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P 개의 날 4 - 완결
김보통 지음 / 씨네21북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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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얼마 전 철원의 군부대에서 자주포 사고로 육군 세 명이 또 죽었다. 대한민국 남성에게 국방의 의무로 부여되는 병역 중에 일어나는 사건사고는 끊이지 않는다. 북한의 도발로 일어난 천안함 폭침, 연평해전, 목함지뢰사건 등은 말할 나위 없지만, 불의의 사고, 선임의 괴롭힘, 무성의한 치료로 악화된 질병 등으로 목숨을 잃거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면 이렇게 가슴 아픈 일이 없다. 이래서야 아들 낳아서 군대 보낼 수 있겠냐는 한탄이 들려올 만하다.


만화 <DP 개의 날>은 헌병 소속 군무이탈 체포조, DP인 안준호와 박성준 콤비가 탈영병들을 추적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DP는 탈영병을 잡기 위해 머리를 기르고 사복을 입고 군대 밖에서 활동한다. 만화 속에 등장하는 탈영병들 중에는 여친 때문에나 별 생각 없이 탈영한 인물도 있지만, 부대 내에서의 선임 및 간부의 구타 및 가혹행위, 내무부조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탈영한 이들이 그려진다. 코를 곤다고 방독면을 씌우고 재우거나 말을 안 듣는다고 때리는 등, 만화를 통해서 그려지는 가혹행위들은 탈영병들을 동정하게 만든다. 탈영병을 쫓는 DP 안준호 역시 마찬가지로 그들을 추격하면서 감정이입하게 된다.

억울한 마음은 알겠지만 이건 옳은 방법이 아닙니다.
옳은 방법이 뭔데요?/ 생활관에 수류탄이라도 깠어야 하나요? 사격장에서 다 쏴 죽이고 나도 자살할 걸 그랬나요?/ 그러면 좀 덜 억울하긴 하겠네요. (4권, 104) 

DP의 존재는 군대와 민간, 가해자와 피해자,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경계에 위치한 것으로 그려진다.주인공 안준호는 부대 밖에서 탈영병을 쫓다가도 부대로 복귀하면 헌병 안에서 행해지는 가혹행위와 부조리를 목격하게 된다. 그러한 위계질서의 피해자였던 동기나 후임마저도 나중에는 가혹행위의 가해자가 되는 현실에 직면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군생활 내내 내가 본 건 너 같은 새끼들 때문에 도망다니는 불쌍한 애들이었어. 너 같은 새끼들 때문에 부서진 가족들이었고, 너 같은 새끼들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이었어./ 영화에 나오는 악당이 아니라,/ 바로 너 같이 생각하는 평범한 새끼들. (4권, 221)

이 만화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탈영병 오성환과 안준호가 마주하고 나누는 다음 대화에 집약되어 있다.

군대가 바뀐다구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바뀝니다. 확실히 바뀝니다.
있잖아요. 제가 쓰는 수통 밑에 1953이라고 새겨져 있어요./ 육이오 때 쓰던 거예요./수통도 안 바뀌는데 무슨. (4권, 107-111)

육이오 때 쓰던 수통은 군인의 열악한 처우를 상징하는 것과 같은 물건이다. 2013년 국정감사 때 논란이 되면서 전량 교체한다는 기사를 보았는데, 실제로는 새 수통을 사 놓고도 전쟁 나면 쓰려고 아껴두고 병사들에게는 오래된 수통을 지급하는 곳도 있다니 한심한 일이다.

어쨌든 수통 이야기는 그렇다쳐도, 나는 군대가 바뀐다고, 바뀌었다고 믿는다. 나는 2014년 11월부터 2016년 8월까지 카투사로 복무했다. 내가 입대한 때는 28사단의 윤일병 살해사건과 22사단의 임병장 총기난사사건으로 군대 내의 내무부조리 및 폭력이 사회적으로 엄청난 문제가 되던 시기였다. 동작도 굼뜨고 내성적인 성격의 나는 군대 내의 사건사고를 접하고 걱정을 많이 했었다. 물론 돌이켜 보면 즐거운 일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힘든 일도 많았지만, 걱정했던 것과 달리 군생활을 비교적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 카투사라는 특수한 환경 덕도 있겠지만, 카투사 역시 육군에 소속돼 있다. 윤일병사건, 임병장사건의 여파가 있던 시기여서인지 논산훈련소에 입소했을 당시부터 병사들의 인권과 처우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군대에 있는 동안 선후임관계가 어떤 식으로 변화하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사실은 군대에서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였다).

