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트 특급 살인 -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 원작 소설, 공식 출판작,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신영희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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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일제시대 때는 경성역(현재의 서울역)에서 만주, 시베리아를 통해 유럽까지 가는 기차표를 살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여러 번 갈아타야 했지만 철도로 조선에서 유럽을 잇는 길이 있었던 것이다. 해방 이후,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한국에서 기차로는 한반도 남쪽 밖에 여행할 수 없어졌다. 비행기가 일반화되고 기차의 속도도 점점 빨라지면서 침대차는 물론이고,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존재했던 '식당차' 역시 사어(死語)가 되고 있다. 

통일이 된다면 모를까, 몇날 며칠을 기차 안에서 보내는 여행의 낭만(romance)은 한국에서는 꿈꿀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러시아나 중국, 인도, 유럽 등에서는 여전히 그러한 기차 여행이 가능하다. 기차 객실에서 잠을 자고 식당차에서 식사를 하며 숙식을 해결하는 기차 여행 말이다. 객실의 등급이 높으면 그 외에도 여러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크루즈 여객선이 그러하듯 기차 역시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세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극단적으로 끌고 나간 작품이 기차를 세계의 메타포(metaphor)로 사용한 영화 <설국열차>다.

철도문학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다. 이스탄불에서 칼레로 가는 오리엔트 특급 열차가 갑작스러운 눈사태로 정지한 가운데, 승객 중 한 사람이 살해당하는 사건을 벨기에인 탐정 에르퀼 푸아로가 해결한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소설이 출간된 것은 이른바 전간기(戰間期)로 불리는 1934년이다. 소설 내의 배경 역시 그 무렵이다. 러시아 공작 부인은 혁명으로 인해 유럽을 떠돌아다니고, 인도에서 복무하는 영국인 대령이 나오며, 미국의 금주법에 대한 묘사가 등장하는 것으로 시대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시리아의 겨울 아침 5시였다. 알레포 역의 플랫폼을 따라 철도 안내판에 타우루스 특급이라고 표시된 열차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13)는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알레포라는 지명이 귀에 익다. 최근 몇 년간 시리아내전과 IS와 관련된 이슈로 뉴스와 신문에 등장했던 곳이다. 1930년대 당시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던 알레포는 이스탄불에서 기차를 갈아타면 유럽으로 갈 수 있는 도시였던 것이다. 아직 아시아, 아프리카의 식민지들이 독립하기 전이었던 당시 지구상에는 훨씬 적은 국가가 존재하고 있었고, 오늘날 유럽의 국경을 가로지르며 여행하는 것처럼 유럽과 오리엔트 식민지 사이를 기차여행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의 지구촌보다 1930년대가 훨씬 국제적(international)이고 글로벌(global)했다고도 할 수 있다. 식민지 조선에서 철로로 유럽으로 접속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일제라는 제국주의 열강에 지배받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는가. 제2차세계대전 이후,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수많은 국경들이 지도상에 새로 생겼고, 냉전으로 인해 그러한 국경들은 훨씬 오고 가기 어렵게 변했다. 한반도 남쪽에서 대륙으로 가는 철로가 끊기고 남한이 일종의 섬으로 변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혹은 유럽으로 가는 기차의 출발역이었던 알레포가 내전으로 인해 폐허가 된 것 역시 마찬가지다.

다시 오리엔트 특급 살인으로 돌아가자면 살인사건이 일어날 당시 기차에 타고 있던 용의자는 모두 13명이다. 프랑스인 차장 미쉘, 이탈리아계 미국인 포스카렐리, 피살자의 미국인 비서 매퀸과 영국인 하인 매스터맨, 러시아의 드래고미로프 공작 부인과 그녀의 독일인 하녀 슈미트, 스웨덴인 간호사 그레타 올슨, 영국인 가정교사 메리 더밴햄, 헝가리의 안드레니 백작 부부, 영국인 군인 아버스넛 대령, 미국인 탐정 하드맨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고립되고 폐쇄된 기찻칸의 승객들이 모두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국적, 나이, 성별, 신분 등이 모두 각각 다른 사람들이다. 마치 기찻칸 하나가 하나의 세계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저자는 오리엔트 특급 열차를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하나의 소우주로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부분적으로는 <설국열차>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정체하고 쇠퇴해가는 유럽과 성장해 가는 미국의 대비가 소설 속에서 주된 소재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이 1930년대의 세계는 지금보다 오밀조밀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또 하나의 무대는 오리엔트 특급 열차가 결코 갈 수 없는 곳, 미국이다. 미국에서 과거에 일어났던 유괴 사건이 오리엔트 특급 안에서의 살인 사건을 유발시킨 계기가 되었다. 탐정 푸아로의 말을 통해 그 점을 알 수 있다.

