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트 특급 살인 -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 원작 소설, 공식 출판작,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신영희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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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일제시대 때는 경성역(현재의 서울역)에서 만주, 시베리아를 통해 유럽까지 가는 기차표를 살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여러 번 갈아타야 했지만 철도로 조선에서 유럽을 잇는 길이 있었던 것이다. 해방 이후,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한국에서 기차로는 한반도 남쪽 밖에 여행할 수 없어졌다. 비행기가 일반화되고 기차의 속도도 점점 빨라지면서 침대차는 물론이고,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존재했던 '식당차' 역시 사어(死語)가 되고 있다. 

통일이 된다면 모를까, 몇날 며칠을 기차 안에서 보내는 여행의 낭만(romance)은 한국에서는 꿈꿀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러시아나 중국, 인도, 유럽 등에서는 여전히 그러한 기차 여행이 가능하다. 기차 객실에서 잠을 자고 식당차에서 식사를 하며 숙식을 해결하는 기차 여행 말이다. 객실의 등급이 높으면 그 외에도 여러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크루즈 여객선이 그러하듯 기차 역시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세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극단적으로 끌고 나간 작품이 기차를 세계의 메타포(metaphor)로 사용한 영화 <설국열차>다.

철도문학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다. 이스탄불에서 칼레로 가는 오리엔트 특급 열차가 갑작스러운 눈사태로 정지한 가운데, 승객 중 한 사람이 살해당하는 사건을 벨기에인 탐정 에르퀼 푸아로가 해결한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소설이 출간된 것은 이른바 전간기(戰間期)로 불리는 1934년이다. 소설 내의 배경 역시 그 무렵이다. 러시아 공작 부인은 혁명으로 인해 유럽을 떠돌아다니고, 인도에서 복무하는 영국인 대령이 나오며, 미국의 금주법에 대한 묘사가 등장하는 것으로 시대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시리아의 겨울 아침 5시였다. 알레포 역의 플랫폼을 따라 철도 안내판에 타우루스 특급이라고 표시된 열차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13)는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알레포라는 지명이 귀에 익다. 최근 몇 년간 시리아내전과 IS와 관련된 이슈로 뉴스와 신문에 등장했던 곳이다. 1930년대 당시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던 알레포는 이스탄불에서 기차를 갈아타면 유럽으로 갈 수 있는 도시였던 것이다. 아직 아시아, 아프리카의 식민지들이 독립하기 전이었던 당시 지구상에는 훨씬 적은 국가가 존재하고 있었고, 오늘날 유럽의 국경을 가로지르며 여행하는 것처럼 유럽과 오리엔트 식민지 사이를 기차여행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의 지구촌보다 1930년대가 훨씬 국제적(international)이고 글로벌(global)했다고도 할 수 있다. 식민지 조선에서 철로로 유럽으로 접속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일제라는 제국주의 열강에 지배받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는가. 제2차세계대전 이후,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수많은 국경들이 지도상에 새로 생겼고, 냉전으로 인해 그러한 국경들은 훨씬 오고 가기 어렵게 변했다. 한반도 남쪽에서 대륙으로 가는 철로가 끊기고 남한이 일종의 섬으로 변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혹은 유럽으로 가는 기차의 출발역이었던 알레포가 내전으로 인해 폐허가 된 것 역시 마찬가지다.

다시 오리엔트 특급 살인으로 돌아가자면 살인사건이 일어날 당시 기차에 타고 있던 용의자는 모두 13명이다. 프랑스인 차장 미쉘, 이탈리아계 미국인 포스카렐리, 피살자의 미국인 비서 매퀸과 영국인 하인 매스터맨, 러시아의 드래고미로프 공작 부인과 그녀의 독일인 하녀 슈미트, 스웨덴인 간호사 그레타 올슨, 영국인 가정교사 메리 더밴햄, 헝가리의 안드레니 백작 부부, 영국인 군인 아버스넛 대령, 미국인 탐정 하드맨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고립되고 폐쇄된 기찻칸의 승객들이 모두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국적, 나이, 성별, 신분 등이 모두 각각 다른 사람들이다. 마치 기찻칸 하나가 하나의 세계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저자는 오리엔트 특급 열차를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하나의 소우주로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부분적으로는 <설국열차>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정체하고 쇠퇴해가는 유럽과 성장해 가는 미국의 대비가 소설 속에서 주된 소재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이 1930년대의 세계는 지금보다 오밀조밀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또 하나의 무대는 오리엔트 특급 열차가 결코 갈 수 없는 곳, 미국이다. 미국에서 과거에 일어났던 유괴 사건이 오리엔트 특급 안에서의 살인 사건을 유발시킨 계기가 되었다. 탐정 푸아로의 말을 통해 그 점을 알 수 있다.

제일 먼저 관심을 끈 점은 이스탄불을 떠난 다음 날 부크 씨가 식당차에서 제게 한 말이었습니다. 모든 계급과 모든 국적을 대변할 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기차 안에 모여 있어서 흥미롭다는 말이었지요. 전 그 말에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 말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을 때 도대체 어떤 곳에 이렇게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 보았습니다. 답은 미국이었습니다. 미국이라면 한 집안에 이렇게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일 수 있습니다.(323, 324)

하나의 세계에 대한 은유였던 오리엔트 특급 열차는 다시 한 번 미국이라는 나라로 환유된다. 다양한 국적과 민족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용광로(melting pot)로서 말이다. 미국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유학하고 평생 전세계를 떠돌아다녔던 진정한 세계인 애거서 크리스티의 대표작이 다양한 국적과 계급이 망라된 작품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저자는 오리엔트 특급이라는 하나의 기차 안에 하나의 세계를 욱여넣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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