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점이야말로 제게는 ˝무슨 책을 찾아드릴까요?˝라며 공손하게 나타나 재빠르게 해결해주는 램프 속 지니와 같답니다.^^ 19주년을 축하하며 앞으로도 책여행길에 좋은 동행자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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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네가 얼마나 행복한 아이인지 아니? - 여행작가 조정연이 들려주는 제3세계 친구들 이야기, 개정판
조정연 지음, 이경석 그림 / 와이즈만BOOKs(와이즈만북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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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에 지인 한 분이 NGO활동의 일환으로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들 중 몇 곳을 다녀왔다고 합니다. 그중  캄보디아의 프놈펜에 있는 한 작은 학교에 들렀는데 그곳의 학생들은 동화책을 읽어본 적이 거의 없다고 하더군요. 교과서를 하나씩 갖는 것조차 어려운 이들에게 동화책은 사치일 수 만큼 교육의 기회에 있어서도 가난은 혹독하게 아이들의 꿈을 짓밟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세계구호기구에서 보내주는 책들은 대부분이 영어로 쓰여진 책인지라 이들에게는 캄보디아어로 쓰여진 동화책을 구하는 일조차 어렵다고 합니다. 베트남에 있는 라오스의 시골 학교 학생들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무슨 종류의 책을 좋아하느냐는 지인의 질문에 책에 어떤 종류가 있는지 몰라 학생들이 눈만 깜박였다는 일화나 베트남어로 된 동화책이 거의 없어 한국에서 아예 베트남어로 동화책 5권을 번역해 만들어갔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는 그리 멀지 않은 이웃나라이건만 삶의 질적 차이는 너무도 크게 다가오기에 '정말?'이라는 확인 단어를 재차 뱉어내게 되었답니다.

 

을 것이 넘쳐나 음식쓰레기를 걱정해야 하는 오늘의 이 배부름이나 아직 쓸만한 새 제품임에도 신상품에 대한 유혹으로 핸드폰을 바꿔 사용하는 오늘의 이 풍요로움, 학원이며 과외, 인강 등 넘쳐나는 교육 컨텐츠들로 인해 선택이 어려울 정도인 대한민국 청소년의 오늘 모습과는 극단적으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지구촌의 다른 아이들을 생각하자니 가슴이 아려옵니다. 지구촌의 다른 편에서는 여전히 지독한 가난과 질병, 기아 속에서 생존을 위해 자식을 몇 푼 돈에 넘기는 부모와 구걸로 살아가는 아이, 쓰레기더미에서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소녀, 하루 열 시간이 넘는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는 어린아이들, 부모가 진 빚독촉을 견디다 못해 나이많은 사내의 노리개로 팔려가는 어린 딸 등 상상만으로도 끔직한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작가 조정연이 들려주는 제3세계 아이들의 이야기인 "넌 네가 얼마나 행복한 아이인지 아니?"는 기본적인 아동의 권리마저 보장받지 못한 채 거리로, 전쟁터로, 일터로 내몰린 9명의 아이들의 비참하고 슬픈 생활을 들려주고 있는 책입니다. 학교라고는 꿈도 꾸지 못할 만큼 당장의 먹을거리와 잠잘 곳을 해결하기에도 급급한 지독한 가난과 오래도록 굳어져 단단해버린 관습의 굴레와 합당한 명분도 없이 이어지는 전쟁의 상처 속에서 꿈을 잃고 살아가는 수천 수만 명의 어린 영혼들이 차마 상상도 할 수 없는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 또한 전쟁의 폐허가 가시지 않은 가난 속에서 입 하나 덜기 위해 어린 자녀를 식모살이로, 공장시다로 보내며 눈물 짓던 부모들이 있었듯 이들의 삶도 그러합니다. 미군트럭을 보면 손을 내밀며 구걸을 하던 아픈 시대가 있었듯 이들의 삶 또한 별잔 다르지 않습니다. 이 책에는 가난 때문에 현대판 하녀나 노예가 되어 힘겹게 살아가는 어린이들, 내전으로 인해 펜 대신 총을 쥐고 전쟁터에 총알받이로 나가 살인병기로 이용되는 아이들, 쓰레기더미에서 하루 양식을 구하는 아이들, 홍수로 집을 잃고 도시로 이주해와 길거리에서 신문지에 의지해 잠을 자고 구걸로 연명해가는 아이들, 인신매매단에게 납치돼 끌려와 카카오 농장에서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는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큐멘터리처럼 보여줍니다.    

