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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 개정판
옥성호 지음 / 국제제자훈련원(DMI.디엠출판유통)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저자의 애착과 독자의 외면 사이에 낀 방언 논란
'저자의 사랑은 가장 많이 받았지만, 정작 독자의 사랑은 가장 덜 받은 책(p.4)'으로 저자 스스로가 소개하고 있는 옥성호의『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는 현대 교회의 민감한 사안 중 하나인 '방언' 에 대해 노골적으로 건드렸다는 자체에서부터 궁금한 독자와 불편한 독자로 지지층을 가르고 있는 독특한 책이다.
하나님의 계시서인 성경을 인간의 언어와 논리로 완벽하게 해석하는 일 자체가 애초에 한계가 보이는 시도이긴 하나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강요된(일반화된) 교리에 각자의 신앙을 짜맞추려는 것 또한 우매한 태도라 여기고 있던 내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반갑고 흥미로운 책이었다.
축복의 은사인가? 비교에서 오는 열등감인가?
저자의 고백처럼 나 역시 한때는 방언의 은사를 사모한 나머지 부흥회나 간증집회에서 여기저기 들려오는 알 수 없는 소리에 상대적 결핍감과 위축감을 느껴 기도 중에 주위를 둘러보곤 했던 경험이 있다. 게다가 나보다 뒤늦게 신앙생활을 한 성도가 어느 날 갑자기 따발총처럼 퍼붓는 방언으로 주위의 눈길을 사로잡는 일을 목격했을 때는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 자 먼저 된다'는 성경 구절이 꼭 나를 두고 지적하는 것만 같아 주눅이 들기도 했다. 간절히 갈구하는 내게는 왜 방언의 은사가 내리지 않는지, 내 신앙의 정체성은 아직도 유아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지, 하나님은 왜 나를 가둬두고 계신지 많은 의문과 절망감이 물밀 듯 찾아와 영적 방황 속에 신앙생활에 대한 회의감을 품기도 했다. 지나고 보니 그때의 간절함은 말씀의 본질을 사모하고 온전히 경배하는 섬김의 자세보다 사람들 사이에서의 평가와 비교에 더 큰 부분을 할애하며 인간적 기준에서의 등급을 마음 속에 그렸는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을 향하는 은사가 아닌 인간을 향한 은사로서 말이다.
인간의 언어인가? 하나님의 언어인가?
저자는 아버지 옥한흠 목사의 격려와 충고 속에 이 책을 저술하면서 저명한 신학자들의 견해를 인용해 방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한편 방언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의 구절을 꼼꼼하게 되짚어가며 성경이 정의하고 있는 방언의 본질과 역할은 무엇인지, 성경적 방언과 오늘날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방언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를 날카롭게 파헤쳐 들어간다. 오로지 성경에 초점을 둔 해석이야말로 정통과 이단을 구분짓는 유일한 잣대라는 측면에서 살펴 볼 때 저자는 오늘날 집단적 최면제 내지는 신비 체험 위주로 행해지고 있는 방언을 성경적 방언이 아니다,라고 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어 방언에 절대적인(호의적인) 이들에게 다소 불편한 도전을 하고 있다. 흔히 하늘의 언어(?)라고 높이 평가되는 방언의 폐해가 교회의 안과 밖에서 어떤 유형으로 드러나는지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지적해주고 있어 방언에 대한 맹목적적인 믿음을 지닌 이들에게 분별의 호소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
사도행전 속에 언급된 방언
사도행전에는 오순절 사건과 사마리아인 회심 사건, 고넬료 회심 사건, 에베소 세례 요한 제자들 회심 사건 등 총 4번에 걸쳐 방언이 등장한다. 저자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방언의 공통적 특징이 '외국어'라는 점과 각각 독특한 대상들(예루살렘에 모여든 세계 각지의 유대인, 사마리아인, 이방인, 구약적 사고에 젖어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을 향해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복음이 전파되고 새로운 교회 시대가 자리잡도록 하는 데 방언이 상징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방언이야말로 예언 성취를 통한 구속사의 완성에 기여한다고 보고 있다. 즉 복음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에게 복음이 세계를 향해(이방인 포함) 전파되어야 할 넓이와 깊이를 지니고 있음을 사도를 중심으로 당시의 유대인들이 바로 깨닫도록 하기 위한 표적이 방언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불순종과 교만의 대가로 인해 각기 다른 언어로 흩어졌던 인류가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을 통해 다시 '한 언어(방언)'로 통합됨을 보여주는 표적으로서도 방언은 상징적 의미를 드러낸다. 다시 말하면 입으로 '믿는다' 고백함에도 여전히 구약적 사고에 젖어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며 성령에 대해 모르고 있던 제자들(그리스도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바로 알게 한 표적이 방언이며, 방언의 은사를 받은 후 복음을 전파하는 데 제자들이 앞장서도록 기인한 것이 방언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초대 교회의 성립에 필요한 표적으로 기능한 방언이 하나님의 계시 전달의 도구였다면 완성된 계시서인 성경이 존재하는 오늘날, 그밖의 또 다른 표적이 과연 필요할까? 라는 의문이 제기됨과 동시에 믿음의 척도로써 인식되는 요즈음의 방언에 대해 독자로서도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고린도전서 속에 언급된 방언
