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틱낫한 스님이 말하는 섹스, 그리고 사랑
틱낫한 지음, 신소영 옮김 / 영림카디널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님이 말하는 섹스와 사랑이라?  

왠지 자연스럽게 연상되지 않는 단어의 연결이다.

저자가 금욕적인 생활 속에서 정신적인 도를 구하는 종교 지도자라는 신분 때문인지 다소 선정적인 제목이 우선 눈길을 끌게 된 것이 사실이지만, 내용은 수행자의 마음 다스리기처럼 차분하고 고요하다.

섹스라는 자극적인 요소보다는 본질적으로 진실한(또는 성숙한) 사랑을 논하는 책이라 보는 게 맞다.

가볍게 만나 쉽게 헤어지는 쿨한(?) 시대에 전 세계의 정신적 스승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틱낫한 스님이 들려주는 참된 사랑법은 무엇일까?

 

마치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 다니는 원숭이와 같이 인간도 애욕의 감옥을 이곳저곳 옮겨 다닌다.(p9)   

 - 애욕망경 9절  

 

애욕의 뿌리는 깊고 견고하다. 나무를 잘라버릴 수는 있지만 가지와 잎은 다시 돋아날 것이다. (p40)     

- 애욕망경 8절 

 

이미지에 사로잡히는 것은 그 덧없음을 꿰뚫어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지한 우리는 그 형상이 좋고 아름다운 것이라 여긴다. 겉모습에는 진실되거나 영속적인 가치가 담겨있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p63)      

- 애욕망경 16절 

 

 

욕망을 뒤에 내려놓고 애욕을 좇는 길에 신경을 쓰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애욕의 그물을 찢어버리게 된다. 그렇게 하면 어떤 것도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힐 수 없을 것이다.(p151)

- 애욕망경 21절

 

 

'욕망경'은 올바른 사랑에 대한 부처의 가르침을 모아놓은 경전으로 첫 번째 글자인 '애(愛)'는 남녀 간의 사랑에 국한되지 않은 인류 전체에 대한 사랑을, 두 번째 글자인 '욕(慾)'은 갈망과 탐욕, 욕망을 말한다. 그러므로 '애욕'은 '욕망이 담긴 사랑'이라는 뜻이다.

원래는 부처가 수도승을 대상으로 가르치고자 한 마음수양법이었으나 가벼운 인스턴트 사랑에 점점 익숙해지는 현대인에게도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는 가르침이다.

 

랑이 집착의 옷을 입게 되면 상대방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고, 사랑이 감정에만 충실하게 되면 상대방을 제대로 알기 어렵게 된다.

스님은 남녀가 서로 진실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감정적, 육체적, 영적으로 온전한 친밀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육체적 친밀감이 감정적 친밀감과 따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기에 성적 친밀감은 서로에 대한 교감과 이해를 바탕으로 영적 수준의 공감이 더해졌을 때라야 성숙하게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감정적, 영적 친밀감이 없는 섹스는 공허할 뿐이며 진실한 사랑이 없는 성행위는 외로움만 더욱 부추길 뿐이니 타인이 아닌 자신의 마음 속에 안식처를 만드는 데 집중할 것을 권한다.  

 

리는 외로움을 느낄 때 쉽게 사랑에 빠진다.

아니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감정에 빠진다는 것이 더욱 정확한 표현인지 모른다.

감정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힘들 때 빠르게 다가온 사랑은 실체는 없고 이미지만 열정으로 포장되기 쉬운 법이다.

관계가 지속될수록 실체와 이미지 사이의 간극은 크게 벌어질 것이며 결국 서로에게 실망할 수도 있다.

이런 이들에게 스님은 진정한 영적 동반자란 당신이 찾아 헤매던 아름다움과 사랑을 당신 내면 깊은 곳에서 찾아낼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워주는 사람임을 조언한다.

 

스컴은 물론이거니와 손 안에 들어온 인터넷 세상 속에서 상품화된 성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변심한 애인을 찾아가 해꼬지를 하는 흉흉한 기사가 종종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는 요즘 시대에 자신만의 만족을 위한 이기적 사랑이 아닌, 서로에게 진실한 사랑을 얻기 위해 스님의 마음수행법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은 어떨까? 

지혜의 명상과 욕망 다스리기, 내 안의 나에게 집중하기, 고통을 이해하고 나누기, 서로에게 깊게 뿌리 내리기 등 마음 먹기에 따라 충분히 연습이 가능한 일들로 말이다.

