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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평전 - 조선 후기 민족 최고의 실천적 학자
박석무 지음 / 민음사 / 2014년 4월
평점 :
영화 <건축학개론>에 이런 장면이 있다. 건축학개론 수업을 듣는 여주인공(배수지)에게 교수가 어디 사느냐고 묻자 여주인공은 정릉이라고 답한다. 교수는 다시 정릉이 누구의 능인지 아느냐고 묻는다. 여주인공은 "정조?"라고 찔러 보지만 교수는 고개를 젓는다. 여주인공이 다시 "정종?"이라고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하지만 교수는 눈을 감고 고개를 젓는다. 그러자 여주인공은 "정약용?"이라고 더욱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하고, 강의실은 웃음바다가 된다. 그 이후 그녀의 별명은 '정약용'이 된다. (참고로 정릉은 최근 <정도전>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다.)
<다산 정약용 평전>에 대한 서평을 시작하기 위해서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를 꺼낸 데는 이유가 있다. <건축학개론>의 에피소드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약용에 대한 한국 사람의 일반적인 인식을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약용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다. <성균관스캔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대중 사극에도 정약용이 등장하고, 내가 다니고 있는 대학에도 "다산경제관"이라는 이름의 건물이 있다. 그만큼 정약용이라는 이름 자체는 우리에게 무척 친숙하다.
그런데 막상 정약용이 뭐한 사람인지를 묻는다면 대답이 궁해진다. 정약용이 누구냐고? 정조, 실학, 목민심서, 유배, 기중기, 화성..... 거기서 멈출 수밖에 없다. 마키아벨리나 푸코의 생애와 사상이라면 어느 정도 상세하게 알고 있는데, 정작 조선의 대표적인 학자 정약용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니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이 책이 반가웠다. 저자는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등을 쓴 다산 연구의 일인자 박석무 교수님. 색인까지 660페이지가 넘는 하드커버, 표지도 밝고 산뜻한 느낌이 나서 마음에 든다. 저자의 평생의 연구 성과가 이 660페이지의 책에 농축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기대되었다.
정약용은 1762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친가와 외가 모두 명문가였다. 1783년 성균관에 들어가 정조의 눈에 들었고, 1789년 전시에 수석으로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뛰어난 능력과 강직한 성품, 정조의 총애로 주변의 질투와 중상을 샀다. 그리고 그의 형 정약종과 자형 이승훈 등이 천주교 신자였고, 정약용 또한 한때 천주교를 공부했었던 경력이 문제시되었다. 관직 생활 동안 천주교에 관련되어 있다는 노론 벽파의 모략이 끊이지 않았고, 몇 번이나 좌천된 끝에 1799년 벼슬을 사직한다.
1800년 정조가 죽으면서 그의 인생은 전락한다. 1801년, 천주교에 대한 박해인 신유옥사가 벌어진다. 천주교 신자임을 부인하지 않았던 정약종은 처형당했고, 정약용과 형인 정약전은 유배를 가게 된다. 정약용은 천주교와 인연을 끊은지 오래였지만, 반대파의 모함에 휘말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후 정약용은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경학 연구 등에 매진한다. 그동안 막내 아들과 형 정약전이 부고를 들어야만 했던 정약용의 삶에서 비애가 느껴진다. 1818년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흠흠신서>를 완성하고 당대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보내다가 1836년 75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책을 읽으며 정약용의 다재다능한 능력에 놀랐다. 학자로서 경학을 연구하여 사서오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고, 행정가로서 목민관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법의학과 수사에 대한 책 <흠흠신서>를 저술하는가 하면, "장수의 재주도 겸비하고 있"었다 하고, 의서 <마과회통>을 저술하고 순조가 위독할 때 진찰을 하기 위해 불려갔을 정도로 의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기중기를 발명하여 화성 축조 기간을 몇 분의 일로 줄일 정도로 과학기술에 눈이 트여 있었는가 하면, 유배지에서 수많은 시를 적었고, 음악에도 조예가 있었다고 한다. 승려 혜장스님과도 교류가 있었다. 못하는 게 없는 사람을 르네상스인이라고 하는데, 정약용이야말로 진정한 르네상스인이었다.
