은 평온을 찾는다. 집 밥을 먹으면서 조성진의 연주를 들으면 미슐랭 5스타의 식사가 되듯. 그래서 이 책은 며칠에 나눠서 조금씩 읽어야 효과를 보는 듯하다. 요즘 조금은 지치고 삶의 의미가 희미해지며 스트레스로 가득찬 나날을 보내고 계시다면 <마음의 속도를 늦춰라>를 추천해드립니다. 말이 필요없는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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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 풀컬러 일러스트 에디션 아르볼 N클래식
제인 오스틴 지음, 앨리스 패툴로 그림, 강수정 옮김 / 아르볼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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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I 제인 오스틴 I 강수정 옮김 I 지학사아르볼



P. 489 아버지가 너의 기질을 잘 아는데, 너는 남편 되는 사람을 진심으로 존경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도, 어엿하게 살 수도 없는 사람이야.


P 493 제 미모에는 처음부터 아랑곳하지 않았고, 제 태도, 당신에 대한 제 태도는 줄잡아 말하더라도 거의 무례한 수준이었죠. 당신에게 말을 할 때면 늘 고통을 주려고 했고요.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보세요. 제가 건방져서 좋아진 건가요?





롱본의 베냇 가는 딸만 다섯이다. 베냇 부인은 딸들을 시집 보내는 것이 인생과업이었다. 비어있던 네더필드 파크에 엄청난 재산을 가졌다는 미혼의 젊은 남자 빙리 씨가 세를 들어온다. 잘생기고 신사다웠으며 호감가는 인상의 빙리씨는 그의 친구 다아시 씨와 빙리 씨의 두 여동생과 함께 왔는데 다아시 씨는 세련되고 훤칠한 체구로 당당한 태도의 신사였으며 연 수입이 1만 파운드라는 소문에 많이들 관심을 가지지만 금새 오만한 태도로 인하여 까다로운 사람으로 전락하고 만다.



빙리 씨와 베냇 가의 맏딸인 제인은 금새 서로의 관심사가 비슷해서 누가봐도 잘 어울리는 커플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제인의 동생인 엘리자베스는 다아시 씨가 친구인 빙리에게 "참아 줄 만은 하군. 하지만 내 마음을 끌 정도로 예쁘지는 않아." 라고 한 말에서 엘리자는 그를 오만한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



집에 딸만 있어서 배넷 씨가 사망했을 경우 그의 재산은 한정 상속제에 의해 콜린스 씨에게 상속이 된다. 이 점에 콜린스 씨는 배넷 씨댁을 방문해서 자신이 성직자가 되었으며 딸들에게 보상을 강구하겠다고 한다. 제인은 빙리 씨와 결혼이 성사된 것처럼 배넷 부인은 말하자 콜린스 씨는 엘리자를 자신의 부인으로 점찍고 청혼을 한다. 사랑의 감정없이는 결혼할 수 없는 엘리자는 거절하고 콜린스의 상한 마음을 달래주던 엘리자의 친구인 샬럿이 그와 결혼을 하게 된다.



롱본의 근처 부대에 위컴이라는 새로운 군인이 왔는데 사교성도 좋고 잘생겼으며 좋은 인상을 풍기는 청년이었고 엘리자와 잘 어울렸다. 시내를 둘러보던 위컴과 엘리자는 우연히 마주친 다아시 씨와 어색한 만남이 신경쓰였던지 다아시 씨와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 다아시 씨의 부친이 유언으로 위컴 자신에게 부여한 성직권을 다아시 씨가 박탈한 이야기를 하자 엘리자는 점점 다아시 씨를 싫어하게 된다. 하지만 다아시 씨는 엘리자에게 청혼을 하는데....





<오만과 편견>은 1797년의 작품이다. 당시로서 여자가 글을 쓴다는 것은 매우 희귀하고 힘든 일이었다. 스스로 직업을 가질 수도 없고 결혼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존재가치가 생겼다. 이러한 것들이 <오만과 편견>속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배넷 부인의 인생과업이 딸들을 시집보내는 것이나 멋지고 돈이 많은 남자와의 결혼을 꿈꾸는 여자들, 아들이 없어서 한정상속(가문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토지와 집 등 재산을 남자에게 한정시켜 상속하도록 한 영국의 제도)을 해야하는 것 등이 그렇다.



