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9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근래 들어 문학서적들이 재밌다. 그것도 주로 서양의 근현대를 다루고 있는 책들이. 작년에 <~~부인>이라는 책들을 읽고 이번에 손에 든 책이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이다. 20여 년 전 군에 있을 때 읽었었지만 줄거리조차 기억 나지 않기에 다시 읽기로 했다.

39세의 독신녀 폴, 그녀이 몇 살 연상 애인 로제, 그리고 25세의 미남 청년 시몽. 로제와 폴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지만 로제는 자유로운 생활을 즐긴다. 여친인 폴 몰래 다른 여자들을 만나기도 하고 주말을 아예 그녀들과 즐기기도 했다. 이에 비해 폴은 고독한 삶을 이어가야만 했다. 로제를 사랑하지만 자신을 외롭게 내버려두는 그의 행동에 좌절하고 가슴 아파한다. 이때 등장하여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이가 바로 시몽이다. 로제의 빈 자리를 찾아 든 시몽은 폴의 가슴 한 켠을 적셔간다. 이렇게 29세 청년과 39살 독신녀의 사랑이 시작되지만 그녀의 가슴에는 여전히 로제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다.

50년대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지만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기에 그다지 낯설게 다가오지 않는다. 대신 폴의 마음과 시몽의 마음 속에서 독자인 나는 마음이 아팠다. 이 불편한 마음은 하루가 지난 오늘도 내내 이어져 마음을 짖누르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의 일이 아닌 남의, 소설일 뿐인 이글에 기분이 별로다.

곁에 없는 로제를 그리워하면서도 자신에게 적극적인 시몽을 받아들여 동거하는 폴은 대체 어떤 심리상태인인지, 그런 폴에게서 사랑을 구하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며 가슴 아파하는 시몽의 불안함이 내게 전해지는 건 왜인지 내내 궁금해하며 어려게 책장을 넘겼다. 아울러 결국엔 변심하여, 자신에게 사과한 원래 남친에게 돌아간 폴에게 적잖이 화가 치민다. 마치 내가 폴인양. 이러려고 읽은 책은 아닌데...ㅎㅎ

겨우 150쪽 남짓한 짧은 소설이지만 주인공의 심리에 동화된 나는 그 불안함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나보다. 아내가 요즘 무슨 안좋은 일 있냐며 묻기까지 한다. 시몽의 실연과 폴과 로제의 재결합이 대체 뭐라고...

참! 50년대 소설이라 그런지 등장인물들 간의 대화보다 작가의 개입(전지적 작가 시점)에 의한 심리묘사가 많다 그러다보니 마치 심리학 도서를 읽는 느낌마저 든다. 세 인물의 심리를 작가가 친절하게 잘 설명해주고 있어서 읽기에는 수월하다. 요즘의 문학과는 제법 생경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얼른 독후감 마무리짓고 새로운 책으로 넘어가야겠다. 이제는 폴과 시몽을 잊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금오신화 우리고전 다시읽기 11
김시습 지음, 구인환 엮음 / 신원문화사 / 200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좋은 책인데, 나름 이름 있는 출판사인데... 오타가 너무 많다. 일찍이 이런 책을 보지 못했다. 아쉽다.

고2 시절 읽었던 책. 역시나 지금 읽어도 그 애절함이 전해진다. 특히 `만복사저포기`나 `이생규장전`에서는. 성리학이 뿌리내린 시절 유학자인 김시습이 이런 류의 글을 쓸 수 있었다는 자체가 재밌다. 내가 갖지 못한 그의 상상력에 존경을 표한다.

그러나 나이 좀 먹었다고 조금 배웠다고 글이 조금 다르게 읽히기도 한다. 먼저 대체적으로 남자들이 중심에 있다. 능력 있는 남자는 죽어서도 저승에서 관리가 된다. 이에 비해 여자 주인공들은 보조적이다. 둘째, 철저히 지배층 중심이며 유교적 논리가 우위에 있다. 셋째, 불교과 도교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등등.

아무튼 재밌다. 어린 친구들에게 권장한다. 가급적 다른 출판사의 책을 읽으시길.

아래 사진은 부여군 무량사에 있는 김시습 초상화이다. 재작년 8월 비내리던 어느날 스님들 몰래 찍었다는 ㅋ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녀귀신 - 조선시대 여인의 한과 복수 키워드 한국문화 6
최기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독교인들에게 다소 불경스런 제목일 수 있으나 실상은 우리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 하나의 키워드로서 `처녀귀신`은 의미가 있다. 그저 공포의 대상으로만 봐오던 처녀귀신이 실상은 보호과 관심을 받지 못한 불쌍한 존재임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된다.