제일 먼저 관심을 끈 점은 이스탄불을 떠난 다음 날 부크 씨가 식당차에서 제게 한 말이었습니다. 모든 계급과 모든 국적을 대변할 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기차 안에 모여 있어서 흥미롭다는 말이었지요. 전 그 말에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 말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을 때 도대체 어떤 곳에 이렇게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 보았습니다. 답은 미국이었습니다. 미국이라면 한 집안에 이렇게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일 수 있습니다.(323, 324)

하나의 세계에 대한 은유였던 오리엔트 특급 열차는 다시 한 번 미국이라는 나라로 환유된다. 다양한 국적과 민족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용광로(melting pot)로서 말이다. 미국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유학하고 평생 전세계를 떠돌아다녔던 진정한 세계인 애거서 크리스티의 대표작이 다양한 국적과 계급이 망라된 작품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저자는 오리엔트 특급이라는 하나의 기차 안에 하나의 세계를 욱여넣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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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혹은 그림자 - 호퍼의 그림에서 탄생한 빛과 어둠의 이야기
로런스 블록 외 지음, 로런스 블록 엮음,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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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미국이 전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라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건국으로부터 250년이 채 되지 않고, 식민지의 역사까지 합쳐도 400년 정도 되는 역사가 얕은 나라다. 정치와 경제에 있어 역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스페인 사람이 "우리나라가 수백년 전에는 세계 최강대국이었다"고 자랑해도 "그러시군요"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반면에 문화는 역사적 축적이 가지는 무게가 크다. 그리스 사람이 호메로스와 플라톤에 대한 자부심을 피력한다면 들어줄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미국은 수천년간 유럽과 아시아에 비해 문화적 변경에 있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문화 중에서도 문학은 미국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큰 분야다. 단테와 세브란테스의 시대까지 거슬러 오라가지는 못하더라도, 영어라는 언어적 자산을 공유하는 셰익스피어까지는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미국문학만을 보더라도 호손과 포에서 폴 오스터와 커트 보네거트로 이어지는 계보는 다른 나라들에 결코 꿀리지 않는다. 사실 문학, 그 중에서도 소설이라는 장르는 역사가 짧다(소설을 뜻하는 영어 단어 novel은 '새롭다'는 뜻이다). 18세기에 처음 국가를 형성한 미국도 따라잡기가 어렵지 않은 분야였던 것이다.

미술에 관해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부터 피카소에 이르는 미술사의 계보에서 미국의 이름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물론 미국이 낳은 미술사의 거장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잭슨 폴록,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은 미국이 20세기 후반 현대미술을 이끌어나간 나라임을 역설한다. 그러나 루브르, 오르세, 에르미타쉬 미술관의 그림들이 걸어온 발자취에서 이들 거장들의 작품은 어딘가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폴록, 워홀, 리히텐슈타인이 고흐, 고갱, 모네의 그림들보다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종류의 감수성을 요구하는 장르임은 틀림없다.

미국인들도 폴록, 워홀, 리히텐슈타인의 전위적이고 최첨단을 달리는 작품을 사랑하는 이들은 소수의 인텔리겐챠가 아니었을까?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한 화가는 따로 있었다. 이 책의 주인공 에드워드 호퍼(1882-1967)다. 그의 사실주의 작품들은 제1차세계대전, 대공황, 제2차세계대전이 세계를 휩쓸었던 20세기 전반을 그리고 있다. 비록 유럽의 화가들에 비하면 한국에서는 지명도가 떨어지겠지만, 미국에서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을 주제로 하여 <빛 혹은 그림자>라는 책까지 나왔다.

