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물학 대논쟁 통섭원 총서 2
최재천 지음 / 이음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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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 논의에 대한 비판적인 논고들만을 모은 책 <통섭과 지적 사기>와 달리 이 책은 사회생물학에 대한 찬반 양론을 전개하는 연구자들의 논고를 모으고 있다. 그래서 <통섭과 지적 사기>를 읽었을 때보다 사회생물학과 통섭에 대한 보다 총체적인 이해가 가능했다. 그런데 사회생물학적 통섭에 찬성하는 논자들의 글을 읽어도 반감만 생길 뿐, 환원주의가 아닌 다원주의를 지향해야 한다는 내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통섭>의 저자 에드워드 윌슨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장차 사회생물학의 한 분과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황당무계한 이야기다. 이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사회생물학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도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왜 19세기 후반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한 반면,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는가? 나치즘은 독일철학을 어떻게 이용했는가? 중국 공산당 체제는 얼마나 지속가능한가? K-pop은 어떻게 국제적 컨텐츠가 되었나? 베버의 권력 개념과 푸코의 권력 개념은 어떻게 비교 가능한가? 1965년 한일수교에서 양국의 만주국 인맥이 한 역할은 무엇인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서 초기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 과정을 어떻게 읽을 수 있는가? 북유럽 모델의 고용정책은 한국사회에 어떤 함의를 가지는가? 유교민주주의가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솔직히 말해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사회생물학이 적실성 있는 가설이나 논증을 제공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이 다른 생물들과 다를 바 없겠지만, 인간의식이 만든 제도, 사회, 역사는 다른 동물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한 인간 고유의 영역들에 대해서는 인간의식이 발전시켜온 개별 학문 분야의 방법론을 차용하는 것이 타당하게 느껴진다. "인간 본성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회생물학의 전제에 동의한다 하더라도(개인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지만), 유전자가 개별 사회나 개인에게 어떻게 발현되는가에 대한 메커니즘을 해명할 방법을 사회생물학이 찾을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가능할 것 같지 않으며, 가능하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의미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예를 들어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문제를 탐구할 때, "인간의 본성이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이 중요한가?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는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연구에 있어 불문에 부쳐도 좋을 문제로 보인다. "사실에서 당위를 도출할 수 없다"는 명제를 받아들인다면, 사회생물학의 타학문에 대한 영향은 크게 제한될 것이다. 물론 여러 학문 분야들, 특히 인류학이나 심리학에 대해서는 사회생물학이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사회생물학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하려면, 실제 연구에서 사회생물학이 응용된 실제 연구의 축적이 필요할 것이다. 만약 사회생물학 환원주의자들이 사회생물학을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적용한 연구를 충분히 축적하지 않는다면, 인문학과 사회과학 연구자들에게 사회생물학을 배우라고 강요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 책에서 김환석은 생물학적 환원주의와 사회학적 환원주의 양쪽 모두를 배격하자고 주장한다. 그런데,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사회학의 한 분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회학자가 있는가? 그런데 왜 사회학적 환원주의를 생물학적 환원주의와 같은 차원에서 비판하는 것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철학자 리처드 로티는 윌슨의 <통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통섭>의] 주장의 주된 문제는 그 저자가 상상하는 한층 통합된 문화가 어떤 것이 될지 이해하기 힘들고, 그런 문화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문화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할 어떤 근거도 없기 때문이다. [...] 실재는 하나지만, 그에 대한 기술(description)은 여럿이고 여럿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서로 다른 수많은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러해야 하기 때문이다. (250,251)

나는 로티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한 가지 방식으로 모든 답을 얻기에는 세상은 너무 복잡하고 흥미롭다"라고 말했던, 스티븐 제이 굴드는 사회생물학과 환원주의에 반대한 대표적 생물학자다. 그는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에서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발견을 부적절한 영역으로 확장시키려는 시도에 저항하고 적절히 겸손한 태도를 보이고 그 해석에 신중을 기했다면 이러한 비난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상대방에 대한 겸손함이 없다면, 통섭은 사회생물학의 오만과 편견으로 끝날 것이고, 오히려 자연학과 인문학, 사회과학의 바람직한 대화를 저해하는 악영향을 끼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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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1. <신들을 위한 여름> 에드워드 라슨(한유정)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개과천선>을 보며 법정드라마의 매력을 다시금 실감했다. 재판이라는 이름의 극장에서 쌍방이 서로의 논리와 가치를 정면에서 충돌시키는 드라마가 재미없을 리가 있겠는가! <신들을 위한 여름>은 1920년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창조론과 진화론을 둘러싼 재판을 논픽션으로 풀었다. 종교와 과학이 정면에서 충돌한 세기의 법정 이야기는 퓰리처상까지 수상한 걸작이라고 한다.