자연스럽게 정약용이 정조의 죽음과 다른 당파의 모함 때문에 그 뜻을 펼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워진다. 정조가 조금 더 오래 살았고, 진정으로 백성을 생각할 줄 알았던 정약용이 조금 더 오래 더 높은 관직에 올라 평생동안 꿈꾸었던 대담한 개혁을 이루었다면 조선이 그렇게 쇠망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 시절인연이었음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리고 덕분에 정약용이라는 뛰어난 학자로 남았다는 점은 전화위복이라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한 정약용의 다양한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장점이 아닐까 싶다.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는터라 정약용의 사상의 내용에 주목하며 읽었지만, 솔직히 그 내용이 추상적이어서 이해하기 어려웠다. 정약용의 정치사상에 대해 저자는 공렴, 공정과 청렴이라는 말로 정리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공정과 청렴은 공직자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최소한의 전제조건이 아닌가? 물론 실천을 못하는 공직자들이 수두룩하지만 말이다. 공렴을 정약용 특유의 사상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전제(田制)를 개혁하여 가난한 백성들의 삶을 향상시키고, 공정한 인재 등용을 하려 했다는 정약용의 이상 또한 추상적으로 느껴진다. 백성(국민)을 위한다고 말하지 않는 정치가가 어디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어떻게"라는 방법이 문제 아니겠는가?
정치가로서의 정약용이 잘 이해되지 않았던 반면에 학자로서의 정약용에 대해서는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약용의 학문적 성실성과 강직하면서도 온화한 성품을 드러내는 에피소드가 있다.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시절, 퇴계와 율곡의 이발기발 논쟁에 대해 정약용은 율곡의 기발설이 옳다고 정조에게 답변을 올렸다. 당시 노론은 율곡의 학설을, 남인은 퇴계의 학설을 지지하고 있었다(그 이유에 대해서는 나와있지 않다. 당파싸움에 철학적 대립도 개입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남인이었던 정약용이 율곡의 설을 지지하고 나섬으로써 남인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정조는 그의 공정한 평가를 칭찬했다. 이후에도 정약용은 반대되는 노론, 소론의 인물들과 학문적 교류를 이어갔다. 정약용을 공격하여 유배보낸 것이 노론 벽파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당파에 구애되지 않는 그의 태도는 배워야겠다 싶다.
또 하나 흥미로웠던 사실은 유배지에서 청나라의 최신 유교 연구 동향을 꿰뚫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오규 소라이 등 일본의 유학 동향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정약용은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대개 일본이라는 나라는 원래 백제에서 책을 얻어다 보았는데, 처음에는 매우 몽매하였다. 그 후 중국의 절강 지방과 직접 교역을 트면서 좋은 책을 모조리 구입해 갔다. 책도 책이려니와 과거를 통해 관리를 뽑는 그런 잘못된 제도가 없어 제대로 학문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는 그 학문이 우리나라를 능가하게 되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487,488)
18세기까지도 유학에 대한 학문적 수준은 우리나라가 일본에 비해 월등히 우수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미 다산이 "그 학문이 우리나라를 능가"했다고 평했다는 사실이 신선했다. 그리고 "과거를 통해 관리를 뽑는 잘못된 제도" 때문에 학문이 발전하지 않았다는 해석 또한 놀랍다. 일반적으로 명대에 완성된 과거제도가 성리학의 완성으로 여겨지지 않던가? 정약용은 왜 과거제도를 비판했을까? 신분에 구애되지 않고 인재를 등용한 조선과 중국의 과거제도가 일본의 신분제에 비해 학문을 장려하지 못한다는 그의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다른 리뷰어 분들이 이미 지적했듯이, 평전치고는 지나치게 정약용의 훌륭한 성품과 공적들에 대한 찬탄으로만 가득차 있는데다가 두꺼운 책 치고는 서술이 밋밋한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자세하면서도 총체적으로 저술했다는 점에서는 다산 정약용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결정적 한 권이라고 할 수 있겠다.
P.S. 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과거제도는 시가를 짓거나 정책적 제안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학문 연구는 소홀해 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고시공부 한다고 학문이 발전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런 것 같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