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금요일이다.

몸은 비록 직장에 매여 있지만.

 

오늘 행복할 수 있는 것은

가진 것은 비록 적지만 그 적은 돈으로 책을 지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새책과 헌책을 골고루 섞어 샀다.

수필, 역사, 종교, 소설 등 종류도 다양히.

 

이제 가진 포인트를 다 소진하여 책 사는 데 약간의 어려움(?)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어떠랴!

그간 모아둔 책도 많고 없으면 없는대로 조금씩 구매하면 그만인 것을.

 

언제까지 내가 이 행복감을 누리며 살지 모르겠지만,

눈이 멀어 스스로 읽지 못하는 그날까지 읽는 즐거움을 누리며 살고 싶다.

 

젊어서는 내가 진정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살았다.

나이 먹으며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분야를 찾게 되니 그쪽에 더 집중하고 즐기는 것 같다.

나를 이것을 '행복'이라 부른다.

 

읽고 쓰는 재미로 요즘 내가 산다.

봄날은 내게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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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의 취지에는 맞지 않지만 그래도 참다참다 다분히 정치적인 글 하나를 올립니다. 이런 글을 원치 않으시면 그냥 나가시면 됩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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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 사전에서 검색해보면 '안보安保'를 '편안히 보전함'으로 정의하고 있다. 단어가 가지는 원래 의미가 이렇다는 뜻이다. 이를 조금만 더 확대 해석하면 안보는 국가나 국민이 편안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취지의 정치적 함의도 지닌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떤까? 흔히 '안보'라 하면 '북한으로부터의 안전'이라는 뜻으로만 전용해서 쓰지 않는가? 그것도 보수 우익이 마치 자신들이 점유한양 급할 때마다 가져다 붙이는 용어. 그래서 진보나 좌파는 안보 개념이 없는 사람들로 매도되기 일쑤다. 과연 그럴까?

 

안보가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국민과 국가를 지키자는 의미로 사용하는 데 반대할 이는 없는 것이다. 북한의 위협은 현실이고 또한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들의 도발은 계속되어 왔으니까. 그런데 이 안보만이 진정한 안보일까? 이번 세월호 사태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청와대 안보실장 김장수 씨는 말했다. 세월호 사태, 즉 국가 재난은 국가안보...실 소관이 아니라고. 이 말의 참뜻은 국가안보는 오로지 북한의 위협에만 해당된다는 뜻 아닐까? 국민을 편안히 보전하는 안보는 국가안보에 해당되지 않는다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안보의 뜻을 그들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분이 바로 국방부 장관과 국회의원을 거쳐 그네씨 바로 밑에서 근무하시는 장관급 안보실장님이시다. 이것이 한국의 고위 공직자의 의식 수준이다. 국민의 현실적 안위보다 북한의 위협에 대처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국민 없는 안보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내 나라 국민을 지키지 못하는 안보라면 애당초 이 말은 폐기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적어도 사전적 의미는 버려야 할 것이다.

세월호 사태를 맞아 이제 우리의 '안보'의식에 전환점을 마련해야 한다. 북한의 위협만이 아니라 국민의 안위를 위협하는 모든 것을 '안보'로 규정해야 한다. 이것이 국민을 편안히 보전하자는 안보 원래의 의미를 되살리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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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장화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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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읽는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이다. 나는 그녀의 담백한 글쓰기를 좋아했다. 비록 그녀가 그린 일본의 일상 풍경이 우리와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사람살이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럭저럭 읽을만한 주제들을 잘 선정해 책을 쓴 것 같다. 그녀의 소설에 평범한 주인공들은 없었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어쩌면 그래서 내게 더 잘 읽혔는지 모르겠다.