<빛 혹은 그림자>는 독특한 앤솔로지(anthology, 특정한 주제로 여러 작가들의 글을 모은 것)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17개을 모티프로 오늘날 미국의 작가 17명이 단편소설을 썼다. 과문하게도 나는 스티븐 킹과 조이스 캐럴 오츠의 이름밖에 모르겠지만 이들이 오늘날 미국문학의 최전선에 서 있는 인물들임은 틀림없다. 에드워드 호퍼라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여기에 실린 글들은 배경이 되는 시대도 다르고, 글의 장르나 스타일도 다르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작품(<11월 10일의 사건>이나 <밤을 새우는 사람들> 등)이 있는가 하면, 호퍼의 그림이 그리고 있는 장면의 뒷이야기를 그린 작품(<밤을 새우는 사람들>이나 <자동판매기 식당의 가을> 등)도 있기도 하고, 호퍼의 그림과 직간접적 연관이 없이 주제만을 따온 작품(<바닷가 방>과 <직업인의 자세> 등)도 있다. 

하지만 각각 다른 이야기들임에도 불구하고 소설들에서 어떤 공통적인 정서가 느껴진다. 바로 폭력의 그림자다. <정물화 1931>에는 인종차별의 그림자, <사건의 전말>과 <11월 10일의 사건>에는 냉전의 그림자, <햇빛 속의 여인>에는 베트남전쟁의 그림자, <자동판매기 식당의 가을>과 <음악의 방>에는 대공황의 그림자, <밤을 새우는 사람들>과 <영사기사>에는 가정폭력의 그림자, <푸른 저녁>과 <밤의 창문>에는 여성에 대한 폭력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호퍼의 그림들은 단순명료한 선과 탁한 색의 대비가 특징적이다. 예외적으로 <바닷가 방>은 바닷가로부터 쏟아져내리는 빛이 중심이 되는 밝은 그림이지만, 여기서도 빛과 경계를 이루는 그림자가 그림을 완성시키는 요소다. 대공황 시기 미국의 우울한 사회상이 호퍼의 작품들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빛 혹은 그림자>지만, 역시 대부분의 소설들이 미국 역사에 드리워진 그림자들을 다루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호퍼의 작품들은 미국적인, 너무나 미국적인 작품들이고, 이 점이 미국인들이 이 작가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고 생각된다. 미국이라는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과 <빛 혹은 그림자>에 수록된 소설들이 가장 좋은 교재가 되리라 생각한다.

앤솔로지라는 특성상, 옥석이 구분되지 않은 느낌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수록된 작품들 중에서 <밤을 새우는 사람들>, <직업인의 자세>, <음악의 방>, <영사기사>, <창가의 여자>, <밤의 창문>, <자동판매기 식당의 가을>을 수작으로 꼽고 싶다. 에드워드 호퍼 외에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들에 대해서도 같은 컨셉의 앤솔로지가 나왔다면 어땠을까? 잭슨 폴록이나 앤디 워홀의 작품들에 대해서 미국의 작가들이 앤솔로지를 냈다면? 그런 책도 읽어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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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대학살 - 프랑스 문화사 속의 다른 이야기들 현대의 지성 94
로버트 단턴 지음, 조한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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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읽은 마지막 책이다. 1984년 원서가 출판된 <고양이 대학살> 현재는 문화사 연구를 대표하는 현대적 고전으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18세기 프랑스 사람들이 듣고, 읽고, 썼던 텍스트들을 토대로 하여 현대인들과는 전혀 달랐던 당시 프랑스인들의 정신세계를 재구성하려고 한다.

