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의 물음
나카지마 다케시 지음, 이목 옮김 / 김영사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일화들을 듣게 되었다. 아내가 서양 의학 치료를 받는 것을 막은 탓에 사망케 했지만 자신의 학질은 서양 의학을 통해 치료를 받았다거나 어린 소녀들을 동침하게 했다거나 하는 이야기였다. 그동안 간디를 위인 내지는 성인이라고만 알았다면 놀라운 이야기다.

간디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는 책 <간디의 물음>에도 간디의 사생활 측면에서의 부적절한 언행에 대한 증언들이 나온다. "실제로 그의 아내 카스투르바이는 폭군처럼 구는 남편 간디 때문에 무척 많은 눈물을 흘렸"(137)다고 하기도 하고, 장남 하릴랄 역시 지나치게 엄격한 아버지 탓에 비뚤어져 알코올중독에 빠지기도 했다. 물론 사생활은 말 그대로 개인적인 문제이니 간디의 공적인 활동과는 선을 그어서 생각해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간디의 물음>에서도 나오듯이 간디는 "나의 삶이 곧 나의 메시지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간디 자신의 삶에 나오는 언행이 일치를 이루지 못했다면 그것은 (공인으로서는 어쨌든 사인으로서는) 문제가 아닐까? 예를 들어 앞서 나왔듯이 자신의 몸을 따뜻하게 만들도록 젊은 여성들에게 몸을 밀착하고 자도록 했던 일화에 대해 간디 자신은 "금욕주의 실험이었다"고 변명했다. 하지만 문제의 여성들은 "간디의 요구가 금욕주의 실험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간디가 그런 식으로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그 행위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었을 때부터였다"(117)고 증언한다. 금욕주의를 설파하며 성욕을 끊었다고 주장한 간디의 이중적 태도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는 만년에 이르기까지 성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성욕을 시험해본다는 행위는, 미미하기는 하지만 자기 내부에 여전히 성욕이 잔존하고 있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그런 행위를 일부러 시험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중략)
간디가 성욕의 억제에 부단히 집착했던 것은 자기 자신이아무리 노력해도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욕망으로부터 정말로 해방된 사람은 욕망을 억제하는 문제를 고집할 이유가 없습니다. (118)

저자는 간디조차도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술도 안 되고, 육식도 안 되고, 사치도 안 되고, 의사 진료도 안 받고, 섹스도 안 되고, 돈을 필요 이상으로 모으는 것도 안 되"(108)는 간디의 극단적 금욕주의는 원리주의(原理主義)로 느껴지기조차 한다. 간디의 극단적 금욕주의가 결국은 자신의 가족들이나 주변인에 대한 독선적이고 억압적 태도로 드러났던 것이 아닐까?

간디의 생애와 사상을 읽으며 욕망을 무조건적으로 부정하기보다는 "늘 자신의 욕망과 마주하며 반성적으로 살아"(140)가는 것이 더 바람직한 삶의 방식이 아닐까? 스스로의 욕망을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것 못지 않게 욕망을 억지로 부정하며 살아가는 것 역시 건강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욕망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더라도 최대한 줄여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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