제대한지 1년이 지난 요즈음, 지하철에서 핸드폰을 하는 작대기 두세 개 짜리 현역병들을 보는 일은 드물지 않다. 요즘 군대에서는 이래도 되는 건가 싶어 컬처쇼크를 받게 된다. 군대는 분명 바뀐다. 실제로 바뀌었고, 바뀌고 있는 중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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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지기 전에 - 1차 세계대전 그리고 한반도의 미래
김정섭 지음 / Mid(엠아이디)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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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은 제1차세계대전 발발 100주년, 내년은 제1차세계대전 종전 100주년이 된다. 지금 제1차세계대전이 주목 받는 이유 중 하나는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중국의 세력전이가 일어나려 하고 있다는 것이 당시 영국과 독일 사이의 관계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패권국과 도전국 사이의 전쟁이 벌어진다면, 발칸반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반도가 그 무대가 될지도 모른다.


1870년 통일에 성공한 독일은 유럽의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비스마르크는 유럽 각국과 우호적 관계를 맺으며 프랑스를 고립시키려 했으나, 비스마르크가 퇴임한 이후 독일이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형국이 된다. 알자스-로렌을 빼앗긴 복수심을 잊지 못한 프랑스, 독일이 패권국으로서의 위치를 위협할지도 모른다 생각한 영국, 독일의 동맹국 오스트리아와 발칸반도를 둘러싸고 경쟁관계에 있던 러시아가 손을 잡으며 삼국협상이 성립된다. 유럽대륙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뭉친 삼국협상과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삼국동맹 사이의 양극체제로 재편된다.

1914년 세르비아의 암살자에게 오스트리아의 황태자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오스트리아 vs. 세르비아의 전쟁은 오스트리아vs. 러시아의 전쟁으로 독일 vs. 프랑스, 러시아, 영국의 전쟁으로 비화되며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한다. "낙엽이 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던 약속은 허무하게도 장장 4년여의 지루한 참호전으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천만 명이 전사하고, 러시아제국, 오스만투르크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독일제국, 네 개의 제국이 붕괴했고, 승리한 영국도 미국에 패권을 물려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낙엽이 지기 전에>는 사라예보 암살사건부터 전쟁 발발까지 각국 지도부의 외교적, 군사적 움직임에 주목하고 있다. 저자는 전쟁의 원인이 제국주의나 양대 동맹의 군비경쟁, 민족주의라는 기존의 통설을 부인한다. 그렇다고 특정 국가나 지도자의 침략 야욕이 부른 전쟁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 대신 지도부의 오판과 무능, 민군관계의 문제를 전쟁의 원인으로 지적한다. 당시 오스트리아, 독일, 러시아의 지도부들은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과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먼저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짜르의 표현대로 하면 "힘을 과시함으로써 평화를 지킨다"는 정책이었다. 문제는 모든 나라가 같은 생각으로 부딪혔다는 데 있었다. (중략) 위기의 먹구름이 모두의 시야를 가릴 때 절제의 용기를 보여주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했고, 유약하게 보이지 않기를 원했으며, 상대방이 굴복할 것이라는 환상에 매달렸다. (156)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라는 유명한 격언이 있다. 이 말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어떤 나라가 평화를 위해서 전쟁을 준비한다 해도, 그 자체로 다른 나라에는 위협이 될 수 있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며 전쟁을 준비하다가 결국 전쟁이 발발하고 말았던 사건이 제1차세계대전이었다. 제1차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외교부 장관이었던 그레이는 이렇게 말한다. "전쟁을 일이킬 목적으로 준비하는 것과 전쟁에 대비하여 준비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차이가 분명하거나 확실치 않다." (322) 