 

2, <저널리즘> 조 사코(최재봉 외)

 

 

 조 사코의 전작 <저널리즘>은 만화라는 형식을 통해 팔레스타인의 현재를 조망한 논픽션이었다. '만화'이긴 하지만, <원피스>처럼 웃기는 이야기는 아니고, 철저하게 진지한 논픽션이었다. 이 책 <저널리즘> 또한 이라크, 체첸, 인도 등 전세계의 현장을 발로 뛰고 취재한 논픽션 만화다. 프레시안, 시사인, 경향신문, 한겨레, 한국일보, SBS의 현직 기자들이 공동번역했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운 시도로 보인다.

 

3. <여파> 마누엘 카스타스 외(김규태)

 

 

 "경제위기는 우리 시대의 문화다"라는 도발적인 부제가 인상적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초등학교 때 IMF가 왔었고, 대학 입학할 무렵, 리만쇼크가 왔었다. 순조로운 성장은 상상도 안 되는 먼 옛날의 신화고, 경기후퇴나 불황 같은 단어들이 함께였다. 그건 아마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닌 듯 싶다. 더 이상 성장은 불가능한 시대, 경제위기라는 삶의 방식에 대한 사유들을 모은 이 책은 한국 사회의 지침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4. <왜 로봇의 도덕인가> 웬델 월러치, 콜린 알렌(노태북)

 

 

 <프랑켄슈타인> 이후로 인간이 만든 피조물에 의해 인류가 몰락하게 되는 모티프는 거듭 반복되어 왔다. 특히 감정이 배제된(혹은 배제되어야만 하는) 로봇이라는 물체의 인간성에 대해서는 수많은 SF들이 다루고 있다. 그러한 문학적 상상력을 기저에 두고, 현실화하고 있는 인공지능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탐색해 본 책이다.

 

5. <현대 한국 정치사상> 강정인 외

 

 

 제목 그대로 현대 한국 정치 사상에 대한 책이다. 일제강점기부터 분단, 전쟁, 독재, 민주화에 이르는 파란만장한 근현대사를 가진 한국에 걸맞은 정치사상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공감할 것이다. 한국의 정치사상은 어떻게 가능하고, 서구의 정치사상을 어떻게 한국에 적용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한국의 일류 정치사상 학자들의 논고를 모았다는 점에서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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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라 브론토 사우루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 스티븐 제이 굴드 자연학 에세이 선집 3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 현암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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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과학과 담을 쌓고 살지만, 나도 한때는 공룡소년이었다. 초등학교 때, <쥬라기공원>을 본 후, 공룡 관련 책들을 읽으며 공룡 이름을 줄줄 외우고 다녔다. 공룡에 대해 읽으면서 고생물 전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하, 은, 주, 춘추전국시대, 진, 한, 위진남북조..."하고 중국 왕조들 이름을 외우면서, "선캄브리아대, 캄브리아기, 오르도비스기, 실루리아기, 데본기, 석탄기..." 하며 지질시대 이름을 외웠다.(삼국지와 쥬라기공원은 초등학교 때 내게 가장 핫한 컨텐츠였다.) 그 중에서도 캄브리아기의 할루키게니아라는 괴상한 생물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는데, 7개의 다리와 7개의 촉수만으로 이루어진 그 특이한 모양새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 책의 6장 "공룡 광풍"에서 개탄하듯이 공룡에 관한 관심이 과학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중학교 올라가면서부터 생물 교과서에 공룡이 아니라 완두콩과 초파리가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고등학교 때, 도서관에서 우연히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라는 책을 읽게 되었고, 고생물학에 대한 감동으로 전율했다. 평소에는 근처에도 가지 않던 과학 서가에서 우연히 그 책을 발견했던 것은 아마 이 책이 캄브리아기의 버제스동물군을 다루고 있었고, 초등학교 때 꽂혔던 할루키게니아를 떠올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캄브리아기, 갑작스럽게 탄생한 다세포생물들은 오늘날의 어떠한 생물들과도 유사하지 않은 전혀 다른 종류의 생물들이었다. 역사의 테이프를 다시 돌린다면, 어쩌면 인류를 비롯한 포유류, 파충류 대신, 할루키게니아나 오파비니아 같은 괴상한 생물들이 오늘날 지구를 지배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책의 주장은 신선하게 다가왔고, 오늘날의 생태계가 현재와 같은 구성이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의 결과라는 사실 그 자체가 일종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해 주었다. 과학서적임에도 불구하고 문과인 나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쓴 저자의 뛰어난 필력에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과학글쓰기의 일인자로 불리는 스티븐 제이 굴드가 책의 저자였다.(<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에 나오는 버제스동물군의 발견에 대해서는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의 16장 "미끄러운 경사로에서 나타난 문학적 편향"에도 간략하게 나온다.)

