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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 ㅣ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2020년 4월
평점 :
좀머 씨 이야기 I 파트리크 쥐스킨트 I 유혜자 옮김 I 열린책들
그러니 제발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
나는,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나무타기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나이에 있었던 일을 추억한다. 나는 날 수도 있었을거라고 생각하고 같은 학급에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있었으며 피아노를 배워야했다. 그리고 동네에 어디서 왔는지, 이름도 모르고, 왜 그러는지도 모르는 아침부터 밤까지 늘 걷기만 하는 좀머 씨가 있었다. 하루는 아버지와 경마장에 다녀 오는 길에 갑자기 주위는 어두워졌고 돌풍이 휘몰아치며 굵은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차를 옆에 세우고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는데 슬슬 빗방울이 얇아지고 이슬비가 내릴 때였다. 그때 좀머 씨를 보았고 아버지는 그에게 차에 타기를 종용했지만 좀머 씨는 끝내 거절했다.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좀머 씨는 폐쇄 공포증을 앓고 있고 온 몸이 떨려서 의자에 앉아 있지도 못해 하루종일 걷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 자전거를 배웠고 시계도 없이 집에서 출발해서 늘 간신히 미스 풍켈 선생님 댁에 도착한다. 그런데 그날은 하르트라웁 박사님 댁의 테리어 한마리가 바퀴달린 것만 보면 짖어대 꼼짝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계속해서 자동차와 행인들을 만나 지각하게 되었는데 미스 풍켈 선생님은 화가 많이 나셨고 연습을 하지 않은 것에 무지 화가 났으며 말을 할 때 침이 내 목덜미로 튀었고 손수건으로 코를 풀었는데 재채기를 할 때 코털에 붙었다가, 그곳을 훔칠 때 집게 손가락으로 옮겨 붙어 건반에 하필 내가 쳐야 하는 그 자리에 녹황색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코딱지가.....!
미스 풍켈 선생님에게 혼나고 짐을 싸서 나온 '나'는 세상 전체가 불공정하고 포악스럽고 비열한 덩어리일 뿐 아무것도 아니라는 분노에 찬 자각으로 그 사람들이랑 어울려 살지 않고 이 세상과 작별을 고하리라 마음 먹는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수를 하고자 자신의 죽음을 계획하지만 '나'는 어떤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의 근원지는 좀머 씨의 호두나무 지팡이 소리였고 곧 아저씨를 살필 수 있었다. 아저씨는 어떤 소리를 내고 있었다, 신음에 가까운.
내가 어째서 그렇게 오랫동안 또 그렇게 철저하게
침묵을 지킬 수 있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두려움이나 죄책감 혹은 양심의 가책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나무 위에서 들었던 그 신음 소리와 빗속을 걸어갈 때
떨리는 입술과 간청하는 듯하던
아저씨의 말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좀머 씨 이야기>는 한 소년의 아름다운 유년시절의 이야기이다. 마치 자신이 날아다닐 수 있었을거란 믿음을 지닌 것이나 좋아하는 여자친구와의 하교길에 대한 설레임으로 이것저것 준비하는 모습, 그리고 너무나 웃기지만 속상해지는 선생님의 코딱지 사건 등은 마치 나라를 불문하고 어린시절 한 번쯤은 겪는 성장통같은 이야기들이어서 흐믓하게, 때로는 박장대소하며, 때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읽었다.
하지만 우리의 유년시절을 돌아보면 한 번쯤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슬픈 기억이나 힘들었던 일들, 또한 누구와의 절절한 약속지키기 등의 비밀스런 일들이 하나 쯤은 있다. <좀머 씨 이야기> 속 '나'도 이상스레 보이는 좀머 씨와 나와의 비밀같은, 어느 누구도 모를 일화를 간직한다. 그것은 어찌보면 정말 좀머 씨를 배려하기 위한 일이기도 했고 어찌보면 어린 '나'로서는 어찌할 바를 몰랐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당시의 사람들에게 특이해 보이는 좀머 씨는 누군가 도움을 주려고 하는 것조차 원치 않으며 오히려 자신이 어찌되든 상관말아달라는 태도였고 그의 걷는 모습이 주는 느낌은 어느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그것이었다. 그의 걷기는 생존기였다.
여기 죽음으로부터 도망쳐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걸었던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무엇때문에 투쟁에 가깝도록 걸었던 것일까? 공포증으로부터? 공간으로부터? 아니면 고통으로부터?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지만 '나'는 그의 선택을 지켜보았고 이제야 그 선택에 대해 추억한다. 그리고 어느 누구에게도 좀머 씨의 선택에 대해 말하지 않고 침묵한다. 두려움이나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고 한다. 간청하는 듯한 그의 말 때문이었다고 한다. 소설 속 '나'가 아닌 독자인 '나'는 그의 선택을 존중할 수 있었을까? 그의 간청어린 말에도 그를 그냥 놔두었을까? 한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선택권이 온전히 한 인간의 것이라면 나는 그를 말릴 수 없었을까? 오랜 시간 만들어진 나의 가치관은 막상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으로 표출될 것인가? 답은 없고 질문만 쏟아진다.
짧지만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그 많은 생각들을 결정 짓기에는 너무 무거운 주제였던 <좀머 씨 이야기>. 좀머씨의 그냥 좀 놔두라는 말이 자꾸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