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기사단장 죽이기 - 전2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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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음.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었다. 1인칭 화자 주인공은 초상화를 그려서 생계를 꾸리는 화가다. 어느날, 아내가 이혼을 통보하자 집을 나가서 자동차를 타고 한동안 정처없이 방황한다. 주인공의 사정을 알게 된 친구 아마다 마사히코는 자신의 아버지가 살던 고택에 잠시 살면 어떻냐고 권유한다. 아마다 마사히코의 아버지 아마다 도모히코는 일본화의 거장이었는데, 현재는 요양원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주인공은 아마다 도모히코가 살던 오다와라(小田原)의 고택으로 이주하게 된다.

한국 독자에게 오다와라는 낯선 지명일 것 같다. 가나가와(神奈川)현에 위치한 오다와라는 인구 20만의 도시로, 가나가와와 시즈오카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다. 도쿄에서 오사카로 가는 신칸센을 타면 요코하마 다음 역이 오다와라역이지만, 신칸센 중에서 정차하지 않는 열차도 있다. 즉, 아주 시골은 아니지만 대도시도 아닌, 지방도시치고는 제법 큰 도시다.

아마다 도모히코의 고택에 살게 된 주인공에게 어느 날부터 기이한 일이 연이어 벌어진다. 멘시키 와타루(免色渉)라는 이름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부호가 그에게 초상화를 의뢰하고, 고택의 다락방에서 아마다 도모히코가 그린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제목의 기이한 그림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가하면 밤마다 집 근처 어디선가 방울 소리가 들려온다. 이렇듯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사건들에 휘말리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긴장감 있게 전개되며 독자들이 몰입하게 만든다.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발단-전개-위기'까지는 재미있는 작품을 써 내려간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불가사의한 '무언가'를 암시하는 그의 필력은 탁월하다. 반면에 불가사의한 '무언가'의 정체가 밝혀지는 절정과 결말은 하루키 소설의 약점이라 할 수 있다. 이른바 '떡밥'을 던지는 능력은 탁월하지만, 수습을 잘 못하는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은 '무언가'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수수께끼로 남겨둔 채 찝찝하게 끝나곤 한다. 혹은 소설 속에서 그 불가사의의 정체가 밝혀질 경우에는 아주 시시해져 버리고 만다. 밤마다 들려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방울 소리와 우스꽝스러운 말투로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는 60cm의 그림 속 인물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의미심장한지는 분명할 것이다. 소설이 전개되면서 불가사의가 밝혀질수록 독자를 사로잡는 힘이 줄어드는 딜레마가 있는 것이다.

<기사단장 죽이기>는 하루키의 소설치고는 결말이 말끔하고 명확한 편이다. 멘시키 와타루의 또다른 인격 정도만 수수께끼로 남았을 뿐, 나머지는 대략적으로나마 설명이 가능한 매듭이 지어졌다. 주인공은 클라이맥스에서 실종된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현실 세계의 이면(裏面)에 있는 세계로 모험을 떠난다. 주인공은 이 탐색(quest)으로부터 무사히 귀환하고, 그녀를 구하게 되는데, 이 과정은 판타지 소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주인공이 어렸을 때 죽은 여동생, 여동생과 닮았다는 이유로 결혼한 아내, 그리고 주인공이 구하게 되는 소녀 아키가와 마리에는 이 모험에서 하나로 이어지게 된다. 모험을 통해 여동생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를 극복한 주인공은 결말에 이르러 이혼 절차를 밟고 있던 아내와 재결합을 하게 된다.

저자는 인터뷰에서 동일본대지진이 소설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는데, 그래서인지 결말 부분은 다소 설명적이거나 설교적인 느낌을 준다. 주인공이 결말에서 선택하게 되는 실존적 믿음을 통한 극복 역시 하루키치고는 진부한 교훈이다. 긴장감 있게 전개되던 이야기가 용두사미로 끝난 것 같아 실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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