 

트남에서는 결혼한 부부가 서로를 '나의 집'이라 부른다고 한다.

서로에 대한 호칭이 '나의 집'이라니, 얼마나 황홀하고 멋진 말인가? 

이 책은 어쩌면 사랑이 욕망이 아닌 안식처가 되는 법을 핵심으로 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식처를 얻기 위해, 안식처를 가꾸기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 걸까?

이에 대한 유용한 힌트가 부록으로 실린 '마음챙김 수행법'에 실려 있으니 꼼꼼하게 챙겨 읽어볼 만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정희의 이야기 성서 - 가장 오래된 사랑의 기록
오정희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경은 애초에 독창적인 변형이 불가능한 책이다. 인간의 손끝에서 기술되었을 뿐, 인간의 순수 창작물이라기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서이기 때문이다. 단어는 물론이거니와 조사나 어미 하나를 잘못 건드려도 전혀 다른 의미 구조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가령 '믿다'와 '믿어지다'의 능동과 피동의 차이처럼) 신학자나 성직자들조차도 성경을 대할 때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경건함이 요구되는 것이 바로 성경이다.

 

대문학을 대표할 만한 작가인 소설가 오정희 님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별반 이의 제기가 없는 듯 책의 서두에서 "애초에 독창성이나 새로움이 가능하지 않은 글이고 스스로 그러한 기대나 의지도 없었다.(p.5)"고 밝혔듯이 『오정희의 이야기 성서』는 작가적 상상력과 통찰력을 가능한 한 배제한 채 저자의 고백 그대로 '성서에 대한 지식도 믿음도 보잘 것 없는, 혹은 갈망은 있으되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은 물음이 부끄럽고 조심스러운 사람들을 향해 함께 읽고자(p.5)'하는 동기에서 출발한 제목 그대로의 이야기로 풀어낸 성경의 일부이다.

책에서는 성경66권 중(천주교의 경우 72권) 구약의 창세기, 출애굽기와 신약의 마태복음을 다루고 있으며, Part 1에서는 하나님이 최초 인류인 아담의 창조부터 아브라함과 모세를 통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기까지의 여정을 '최초의 계약(옛언약)'으로, Part 2에서는 예수님의 탄생과 십자가 사역을 통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고 부활하시기까지의 과정을 '새로운 약속(새언약)'으로 보여주고 있다. 성경의 방대한 분량을 '옛언약-새언약'의 기준으로 간략하게 풀어내고 있다고나 할까? 독자로서는 그림자로서의 계시를 보여준 구약의 언약이 예수님이 실체가 된 사랑의 언약이 되어 부활에서 마침이 아닌, 재림에 대한 약속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음이 다소 아쉽다. 저자가 신구약의 순서대로 앞부분만 펼쳐나간 게 아니라 일정한 기준(옛언약-새언약)을 두고 파트를 나눠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고로 기독교(=그리스도교) 중 개신교(=프로테스탄)에 속하는 독자들이 읽기에는 다소 생소한 명칭들이 읽기를 방해할 수도 있겠다 싶다. 예를 들면 하느님(하나님), 이사악(이삭), 레베카(리브로), 에사우(에서), 야훼(여호와), 바리사이(바리새인), 카파르나움(가버나움), 자캐오(삭개오) 등등. 괄호 안에 개신교 성경으로 번역된 명칭을 함께 제시해줬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자 입장으로서보다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 입장에서 보자면 '하느님'이라는 명칭은 그 대상이 설령 같은 하나님일지라도 '하늘님= 하느님'으로서의 의미를 먼저 연상시키는 데에다 애국가의 한 구절인 '하느님이 보우하사~'에도 등장하고 각종 여러 종교에서도 초월적 존재로서의 신으로(=모든 자연현상의 주권자) 보편화돼있으므로 '오직 하나뿐인 유일한 창조주이자 구원주인 동시에 심판자로서 유일신이신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감소돼 있다는 느낌이 들어 솔직히 읽는 내내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아마 개신교에 속한 나와 같은 독자라면 스토리 전개에 앞서 '하느님'이라는 낯선 명칭에서부터 어리둥절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쨌든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라는 수식어가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일반인은 물론이거니와 신앙생활을 하는 기독교인(개신교와 천주교의 통칭)에게도 여전히 풀기 어려운 암호처럼 난해하고 술술 읽어내려가기가 만만치 않은 책이다. 게다가 독서의 일반적인 기능(감동, 즐거움, 정서적 교감, 순화, 정보습득 등등)과 달리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서인 동시에 언약백성으로서의 생활 방침을 다루고 있는 지시서인 특성상 일독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땅에서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세를 예수님을 닮아가는 모습으로 요구하고 있으므로 저자가 지적한 그대로 '읽기'보다 '만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좀더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만날 수 있도록 돕는 책이라 볼 수 있다. 소설가로서의 역량이 짜임새 있는 이야기처럼 술술 읽히는 성서로 재탄생해 믿음의 발판인 말씀의 진리를 좀더 바르게 알아가는 데 일조하는 책으로서의 기능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 개정판
옥성호 지음 / 국제제자훈련원(DMI.디엠출판유통)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저자의 애착과 독자의 외면 사이에 낀 방언 논란 