 

  이 책은 10년차 부부의 일상을 그린다. 그것도 아이가 없는 부부다. 언뜻 보기에도 아이 없는 10년의 부부 생활을 무료하고 심지어 지친듯한 기색까지 보인다. 시부모를 비롯해 주위 사람들에게 친절한 여주인공 히와코. 무심하고 주위와 단절된 듯한 그녀의 남편 쇼조. 이들 부부는 언뜬 행복한 가족으로 보이지만(그렇다고 큰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삶에 조금은 지친 히와코는 생각한다. "소죠가 곁에 없을 때 더 그립다"고. 이 말은 결국 곁에 있으면 그다지 그립지 않다는 뜻이 된다.

 

 아이 없는 결혼 10년 차의 모습은 무료하고 답답하기 조차하다. 책 내용도 그렇지만 독자로서도 어느 정도 상상이 되는 부분이었다. 이 책은 부부의 생활을 그린 것이지 불륜을 묘사한 것이 아니어서 에로스적 사랑이나 격정적 멜로같은 내용은 없다. 10년차 부부의 일상과 정신을 그리고 있어서인지 에쿠니 특유의 담백하고 깔끔한 글쓰기는 나타나지만 내용상으로는 그저 덤덤히 읽히는 수준이 되고 말았다. <냉정과 열정사이>, <도쿄타워>, <웨하스 의자> 등을 상상하면 낙담할 수도 있겠다.

 

 부부의 생활은 많은 부분에서 겉돈다. 히와코는 아내로서 충실하지만 쇼조는 무심한 성격 그대로 일관한다. 이 둘은 물과 기름처럼 잘 섞이진 않지만 서로에 대한 작은 관심이라는 끈은 놓지 않고 산다. 그래서일까? 히와코는 헤어지는 상상만하지 실천에 옮길 생각은 없다. 오히려 쇼조의 무심한 성격에 긍정적인 점을 찾고 늘 웃어준다. 쇼조 역시 그녀의 생활에 우호적이고 늘 배려한다. 이는 아이가 있는 부부일지라고 경험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오히려 이보다 못한 부부도 많으니 말이다.

 

  이 소설이 내게 무어라 말하는 바는 적었다. 내용상으로는 그간 읽었던 에쿠니의 소설 중 제일 밋밋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주제가 주제였던만큼 '부부란 무엇인가?'하는 자문을 하게 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었다. 서로 살을 맞대며 사는, 두 아이를 기르며 사는, 정신적.종교적으로 의지하며 사는, 첫사랑은 식었어도 서로의 존재 자체에 만족하며 사는 우리 부부는 잘 살고 있는지 되묻게 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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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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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6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책. 정독을 하며 읽자니 다루고픈 주제가 너무 많다. 저자 정민 교수는 정약용과 황상의 만남을 대주제로 하고 그 속에 두 인물을 비롯해 주변인들의 다양한 발걸음을 추적하였는데, 그들을 다루는 소재가 편지.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가 소통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현실에서 구시대의 색채가 물씬 풍기는 소통의 수단이 나는 왜 그리 아름다워 보이는 걸까? <미쳐야 미친다>이래 정민 교수와 주인공들에 대한 호감도가 높은 상태에서 출발한 이 책. 감동의 물결 속에 나를 던져 본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의 삶. 그렇기에 그 속에는 채우고 가꿔나가야 할 내용들이 많다. 지식은 자신의 노력으로 필요한 만큼 채울 수 있지만, 타인과의 만남은 순간적 재치와 무조건적인 노력만으로 채우기 힘들다. 좋은 만남을 위해 나를 가꾸고 준비해야 함은 물론 상대의 장점을 배우기 위한 노력도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세상에는 많은 만남들이 있지만 그 속내를 자세히 살펴보면 만남이라기보다 마주침이 더 많은 것이다. 곁눈질하거나 흉금을 털어 놓지 않는 관계에서 좋은 만남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만남에는 이처럼 마음의 교류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여기 다산 정약용과 치원 황상의 만남을 살펴보자. 저자는 이들의 만남을 맛남 만남이라 평했다.