우선 가장 주목을 끄는 제목 <고양이 대학살>은 1730년대 파리의 인쇄소에서 있었던 노동자들의 고양이 학대 사건에서 따왔다. 주인으로부터 모욕적인 대우를 받고 있던 인쇄소 노동자들은 모략을 꾸며 주인 부부가 아끼던 애완 고양이를 재판에 처하고 잔혹하게 살해한다. 저자는 이 사건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회상을 드러낸다. 당시에 애완동물을 기른다는 개념 자체가 없던 노동자들이 자신들에 대한 부당한 처우에 대한 상징적 보복으로 주인 부부가 기르던 고양이를 죽인 것이다. 1984년의 저자는 "이것은 현대의 독자에게는 노골적으로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재미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115)는 신중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애완동물을 반려동물이라는 말이 대체하고 고양이 인기가 높아진 2017년의 독자들에게는 노골적으로 혐오스러운 것으로 비춰질 것 같다. 고양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폭력성과 잔혹성은 반세기 뒤, 프랑스혁명에서의 학살을 예고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책은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빨강모자, 장화신은 고양이 등을 통해 농민들의 삶을 분석한다. 여기서는 혹독했던 농민들의 삶을 통해 무질서하고 부조리로 가득했던 프랑스 농촌 사회의 균열을 엿볼 수 있다. 2장은 앞서 이야기한 고양이 학살을 통해 도시 노동자들의 삶을 분석한다. 3장은 평민과 귀족 사이에서 부르주아의 기억을 통해 신분제 사회의 혼란과 그에 대한 상류층의 불안을 분석하고 있다. 1-3장을 통해 공고했던 신분제 사회가 불안과 혼돈, 하극상의 전조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6장은 지식인들에 대한 기록이다. 4장은 특이하게도 경찰관료인 데므리가 당시의 불온사상이라 할 수 있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에 대해 기록한 보고서를 분석하고 있다. 5장은 백과전서 서문을 통해 새로운 지식의 체계를 살펴보고 있으며, 6장은 한 독자의 서적 구매 목록을 통해 당시 지식인의 세계관을 분석하고 있다. 특히 당시에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루소의 저작들에 대한 저자와 독자들의 이야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6장을 통해 당시 농민, 노동자, 부르주어, 관료, 지식인의 눈을 통해 본 세계의 전체적인 모습이 어느 정도 조감된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의 방법론을 역사학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프랑스혁명 직전 18세기 사람들의 세계관은 현재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것은 흥미로운 작업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어려운 내용이 많아서 읽기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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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정치 - 유머와 반전이 넘쳐흐르는 서민의 정치 에세이
서민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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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귀순한 북한 병사의 몸에서 기생충이 수십여 마리나 발견되면서 한국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회나 육회 같은 음식에 대해 께림칙하게 여기는 사람도 많아졌고, 나 역시 오랜만에 구충제를 먹었다. 그 무렵 라디오의 시사 방송에서 "회를 먹음으로써 얻는 이득이 기생충의 위험을 상쇄합니다. 육회요? 맛있잖아요. 드세요. 선지요? 어떻게 그렇게 맛있는 것만"라고 대답한 '육회한' 인터뷰가 화제가 되었다. 기생충 연구자 중 가장 유명한 서민 단국대 교수였다.

요 며칠 서민 교수가 이번에는 유쾌하지 않은 일로 화제가 되고 있다. 경향신문 블로그에 올린 '문빠가 미쳤다'라는 글이 문제가 된 것인데, 이 글에서 그는 이른바 '문빠'에 대해 "환자"라고 하는 등, 원색적인 비판을 하고 있다. 인터넷 상에서는 이 글에 대한 찬반을 둘러싸고 다양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서민 교수를 비판하는 사람들 중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비판이 몇 가지 있었다. "박근혜 때는 찍소리도 못했으면서"라거나 "박근혜 때였으면 교수 그만뒀어야 할 것"이라는 비판들이다. 서민 교수는 박근혜 정부 당시 경향신문에 박근혜 정부를 비판, 풍자하는 칼럼을 거의 매주 연재하고 있었지 않은가? 그 칼럼들만 모아서 최근에 <B급정치>라는 제목의 책으로 나왔다. 반어법으로 가득한 그의 칼럼들은 당시 야권 지지자들 사이에서 여러 번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물론 그런 사실들을 모를 수는 있다. 그런데 더욱 황당한 반응은 서민 교수가 박근혜 정부 당시 썼던 칼럼들의 링크를 근거로 박근혜빠로 몰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근거로 들고 있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에게서 이순신 장군을 보다"라는 글과 "윤창중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등이다. 칼럼 본문을 읽어보면 이 글들이 반어법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이나 윤창중 대변인을 비판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는데 말이다(2006년에 쓴 "차라리 박근혜가 낫겠다"라는 글도 화제가 되고 있는데, 이 칼럼은 나 역시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반어법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1. 상당수 네티즌은 제목만 보고 본문은 읽지 않는다.
2. 상당수 네티즌은 행간에서 숨겨진 의미를 읽어내는 능력이 떨어진다.

