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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박광수 지음 / 청림출판 / 2014년 7월
평점 :
마포대교 난간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져 있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입니다'
<광수 생각>으로 유명한 박광수의 신작『어쩌면, 어쩌면, 어쩌면』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위 글이야말로 이 책이 전하고 싶은 메세지의 압축이 아닐까? 싶다. 살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벼랑 앞에 서보게 될 것이며 그 순간에 각자는 더 이상 살아갈 힘이 없는 절망과 동시에 살아있는 순간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에 빠질 것이다. 마침표를 생각하는 순간에 떠올리는 쉼표처럼 이 책은 삶의 고단함과 서글픔, 답답함과 억울함, 깊은 한숨과 얕은 분노를 느껴본 자들에게 잠시 쉬었다갈 수 있는 쉽터를 제공해주는 책이 될 것이다.
그림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간결하고 섬세하되, 광수 생각은 시간을 덧입은 만큼 깊고 풍성해져 스쳐 지나가는 사물에도 깊은 애정과 관심을 두고 관찰하는 관조적인 그만의 사상으로 성장했다.
1. 어쩌면
이 책은 섬과 섬 사이를 떠도는 외로운 현대인에게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싶다"라고 말한 어느 시인의 바람처럼 나와 타인에 대한 적당한 거리에서 오는 관계미학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1부인 '나, 그대로의 나'에서 종종 보여지는 현실에 대한 순응적 받아들임은 우울한 체념보다 평온한 순리에 가깝게 느껴지며 거추장스런 위선보다 솔직한 고백으로 다가오기에 공감이 가는 부분이 참 많다.
이제는 더 이상 젊다고 말할 수 없는 나이에, 인생에 핑크빛 희망을 지니고 살기에는 현실감각이 지나치게 발달해버린 시점에, 막연한 행운이나 요행을 바라고 새로운 일을 펼치기에는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아진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 허망한 희망보다 따뜻한 위로가 되주는 조언이랄까? 저자는 나이들면서 조금씩 사람에 대한, 일에 대한, 상황에 대한 기대감을 내려놓고 조금씩 좌절을, 분노를, 슬픔을,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인정해가며 가면을 벗고 타인을 대하는 순간 우리 생이 더욱 빛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아픈 것은 아프다고 말하자
무서운 것은 무섭다고 말하자
힘든 것은 힘들다고 말하자
세상 사람들은 속일지라도 내 자신에게만은 솔직하자
같은 실수에도 누군가는 자신의 실수를 감추기에 바쁘고,
또 누구가는 실수를 통해서 내면의 키가 한 뼘쯤 자라기도 한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나.
내 인생의 구경꾼들로 인해 내 인생이 흔들릴 필요는 없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타인을 바라보게 되면, 서로의 미숙함과 불완전함도 비난이 아닌 동병상련이 되기에 안녕?하고 인사를 건넬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2부인 '안녕, 낯선 사람'에서는 용서보다 아름다운 화해를, 기분이 나빠지는 간섭과 가슴이 아파오는 충고의 차이를, 핸드폰이라는 우물에 빠져 계절의 오고 감도 못 느끼고 사는 현대인을, 하나뿐인 무전기가 소용없음을 통해 소통의 쌍방 조건을, 계산기로는 도무지 계산할 수 없는 너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각자 외로이 떠 있는 섬이지만,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다정한 섬이기도 한 것이다.
2. 어쩌면
이 책은 치매에 걸린 노모를 곁에서 지켜보며 자식으로서 느끼는 부모의 깊은 사랑에 대한 '사모곡'인지도 모른다.
밥때가 되면 광수야! 이름을 불러가며 신호를 보내신 후 누런 코를 깨끗이 씻어주신 다음에야 식탁에 앉히시고는 맛있는 음식으로 저자의 입안을 채워주시던 어머니.
대견할 것도 없다고 표현하는 저자를 평생 대견한 아들로 여기시며 막내에 대한 애틋함을 가슴 깊이 새기며 살아가시던 어머니.
그 어머니가 어느 순간 치매 판정을 받고는 자식들의 이름을 깜박깜박하시더니 씻는 일조차 잊으시고는 음식 만드는 일조차 불가능하게 되어버린다.
그런 어머니를 지켜보며 저자는 치매를 앓는 노모와 지켜보는 가족의 안타까운 심정 속에서의 아픔을 이렇게 표현한다.
치매란 자신이 젊은 시절 애쓰며 건너온 징검다리를 되돌아 가는 것.
되돌아 가면서, 자신이 건너온 징검다리를 하나씩 치우는 일.
