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것이 쉬는 것이다 - 옛길박물관이 추천하는 걷고 싶은 우리 길
김산환 글 사진 / 실천문학사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여행은 휴식의 다른 이름이다. 여행을 통해 육신의 묵은 때를 벗겨내고 정신을 이완시켜 주는 행위의 일종이다. 하지만 급격한 문명화와 현대화로 인해 여행의 본질이 오도되는 경향이 짙다. 세련되고 최신 시설을 갖춘 위락시설이 구비된 휴양지를 선호하는 현실을 대하다 보면 씁쓸함마저 감돈다. 이처럼 여행이 변질된 이유야 여러 가지 사유가 있겠지만 최근 들어 여행 그 자체가 주는 경험의 틀과 범위를 복원하려는 시도가 눈에 뜨이게 늘었다.

<걷는 것이 쉬는 것이다>의 저자 김산환은 잊힌 옛길을 통해 우리네 산천을 돌아보고 현대화에 매몰된 향수와 정취를 공유하고 회복하고자 이 책을 펴냈다. 신작로가 뚫리고 돌담길이 사라지고 징검다리의 기억이 가라앉은 추억을 오롯이 간직한 옛길을 통해 우리를 돌아보게 하였다. 책을 통해 우리는 상념의 즐거움과 휴식의 충만함을 곁으로 얻을 수 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미천한 것들도 작가를 통해 다듬어진 후라면 태고의 품을 잉태하여 오래도록 간직한 아슴아슴 자연으로 회복되어 새로이 태어난 날 것 그대로의 오감을 자극한다.  



저자는 여느 기행문과 달리 주관적 단상을 맛깔나게 소묘하였다. 이름 모를 들꽃에서부터 옛 시간이 만든 돌담길, 오솔길, 징검다리길 등에 고귀한 생명의 불씨를 불어 넣었다. 하나같이 진득하게 매료시키는 표정에 온몸을 감싸는 따뜻한 감촉이 그대로 전율한다. 왜 걷는 것이 쉬는 것이라는 단상을 길어 올렸는지 이내 공감하는 글이라 하겠다.


책은 저자가 밟은 우리네 강산의 구석구석 중 알짜배기만 골라 실었다. 가족중심의 여행을 테마로 구성하였다. 상세한 지역 설명과 지명이야기, 맛집 소개, 걷기 난이도 등 여행과 관련한 모든 사항을 꼼꼼히 기록하여 허투루 넘겨볼게 없다. 물론 이름난 관광지도 있겠거니와 아직 낯선 곳도 종종 자태를 뽐낸다. 무엇보다 소중한 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이 주목적이기에 번잡함을 일부러 피했다. 읽기도 쉽지만 작가가 직접 담은 사진은 마치 생동감 있게 잡아 낸 펄떡이는 역동감과 숨결이 느껴진다.


전체 3부로 나뉘어 엮었다. 각 장을 걷는 이를 통해 바라 본 풍광을 중심으로 제1부는 물이 주는 원형의 순수함을 녹여 내었다. 시간의 흐름이 마비되어 마치 멈춰버린 굽이굽이 물길이 흘러가는 섬진강자락을 필두로 걷기명소로 빼놓을 수 없는 제주 올레 길을 지나 마지막 남은 조선의 큰길을 내처 흘렀다. 어느 것 하나 인상적이지 않은 것이 없고 자연이 주는 위대한 작품에 인간의 오만함 마저 부끄럽게 만든다.


제2부는 경계를 넘어 잇는 고개를 걸었다. 백두대간의 고준산령 대관령의 아스라이 펼쳐 진 눈길의 순간을 담고 한 많은 동강의 뼝대 고개를 온몸으로 넘었다. 자작나무에 편지를 쓰면 맺어진다는 러시아의 전설이 스민 인제 점봉산의 운치는 오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우락부락 총각들이 흐드러지게 핀 이름 모를 꽃에 동해 꽃 꺾기 내기하던 백운산 화절령은 옅은 미소가 절로 피어난다. 그렇다고 마냥 좋을 수만은 없듯 탄광이 막히고 도롱이못과 아롱이못의 사연은 가엾기만 하다. 인간이 휩쓸고 간 자리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백두대간을 따라 처음 열린 하늘재를 통해 명멸한 아픔의 기억이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전설이 깃든 월악산은 그 산세 또한 기가 막힌다. 조령을 넘어 문경세재에 얽힌 야사는 그 시절 그 사람들과 함께 걷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영남대로의 중심관문인 문경과 충주를 이어주는 길에 아직도 주막거리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은 것이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우리 선현들의 결과 얼이 깃든 그 오름길을 따라 거니는 것만으로도 막혔던 기운이 풀릴 것만 같다.


제3부는 물아일체에 맞닿은 풍경의 가운데를 타고 넘었다. 해남 끝자락 두륜산 대흥사로 오르는 길은 자연과 나와 하나 된 혼연일체의 착각을 돋운다. <서편제>와 <나의 문화유적답사기>로 유명해진 유선장은 운치 또한 멋들어진다. 이 모든 것이 도탑기만 하다. 또 장성 축령산에는 춘원 임종국의 나무사랑은 그 얼과 기상이 여간 대단한 게 아니다. 그저 그의 행적이 고귀하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것에 다르지 않다.


핏빛처럼 어스러지는 동백꽃길이 곧게 뻗은 전남 강진 백련사와 다산 정약용은 친분은 정겹기만 하다. 정약용이 여유당이라는 호를 버리고 다산이라 바꿔 부른 사연은 옛길을 통해서만 스치는 교감이다. 이쯤 되면 저자의 기행은 세상으로 통하는 부드러운 흙내임 가득한 길처럼 느껴진다. 사자평의 드넓은 화전의 향취가 아스라이 배인 낙동정맥의 기운도 이젠 살갑게 다가선다.


인생은 쉼 없이 걷는 고독한 삶의 일환인지 모른다. 먼저 간 자의 발자취를 따라 하염없이 걷다 보면 어느새 어질한 풍광에 도취되고 자연 속으로 교감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굳이 어디라도 이름난 곳이 아닐지라도 잊힌 우리네 옛길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흥겹기만 하다. 문명화로 치우친 마음의 편식을 저자가 다시 터 준 책을 길라잡이 삼아 시간 내어 따라 걷다 보면 녹음이 전해 주는 풍광에 충만해 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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