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 동서분당의 프레임에서 리더십을 생각한다
이정철 지음 / 너머북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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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어느 인터넷 유머 사이트에서 "탕수육으로 본 붕당의 이해"라는 글이 올라와 화제가 되었다. 탕수육 부먹-찍먹 논쟁에 조선시대 당쟁을 비유한 이 글에는, 탕수육에 소스를 부어먹는 사람들은 동인, 탕수육을 소스에 찍어먹는 사람들은 서인, 동인 중에서도 붓기 전에 양해는 구하는 사람들이 남인, 양해 없이 붓는 사람들은 북인, 서인 중에서 살짝만 찍어먹는 사람들이 노론, 푹 찍어 먹는 사람들이 소론, 반은 찍어먹고 반만 붓는 것이 탕평책, 소스 없이 먹는 사람은 서학 등, 절묘한 비유가 있어 많은 패러디를 낳는 등 화제가 되었다.

조선시대 당쟁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관점이 있겠지만, 당쟁이 정치적, 사상적 내용과 유리되어 그저 당쟁을 위한 당쟁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이 문제점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당쟁의 최대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예송논쟁은 효종이 사망했을 때, 인조의 계비가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가에 관한 논쟁이었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은 1년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했고, 남인은 3년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그게 뭣이 중헌디!"라고 생각되기에, 오늘날 예송논쟁은 허례허식 때문에 일어난 소모적 논쟁의 대명사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당대에는 신권을 중시하는 서인(이후, 노론)과 왕권을 중시하는 남인의 입장이 반영된 정치사상적 내용을 담고 있는 심각한 논쟁이었다 할 수 있다.(여담이지만, 소설가 이인화가 <영원한 제국>을 출판한 이후, 남인과 정조에 우호적이고, 서인 노론을 악의 축으로 그리는 작품들이 대중매체에 자주 등장한다.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이나 <비밀의 문>, 영화 <역린> 등이 대표적이다.)

이는 유교국가였던 조선의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정치인과 관료를 선발하는 과거시험은 사서오경을 비롯한 유교 고전들을 시험 문제로 제출했었고, 공자왈 맹자왈을 잘 외우는 것이 정치인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즉, 조선의 정치인들은 정치인인 동시에 학자였고, 지식인이었다. 조광조 이후의 성리학자들은 말 그대로 유교의 성인군자를 이상적인 정치인의 모델로 삼고 있었고, 정치를 통해 유교 이상사회를 실현하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었다. 따라서 유교 경전을 어떻게 해석해서 상복을 얼마나 입을지 결정하는 것이 중요한 정치사상 논쟁이 되었던 것이다.(반면에 서양에서는 정교분리와 정교통합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대립의 축이라 할 수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성경에 나온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는 말이 나타내듯이 정교분리가 원칙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는 선조가 친정을 시작한 선조 8년부터 임진왜란 직전의 선조 23년까지를 다루고 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비롯한 소윤 세력이 몰락하면서, 외척과 훈구파를 대신하여 사림파가 집권하게 된 선조 시대. 우연한 계기로 사림은 노장 그룹인 서인과 신진 그룹인 동인으로 분열하게 된다. 이는 서인의 영수 심의겸의 집이 한양 서쪽에, 동인의 영수 김효원의 집이 한양 동쪽에 위치했던 데서 기인한 명명이다.(참고로 오늘날 통용되는 우파, 좌파는 프랑스혁명 직후, 보수파가 국회의장 오른쪽에, 혁명파가 국회의장 왼쪽에 앉았던 데서 유래했다.)

동인들은 인순왕후의 동생이었던 심의겸을 외척으로 보고 배척했다. 율곡 이이는 동인과 서인 사이에서 이들을 화합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동인들에게 배척 당하고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게 된다. 이후 동인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양자의 균형자 역할을 하던 선조는 정여립의 난 직후에 일어난 기축옥사를 통해 서인의 정철을 앞세워 동인(특히 강경파였던 북인)을 숙청한다.