 

냐의 빈민촌이자 매립지이기도 한 고로고초(쓰레기라는 뜻)에 사는 소피아는 매일 아침 트럭이 오는 소리를 듣고는 더 많은 음식 쓰레기를 구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달려갑니다. 에이즈로 부모님을 잃고 졸지에 할머니와 남동생을 책임져야만 하는 12살 어린 소녀에게 비가 오면 줄줄 세는 텐트 속에서의 고단한 삶은 생활이라기보다 전쟁에 가깝습니다. 주운 쓰레기를 두고서도 싸움을 해야하는 이곳은 끔찍하고 흉악한 범죄도 자주 일어나 저녁 7시가 넘으면 통행금지령이 울리는 세계 최대의 빈민가이기도 합니다. 나누기보다 빼앗는 삶으로 하루를 연명해야 하는 무법의 쓰레기더미 속에서 소피아와 같은 어린아이들은 최대 피해자요, 약자이기에 아무런 보호막도 없이 쓰레기더미 위에서 어린 영혼이 신음하다 영원히 잠들기도 하는 곳입니다.

 

리에게 킬링필드 학살로 잘 알려진 캄보디아 역시 잦은 내전과 급속한 에이즈 확산으로 인해 열악한 환경에 처한 어린이들이 무척이나 많다고 합니다. 소피아처럼 쓰레기마을에 살고 있는 라타, 포, 미네야는 말라리아에 걸려 누워있는 아버지, 어머니를 대신해 온종일 쓰레기더미를 뒤지며 벌이를 충당해야 합니다. 학교에 가고 싶어도 일할 시간이 줄어드니 아쉽게도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곳 매립지는 분리되지 않은 쓰레기를 태울 때 생기는 유독가스로 인해 호흡기질환, 폐질환, 뇌세포 손상 등을 가져오기도 한다니 총알 없는 전쟁터나 다를 바가 없겠지요. 

 

'동의 파리'라 불릴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도시 두바이(아랍 에미리트)에서는 낙타 경주가 현지인의 열렬한 사랑과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석유(두바이유)로 부자나라가 된 이 지역 사람들에겐 유목민으로 생활해왔던 전통적 흔적으로 낙타경주가 남아 있는데, 이는 이들에게 흥미진진한 오락거리이자  수백 억원이 오가는 도박장이기도 합니다. 경마의 기수에 해당하는 낙타몰이꾼들은 4세~15세 가량의 몸무게가 가벼운 남자아이들이며 이들은 대개 파키스탄이나 방글라데시 등 주변 가난한 나라에서 유괴나 인신매매, 또는 부모에 의해 팔려온 아이들이라고 합니다. 경주용 낙타의 속력을 내기 위해서는 낙타몰이꾼의 몸무게를 가능한 한 줄여야 하기에 평소에도 먹을 것을 제대로 주지 않아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이 태반인 데다가 경기 전에는 물조차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게다가  안장을 얹는 등까지의 높이가 대략 2.5m는 되기 때문에 어린이 혼자서는 올라탈 수 없으며 자칫 실수로 떨어지는 날에는 장애인이 되거나 시속 65km로 달리는 낙타들에게 짓밟혀 죽기까지 하는 끔직한 일이 자주 벌어집니다.  알스하드는 네 살 때 아빠 친구가 저지른 인신매매에 의해 낙타몰이꾼이 되었으며 아버지의 끈질긴 추적과 집요한 노력으로 인해 5년 후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나 불행히도 너무 오랫동안 굶주린 탓에 뇌세포가 죽어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다고 합니다.