 

'저자의 사랑은 가장 많이 받았지만, 정작 독자의 사랑은 가장 덜 받은 책(p.4)'으로 저자 스스로가 소개하고 있는 옥성호의『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는 현대 교회의 민감한 사안 중 하나인 '방언' 에 대해 노골적으로 건드렸다는 자체에서부터 궁금한 독자와 불편한 독자로 지지층을 가르고 있는 독특한 책이다. 

하나님의 계시서인 성경을 인간의 언어와 논리로 완벽하게 해석하는 일 자체가 애초에 한계가 보이는 시도이긴 하나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강요된(일반화된) 교리에 각자의 신앙을 짜맞추려는 것 또한 우매한 태도라 여기고 있던 내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반갑고 흥미로운 책이었다.

 

축복의 은사인가? 비교에서 오는 열등감인가?

 

저자의 고백처럼 나 역시 한때는 방언의 은사를 사모한 나머지 부흥회나 간증집회에서 여기저기 들려오는 알 수 없는 소리에 상대적 결핍감과 위축감을 느껴 기도 중에 주위를 둘러보곤 했던 경험이 있다. 게다가 나보다 뒤늦게 신앙생활을 한 성도가 어느 날 갑자기 따발총처럼 퍼붓는 방언으로 주위의 눈길을 사로잡는 일을 목격했을 때는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 자 먼저 된다'는 성경 구절이 꼭 나를 두고 지적하는 것만 같아 주눅이 들기도 했다.  간절히 갈구하는 내게는 왜 방언의 은사가 내리지 않는지, 내 신앙의 정체성은 아직도 유아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지, 하나님은 왜 나를 가둬두고 계신지 많은 의문과 절망감이 물밀 듯 찾아와  영적 방황 속에 신앙생활에 대한 회의감을 품기도 했다. 지나고 보니 그때의 간절함은 말씀의 본질을 사모하고 온전히 경배하는 섬김의 자세보다 사람들 사이에서의 평가와 비교에 더 큰 부분을 할애하며 인간적 기준에서의 등급을 마음 속에 그렸는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을 향하는 은사가 아닌 인간을 향한 은사로서 말이다.

 

인간의 언어인가? 하나님의 언어인가?

 

저자는 아버지 옥한흠 목사의 격려와 충고 속에 이 책을 저술하면서 저명한 신학자들의 견해를 인용해 방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한편 방언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의 구절을 꼼꼼하게 되짚어가며 성경이 정의하고 있는 방언의 본질과 역할은 무엇인지, 성경적 방언과 오늘날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방언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를 날카롭게 파헤쳐 들어간다. 오로지 성경에 초점을 둔 해석이야말로 정통과 이단을 구분짓는 유일한 잣대라는 측면에서 살펴 볼 때 저자는 오늘날 집단적 최면제 내지는 신비 체험 위주로 행해지고 있는 방언을 성경적 방언이 아니다,라고 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어 방언에 절대적인(호의적인) 이들에게 다소 불편한 도전을  하고 있다.  흔히 하늘의 언어(?)라고 높이 평가되는 방언의 폐해가 교회의 안과 밖에서 어떤 유형으로 드러나는지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지적해주고 있어 방언에 대한 맹목적적인 믿음을 지닌 이들에게 분별의 호소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

 

 

사도행전 속에 언급된 방언

 