저자는 조선 중기를 지배했던 당쟁의 기원을 분석하면서, 동서분당의 원인이 권력에 대한 욕망과 도덕적 확신에 있었다고 말한다. 동인은 심의겸과 서인을 사파로 규정하고,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확신했다는 것이다. 정치의 세계에서 상대방을 악으로 규정하고 배척하게 될 때의 위험성은 오늘날의 정치현실을 생각할 때도 참조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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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100쇄 기념 아트 에디션)
김훈 지음, 문봉선 그림 / 학고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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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양대 전란이라 할 수 있는 임진왜란/정유재란과 정묘호란/병자호란을 비교하면 병자호란이 훨씬 암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의 활약은 말할 것도 없지만, 각지에서 의병들이 궐기하기도 했고, 권율, 김시민, 곽재우, 유성룡, 윤두수, 이산해, 이덕형, 이항복, 곽재우, 김천일, 조헌, 서산대사, 사명대사, 논개, 허준 등의 쟁쟁한 위인들이 활약했다. 반면에 삼전도의 굴욕으로 끝난 병자호란의 경우에는 꿈도 희망도 없다. 파죽지세로 진격해 오는 청나라 군대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도망간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은 청나라 군대를 피해 남한산성으로 도망친 인조와 최명길, 김상헌, 김류, 이시백, 그리고 성 안의 대장장이 서날쇠와 나루터 사공의 딸 나루 등의 인간군상을 그리고 있다. 원군은 올 기미가 보이지 않고, 청군에 비해 성 안의 조선군은 상대가 되지 않고, 혹독한 추위 속에서 물자는 점점 떨어져 가는 남한산성의 사람들은 하루하루 절망의 나날을 살아간다.

(전략) 안팎으로 통하는 길이 멀고 외가닥이어서 한번 막히면 갇혀서 뚫고 나가기가 어려우며, 아군이 성문을 닫아걸고 성첩을 지키면 멀리서 깊이 들어와 피곤한 적명이 강가의 너른 들에서 진을 치고 앉아 힘을 회복할 수 있고, 성 밑이 가팔라서 안에서 웅크리고 견딜 수는 있으나 나아가 칠 수가 없으며, 좌우가 막히고 가운데가 열려 적이 열린 곳을 막으면 목이 눌리고, 목이 눌리면 안팎이 통하지 못하여 원군을 불러서 부릴 수가 없으며, 또 성이 산에 기대어 있다 하나 성 밖 산봉우리에서 성 안이 손샅처럼 굽어보여 내리쏘는 적의 화포를 피할 길이 없고, 성 안 농토의 소출이 백성들의 일용에도 못 미쳐서 적이 성을 깨뜨리지 않고서도 말려 죽일 수도 있고, 도성과 민촌이 가까워서 멀리서 온 적들이 약탈과 노획으로 군수를 충당하며 머물 수 있으니 병서에 이른 대로, 막히면 뚫기가 어려워서 멀리 도모할 수 없고, 웅크리고 견딜 수는 있으나 나아가 칠 수 없으므로 움직이면 해롭고, 시간과 더불어 말라가니 버틸수록 약해져서 움직이지 않아도 해롭고, 버티고 견디려면 트인 곳을 막아야 하는데 트인 곳을 막으면 안이 또한 막혀서, 적을 막으면 내가 나에게 막히게 되니 막으면 갇히고, 갇혀서 마르며, 말라서 시들고, 적이 강을 차지하니 물이 적의 쪽으로 흐르고, 안이 먼저 마르니 시간이 적의 편으로 흐르는 땅이 바로 여기라 말하는 지관들도 있었는데, 그 또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덕의 거룩함을 말하는 목소리는 컸고, 곤궁함을 말하는 목소리는 작았다. 큰 목소리는 높이 울리면서 퍼졌고, 작은 목소리는 낮게 스미면서 번졌다. (35,36)

원군이 올 가망이 없는 가운데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남한산성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게 변한다. 성문을 열고 항복할 것인가, 아니면 싸우다 전멸할 것인가? 책 소개에는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라는 말이 있다. 이순신 장군의 "생즉사 사즉생(生即死 死即生)"을 떠올리게 한다. 소설 속에서 죽어서 살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척화파 김상헌이고, 살아서 죽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주화파 최명길이다. 양쪽 모두 절망적인 상황에서의 나름대로의 논리와 고뇌를 가지고 있다. 김상헌은 "무도한 문서를 성 안에 들인 수문장을 벌하시고 적의 문서를 불살라 군병들을 격발케 하옵소서. 애통해 하시는 교지를 성 밖으로 내보내 삼남과 양서의 군사를 서둘러 부르셔야 하옵니다. 이백 년 종사가 신민을 가르쳐서 길렀으니 반드시 의분하는 창의의 무리들이 달려올 것입니다"(145,146)라고 말한다. 최명길은 "세상이 모두 불타고 무너진 풀밭에도 아름다운 꽃은 피어날 터인데, 그 꽃은 반드시 상헌의 넋일 것이옵니다. 상헌은 과연 백이이오나, 신은 아직 무너지지 않는 초라한 세상에서 만고의 역적이 되고자 하옵니다"(314,315)라고 말한다. 