그때 옆에 있는 당신은 답답하다고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어서는 안 됩니다.
그녀에게는 당연한 일들.
그때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저 뚝방에 서서 웃으며 손을 흔드는 일.
밝게 웃어주며 날 천천히 잊어달라고 비는 일.
안단테, 안단테......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밝혔듯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에 대해 막연한 기대감을 품게 된다. 나이가 들면 기대가 작아지는 것이 순응을 배워가는 것이라지만, 저자가 끝까지 버리지 않고 싶은 기대감은 예전처럼 온 가족이 둘러앉아 엄마가 만들어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날에 대한 소망이다. 소박한 희망, 실낱같은 그 기대감이 간절한 기도 의식처럼 만나 이뤄진 것이 3부 <안단테, 안단테, 안단테>이다. 막을 수 없고 되돌릴 수는 없어도 천천히 진행되기를 바라는, 천천히 잊혀지기를 바라는 저자의 현실적 소망이 고스란히 담겨있어서인지 먼저 손이 가고 이내 마음을 울린다. 저자의 차분한 기도의식이 독자의 응원 속에 지침 없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3. 어쩌면
이 책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에 대한 저자의 시인적 관찰 보고서인 동시에 사물이 지니고 있는 상징적 설명서이기도 하다.
늘상 곁에 두고도 스쳐지나갈 만큼 하찮거나 사소한 것들에 대한 저자의 섬세한 관찰력과 사물의 속성에서 기인한 새로운 의미 부여는 마치 시인의 눈을 닮아 있다. 나는 어쩐지 광수씨가 그림에 가까운 화가라기보다 문학에 가까운 시인같은 느낌을 받곤 하는데 그건 아마도 짧지만 긴 여운을 주는 그의 시심(詩心) 때문인 것 같다. 일상에서의 한 단면을 인생으로 연결시켜 풀어갈 수 있을 만큼 그의 관찰력과 통찰력은 타인의 공감력을 이끌어낸다. 그림과 함께 봐야 제맛이지만 아쉽게나마 몇 편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계란 후라이 - 그 사람이 웃으며 내게 물었습니다. "깨뜨릴까? 깨뜨리지 말까?"
계란이야 어찌 되었든, 우리의 사랑은 깨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안경 - 내 눈에 사람들이 보는 것과 다른 것이 보인대도.
사람들이 이제 그만 벗어버리라고 해도.
난 당신이 내게 씌워준 안경을 벗지 않으련다.
당신이 내게 씌워준 콩깍지라는 안경.
초콜릿 - 언젠가 녹아서 없어지겠지만,
당신과 나의 달콤했던 추억은 잊지 말아 주세요.
편의점 - 당신의 사랑은 너무 게으르오. 어느 날은 열렸다가 어느 날은 닫혔다가.
내 사랑은 24시간 항상 당신을 위해 열려있는.
선풍기 - 내가그 사람을 잊을 수 있을까?
내 물음에 선풍기가 머리를 좌우로 돌리며 대답한다.
못 잊어. 넌 그 사람 절대 못 잊어.
전화기 - 내가 사는 곳에 눈이 왔다고 말하니 전화기 너머의 그녀가 말했다.
"이곳은 비가 왔어요. 이곳은 씻어버릴 것들이 많고,
당신이 있는 곳은 덮어버릴 것들이 많은가 보네요."라고.
성냥개비 - 상대가 눈앞에서 멀어지면, 보통의 사랑은 잊히고
큰사랑은 그 사랑이 더 커진다.
바람이 불면 성냥의 불은 꺼지고 들판의 큰불은 더 불길이 세지는 것처럼.
망치 - 망치는 못을 박는 도구만이 아니다. 반대로 못을 빼는 도구이기도 하다.
나는 내 망치로 그동안 내가 타인의 가슴에 박은 못들을 모두 뺄 것이다.
이쯤되면 광수씨에게 만화가/화가라는 호칭 뒤에 작가/시인이라는 호칭을 붙여도 억지스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참고로 글쓰고 그림 그린이 박광수의 신작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에는 쪽수를 나타내는 숫자가 없다.
아무 데나 펼쳐 읽어도 아무렇지 않게 쉽고 편안하게 읽혀지는 책.
그러나 깊은 울림과 떨림이 있어 자꾸만 또다시 들춰보게 되는 책.
내게 박광수의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은 '자꾸만, 자꾸만, 자꾸만' 들춰보게 되는 책이 될 것 같다. 보고 또 보고 또 보게 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