 

정약용은 신유박해(1801)로 인해 형들과 함께 유배의 길을 떠난다. 그가 당도한 곳은 땅 끝에 위치한 강진. 멀리 한성에서 이곳으로 누군가 유배를 온다고 하니 사람들이 다 피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아마도 당시 강진 사람들은 무슨 괴물이라도 오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정약용은 이런 상황에서도 묵묵히 학문에 전념하고 자신에게 집중한다. 물론 마음 한켠에는 두고 온 가족에 대한 미안함 가득했다(이는 그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난다). 오랫동안 정약용을 지켜보던 아전들이 서서히 경계의 눈초리를 풀고 제 자식들을 가르쳐 주십사하고 나타났다. 강진이라는 궁벽한 시골 마을에 제대로 학문적 기초를 닦은 이가 얼마나 되었겠는가. 큰 기대를 않던 정약용에게 한 더벅머리 소년이 묻는다.

 

선생님! 제게 세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둔하고, 둘째는 앞뒤가 꼭 막혔으며, 셋째는 답답합니다. 저 같은 아이도 정말 공부할 수 있나요?”

그렇구나. 내 이야기를 좀 들어보렴. 배우는 사람은 보통 세 가지 큰 문제가 있다. 너는 그 세 가지 중 하나도 없구나.”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민첩하게 금세 외우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을 가르치면 한 번만 읽고 바로 외우지. 정작 문제는 제 머리를 믿고 대충 소홀히 넘어가는 데 있다.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하지. 둘째, 예리하게 글을 잘 짓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질문의 의도와 문제의 핵심을 금새 파악해낸다. 바로 알아듣고 글을 빨리 짓는 것은 좋은데, 다만 재주를 못 이겨 들떠 날리는 게 문제다. 자꾸 튀려고만 하고, 진중하고 듬직한 맛이 없다. 셋째, 깨달음이 재빠른 것이다. 대번에 깨닫지만 투철하지 않고 대충 하고 마니까 오래가지 못한다.

내 생각을 말해줄까? 공부는 꼭 너 같은 사람이 해야 한다. 둔하다고 했지? 송곳은 구멍을 쉬 뚫어도 곧 다시 막히고 만다. 둔탁한 끝으로는 구멍을 뚫기가 쉽지 않지만, 계속 들이파면 구멍이 뚫리게 되지. 뚫기가 어려워 그렇지 한번 구멍이 뻥 뚫리면 절대로 막히는 법이 없다. 앞뒤가 꼭 막혔다고? 융통성이 없다고 했지? 여름 장마철의 봇물을 보렴. 막힌 물은 답답하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를 빙빙 돈다. 그러다가 농부가 삽을 들어 막힌 봇물을 터뜨리면 그 성대한 흐름을 아무도 막을 수가 없단다. 얼마나 통쾌하냐? 어근버근 답답하다고 했지? 처음에는 누구나 공부가 익지 않아 힘들고 버벅거리고, 들쭉날쭉하게 마련이다. 그럴수록 꾸준히 연마하면 나중에는 튀어나와 울퉁불퉁하던 것이 반질반질 반반해졋 마침내 반짝반짝 빛나게 된다. 구멍을 어떻게 뚫어야 할까? 부지런히 하면 된다. 막힌 것을 틔우는 것은? 부지런히 하면 된다. 연마하는 것은 어찌해야 하지? 부지런히 하면 된다. 어찌해야 부지런히 할 수 있겠니?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으면 된다. 그렇게 할 수 있겠지? 어기지 않고 할 수 있겠지?” (본문 34~36쪽에서)

 

제법 긴 글을 인용해보았다. 질문을 한 소년이 바로 당시 15세의 황상이다. 그 소년에게 정약용은 삼근계(三勤戒), 즉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히 공부할 것은 당부한다. 황상은 이때부터 삶이 바뀌게 된다. 시골 아전의 아들이었던 그는 정약용과의 만남이 없었다면 가업을 이어받아 살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그는 스승의 지도아래 배우고 익힌 것을 무한히 반복하는 삶을 살아간다. 정약용 이런 제자를 가르치며 유배지에서의 곤난함을 극복해간다. 이후 두 사람은 마치 바늘과 실 같은 인연을 이어가며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로서 살아간다. 당시 강진에는 정약용 문하에 여러 제자들이 있었지만 다산의 해배(解配) 후까지 그 연을 이어가는 사람은 황상 뿐이었다. 대체 그는 왜 그랬을까?