 굴드 자신이 가장 뛰어나다고 인정한 35편의 에세이들을 모은 이 책 역시 과학에 대해 잘 모르는 독자들도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게 쓰여져 있다. 왜 여자뿐 아니라 남자에게도 젖꼭지가 달려 있는가? 야구는 잘 알려진 것처럼 뉴욕주 쿠퍼스타운에서 탄생했는가? 히라코테륨이라는 말의 선조 동물의 크기를 묘사할 때, 왜 모든 미국의 과학교과서는 폭스테리어라는 듣도 보도 못한 개의 일종과 비슷한 크기라고 말하는가? 오리너구리나 가시두더지 같은 단공류(알을 낳는 포유류)는 태반을 가진 다른 포유류들에 비해 진화가 덜 되거나 열등한 동물들인가?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이 다윈의 적자생존이론을 비판한 건 단순히 그의 이상주의적 경향이 빚어낸 잘못인가? 1941년의 다마지오의 56경기 연속 안타 기록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매료되었다(masmerize)'라는 단어의 어원이 된 매스머의 최면요법은 무엇이었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이 책에 나와 있다. 언뜻 보기에는 과학과 별 관련이 없어보이는 야구 이야기나 타자기 이야기로부터도 생물학의 심오한 이야기를 자유자재로 풀어내는 저자의 글쓰기 능력은 독자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하나하나가 보석 같은 이 에세이들은 두고두고 읽어야 할 것이다.

 굴드는 생물학이 수치의 엄밀함, 예측, 실험을 다루는 견고한 물리과학과 달리, 역사 속의 복잡한 대상을 다루는 역사과학이라고 부른다. 앞에서 나는 중국의 왕조 순서들 외우듯이 지질시대의 순서를 외웠다고 했다. 그런데 굴드 역시 의식적으로 인류의 역사와 지구의 역사를 유비시키고 있다.

 야구의 기원에 대해 논한 3장 "쿠퍼스타운의 창조 신화들"은 인류의 역사와 지구의 역사를 대비시키며 과학의 심오한 문제를 풀어낸 대표적인 에세이다. 1907년, 야구의 기원을 밝히기 위해 만들어진 위원회는 애브너 더블데이가 "1839년에 쿠퍼스타운의 양복점 뒤편에서 구슬치기를 하다가 그림을 그리고 경기 규칙을 설명했으며, 이 운동경기에 "베이스 볼"이라는 오늘날 사용되는 이름을 붙였다"(66,67)는 설을 채택했다. 이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이야기였다. 18세기 영국의 하류층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다양한 공놀이가 19세기 전반 미국으로 들어왔고, 19세기 후반 오늘날의 야구로 확립되었다는 것이 굴드가 제시한 설득력 있는 설명이다. "쿠퍼스타운 신화"가 탄생한 이유는 1907년 당시의 위원회가 야구의 기원이 미국에 있고, 그 창시자가 남북전쟁의 영웅인 애브너 더블데이라는 설명을 애국적 관점에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굴드는 야구의 기원과 마찬가지로 진화의 역사 또한 연속적이며, 어떤 특정한 출발점과 원인을 찾을 수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굴드는 역사에 의미나 목적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17장 "밝게 빛나는 커다란 땅반딧불 애벌레"에는 17년간을 애벌레로 산 끝에 몇 주간 나무에서 울다가 죽는 매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다면 17년을 사는 매미는 어떤가? 매미의 애벌레가 영광스러운 며칠을 끈기 있게 기다리며 오랜 기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내는 것은 아니다. 애벌레는 지하에서 활동적인 삶을 영위한다. 물론 그중에는 긴 수면기도 있지만, 여러 차례 허물을 벗으며 왕성하게 성장하는 기간도 포함된다. (365,366)