 

거 미국으로 끌려가 노예생활을 하던 흑인들이 노예 해방을 맞이한 후 돌아와 세운 나라인 시에라리온은 선조들이 일군 자유를 마음껏 누리기도 전에 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내전으로 인해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난민이 된 불행한 나리입니다. 반군에게 부모님이 학살당한 채 얼떨결에 반군에게 끌려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손에 총을 쥐고는 똑같이 사람을 죽이는 살인기계로 키워지고 있는 소년병들. 술과 마약으로 몸을 병들게 하고 세뇌교육으로 판단력을 흐리게 해 마약을 얻기 위해서라도 손에 총을 들게 만드는 간악한 어른들의 싸움에 아이들은 점점 흉악하고 잔인한 살인병사가 되어 갑니다.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데 앞장서기도 하고 불을 질러 마을을 태우거나 달아나는 사람들의 사지를 무자비하게 잘라내 장애인을 만들기도 합니다. 이름도 과거도 잊게 만드는 끔찍한 현실 앞에서 이들은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고 무기로 훈련되는 소년병입니다.   

 

쟁과 테러의 나라인 아프가니스탄에는 부모나 가족이 진 빚을 갚지 못해 빚 대신으로 끌려가는 어린 소녀들이 많다고 합니다. 집집마다 빚이 늘어난 데에는 양귀비 재배에 관한 법제도와 정권 변화가 큰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하는데요. 전 세계 아편의 3/4을 수출하는 나라인 아프가니스탄은  한동안 정부 주도로 이루어져 오던 양귀비 재배를 소련의 아프간 침공 이후 일반인들에게도 허용, 탈레반 정권에 의해 아편으로 만들어져 중개상에게 팔려나간 수입을 전쟁자금으로 쓰던 나라였습니다. 탈레반 정권이 물러난 이후에는 일반인의 양귀비재배가 불법으로 바뀌자 그동안 양귀비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해왔던 많은 사람들이 큰빚을 지게 됐으며, 결국에는 빚을 갚을 수 없게 되자 눈물을 머금고 어린딸을 빚대신으로 늙은 남편감에게 신부로 보낸다고 합니다.   

 

러한 모든 것들이 선택이 아닌 강요된 삶이라면, 소수가 아닌 다수의 삶이라면, 구걸 외에는 더 이상 살아갈 방도가 없는 삶이라면 이 아이들은 과연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과거 우리가 잘 사는 이웃 나라에게 도움을 받아 경제 발전의 밑바탕을 만들었듯 이제는 우리가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애정을 보여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족이 모여있는 따뜻한 집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학교에 다니고 꿈을 키우며 내일을 열어갈 이 아이들이 어린아이로서 누릴 최소한의 권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먼나라 이야기로만 듣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눔의 범위가 확대되어 더 이상 학대받는 아이들이 없도록 저자가 던진 질문에 '난 내가 얼마나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알기 때문에 너희들에게도 이 행복을 알려주고 싶다. 돕고 싶다' 답을 해줘야 할 것 같습니다. 

 

[참고] 국제적 인권 조약 중 하나인 UN아동권리협약 은 1989년 UN총회에서 채택된 것으로  아동의 생존과 보호, 발달, 참여의 권리를 규정해 놓고 있다.

 

1. 생존의 권리 : 적절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 안전한 주거지에서 살아갈 권리,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고 기본적인 보건 서비스를

  받을 권리 등 기본적인 삶을 누리는 데 필요한 권리

2. 보호의 권리 : 모든 형태의 학대와 방임, 차별, 폭력, 고문, 징집, 부당한 형사처벌, 과도한 노동, 약물과 성폭력 등 어린이에게

  유해한 것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3. 발달의 권리 : 잠재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데 필요한 권리(교육받을 권리, 여가를 즐길 권리, 문화생활을 하고 정보를 얻을

  권리,  생각과 양심, 종교의 자유를 누릴 권리)

4. 참여의 권리 : 자신의 나라와 지역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할 수 있는 권리(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자신의 삶에 영향을

  주는 문제들에 대해 발언권을 지니며, 단체에 가입하거나 평화적 집회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유)  

 

넌네가 얼마나행복한지모르는것같다.와이즈만.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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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박광수 지음 / 청림출판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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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대교 난간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져 있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입니다'

 <광수 생각>으로 유명한 박광수의 신작『어쩌면, 어쩌면, 어쩌면』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위 글이야말로 이 책이 전하고 싶은 메세지의 압축이 아닐까? 싶다. 살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벼랑 앞에 서보게 될 것이며 그 순간에 각자는 더 이상 살아갈 힘이 없는 절망과 동시에 살아있는 순간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에 빠질 것이다. 마침표를 생각하는 순간에 떠올리는 쉼표처럼 이 책은 삶의 고단함과 서글픔,  답답함과 억울함, 깊은 한숨과 얕은 분노를 느껴본 자들에게 잠시 쉬었다갈 수 있는 쉽터를 제공해주는 책이 될 것이다.