그런데 이것은 네티즌들의 독해력과 문해력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풍자와 반어법, 패러디가 가진 본질적 문제이기도 한 것 같다. 반어법은 '나는 A라고 쓰지만 독자들은 B라고 이해해 줄 것을 기대하는' 암묵적 전제 위에서 비로소 성립하는 맥락의존적 발화다. 그런데 A라고 쓰여있는 것을 B라고 이해하는 것은 저자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독자의 선의가 작동해야만 한다. 독자가 악의를 가지고 해석하거나 적어도 선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A라고 쓰여진 부분을 비판하게 된다. 어떤 글이 원래 쓰여진 맥락으로부터 단절되어 떠돌아다니게 되는 SNS 시대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박근혜 대통령에게서 이순신 장군을 보다"라는 제목을 본 사람이 본문은 확인도 하지 않고 이 사람은 박사모인가보다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10초도 걸리지 않는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작금의 커뮤니케이션 양상은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어쨌든 이번에 화제가 된 "문빠가 미쳤다"는 글로 돌아가 보자. 여기서 저자는 청와대 수행기자들이 중국 경호원들로부터 폭행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폭행을 당한 기자들을 비난하는 일부 네티즌들의 어긋난 행태를 지적한다. 그리고 이른바 '문빠'라 불리는 네티즌들의 진영논리와 이중잣대 등을 비판하고 있다. 나 역시 이러한 비판은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문빠가 환자이며 치료가 필요하다고 한 부분이다. 이것은 사실 여부를 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레토릭으로서도 부적절하다. 심지어 저자는 의사이자 의대 교수인데 "환자"라는 말을 매도(罵倒)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부분은 우려스럽다. 역시 풍자와 조롱은 양날의 칼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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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의 물음
나카지마 다케시 지음, 이목 옮김 / 김영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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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일화들을 듣게 되었다. 아내가 서양 의학 치료를 받는 것을 막은 탓에 사망케 했지만 자신의 학질은 서양 의학을 통해 치료를 받았다거나 어린 소녀들을 동침하게 했다거나 하는 이야기였다. 그동안 간디를 위인 내지는 성인이라고만 알았다면 놀라운 이야기다.

간디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는 책 <간디의 물음>에도 간디의 사생활 측면에서의 부적절한 언행에 대한 증언들이 나온다. "실제로 그의 아내 카스투르바이는 폭군처럼 구는 남편 간디 때문에 무척 많은 눈물을 흘렸"(137)다고 하기도 하고, 장남 하릴랄 역시 지나치게 엄격한 아버지 탓에 비뚤어져 알코올중독에 빠지기도 했다. 물론 사생활은 말 그대로 개인적인 문제이니 간디의 공적인 활동과는 선을 그어서 생각해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간디의 물음>에서도 나오듯이 간디는 "나의 삶이 곧 나의 메시지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간디 자신의 삶에 나오는 언행이 일치를 이루지 못했다면 그것은 (공인으로서는 어쨌든 사인으로서는) 문제가 아닐까? 예를 들어 앞서 나왔듯이 자신의 몸을 따뜻하게 만들도록 젊은 여성들에게 몸을 밀착하고 자도록 했던 일화에 대해 간디 자신은 "금욕주의 실험이었다"고 변명했다. 하지만 문제의 여성들은 "간디의 요구가 금욕주의 실험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간디가 그런 식으로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그 행위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었을 때부터였다"(117)고 증언한다. 금욕주의를 설파하며 성욕을 끊었다고 주장한 간디의 이중적 태도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는 만년에 이르기까지 성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성욕을 시험해본다는 행위는, 미미하기는 하지만 자기 내부에 여전히 성욕이 잔존하고 있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그런 행위를 일부러 시험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중략)
간디가 성욕의 억제에 부단히 집착했던 것은 자기 자신이아무리 노력해도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욕망으로부터 정말로 해방된 사람은 욕망을 억제하는 문제를 고집할 이유가 없습니다. (118)

저자는 간디조차도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술도 안 되고, 육식도 안 되고, 사치도 안 되고, 의사 진료도 안 받고, 섹스도 안 되고, 돈을 필요 이상으로 모으는 것도 안 되"(108)는 간디의 극단적 금욕주의는 원리주의(原理主義)로 느껴지기조차 한다. 간디의 극단적 금욕주의가 결국은 자신의 가족들이나 주변인에 대한 독선적이고 억압적 태도로 드러났던 것이 아닐까?

간디의 생애와 사상을 읽으며 욕망을 무조건적으로 부정하기보다는 "늘 자신의 욕망과 마주하며 반성적으로 살아"(140)가는 것이 더 바람직한 삶의 방식이 아닐까? 스스로의 욕망을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것 못지 않게 욕망을 억지로 부정하며 살아가는 것 역시 건강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욕망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더라도 최대한 줄여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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