당시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주면서도 제인 오스틴은 그야말로 오만과 편견에 대한 인상을 다아시와 엘리자베스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때로는 말을 아끼는 모습이나 자신의 너무나 솔직한 심정을 드러내는 것에서 사람들은 오만함을 느낄 수 있으며 그것이 상대를 알기도 전에 편견이 생기는 부작용을 또한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때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주면 기분이 좋고 무시를 하면 기분이 상해 선입견과 무지를 따랐던 엘리자베스를 통해 여성의 허영심을 보여준다. 나름 분별력이 있는 캐릭터였던 엘리자베스를 통해 나에 대한 상대의 관심이 이성을 마비시키는 모습을 여주인공을 통해 작가는 피력하고 있다.



이 작품이 200년 전의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잘 읽혔음에 놀라웠다. 가독성이 굉장히 좋았는데 앞서 읽은 지학사아르볼의 <프랑켄슈타인>의 번역자인 강수정님의 번역이었다. 이분의 번역이 좋아서 이분이 번역한 책만 골라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잘은 모르지만 고전의 번역은 원작의 의도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현대적 감성을 불어넣어야 하는 작업이 아닌가 싶은데 강수정님의 번역이 내게는 두 부분을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시대적 배경의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으면서 술술 읽었을 만큼 가독성이 좋아 책의 두께감을 느끼지 못했다.



<오만과 편견> 속에는 다양한 인물이 여럿 등장한다. 친구에게 청혼한 남자의 마음을 달래주다 눈이 맞은 샬럿이라는 캐릭터나 다아시의 여동생에게 온갖 정성을 쏟다 일이 틀어지자 다른 여성들을 공략하는 돈을 보고 신붓감을 정하는 위컴이라는 인물, 딸들의 결혼에 전전긍긍하고 오로지 그것에만 매달리는 배넷부인, 오만함을 뒤집어 쓰고도 끝끝내 사랑을 쟁취하는 다아시라는 인물이 그렇다. 베냇 가문의 다섯 딸들도 각각 차별화되는 캐릭터를 가지고 있으며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개성이 있어서 지루하지 않다.



<오만과 편견>을 읽으면서 나는 자주 웃었다, 너무 재미있어서. 책을 읽으면서 얻는 큰 이득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최고는 재미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아무리 재미있어도 재독은 쉽지 않다. 재독이 어려운 이유는 결말을 알고 있어 매달리지 않는 것이 아닐까? 이야기의 재미는 절정에서 느끼고 결말은 우리에게 도착지에 도착했을 때의 안정감을 준다. 미리 맛본 안정감에서도 신비감이 떨어지지만 절정에서 치솟은 궁금증은 재독에서는 다시 느끼지 못할 부분이다. 그러나 <오만과 편견> 같은 도서는 절정에서 주는 궁금증보다는 전개과정에서의 주인공들의 심리와 상황이 주는 재미들이 다시 재독으로 이끌 수 있는 매력을 지니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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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죽음 - 다문화의 대륙인가? 사라지는 세계인가?
더글러스 머리 지음, 유강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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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죽음 I 더글러스 머리 I 유강은 옮김 I 열린책들





지금 유럽은 자살하는 중이다.

아니면 적어도 그 지도자들은 자살을 선택했다.

유럽인들이 이 결정을 따르기로 선택할지는 

당연히 또 다른 문제다.




장 지글러의 <인간섬>을 읽고 이주자들의 목숨을 건 여정이 얼마나 험난하며 목숨을 걸고 도착한 곳마저도 사실 안락함과는 거리가 먼 현실에 참혹함을 느꼈었다. 더글러스 머리의 <유럽의 죽음>을 병렬독서하면 좀 더 난민들의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고 유럽이 어떤 상황인지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싶어 시작한 독서는 뜻하지 않은 이야기들과 만난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더글러스 머리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더글러스 머리는 19세기는 신경쇠약이라는 단어를 통해 개인적인 무기력과 피로를 설명했다면 현재는 번아웃이라는 단어로 바꿔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당사자가 헌신적으로 자신을 너무 많이 내주었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사람의 번아웃이 있다면 사회도 번아웃이 있지 않겠냐며 현재 유럽은 번아웃 상태라고 말한다. 왜?



노동력 부족으로 서유럽국가들이 이주자들을 받아들이면서 대규모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아마 저출산도 한 몫을 했을텐데. 이것을 시작으로 유럽은 현재 서유럽의 각 나라마다 이주자들로 미어터진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1950~60년대 서독, 스웨덴, 네덜란드, 벨기에는 노동력 공급의 간극을 매우기 위해 손님 노동자 유치계획을 세웠다. 산업 부문 미숙련 분야에서 노동력을 해소하는데 기여했고 그들은 곧 돌아갈 것이라 유럽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손님 노동자는 가족을 데려오고 자녀가 생기자 학교를 보내기 시작하며 자신의 고국과의 생활수준의 차이로 귀국하는 사람보다 그냥 눌러앉는 사람이 많게 되었다. 거기에 매일 밀려오는 엄청난 이민자들로 유럽은 주체하지 못하는 상태다.