고린도전서에 등장하는 방언은 사도행전 속 방언과 달리 외국어인가 아니면 전혀 새로운 언어인 하늘의 언어(?)인가라는 출발점에서부터 고심하게 된다. 즉 성경에 등장하는 방언이 한 가지인가 두 가지인가라는 논의는 방언의 기능이 각각 나뉘게 된다는 측면으로 이어지는데 성경은 그 점에 있어 어떤 암시도 하지 않고 있는데다가 고린도 지역의 특수한 배경을 감안해 볼 때 사도 바울이 그 점에 대해 충분히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다. 교통의 요지이자 도덕적 타락으로 유명한 고린도 지역은 상업 중심지로 이교도주의, 신비주의에 의한 전통적 습관이 배어 있는 곳으로 현대의 은사주의자들이 행하는 방언과 같은 뜻 모를 소리로 이뤄진 주문과 기도가 유행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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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런 기록들을 근거로 당시 그 유명한 아프로디테 신전에서의 예배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신비주의에 가득 찬 그곳은 말 그대로 광란의 현장이었을 것입니다. 그 안에서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방언들이 이곳 저곳에서 쏟아지는 한편 한쪽에서는 신도와 여사제가 몸을 섞고 있습니다. 또 저쪽에서는 신내림을 받은 어떤 자가 온몸을 경련하며 누워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곳, 매일 밤 타오르는 '광란'의 열기가 온 도시를 뒤덮고도 남을 것 같은 곳이 바로 아프로디테 신전이었습니다.(p.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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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 묘사하고 있는 장면이 낯설지 않은 것은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방언 은사의 장면과 일정 부분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밀폐된 공간에서의 자극적인 멘트, 잔잔한 음악과 혼이 나갈 것만 같은 압도적 분위기, 신과의 교접을 구하는 듯한 울부짖음, 엉덩이를 들썩거리거나 손바닥으로 무릎을 치며 일정한 소리를 반복적으로 외치는 소리 등등이 그러하다. 구약 시대 부터 이방 종교의 특징이 광란과 무절제로 나타났음을 생각해볼 때 경건한 질서가 깨진 위와 같은 모습은 결코 성경적 예배의식이 아니라는 생각이 독자로서도 공감하는 바이다. 바울은 고린도의 방언 역시 통역 가능한 언어임을 전제로 하여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교회와 공동체를 위한 방언이 아닌 개인의 경건을 위한 생활 도구로 전락된 방언에 대해서는 분별할 것을 경고하고 있다. 잘못된 방언에 대한 바울의 특별한 언급이 없음에도 그리 생각하는 것은 '고린도전서는 바울의 분노, 빈정거림, 책망, 교정, 그리고 교훈으로 점철되어 있다(p.115)'는 조지 가디너 교수의 말이 설득력있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방언은 과연 성경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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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회 속에서 방언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울의 이런 명령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방언이 통역될 수 있는 언어인가 아니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성경 본문의 문맥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몇 구절을 자르고 조합해서 오늘날의 방언 사용을 정당화하는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바울은 통역하라고 하는데 통역할 수 없는 암호를 바른 방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말씀보다 나의 체험을 더 중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p.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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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을 특별 은사로 여겨 개인의 신앙심을 등급화하는 척도로 삼거나 하나님과의 직통 연결 도구로 삼아 방언삼매경에 빠질수록 성경에서 멀어진다는 허점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성경의 가르침보다 개인의 신비 체험에 매료될수록 말씀은 시시하게 다가올 것이며, 극단적으로는 방언이 성경보다 위에 서는 주객전도의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말이다. 게다가 행함을 자랑 삼아 교만에 빠져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도구로 전락될 수 있음을 떠올려볼 때 과연 체험이 우선인가? 성경이 우선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리라 본다.