게임이론 중에서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가 있다.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되고 상호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각각의 행위자가 자신에게 최선인 선택을 한 결과 전체적으로는 최악의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이는 국제정치에서는 안보딜레마로 응용된다. 즉 "상대방의 의도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위협에 직면한 국가는 자구 노력을 기울이지 없는데, 이 자위적 조치가 불가피하게 상대방의 안보를 위협하는 딜레마 상황을 말한다." (320)

죄수의 딜레마 상황 아래선 선제공격이 상책이다. 예를 들어 미소냉전 당시 미국과 소련은 서로 상대방이 먼저 핵공격을 할 수 있다는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먼저 맞기 전에 먼저 때리는 것이 상책이다. 북핵문제도 마찬가지다. 한국, 미국, 일본은 "북한이 핵을 만들기 전에 선제공격을 하자"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해법이 될 것이다. 북한 입장에서도 한미일의 생각을 알고 있다면 당연히 "선제공격 당하기 전에 핵을 써버리자"고 생각할 것이다. 미국과 소련은 제3차세계대전이 발발할지도 모른다는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도 자제력을 발휘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면 북한의 김정은과 미국의 트럼프는? 물론 둘 다 자신에게 가장 합리적 선택을 하겠지만, 그 합리적 선택의 결과가 우리가 생각하는 최선의 해법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있다.

이 책을 읽고 느낀 교훈은 인간은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전쟁은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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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 전쟁 - 대한민국 안보를 파멸시킨 탐욕의 세력들
김종대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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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전쟁>은 진보진영의 안보 전문가로 알려진 저자가 작년에 정의당 비례대표로 당선되기 전에 쓴 책이다. 북핵, 사드, 주한미군, 사이버전쟁, 무인기, 방산비리, 내무부조리, 군내 인사 문제까지 한국의 군사와 안보를 둘러싼 여러 이슈들에게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북한과 대치 중이라는 특수성과 군대란느 조직의 특수성 때문에 한국 군대는 참 문제가 많은데도 이를 정면에서 비판하기가 쉽지 않은데 신선한 시각을 통해 읽을 수 있다는 점은 좋았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생산된 최루탄이 터키나 바레인 등의 독재 국가에 수출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보수진영에서 수시로 자극하는 위기론이 안보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한국의 안보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는 책의 전체적인 주장에는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다. 책의 뒷부분에 나오는 군대 내 인권 문제에 대해 저자가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문제제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바람직하다(참고로 이번 회기에 국회 국방위원회에 소속되겠다고 자원한 국회의원이 저자를 포함해 세 명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책이 지난 해 총선 전 출판된 책(책에 수록된 각각의 글들은 그 이전에 언론에 발표된 것들)이다보니 북핵위기에 대해서는 2017년 9월 현재 시점에서 읽었을 때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부분이 많다. 특히 북핵문제는 지난해와 올해에 급변했다. 지난해에는 4차, 5차 핵실험이 있었고, 올해 들어 최근에는 6차 핵실험과 ICBM 실험까지 벌이며 말 그대로 핵보유국이 되기 직전의 상황이다. 수소폭탄과 ICBM 실험이 성공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마음만 먹으면 LA에 핵미사일을 날려버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현실화되고 있다.

물론 다분히 결과론적인 관점이긴 하지만, 저자가 북핵문제에 대한 진단은 다소 나이브한 것 같다. 보수세력의 북핵 위협론이 지난 몇 년간 실제보다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상상력의 공장에서 만들어진 이미지"(63)라고까지 평가절하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사실은 지난 몇 년간, 아니 십수년 간 북한은 차근차근 핵보유국으로 향하는 길을 걸어왔던 것이 아닌가? 저자는 이 책에서는 물론, 지금도 사드 배치에 열렬히 반대하고 있다. 진보세력은 북핵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꾸준히 대화를 주장해 왔지만, 핵실험을 끊임없이 해 온 북한에 대해 적절한 해법이 될 수 있는가?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자는 문재인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은 북한의 6차 핵실험으로 돌아왔다.