현재 그리스 레스보스 섬의 수용시설인 모리아는 이주자들을 수용하고 있지만 포화상태이다. 식량 배급, 샤워시설, 안락한 잠자리, 화장실 등이 제대로 제공되지 않아 목숨을 걸고 이주해 온 이들의 삶이란 아직도 험난한 여정 중에 있는데 무조건적인 수용도 문제이지만 넘쳐나는 이주자들을 어떻게 해야할지 유럽은 난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거기에 부족한 주택시설과 주택을 지을 공간의 확보에도 문제가 있다. 그리고 저자 더글러스 머리가 <유럽의 죽음>을 통해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말하고 있는 공통된 문제가 있다. 바로 무슬림이야기다. 유럽 내의 무슬림의 숫자가 넘쳐나면서 문화의 변화, 인규비율, 가장 심각한 무슬림의 범죄에 주목해야한다고 말한다. 책의 거의 매 장마다 후기마저 더글러스 머리는 무슬림의 범죄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라고 외치며 곳곳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상황을 셀수 없이 많이 열거하고 있다. 강간사건부터 시작해서 이슬람에 대한 출판에 관계한 모든 이들은 살해당하고 폭행을 당하고 있다. 이른바 만평사건이라고 하며 출판계의 인사들이 줄지어 피해자가 되었지만 현재는 여성이 주로 범죄의 약자가 되고 있다.



동유럽처럼 확실한 태도를 취하지 못한 서유럽의 몇몇의 예지자들이 걱정하고 우려를 표현했으나 마치 인종주의자로 치부당하고 자유로움을 대표하는 유럽은 이제와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기도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다. 더글러스 머리는 지금이 이 사태는 마치 독일의 메르켈에게 잘못이 있는 것처럼 그녀에게 화살을 던진다. 더불어 이 문제를 해결할 나라도 독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유럽에 활기를 부여한 것은 정신이었고 종교였으며 철학이었고 예술이었는데 이제 그 토대를 잃어가고 있으며 인간에 대한 믿음도 상실했다고 한다. 서유럽은 그의 말대로 번아웃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모두 유럽이 자초한 일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이제 질문을 던진다.

유럽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고 한다. 유럽은 세계의 누구든 옮겨와서 자기 고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하는가? 세계 각지에서 전쟁을 피해 도망치는 모든 사람의 안식처가 되어야 하는가? 전 세계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우리 대륙에 들어오게 해서 더 나은 생활수준을 제공하는 게 유럽인들이 해야 할 일인가? 라고.



마지막으로 더글러스 머리는 유럽은 어느 누구도 돌려보낼 수 없었고 그리하여 원하는 사람은 아무나 열린 문으로 성큼성큼 들어올 수 있었다라고 하면서도 유럽이 애초에 누구를 위한 곳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가야한다고 말한다. 또한 이주 사태가 기본적으로 유럽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문제라고 말한다. 이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도 유럽 중심적 시각을 드러낸다는 식이다. 하지만 유럽인들이 유럽 중심적 시각이나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될 이유는 없다고 말한다.



무슬림의 범죄 이야기가 넘쳐나는 글을 읽으면서 일반화의 오류가 생각이 났다. 물론 IS가 관계된 사건은 명시를 했지만 번역의 탓인지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마치 무슬림이 범죄의 주체인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머릿 속을 맴돌았다. 무슬림의 범죄사건을 이렇게 많이 나열해야할 이유가 있었을까? 사건일지를 보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고 유럽의 문화와 상황을 표현하는 단어나 표현들을 모르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상당했다. 저자는 유럽 각국 대중이 직접 삶으로 경험하는 증거를 믿지 않게 만들려는 지속적인 시도가 존재하고 이 책에 담긴 요지 하나는 이런 겉치레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도 영국은 지난날의 유럽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냥 자취를 감출 것이고 전혀 새로운 문제들로 가득한 세계가 태어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저자의 말에서 이중적인 의도를 받는 것은 나만의 오해인가? 장지글러의 <인간섬>을 읽으며 난민의 상황을 안타깝게만 여겼던 것에 반해 현재 이주자들의 처우와 시스템 뒷편에 엄청난 문제로 곪고 있었던 유럽의 민낯을 만난 <유럽의 죽음>. 서유럽의 현재 상황은 그야말로 번아웃이었다. 이런 번아웃을 해결할 새로운 방안을 제시하고 이야기를 끝냈다면 독자로서 읽는 보람을 느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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