인조는 둘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뇌한다. 영의정 김류는 "출성과 수성은 결국 다르지 않을 것"(238)이라며 오락가락한다. 척화를 주장하는 김상헌이라고 해서 수성하여 버틸 수 없음을 모르지 않고, 주화를 주장하는 최명길이라고 해서 청나라 군대에 임금이 무릎을 꿇는 것이 치욕스럽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출성과 수성은 모두 가야만 하는 길이고, 갈 수 없는 길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인조와 최명길, 김상헌의 내면 묘사는 상당히 깊이가 있으며 무게감이 느껴진다. 문제는 소설에서 민초들의 대표로 등장하는 성 안의 대장장이 서날쇠와 뱃사공의 딸 나루다. 이들은 소설 속에서 대상화되고, 인조나 김상헌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기능적 역할만을 수행한다. 나루는 변변한 대사조차 없고, 서날쇠 역시 조정이 성에서 나가야 백성들이 살 수 있다는 말을 할 뿐이다. 나는 인조와 대신들의 이야기만으로 이 소설이 충분히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저자는 서문에서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 받는 자들의 편이다"(5)라고 말한다. 만약 저자가 서날쇠와 나루를 등장시켜 전란 속에서도 살아남고 삶을 이어가는 민초들의 꿋꿋한 인생을 그리고자 하였다면, 그 부분은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인조나 김상헌, 최명길에 비해서 서날쇠나 나루의 인물 묘사는 피상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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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와 죽은 자 스토리콜렉터 32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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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주의*

독일의 추리소설 작가 넬레 노이하우스의 <타우누스 시리즈>는 프랑크푸르트 근처의 타우누스 지역을 배경으로 형사 보덴슈타인과 피아가 활약한다. 한국에 번역된 순서는 다르지만, 출판된 시간 순으로 <사랑받지 못한 여자> <너무 친한 친구들> <깊은 상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바람을 뿌리는 자> <사악한 늑대> <산 자와 죽은 자> 그리고 최근의 <여우가 잠든 숲>이 있다. 사실 개인적으로 <백설공주에게 죽음을>까지는 어려운 독일 이름의 용의자들이 많이 등장해서 사건이 안 풀리다가 어찌어찌 해결한다는 스토리가 딱히 재미있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최근 작품들은 작가의 필력이 많이 향상되었는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이 시리즈의 특징은 작품이 계속 나올수록 보덴슈타인과 피아의 사적인 인간관계 또한 깊이있게 묘사된다는 것이다. <사랑받지 못한 여자>의 2005년부터 <산 자와 죽은 자>의 2013년까지 보덴슈타인과 피아는 이혼도 하고, 연애도 하고, 재혼도 한다. 때로는 말 안 듣는 부하나 재수없는 동료 때문에 속을 썩이기도 한다. <산 자와 죽은자>에서 피아는 연말연시에 휴가를 얻었다가 사건 때문에 휴가를 취소하게 된다.

또한 사회파적 요소 또한 있는데, <깊은 상처>는 홀로코스트를, <바람을 뿌리는 자>는 지구온난화와 풍력발전을, <사악한 늑대>는 아동포르노 문제를 다루고 있따. <산 자와 죽은 자>는 장기기증 문제가 중심에 있다. 저격수의 총격으로 선량한 사람들이 하나 둘 죽어가는데, 연관성이 없어보였던 연쇄살인은 10년 전 사고로 사망한 뒤 장기를 기증한 여자의 유족의 복수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뇌물을 받은 병원 측에서 강압을 통해 보호자로부터 장기 기증을 하게 했던 것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세계에서 제일 투명하고 준법정신이 투철할 것 같은 나라 독일이다. 그런 나라에서 이런 소설이 나오다니 놀랍다. 더구나 소설이 모티프로 삼은 사건이 실제로 독일에서 벌어진 것 같다는 암시도 소설 속에 나온다. 그동안 장기 기증에 대해서 막연히 좋은 일이라고만 생각해왔다. 그런데 어쩌면 장기 기증을 둘러싼 유족과 병원 사이의 문제는 그리 아름답기만 한 이야기는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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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무중에 이르다
정영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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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오리무중에 이르다>를 읽기 시작하면, 끝날 듯 끝나지 않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긴 문장들에 강한 인상을 받게 된다. 백문이 불여일견,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나는, 어디에도 없는 곳에 가면 어디에도 없는 사람 정도는 될 수도 있겠지만 어디에도 없는 곳은 어디에도 없으니 어디에도 없는 곳을 갈 수는 없을 테지만 그럼에도 마음속으로 어디에도 없는 곳을 향해 어딘가를 가다보면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가고 있는 사람이거나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가고는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가느라 어디에도 가지 못하는 사람 정도는 될 수도 있겠지, 하는 어지러운 생각을 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머리가 무척 어지러운 덕분인 것 같았다. (299, 300)

위의 인용문은 한 문장이다. 그리고 이 책에 나오는 문장들 중에서는 상당히 짧은 편에 속한다. 어떤 문장은 두 페이지에 걸쳐 마침표 없이 쉼표만으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읽는 게 난해해서 소설 내용을 쫓아가는 것이 어렵기도 했다. 하지만 끝날 듯 끝나지 않는 문장들은 묘한 리듬감을 느끼게 한다. 특유의 읽는 맛이 있다고나 할까. 