오늘날의 방언 열풍이 줄 수 있는 위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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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은 체험이 동일한 한, 교리가 달라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 추세입니다. 가톨릭 안에도 오순절파 가톨릭을 중심으로 방언에 대한 열기는 더 뜨겁게 달아오릅니다. 많은 사람은 개신교와 가톨릭을 하나로 만드는 데 방언보다 더 좋은 도구가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할 정도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점점 교리적 가르침보다는 체험적 감정 고조를 더 중요시 여기고 있습니다. 교리를 벗어 던지고 체험으로 하나 되도록 하는 사탄의 보이지 않는 무서운 공격은 '연합과 사랑 그리고 관용'이라는 달콤한 가면을 쓰고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곁에 있습니다.(p.258)<strong> </str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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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결국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전하고자 했던 요지 그대로를 우리에게로 다시 전하고 있는 셈이다. 체험 아래에 말씀이 놓이는지 말씀 아래에 체험이 놓이는지를 놓고 벌이는 영적 전투의 중심(p.30)에 방언이 있다고 가정해볼 때 오늘날의 방언은 성경적 방언이 아닌, 이방 종교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종교심의 발로에서 나온 지극히 인간적이고 지극히 체험적인 것으로써 교회공동체를 튼튼히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이름을 세우려는 인본주의적 해석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적을 통해 믿음을 확인하려는 이들에게 사탄의 치밀한 계략이 하나님을 그럴싸하게 모방하는 신기술로 '방언'을 악용하고 있음도 주목할 만한 지적이다.
체험에서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소박한 외침일 뿐!
저자의 시도는 참/거짓 또는 긍정/부정 등의 이분법적 정의를 떠나 모든 것을 말씀에 비추어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행17장)' 묵상하던 베뢰아인처럼 방언 또한 개인적인 체험 이전에 말씀을 깊이 있게 묵상하고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가 아닌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흔적만으로도 이 시대에 어떤 자세로 하나님을 섬기고 신앙생활을 해야할 지에 대한 경건한 힌트를 주고 있다.
명절 때마다 과다포장으로 소비자에게 혼란을 주는 선물세트처럼 혹 우리의 신앙도 직분과 각종 은사들로 믿음을 과대포장한 채 거추장스런 포장재로 둘러싸여 본질이 축소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살펴볼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기도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담는 전인격적 기도여야 하며, 성경의 가르침을 자세히 알아보지 않은 채 내게 신비한 체험을 가져다 준다는 이유로 방언을 하늘의 언어라고 가르치고 권장하는 움직임은 중지되어야 한다(p.266)는 저자의 단호한 입장이 억지스럽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구원의 의미와 가치를 깨달은 자에게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신비 체험은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는 방편일 뿐이지 그 자체가 믿음의 증거물로 목적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감사와 은혜의 삶보다 교회 안에서의 나의 위치와 직분은 어떠한지를 각종 은사로 확인해보려는 테스트 용품으로 혹 방언을 사모하고 있다면, 자신의 신앙적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점검해보라는 소박한 외침으로 저자의 말에 귀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더불어 특정은사를 달라고 떼쓰기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깨달아 필요한 곳에 온전히 쓰이게 해달라는 기도가 더 진정성있어 보이지 않을까? 세례증서를 받았다고 하여 언약백성의 자격을 온전히 획득했다는 증거물이 아니듯 방언 또한 아무 때나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는 능력 과시용의 마패가 아님을 이 책을 통해 짚어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끝으로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하늘의 언어가 아니라 예수님을 더 알아가고 닮기 위한 말씀임을 절실히 깨닫는 가운데 성령에 대한 오해와 진정한 기적이란 무엇인지를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는 본문 속 구절을 소개하며 서평을 마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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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성령을 이렇게 오해하고 있습니까? 왜 기적만이 성령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자연법칙은 하나님이 성령과 함께 시작하신 창조 사역입니다(창1:2). 왜 성령 하나님이 이루신 그 창조 질서를 위반하는 것들을 성령의 일로 보고 있습니까? 왜 우리는 자연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운행되는 이 '진짜 기적' 속에서 성령을 만나지 못할까요? 오늘도 어김없이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이야말로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까?(p.2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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