 우리는 흔히 매미를 완성된 형태로 보고, 애벌레는 그 과정에 있는 것으로 보지만, 실제로는 애벌레도 매미 못지 않게 완성된 존재이며, 결코 매미가 되기 '위하여' 애벌레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가 우연의 연속이며, 의미나 목적이 없다는 굴드의 역사관은 영국의 보수주의 사상가인 마이클 오크셧의 역사관을 연상시킨다. 물론 이 책에서 오크셧의 이름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표현은 다를지라도 역사의 목적이나 의미를 부정하는 둘의 역사관은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다. 오크셧은 "우리는 출발점도 없고 목적지도 없는 한도 끝도 없는 바다를 항해하고 있으며,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평평한 배 위에 계속 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단선적 진보를 믿었던 E.H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이러한 오크셧의 역사관을 비판했지만, 오늘날의 포스트모던적 관점에서 보면, 오크셧의 관점에 일리가 있다.

 이러한 관점은 어찌 보면 허무주의를 조장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굴드는 아무런 의미나 목적 없이 우연의 결과로 나타난 역사 그 자체에서 역설적인 경이로움을 발견한다. 충분히 다른 형태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그 자체가 경이롭지 않은가, 라고 말하는 것이다. 굴드는 "한 가지 방식으로 모든 답을 얻기에는 세상은 너무 복잡하고 흥미롭다"(745)라고 말하며, 특정한 하나의 원리에 역사를 환원시키려는 시도를 반대한다. 그리고 현존하는 모든 것들의 다양성을 긍정한다. 굴드가 제시하는 다양한 생명들의 이야기가 매력적이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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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평전 - 조선 후기 민족 최고의 실천적 학자
박석무 지음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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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건축학개론>에 이런 장면이 있다. 건축학개론 수업을 듣는 여주인공(배수지)에게 교수가 어디 사느냐고 묻자 여주인공은 정릉이라고 답한다. 교수는 다시 정릉이 누구의 능인지 아느냐고 묻는다. 여주인공은 "정조?"라고 찔러 보지만 교수는 고개를 젓는다. 여주인공이 다시 "정종?"이라고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하지만 교수는 눈을 감고 고개를 젓는다. 그러자 여주인공은 "정약용?"이라고 더욱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하고, 강의실은 웃음바다가 된다. 그 이후 그녀의 별명은 '정약용'이 된다. (참고로 정릉은 최근 <정도전>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다.)

 <다산 정약용 평전>에 대한 서평을 시작하기 위해서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를 꺼낸 데는 이유가 있다. <건축학개론>의 에피소드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약용에 대한 한국 사람의 일반적인 인식을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약용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다. <성균관스캔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대중 사극에도 정약용이 등장하고, 내가 다니고 있는 대학에도 "다산경제관"이라는 이름의 건물이 있다. 그만큼 정약용이라는 이름 자체는 우리에게 무척 친숙하다.

 그런데 막상 정약용이 뭐한 사람인지를 묻는다면 대답이 궁해진다. 정약용이 누구냐고? 정조, 실학, 목민심서, 유배, 기중기, 화성..... 거기서 멈출 수밖에 없다. 마키아벨리나 푸코의 생애와 사상이라면 어느 정도 상세하게 알고 있는데, 정작 조선의 대표적인 학자 정약용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니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이 책이 반가웠다. 저자는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등을 쓴 다산 연구의 일인자 박석무 교수님. 색인까지 660페이지가 넘는 하드커버, 표지도 밝고 산뜻한 느낌이 나서 마음에 든다. 저자의 평생의 연구 성과가 이 660페이지의 책에 농축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기대되었다.

 정약용은 1762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친가와 외가 모두 명문가였다. 1783년 성균관에 들어가 정조의 눈에 들었고, 1789년 전시에 수석으로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뛰어난 능력과 강직한 성품, 정조의 총애로 주변의 질투와 중상을 샀다. 그리고 그의 형 정약종과 자형 이승훈 등이 천주교 신자였고, 정약용 또한 한때 천주교를 공부했었던 경력이 문제시되었다. 관직 생활 동안 천주교에 관련되어 있다는 노론 벽파의 모략이 끊이지 않았고, 몇 번이나 좌천된 끝에 1799년 벼슬을 사직한다.