화자의 의식의 흐름이 도대체 어디로 이어질지 감을 잡을 수가 없어 그야말로 오리무중인 느낌을 들게 만든다. 소설이 그리고 있는 종잡을 수 없는 혼란스러운 느낌을 표현하기에는 이러한 문장이 적역이라는 생각도 든다. 다음 인용문을 보면 특유의 문장 스타일을 통해 소설에서 궁극적으로 말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다.

오래전부터 모든 것이 아무래도 좋은, 아무런 필연성이 없는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것 같았고, 그 필연성이 없는 세계는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일어나도 그만, 일어나지 않아도 그만, 뭔가가 어떤 식으로 일어나도 그만, 다른 식으로 일어나도 그만인, 아무런 원리가 없는 세계였다. 이 세계에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일 같은 것은 없었다. (78)

궁극적으로 아무런 필연성이 없는 세계의 문제를 이 소설은 다루고 있다. 제목에 나타난 오리무중이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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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침대 위에 부는 바람 - 야하고 이상한 여행기
김얀 지음, 이병률 사진 / 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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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야하고 이상한 여행기"라는 부제가 붙은 <낯선 침대 위에 부는 바람>의 저자는 어디선가 교도소나 군대에서 책을 읽은 독자가 많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도 그럴 법 하다. 어딘가에 갇혀 있는 사람이 가장 갈망하는 무언가가 이 책에는 있다. 나 역시 군대에서 이 책을 처음 읽었다. 당시 나는 여행기를 즐겨 읽었다. 방콕, 싱가포르, 믈라카, 홍콩, 오타와, 뮌헨, 프라하, 가 본 적 없는 외국 도시들의 이름을 마음 속 지도에 그렸다. 어디에도 갈 수 없는 몸이었기에 제대만 하면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세계일주의 계획을 세워 보기도 하였다. 제대하고 나서 1년이 지났다. 세계일주는 무슨. 일본에만 몇 번 다녀왔을 뿐이다.

작가 파울로 코엘료는 "여행은 언제나 돈의 문제가 아니라 용기의 문제다"라고 말했다. 왜 돈의 문제가 아니겠냐만, 역시 여행에 가장 필요한 것은 용기가 아닐까 싶다. 이를테면 낯선 장소에서 낯선 사람을 만날 용기 말이다. 낯선 여행지에서의 만남들을 기록한 이 에세이가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싶다. 동남아시아에서 유럽까지 전세계를 종횡무진 떠돌아다니는 저자가 부러웠다.

저자와 나는 성별, 성격, 성향, 나이, 살아온 과정, 그리고 무엇보다 연애경험까지 모든 것이 다르지만, 책을 읽으며 묘한 친근감을 느꼈다. 공통점이라면 2008년 무렵에 일본에서 살았다는 것(도시는 달랐다)과 2013년에 첫 책을 출판했다는 것(나는 번역서였지만) 정도일 것이다. 저자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무라카미 류인데, 나는 하루키를 더 좋아한다. 책에서 내 이야기 같다고 느낀 부분은 아무런 계획 없이 직장을 그만두고 막막하게 싱가포르로 떠나기 위해 모친에게 돈을 빌리는 대목이었다.

천사 같은 나의 엄마. 서른이 되어도 여태껏 철없이 겉도는 딸은 감사하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 휴대폰 전원을 껐다. 글을 쓰기 위해 여행을 한다는 것은 사실 핑계였다. (중략) 자괴감이 들었다. 과연 내가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냥 평생 읽는 사람으로 만족해야 하는 건 아닐까? 이번 여행이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서른이 넘어서까지 갈대처럼 흔들리며 살 수는 없다고 다짐했다. (45)
 
내일 모레 서른인데, 취직도 못하고(혹은 안 하고) 돈도 못 벌면서 부모님께 의지하고 있는 내 처지가 한심하고, 지금까지 뭐 하며 살았는지 후회스럽고, 앞으로는 뭐 하고 살지 막막하지만, 그렇다고 막상 취직을 할 용기는 안 나서 막막하고 불안하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내게 이 문장은 나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왜 남들처럼 평범하게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며 살지 못하는 걸까, 고민하던 내게 아마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저자의 책은 위로가 되었다. 저자처럼 철없이, 혹은 자유롭게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이다. 군대는 제대했지만, 그래서 용기만 내면 어디든 갈 수 있겠지만, 여전히 어디로도 떠나지 못하는 내게 <낯선 침대 위에 부는 바람>은, 그리고 이 책의 저자는 여전히 부러움과 동경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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