사도행전에는 오순절 사건과 사마리아인 회심 사건, 고넬료 회심 사건, 에베소 세례 요한 제자들 회심 사건 등 총 4번에 걸쳐 방언이 등장한다. 저자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방언의 공통적 특징이 '외국어'라는 점과 각각 독특한 대상들(예루살렘에 모여든 세계 각지의 유대인, 사마리아인, 이방인, 구약적 사고에 젖어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을 향해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복음이 전파되고 새로운 교회 시대가 자리잡도록 하는 데 방언이 상징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방언이야말로 예언 성취를 통한 구속사의 완성에 기여한다고 보고 있다. 즉 복음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에게 복음이 세계를 향해(이방인 포함) 전파되어야 할 넓이와 깊이를 지니고 있음을 사도를 중심으로 당시의 유대인들이 바로 깨닫도록 하기 위한 표적이 방언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불순종과 교만의 대가로 인해 각기 다른 언어로 흩어졌던 인류가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을 통해 다시 '한 언어(방언)'로 통합됨을 보여주는 표적으로서도 방언은 상징적 의미를 드러낸다. 다시 말하면 입으로 '믿는다' 고백함에도 여전히 구약적 사고에 젖어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며 성령에 대해 모르고 있던 제자들(그리스도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바로 알게 한 표적이 방언이며, 방언의 은사를 받은 후 복음을 전파하는 데 제자들이 앞장서도록 기인한 것이 방언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초대 교회의 성립에 필요한 표적으로 기능한 방언이 하나님의 계시 전달의 도구였다면 완성된 계시서인 성경이 존재하는 오늘날, 그밖의 또 다른 표적이 과연 필요할까? 라는 의문이 제기됨과 동시에 믿음의 척도로써 인식되는 요즈음의 방언에 대해 독자로서도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고린도전서 속에 언급된 방언 

 

고린도전서에 등장하는  방언은 사도행전 속 방언과 달리 외국어인가 아니면 전혀 새로운 언어인 하늘의 언어(?)인가라는 출발점에서부터 고심하게 된다. 즉 성경에 등장하는 방언이 한 가지인가 두 가지인가라는 논의는 방언의 기능이 각각 나뉘게 된다는 측면으로 이어지는데 성경은 그 점에 있어 어떤 암시도 하지 않고 있는데다가 고린도 지역의 특수한 배경을 감안해 볼 때 사도 바울이 그 점에 대해 충분히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다. 교통의 요지이자 도덕적 타락으로 유명한 고린도 지역은 상업 중심지로 이교도주의, 신비주의에 의한 전통적 습관이 배어 있는 곳으로 현대의 은사주의자들이 행하는 방언과 같은 뜻 모를 소리로 이뤄진 주문과 기도가 유행했다고 한다.

 

우리는 이런 기록들을 근거로 당시 그 유명한 아프로디테 신전에서의 예배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신비주의에 가득 찬 그곳은 말 그대로 광란의 현장이었을 것입니다. 그 안에서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방언들이 이곳 저곳에서 쏟아지는 한편 한쪽에서는 신도와 여사제가 몸을 섞고 있습니다. 또 저쪽에서는 신내림을 받은 어떤 자가 온몸을 경련하며 누워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곳, 매일 밤 타오르는 '광란'의 열기가 온 도시를 뒤덮고도 남을 것 같은 곳이 바로 아프로디테 신전이었습니다.(p.108)

본문에서 묘사하고 있는 장면이 낯설지 않은 것은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방언 은사의 장면과 일정 부분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밀폐된 공간에서의 자극적인 멘트, 잔잔한 음악과 혼이 나갈 것만 같은 압도적 분위기, 신과의 교접을 구하는 듯한 울부짖음, 엉덩이를 들썩거리거나 손바닥으로 무릎을 치며 일정한 소리를 반복적으로 외치는 소리 등등이 그러하다. 구약 시대 부터 이방 종교의 특징이 광란과 무절제로 나타났음을 생각해볼 때 경건한 질서가 깨진 위와 같은 모습은 결코 성경적 예배의식이 아니라는 생각이 독자로서도 공감하는 바이다. 바울은 고린도의 방언 역시 통역 가능한 언어임을 전제로 하여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교회와 공동체를 위한 방언이 아닌 개인의 경건을 위한 생활 도구로 전락된 방언에 대해서는 분별할 것을 경고하고 있다. 잘못된 방언에 대한 바울의 특별한 언급이 없음에도 그리 생각하는 것은 '고린도전서는 바울의 분노, 빈정거림, 책망, 교정, 그리고 교훈으로 점철되어 있다(p.115)'는 조지 가디너 교수의 말이 설득력있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방언은 과연 성경적인가?