 1800년 정조가 죽으면서 그의 인생은 전락한다. 1801년, 천주교에 대한 박해인 신유옥사가 벌어진다. 천주교 신자임을 부인하지 않았던 정약종은 처형당했고, 정약용과 형인 정약전은 유배를 가게 된다. 정약용은 천주교와 인연을 끊은지 오래였지만, 반대파의 모함에 휘말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후 정약용은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경학 연구 등에 매진한다. 그동안 막내 아들과 형 정약전이 부고를 들어야만 했던 정약용의 삶에서 비애가 느껴진다. 1818년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흠흠신서>를 완성하고 당대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보내다가 1836년 75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책을 읽으며 정약용의 다재다능한 능력에 놀랐다. 학자로서 경학을 연구하여 사서오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고, 행정가로서 목민관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법의학과 수사에 대한 책 <흠흠신서>를 저술하는가 하면, "장수의 재주도 겸비하고 있"었다 하고, 의서 <마과회통>을 저술하고 순조가 위독할 때 진찰을 하기 위해 불려갔을 정도로 의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기중기를 발명하여 화성 축조 기간을 몇 분의 일로 줄일 정도로 과학기술에 눈이 트여 있었는가 하면, 유배지에서 수많은 시를 적었고, 음악에도 조예가 있었다고 한다. 승려 혜장스님과도 교류가 있었다. 못하는 게 없는 사람을 르네상스인이라고 하는데, 정약용이야말로 진정한 르네상스인이었다.

 자연스럽게 정약용이 정조의 죽음과 다른 당파의 모함 때문에 그 뜻을 펼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워진다. 정조가 조금 더 오래 살았고, 진정으로 백성을 생각할 줄 알았던 정약용이 조금 더 오래 더 높은 관직에 올라 평생동안 꿈꾸었던 대담한 개혁을 이루었다면 조선이 그렇게 쇠망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 시절인연이었음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리고 덕분에 정약용이라는 뛰어난 학자로 남았다는 점은 전화위복이라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한 정약용의 다양한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장점이 아닐까 싶다.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는터라 정약용의 사상의 내용에 주목하며 읽었지만, 솔직히 그 내용이 추상적이어서 이해하기 어려웠다. 정약용의 정치사상에 대해 저자는 공렴, 공정과 청렴이라는 말로 정리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공정과 청렴은 공직자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최소한의 전제조건이 아닌가? 물론 실천을 못하는 공직자들이 수두룩하지만 말이다. 공렴을 정약용 특유의 사상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전제(田制)를 개혁하여 가난한 백성들의 삶을 향상시키고, 공정한 인재 등용을 하려 했다는 정약용의 이상 또한 추상적으로 느껴진다. 백성(국민)을 위한다고 말하지 않는 정치가가 어디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어떻게"라는 방법이 문제 아니겠는가?

 정치가로서의 정약용이 잘 이해되지 않았던 반면에 학자로서의 정약용에 대해서는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약용의 학문적 성실성과 강직하면서도 온화한 성품을 드러내는 에피소드가 있다.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시절, 퇴계와 율곡의 이발기발 논쟁에 대해 정약용은 율곡의 기발설이 옳다고 정조에게 답변을 올렸다. 당시 노론은 율곡의 학설을, 남인은 퇴계의 학설을 지지하고 있었다(그 이유에 대해서는 나와있지 않다. 당파싸움에 철학적 대립도 개입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남인이었던 정약용이 율곡의 설을 지지하고 나섬으로써 남인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정조는 그의 공정한 평가를 칭찬했다. 이후에도 정약용은 반대되는 노론, 소론의 인물들과 학문적 교류를 이어갔다. 정약용을 공격하여 유배보낸 것이 노론 벽파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당파에 구애되지 않는 그의 태도는 배워야겠다 싶다.

 또 하나 흥미로웠던 사실은 유배지에서 청나라의 최신 유교 연구 동향을 꿰뚫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오규 소라이 등 일본의 유학 동향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정약용은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대개 일본이라는 나라는 원래 백제에서 책을 얻어다 보았는데, 처음에는 매우 몽매하였다. 그 후 중국의 절강 지방과 직접 교역을 트면서 좋은 책을 모조리 구입해 갔다. 책도 책이려니와 과거를 통해 관리를 뽑는 그런 잘못된 제도가 없어 제대로 학문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는 그 학문이 우리나라를 능가하게 되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487,488)