 

황상은 스승 정약용을 만남으로써 자신 안에 있던 능력의 싹 같은 것을 발견한다. 특히 그는 시 분야에 탁월함을 보이게 된다. 스승의 지독한(정약용은 상당히 깐깐하고 어려웠던 스승이었던 듯하다) 조련에도 게을리 행치 않고 수 십 년간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 또한 스승이 꿈꾸던 유학자로서의 이상적 삶을 그대로 실천하며 산속(일속산방)에서 살아간다. 이런 그에게 다산은 오래 전부터 과거 응시를 권하지만 듣지 않는다. 그에게는 그런 꿈이 없었기 때문이다. 외진 곳에서 농사지으며 책 읽고 시를 짓는 삶에 그는 만족해한다. 이런 젲의 삶에 스승도 결국 만족해 한다. 오히려 다산이 과거를 치지 않았으면 하는 제자들은 결국 다산을 배신해가면서까지 응시하지만 줄줄이 낙방의 고배를 마신다.

 

황상에게 놀라운 점은 나이가 들어도 스승이 그에게 남긴 삼근계의 명령을 놓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려운 가정 사정에도 서책을 놓지 않고 시를 지으며 스승의 분부를 십계명처럼 지킨다. 이런 그의 정성은 황상의 말년에 그를 꽃 피게 한다. 정약용의 아들들과의 교류, 김정희 형제들과의 교류 등을 통해 강진 촌구석의 황상은 중앙 문단의 명사로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정약용과의 만남과 황상의 지독한 노력(삼근계 실천)의 결과물이다. 여기에 대비해 보잘 것 없이 쇠락해진 스승을 배신하며 다른 이들에게 붙은 제자들과 그 말년의 몰락은 좋은 비교를 이룬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세 차례 눈시울을 붉혔다. 위의 삼근계를 받는 장면에서, 정약용 해배 후 10년이 흘러 스승과 제자의 만남에서, 정약용 사후 노구(老軀)를 이끌고 강진에서 마재(현 남양주 소재)까지 걸어가 정약용의 아들들과 재회하는 모습은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드라마다. 특히 그토록 그리던 제자와의 재회는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죽음을 목전에 둔 노스승마저 일어나게 한다. 스승께 울며 절하고 그의 손을 잡는 제자, 그 제자를 위해 자신의 일부를 기꺼이 내주는 스승. 눈물겹게 아름다운 만남이다. 나를 알아주고 나를 위해 애써주는 사람을 위한 헌신적인 자세는 인간사 최고의 장면이 아닐까 싶다.

 

정약용과 황상의 만남을 둘의 관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당대 유명 인사들에게까지 연쇄 파급효과를 낳는다. 혜장 스님, 초의 선사, 정양전, 권돈인, 허련, 추사 형제들 등 당대의 쟁쟁한 인사들이 만나고 헤어진다. 이는 인위적인 만남이라기보다 다산과 황사의 만남에서 출발해 그 아름다운 향기가 다른 이에게 파급된 결과다. 향기란 바로 . 시를 통해 이야기 하고 시를 통해 삶을 즐기는 그들은 결국 시를 통해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간다. 그리하여 강진과 경기의 먼 거리를 오가며 정을 나누고 의리를 쌓게 된다. 여기에 편지의 역할 또한 빼놓을 수 없겠다. 지금은 거의 폐기물 단계에 있는 손편지는 쓰는 이의 절절한 마음과 정이 녹아 있으니 받는 이 역시 그 마음이 움직일 수밖에 없다. 덧붙여 그들이 시를 통해 교유함으로써 마음은 더 넉넉해지게 된다.