오늘날 교회 속에서 방언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울의 이런 명령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방언이 통역될 수 있는 언어인가 아니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성경 본문의 문맥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몇 구절을 자르고 조합해서 오늘날의 방언 사용을 정당화하는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바울은 통역하라고 하는데 통역할 수 없는 암호를 바른 방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말씀보다 나의 체험을 더 중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p.215)

방언을 특별 은사로 여겨 개인의 신앙심을 등급화하는 척도로 삼거나 하나님과의 직통 연결 도구로 삼아 방언삼매경에 빠질수록 성경에서 멀어진다는 허점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성경의 가르침보다 개인의 신비 체험에 매료될수록 말씀은 시시하게 다가올 것이며, 극단적으로는 방언이 성경보다 위에 서는 주객전도의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말이다. 게다가 행함을 자랑 삼아 교만에 빠져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도구로 전락될 수 있음을 떠올려볼 때 과연 체험이 우선인가? 성경이 우선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리라 본다.

 

오늘날의 방언 열풍이 줄 수 있는 위험들

오늘날은 체험이 동일한 한, 교리가 달라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 추세입니다. 가톨릭 안에도 오순절파 가톨릭을 중심으로 방언에 대한 열기는 더 뜨겁게 달아오릅니다. 많은 사람은 개신교와 가톨릭을 하나로 만드는 데 방언보다 더 좋은 도구가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할 정도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점점 교리적 가르침보다는 체험적 감정 고조를 더 중요시 여기고 있습니다. 교리를 벗어 던지고 체험으로 하나 되도록 하는 사탄의 보이지 않는 무서운 공격은 '연합과 사랑 그리고 관용'이라는 달콤한 가면을 쓰고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곁에 있습니다.(p.258)<strong> </strong>

저자는 결국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전하고자 했던 요지 그대로를 우리에게로 다시 전하고 있는 셈이다. 체험 아래에 말씀이 놓이는지 말씀 아래에 체험이 놓이는지를 놓고 벌이는 영적 전투의 중심(p.30)에 방언이 있다고 가정해볼 때 오늘날의 방언은 성경적 방언이 아닌, 이방 종교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종교심의 발로에서 나온 지극히 인간적이고 지극히 체험적인 것으로써 교회공동체를 튼튼히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이름을 세우려는 인본주의적 해석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적을 통해 믿음을 확인하려는 이들에게 사탄의 치밀한 계략이 하나님을 그럴싸하게 모방하는 신기술로 '방언'을 악용하고 있음도 주목할 만한 지적이다.

 

체험에서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소박한 외침일 뿐!

 

저자의 시도는 참/거짓 또는 긍정/부정 등의 이분법적 정의를 떠나 모든 것을 말씀에 비추어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행17장)' 묵상하던 베뢰아인처럼 방언 또한 개인적인 체험 이전에 말씀을 깊이 있게 묵상하고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가 아닌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흔적만으로도 이 시대에 어떤 자세로 하나님을 섬기고 신앙생활을 해야할 지에 대한 경건한 힌트를 주고 있다. 

명절 때마다 과다포장으로 소비자에게 혼란을 주는 선물세트처럼 혹 우리의 신앙도 직분과 각종 은사들로 믿음을 과대포장한 채 거추장스런 포장재로 둘러싸여 본질이 축소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살펴볼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기도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담는 전인격적 기도여야 하며, 성경의 가르침을 자세히 알아보지 않은 채 내게 신비한 체험을 가져다 준다는 이유로 방언을 하늘의 언어라고 가르치고 권장하는 움직임은 중지되어야 한다(p.266)는 저자의 단호한 입장이 억지스럽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구원의 의미와 가치를 깨달은 자에게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신비 체험은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는 방편일 뿐이지 그 자체가 믿음의 증거물로 목적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감사와 은혜의 삶보다 교회 안에서의 나의 위치와 직분은 어떠한지를 각종 은사로 확인해보려는 테스트 용품으로 혹 방언을 사모하고 있다면, 자신의 신앙적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점검해보라는 소박한 외침으로 저자의 말에 귀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더불어 특정은사를 달라고 떼쓰기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깨달아 필요한 곳에 온전히 쓰이게 해달라는 기도가 더 진정성있어 보이지 않을까? 세례증서를 받았다고 하여 언약백성의 자격을 온전히 획득했다는 증거물이 아니듯 방언 또한 아무 때나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는 능력 과시용의 마패가 아님을 이 책을 통해 짚어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끝으로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하늘의 언어가 아니라 예수님을 더 알아가고 닮기 위한 말씀임을 절실히 깨닫는 가운데 성령에 대한 오해와 진정한 기적이란 무엇인지를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는 본문 속 구절을 소개하며 서평을 마치려 한다.