 18세기까지도 유학에 대한 학문적 수준은 우리나라가 일본에 비해 월등히 우수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미 다산이 "그 학문이 우리나라를 능가"했다고 평했다는 사실이 신선했다. 그리고 "과거를 통해 관리를 뽑는 잘못된 제도" 때문에 학문이 발전하지 않았다는 해석 또한 놀랍다. 일반적으로 명대에 완성된 과거제도가 성리학의 완성으로 여겨지지 않던가? 정약용은 왜 과거제도를 비판했을까? 신분에 구애되지 않고 인재를 등용한 조선과 중국의 과거제도가 일본의 신분제에 비해 학문을 장려하지 못한다는 그의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다른 리뷰어 분들이 이미 지적했듯이, 평전치고는 지나치게 정약용의 훌륭한 성품과 공적들에 대한 찬탄으로만 가득차 있는데다가 두꺼운 책 치고는 서술이 밋밋한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자세하면서도 총체적으로 저술했다는 점에서는 다산 정약용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결정적 한 권이라고 할 수 있겠다.

 

 P.S. 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과거제도는 시가를 짓거나 정책적 제안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학문 연구는 소홀해 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고시공부 한다고 학문이 발전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런 것 같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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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히틀러의 철학자들> 이본 셰라트(김민수)

 

 

 히틀러와 (주로 독일)철학자들과의 관계에 대한 책이다. 칸트, 헤겔, 쇼펜하워, 니체 등 나치가 왜곡해서 이용한 철학자들, 칼 슈미트나 하이데거처럼 나치에 부역한 철학자들, 아렌트, 아도르노, 벤야민처럼 나치에 박해받은 철학자들. 서양지성사에 어두운 그림자를 남긴 나치즘이란 무엇이었는지, 나치즘 철학의 구체적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2. <조선과 중화> 배우성

 

 

 일본은 한국이 옛날부터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식민지 통치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정당화한다. 새뮤얼 헌팅턴이 일본은 일본문명으로 별개의 문명으로 분류한 반면, 한국은 중화문명권으로 본 것을 보면, 서양에서도 그러한 시각이 주가 되는 듯하다. 물론 근세 동아시아 조공책봉관계가 서양근대의 웨스트팔리아체제에서 보편화된 주권국가들의 관계와는 다른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말 그대로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지만, 실제로 조선은 명과 청으로부터 책봉을 받아야만 했고,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조차도 명나라에서 정해준 것이었다. 과연 조선과 명, 청의 관계는 실제로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하는 것이 나의 오랜 의문이었다. 페이지수에서부터 학술서의 포스가 느껴지는 이 책이라면 그 의문에 대한 답이 될 것 같다.

 

3. <켄 로치> 존 힐(이후경)

 

 

 영국의 좌파 영화감독 켄 로치. 아일랜드 독립을 그린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을 때부터, '켄 로치'라는 이름은 내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주로 영국 하층민들의 삶을 아무런 희망 없이 보여주는 그의 영화는 솔직히 말해서 재미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감독 특유의 묘한 작품세계가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거장 중 한 사람이다. 그러한 켄 로치의 작품들과 정치의 관계를 서술한 책. 감히 켄 로치의 팬을 자처하는 이로서 추천한다.

 

4. <대중의 계보학> 김성일

 

 

 "모던 걸에서 촛불소녀까지, 대중 실천의 역사와 새로운 대중의 시대"라는 부제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일제시대에 탄생한 대중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사회사적 고찰. 솔직히 말해서 나는 황우석사태나 디워사태에 보여준 대중의 비이성적 모습을 보고 대중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불신을 갖고 있다. 오히려 그래서 이 책의 저자가 대중의 계보학을 어떻게 그렸을지 더 관심이 가는 책이다.

 

5. <음식의 문화학> 밥 애슬리 외(박형신 외)

 

 

 요즘은 어지간한 곳에는 돈부리니 라멘이니 하는 일본음식점들이 성황을 누리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일식"하면 거창한 회와 초밥, 그 외 서비스 메뉴들이었는데 격세지감이 든다. 그런가 하면 얼마 전 오랜만에 도쿄에 갔더니 인도음식점들이 부쩍 늘어 있었다. 베트남 요리, 우즈베키스탄 요리, 지구 반대편 브라질 요리까지도 오늘날의 글로벌 시티 서울에서는 맛볼 수 있다. 다양한 음식, 신기한 음식을 먹어보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무척 기쁜 일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음식이란 그 사회의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음식의 문화학"이라는 본격적인 제목을 들고 나온 이 책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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