결과적으로 보면 한국의 보수정권, 진보정권 모두 북핵문제 해결에 실패해 왔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를 비롯한 국제사회도 마찬가지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햇볕정책도,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신뢰프로세스도,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도, 결과적으로는 북한이 핵보유국을 향해 한 걸음 한걸음 다가서는 것을 막지 못했다. 안드레이 란코프가 <리얼 노스 코리아>에서 말한 비유를 빌리자면 북한에게 "채찍은 충분히 아프지 않고, 당근은 충분히 달콤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주변국들은 북한의 핵무장화를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한국은 북한의 위협을 가장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다.

올해는 한국과 미국에 정권교체가 일어나 새로운 정치 지도자들이 선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북핵문제를 현명하게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은 북한으로부터 무시당했고, 트럼프는 트위터로 전쟁 위협을 고조시키고 있다. 아베는 북핵문제를 과장해 우경화를 진전시키고, 시진핑은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김정은을 통제할 수는 없는 것 같다.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이다. 진보진영, 특히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10년 전 햇볕정책을 다시 한 번 꺼낼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한반도의 핵전쟁을 막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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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게이트 - 기자들, 대통령을 끌어내리다
한겨레 특별취재반 지음 / 돌베개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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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0월 무렵이었나, SNS에서 "#그런데 우병우는? #그런데 최순실은?"이라는 해시태그가 유행했다. 다른 기사들에 현혹되지 말고 우병우와 최순실을 추적해야 한다는 네티즌들이 벌인 운동이었다. 당시 99%의 국민이 그랬듯이 나 역시 최순실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었기에, '어디서 또 이상한 음모론 주워왔나보네'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그때는 최순실게이트라는 이름을 일대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최순실 딸 정유라에 대한 이대 특혜 의혹이 보도되기 시작할 때도 설마 이런 일이 진짜일까 싶었는데, 10월 말 JTBC가 최순실 태블릿 피씨와 연설문 유출을 보도하면서 사태가 급격히 진전되었던 것이다.

JTBC와 손석희. 최순실게이트에 있어서 가장 임팩트 있는 한방이 JTBC에서 나왔음은 부정할 수 없다. 만약 그 보도가 없었더라면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JTBC가 최순실게이틔의 모든 것을 밝혀냈던 것은 아니다. 이대 미래라이프 반대 투쟁에서 이대에 대한 비리 혐의가 불거져 나오고 있었고, 안민석 의원은 최순실 모녀에 대한 의혹 추구를 2014년 무렵부터 시작했었다고 한다. 우병우에 관련된 의혹에 대해 조선일보가 비판 논조를 내기도 하는 등 전조는 있었다. 그리고 한겨레신문은 9월 무렵부터 미르, K스포츠재단에 대한 전담 팀을 꾸리고 취재를 시작했다.

한겨레 기자들이 쓴 <최순실 게이트>를 읽고, 미르재단과 K스포츠, 그리고 최순실을 둘러싼 특종들 중 상당수가 한겨레 기자들이 발로 뛰어서 밝혀낸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사태의 발단부터 전개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서 최순실 게이트에 관한 전모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한겨레 기자들의 노력이 상대적으로 가려졌다는 사실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영상매체와 신문매체의 파급력에는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종이신문의 기사 역시 인터넷을 통해 접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진영논리를 동원해 욕할 때를 제외하면) 신문 이름을 눈여겨 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한겨레, JTBC, TV조선, SBS 등 언론들의 활약으로 최순실게이트의 정체를 만천하에 밝혀내고,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고,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영화였다면 이제 의혹을 밝혀낸 기자들은 박수받으며 해피엔드를 맞이했겠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 흥미롭다. 정권교체에 성공한 이후, 일찍이 일베에서나 들을 법 했던 "한걸레"라는 명칭이 여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회자되기 시작했다. 인터넷의 여당 성향 커뮤니티에서는 조중동이나 다른 언론보다도 한겨레가 적폐 언론의 대명사로 난타당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대통령 부인의 이름 뒤에 '여사'가 아닌 '씨'라는 호칭을 사용했다거나, 한겨레 전 편집장이 페이스북에 "덤벼라 문빠들아"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등의 사건들이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한국 언론들에 문제가 많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고, 진보 언론으로 분류되는 한겨레 역시 예외는 아닐 것이다. 최순실게이트 보도 또한 몇몇 정의로운 기자들의 영웅적 투쟁의 결과로 서사(narrative)화되어서는 안 될 문제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겨레가 최순실게이트 국면에서 큰 활약을 한 만큼, 앞으로도 비판 정신이 살아있는 언론 보도를 계속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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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기사단장 죽이기 - 전2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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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음.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었다. 1인칭 화자 주인공은 초상화를 그려서 생계를 꾸리는 화가다. 어느날, 아내가 이혼을 통보하자 집을 나가서 자동차를 타고 한동안 정처없이 방황한다. 주인공의 사정을 알게 된 친구 아마다 마사히코는 자신의 아버지가 살던 고택에 잠시 살면 어떻냐고 권유한다. 아마다 마사히코의 아버지 아마다 도모히코는 일본화의 거장이었는데, 현재는 요양원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주인공은 아마다 도모히코가 살던 오다와라(小田原)의 고택으로 이주하게 된다.