 

왜 우리는 성령을 이렇게 오해하고 있습니까? 왜 기적만이 성령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자연법칙은 하나님이 성령과 함께 시작하신 창조 사역입니다(창1:2). 왜 성령 하나님이 이루신 그 창조 질서를 위반하는 것들을 성령의 일로 보고 있습니까? 왜 우리는 자연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운행되는 이 '진짜 기적' 속에서 성령을 만나지 못할까요? 오늘도 어김없이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이야말로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까?(p.26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만화 스토리 바이블 : 신약 만화 스토리 바이블
히구치 마사카즈 지음, 김영진 옮김 / 성서원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들 녀석이 먼저 읽고 반한 책입니다.

순서와 상관 없이 <만화 바이블-신약> 편을 읽고 나더니 연이어 구약1,2권을 찾아 보더군요.

바른 신앙 속에서 자녀를 양육하고 싶은 소망에도 불구하고 정작 게으름과 나태함 속에서 내일로 미뤄왔던 나약한 신앙심에 늘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웠는데 이렇게나마 신앙 서적을 스스로 접하며 갈피를 잡아가니 감사한 마음입니다.

물론 심리적 위안에 그치지 않고 생활 속에서 바른 말씀의 토대 위에 부모가 본이 되어 성경적으로 양육해야함이 우선이겠지요?

 

른 말씀이 바른 믿음으로 이끄는 원동력임을 생각해 볼 때 <만화 스토리 바이블>은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기초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책입니다.

만화형식이라고 해서 가벼운 스토리에 시각적 효과에만 치중한 구성일 거란 편견은 말끔히 거두어도 좋을 만큼 접근성의 편안함과 스토리의 탄탄한 구성을 지닌 책이니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저 또한 요즘 유행하고 있는 학습 만화 시리즈에 편견과 반감을 지니고 있었는데 아들 녀석이 즐겨보는 <WHY> 시리즈를 직접 읽어본 후로 생각이 확 바뀌어버린 독자 중 하나랍니다.

무엇보다 성경을 좀더 쉽고 바르게 전하고자 하는 의도에 충실한 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글자의 표면적 해석에 얽매이기보다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 찬 하나님의 언약적 계시로 접근해야 하는데 기존의 성경은 번역의 애매함과 고어적 어휘의 어려움 탓에 일반인들이 쉽게 읽기에는 벅찼던 것이 사실입니다.

쉬운 성경을 비롯해 어린이 성경까지 접근의 편리성에 기인한 성경들이 출간되고 있으나 방대한 흐름을 계시서의 특징으로 정리하기에는 역시나 양적 압박감이 남게 됩니다.

입문서와 같이 기본이 되는 맥을 잡기 위해 이 책을 먼저 읽어본 후 성경과 비교해가며 말씀의 본의를 점검해보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약1,2권에 이어 신약은 예수 탄생과 세례요한의 외침으로 시작됩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해주신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을 통해 구체화되는 장으로, 언약의 핵심인 구원과 열두 제자를 비롯한 사도의 시대를 보여줍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치다 결국에는 살로메의 간교한 계략에 목이 잘린 세례요한을 볼 때면 과연 나 자신은 신앙의 순결성을 어디까지 지켜낼 수 있을지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또한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도리어 핍박하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의 교만함 속에서는 혹 내 모습 역시 율법에 얽매인 채 형식주의에 빠져 행함으로 신앙의 정도를 등급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하게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을 행하신 부분에서는 할머니 곁에서 흥미진진한 옛날 이야기를 듣듯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되고,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사울이 예수님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바울로 거듭나기까지의 과정은 드라마틱한 감동과 은혜를 전해줍니다.

재미있는 것은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은 예수님의 소년 시절이 저자의 상상 속에 구체적 장면으로 펼쳐진다는 점입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덧붙임은 이뿐만이 아니라 페이지 하단부에 풀이해놓은 용어 설명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당시의 풍습이나 제도, 시대적 상황, 인물 부연 설명 등 다채로운 방법으로의 접근이 돋보입니다.