왜 처녀가 귀신이 될 수밖에 없었을까? 이는 귀신이 나오게 되는 핵심 요인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에서 가장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미약한 존재가 누구인지 안다면 쉽게 그 답은 나온다. 즉 결혼하지 못한 신분이 낮은 처녀들. 어디에도 하소연 할 수 없는 그들은 위협과 협박의 순간에 자살하게 된다. 현실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으며, 그들은 귀신이 되어서야 비로소 목소리를 내게 된다. `전설의 고향`을 보았을 때 들은 바로 그 귀신 목소리, 이른바 귀곡성이다. 귀신들의 흐느끼는 소리는 보는 이에게는 공포감을 주지만 실상 그녀들은 자신의 원한을 이렇게라도 표현한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들을 귀신이 되게 만든 이들이 대부분 남자들이고, 그들의 원한을 풀어준 이들은 다 남자들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대체로 유명한 관료들이 귀신의 이야기를 듣고 해결사 노릇을 하게 된다.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양반 사대부들이 야담류의 독자였으므로 그들의 구미에 맞게 저자가 그렇게 썼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이 책이 현실의 우리에게 갖는 함의는 무엇일가? 그것은 바로 사회의 약자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다. 처녀귀신 이야기는 공포소설인 듯하지만 결국에는 명관료에 의해 불의가 응징당하고 인과응보적 결과를 낳는다. 이를 통해 비록 상상과 문학 속이지만 사회 정의를 실현한다. 후대의 우리는 재미로 읽을 수도 있는 이런 이야기를 남의 것처럼 볼 수 없다. 우리 주위에는 처녀귀신과 같은 존재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가령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이 그런 존재 아니던가. 외국인노동자 문제도 그렇고. 이제서야 서서히 문학의 가치를 느낀다.

이 책의 단점은 저자의 글쓰기 태도인 듯하다. 논문에서나 볼 수 있는 표현들이 제법 많다. 독해 능력이 부족한 나로서는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어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했다. 좋은 책인데 아쉽다.

사족 - 처녀귀신이란 주제로 글쓰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재밌다. 세상에는 글쓰기할 수 있는 주제가 얼마나 많단 얘기인가. 무궁무진한 글쓰기 보따리가 있음에 난 책을 놓을 수 없구나. ㅎㅎ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리엔탈리즘의 역사 살림지식총서 15
정진농 지음 / 살림 / 200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리엔탈리즘이란 간단히 말해 서양이 동양을 바라보는 인식 체계 모두를 일컫는다.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현실에서 이 말은 주로 부정적으로 인식되었고 내게도 그리 작용했다. 여전히 서구인들의 동양 인식에 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제국주의가 완전히 소멸되지 못한 지금에까지 부정적 오리엔탈리즘이 남아 있다고 본다. 이런 의문에서 이 책을 펼쳤다.

저자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고 싶어했다. 그는 이 책에서 사이드의 협소하고 부정적인 인식을 넘어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오리엔탈리즘을 제안했다. `포스트오리엔탈리즘`이라는. 저자는 사이드가 서양의 단면만 보고 평을 내렸기에 부당하다고 보며, 반대로 서구의 긍정적 동양읽기를 예로 제시했다. 서양 근대 지식인들의 활동과 동양 종교 유행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긍정적인 면을 간과해서는 안되며 앞으로도 이런 분위기는 지속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정말 저자의 바람처럼 서구의 부정적 오리엔탈리즘은 극복될 수 있을까? 나는 비관적으로 본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다. 사람에 대한 신뢰가 약해서다. 동양이 세계의 헤게모니를 쥔다면 모를까. 당분간은 쉽지 않은 일이다.

문고본이라 빨리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다만 사전 지식이 있어야만 한다. 책의 앞 부분은 이론에 대한 설명이라 쉽게 넘어가질 않는다. 물론 뒷장은 휘리릭~~ 할 수 있다. 대학생 이상에게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법이 정치와 무관하다고 믿는 순진한 사람은 없다. 신체형(몸에 가하는 형벌)은 사법의 영역이지만 정치성을 띤다. 특히 반역 사건을 조사하는 추국은 말할 것도 없다. 반역의 당위성 여부를 떠나 아무리 작은 규모의 반역이라도 그 반역 사건을 다루면서 체제 권력은 자신을 과시한다. 중죄를 처벌하는 데 왕권의 행사는 법의 시행에서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다. 처형을 결정하든 사면 또는 감형하든 마찬가지이다. 처벌 속에는 항상 한 가지 몫, 군주의 몫이 있어야 한다. 상처받는 군주권을 회복하는 의식儀式, 그리고 본질적 불균형과 우월성을 확인하는 의식이다."
오항녕, <유성룡인가 정철인가>, 너머북스, 2015, 252쪽에서 인용.

역사책을 읽자니 나는 엉뚱하게 조선과 현재의 한국이, 그리고 선조와 박그네가 오버랩된다. 선조는 역모사건인 정여립의 난을 조사하며 정여립과 친했던 이발까지 역어 처벌한다. 그는 곤장에 맞아 죽는 장살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선조는 역모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이발의 노모(82세)와 어린 아들(8세)를 잡아와 고문을 가한다. 결국 노모와 어린 아들은 죽게 되는 데, 당시의 형법으로 이는 불법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 게 되는 걸까. 결국 군주권 회복을 위해 선조가 임의로 권력을 행사한 때문이다. 그는 이 고문과 처벌을 통해 군주권의 우월성을 확인하고 널리 알린 셈이다.

 

우리의 그네씨는 어떨까? 왕조시대 임금과 무엇이 다를 바 있는가? 시위대를 IS에 비유하는가 하더니 급기야 법무부장관은 법이 없는데도 복면시위하면 엄중히 처벌하겠단다. 경찰은 이 시위대를 가만두지 않겠다며 연일 엄포다. 과연 이들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나를 반대하면 국민이 아닌가? 법무장관과 경철청장은 권력을 위해 봉사하는 시녀인가? 반대하는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처사다. 반대를 거부하는 사회에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 어렵다. 이것이 작금의 한국의 현실이다. 권력에 대한 인식이 조선시대와 전혀 달라진 바 없는 그런 현실말이다.

오늘은 왠일인지 중앙일보에서 그네씨를 칼럼에서 비판하고 있다. 미국 주간지에서도 그러고. 세상 참 우습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