한국 독자에게 오다와라는 낯선 지명일 것 같다. 가나가와(神奈川)현에 위치한 오다와라는 인구 20만의 도시로, 가나가와와 시즈오카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다. 도쿄에서 오사카로 가는 신칸센을 타면 요코하마 다음 역이 오다와라역이지만, 신칸센 중에서 정차하지 않는 열차도 있다. 즉, 아주 시골은 아니지만 대도시도 아닌, 지방도시치고는 제법 큰 도시다.

아마다 도모히코의 고택에 살게 된 주인공에게 어느 날부터 기이한 일이 연이어 벌어진다. 멘시키 와타루(免色渉)라는 이름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부호가 그에게 초상화를 의뢰하고, 고택의 다락방에서 아마다 도모히코가 그린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제목의 기이한 그림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가하면 밤마다 집 근처 어디선가 방울 소리가 들려온다. 이렇듯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사건들에 휘말리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긴장감 있게 전개되며 독자들이 몰입하게 만든다.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발단-전개-위기'까지는 재미있는 작품을 써 내려간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불가사의한 '무언가'를 암시하는 그의 필력은 탁월하다. 반면에 불가사의한 '무언가'의 정체가 밝혀지는 절정과 결말은 하루키 소설의 약점이라 할 수 있다. 이른바 '떡밥'을 던지는 능력은 탁월하지만, 수습을 잘 못하는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은 '무언가'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수수께끼로 남겨둔 채 찝찝하게 끝나곤 한다. 혹은 소설 속에서 그 불가사의의 정체가 밝혀질 경우에는 아주 시시해져 버리고 만다. 밤마다 들려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방울 소리와 우스꽝스러운 말투로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는 60cm의 그림 속 인물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의미심장한지는 분명할 것이다. 소설이 전개되면서 불가사의가 밝혀질수록 독자를 사로잡는 힘이 줄어드는 딜레마가 있는 것이다.

<기사단장 죽이기>는 하루키의 소설치고는 결말이 말끔하고 명확한 편이다. 멘시키 와타루의 또다른 인격 정도만 수수께끼로 남았을 뿐, 나머지는 대략적으로나마 설명이 가능한 매듭이 지어졌다. 주인공은 클라이맥스에서 실종된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현실 세계의 이면(裏面)에 있는 세계로 모험을 떠난다. 주인공은 이 탐색(quest)으로부터 무사히 귀환하고, 그녀를 구하게 되는데, 이 과정은 판타지 소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주인공이 어렸을 때 죽은 여동생, 여동생과 닮았다는 이유로 결혼한 아내, 그리고 주인공이 구하게 되는 소녀 아키가와 마리에는 이 모험에서 하나로 이어지게 된다. 모험을 통해 여동생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를 극복한 주인공은 결말에 이르러 이혼 절차를 밟고 있던 아내와 재결합을 하게 된다.

저자는 인터뷰에서 동일본대지진이 소설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는데, 그래서인지 결말 부분은 다소 설명적이거나 설교적인 느낌을 준다. 주인공이 결말에서 선택하게 되는 실존적 믿음을 통한 극복 역시 하루키치고는 진부한 교훈이다. 긴장감 있게 전개되던 이야기가 용두사미로 끝난 것 같아 실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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