 

번 읽고 책꽂이에 꽂아둘 소장용이 아닌, 두고두고 되새김질하며 펼쳐 읽는 생명의 말씀이 각 가정에도 한 자리하기를 바라며, 신앙의 첫걸음이 온전한 출발점에서 이뤄지기를 더불어 기도드립니다.

분명 <만화 스토리 바이블>이 첫걸음을 떼는 데 훌륭한 안내서가 돼 줄 겁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만화 스토리 바이블 : 구약 2 만화 스토리 바이블
히구치 마사카즈 글.그림, 김영진 옮김 / 성서원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하나님께 대적하는 가장 큰 죄성은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게 될까?

언약백성에게 주신 십계명 중 첫째가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인 것을 떠올려 본다면, 하나님 없는 삶, 즉 세상 속 우상을 숭배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인간의 연약함과 간사함은 끊임없이 다른 신들(=우상)을 만들어내고 그들에게 절하며, 그들에게 복을 빌고 그들에게 자신의 불완전성을 채우려 한다.

인류 역사가 진행될수록 우상의 범위는 '금송아지'와 같이 구체적 대상으로 형상화된 시각적 대상물부터 보이지 않는 추상적 개념인 '물신주의 풍조'까지 광범위하게 생활 속에 파고들어 우리를 유혹한다.

 

<만화 바이블 구약2>권은 출애굽 이후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시내산으로 올라간 모세를 기다리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급함과 답답함에 눈에 보이는 신을 요구하며 '금송아지'를 만들어낸 우상 숭배 사건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의 크고도 깊은 사랑과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으면서도 금세 잊고 인간의 종교성에 기인한 금송아지를 만들고 절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참으로 어리석게 느껴질는지 모르나 우리들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하나님보다 세상 것을 좋아하여 그 유혹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면 그 또한 '우상'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어리석은 실수와 죄악에도 하나님은 또 다시 그들을 용서하지만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여정 속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불평불만을 쏟아놓는다.

게다가 약속의 땅인 가나안 정탐에서도 아말렉의 위용에 눌려 들어서기를 주저한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세상적 질서와 권력 앞에 주저하는 백성을 보시고 하나님은 광야 40년을 떠돌게 하신 후에야 모세 뒤를 이은 여호수아를 통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그들을 인도해주신다.

 

머지 않아 여호수아도 죽고 가나안 땅은 '사사의 시대'를 맞게 되는데, 이 책에서는 용사들의 활약상을 다룬 '사사기'와 이스라엘 여성을 다룬 '나오미와 룻'에 관한 '룻기'는 만화 형식이 아닌 줄글 형태로 요약해서 보여준다.

방대한 분량 중 성경의 핵심적 맥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다보니 부득이하게 압축적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는 편집권이었으리라.

이 책이 일본 애니메이션 작가의 흑백필름에 기초를 두고 재구성된 점을 감안해본다면 이 부분에 대한 원작가의 그림이 애초부터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편집구성이 마음에 든다.

출판사의 의도가 어떻든 구약의 흐름에서 굵은 줄기를 형성하는 이야기 구조로 압축해놓는 것이 성경이 무엇을 전하는지에 대한 핵심을 파악하기에 더 안성맞춤이며, 대개 이런 형태의 성경을 접하는 대상은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새신자나 어린아이들일 거란 생각 때문이다.

 

어쨌든 구약2권은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한 초대왕 사울왕을 비롯해 하나님이 기름부은 자인 다윗왕과 지혜의 왕 솔로몬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신정왕국 건설 과정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솔로몬이 이방신을 받아들이는 등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행동을 하자 솔로몬 사후 그의 왕국은 분열했고 이스라엘은 또 다시 고난의 시대를 맞게 된다.

이후의 내용은 앞서 사사기 부분과 같이 만화가 아닌 줄글 형태로 요약해 선지자 시대와 이스라엘의 재건 과정를 보여준다.

 

방대한 분량을 요약해 보여줄 수밖에 없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읽는이로 하여금 성경의 중요한 맥을 짚게 하고, 다음 장으로 계속 넘겨보게 만드는 재미까지 선사해준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고난 후 성경을 좀더 깊이 알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는 것이 가장 큰 수확이리라.

성경을 바르게 아는 것만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