 

~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만남인가. 스승은 제자를 사랑하고 제자는 평생 스승의 가르침을 놓지 않고 실천하며, 이 만남은 대를 이어 지속되니. 서로를 아끼지 못해 안달이 나는 모습은 주위가 초라한 나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사대부 양반들과 중인 아전의 신분을 초월한 교류 역시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강고한 신분제가 유지되던 당시에 를 통한 이 만남이 정말 r자신에게 매몰되어 주위를 돌아보지 못한지 오래다. 벗들이 떠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않은 게다. 새로운 만남도 많지만 계속 이어지지 않는 것은 나만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다산과 황상의 이야기를 통해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짧은 지면에 다산의 새로운 모습과 황상의 일생을 보여줄 수는 없다. 다만 나는 이 독후감을 통해 스승의 제자의 훌륭한 만남이 이후 인생에 얼마나 큰 파급을 미치는 말하고 싶을 뿐이다. 아마도 교학상장(敎學相長)이 최고로 구현된 모습이 아닐까 싶다.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읽으며 나도 그처럼 가슴이 따뜻한 스승이 되어보자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정민 교수의 <삶을 바꾼 만남>을 읽고서는 그런 스승을 넘어 제자들과 인생의 교류를 해야 한다는 느낌이 든다. 다시 말하지만 나만 바라본 삶에 대한 본질적 전환이 요구되는 것이다.

 

두꺼운 책이지만 손에서 떼지 못하고 조금조금이라도 읽으며 일주일을 보냈다. 마음에 찡한 감동을 넘어 깊은 울림은 주는 이 책은 근래 읽은 책 가운데 최고가 아닐까 싶다. 사제의 정을 넘어 인간적 만남과 교류를 원하는 이들은 반드시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이 봄에 감동을 느끼고 싶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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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읽는 얇은 동화책에서 때로 많은 것을 배운다. 5~600페이지가 넘는 두터운 책보다 깊은 감동과 찡한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얼마전에 읽은 <행복한 왕자>의 경우가 그렇다. 사실 이 동화의 저자 오스카와일드는 <행복한 왕자>를 통해 약한 자와 가난한 자를 배려하지 못하는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영국사회를 풍자적으 로 그린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작금의 한국 현실에 비춰 다른 시각으로 읽게 되었다.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되는 모 후보의 아들이 한 발언으로 한때 사회가 시끄럽기도 했다. 그 발언의 핵심은 대통령에게 소리지르고 국무총리에게 물병 던지는 미개한 국민들이 미개한 나라를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어쩌면 그가 자라온 환경에서 보자면 그렇게도 보일 것이다. 다 해주겠다는 데 왜 저리 미친짓하는 건지 그는 이해 못할 것이다. 그런 경험도 없었고 엘리트 집안의 자제로 부족함 없이 자라왔을테니. 그런 그에게 돌을 던질 생각은 없다. 다만 그런 자식을 키운 아버지가 과연 한 나라의 수도를 책임질 수장으로서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들따름이다. 아들과 시민은 별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없이 이성적으로 정신차리라는 이 땅의 보수 권력층, 그리고 그의 아들들. 아직 파이를 나눌 상황이 못되니 파이를 더 키워야 한다는 성장주의자들. 여기에 빌붙은 생각없는 듣보잡들. 다들 한패거리 아닌가. <행복한 왕자>를 읽자니 내 안으로 더운 눈물이 흐른다. 우리에게 이런 지도자는 없는가. 종교적으로야 예수님이 부처님이 계시지만 현실의 우리에게 위안을 줄 리더는 진정 없는가 말이다.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인 그 속에서 공주인양 하는 리더는 필요 없다. 그가 아무리 말해도 듣는 이 없는데 어찌 그에게 기대하겠는가. 기댈 어깨가 필요한 이들을 감싸 안는 그런 지도자가 필요하다. 마음이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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