그림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간결하고 섬세하되, 광수 생각은 시간을 덧입은 만큼 깊고 풍성해져 스쳐 지나가는 사물에도 깊은 애정과 관심을 두고 관찰하는 관조적인 그만의 사상으로 성장했다.  

 

1. 어쩌면

 

이 책은 섬과 섬 사이를 떠도는 외로운 현대인에게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싶다"라고 말한 어느 시인의 바람처럼 나와 타인에 대한 적당한 거리에서 오는 관계미학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1부인 '나, 그대로의 나'에서 종종 보여지는 현실에 대한 순응적 받아들임은 우울한 체념보다 평온한 순리에 가깝게 느껴지며 거추장스런 위선보다 솔직한 고백으로 다가오기에 공감이 가는 부분이 참 많다.

이제는 더 이상 젊다고 말할 수 없는 나이에, 인생에 핑크빛 희망을 지니고 살기에는 현실감각이 지나치게 발달해버린 시점에, 막연한 행운이나 요행을 바라고 새로운 일을 펼치기에는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아진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 허망한 희망보다 따뜻한 위로가 되주는 조언이랄까? 저자는 나이들면서 조금씩 사람에 대한, 일에 대한, 상황에 대한 기대감을 내려놓고 조금씩 좌절을, 분노를, 슬픔을,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인정해가며 가면을 벗고 타인을 대하는 순간 우리 생이 더욱 빛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아픈 것은 아프다고 말하자

 무서운 것은 무섭다고 말하자

 힘든 것은 힘들다고 말하자

 세상 사람들은 속일지라도 내 자신에게만은 솔직하자

 

 같은 실수에도 누군가는 자신의 실수를 감추기에 바쁘고,

 또 누구가는 실수를 통해서 내면의 키가 한 뼘쯤 자라기도 한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나.

 내 인생의 구경꾼들로 인해 내 인생이 흔들릴 필요는 없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타인을 바라보게 되면, 서로의 미숙함과 불완전함도 비난이 아닌 동병상련이 되기에 안녕?하고 인사를 건넬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2부인 '안녕, 낯선 사람'에서는 용서보다 아름다운 화해를, 기분이 나빠지는 간섭과 가슴이 아파오는 충고의 차이를, 핸드폰이라는 우물에 빠져 계절의 오고 감도 못 느끼고 사는 현대인을, 하나뿐인 무전기가 소용없음을 통해 소통의 쌍방 조건을, 계산기로는 도무지 계산할 수 없는 너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각자 외로이 떠 있는 섬이지만,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다정한 섬이기도 한 것이다. 

  

2. 어쩌면

 

이 책은 치매에 걸린 노모를 곁에서 지켜보며 자식으로서 느끼는 부모의 깊은 사랑에 대한 '사모곡'인지도 모른다.

밥때가 되면 광수야! 이름을 불러가며 신호를 보내신 후 누런 코를 깨끗이 씻어주신 다음에야 식탁에 앉히시고는 맛있는 음식으로 저자의 입안을 채워주시던 어머니.

대견할 것도 없다고 표현하는 저자를 평생 대견한 아들로 여기시며 막내에 대한 애틋함을 가슴 깊이 새기며 살아가시던 어머니.

그 어머니가 어느 순간 치매 판정을 받고는 자식들의 이름을 깜박깜박하시더니 씻는 일조차 잊으시고는 음식 만드는 일조차 불가능하게 되어버린다.

그런 어머니를 지켜보며 저자는 치매를 앓는 노모와 지켜보는 가족의 안타까운 심정 속에서의 아픔을 이렇게 표현한다.

 

  치매란 자신이 젊은 시절 애쓰며 건너온 징검다리를 되돌아 가는 것.

  되돌아 가면서, 자신이 건너온 징검다리를 하나씩 치우는 일.

  그때 옆에 있는 당신은 답답하다고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어서는 안 됩니다.

  그녀에게는 당연한 일들.

  그때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저 뚝방에 서서 웃으며 손을 흔드는 일.

  밝게 웃어주며 날 천천히 잊어달라고 비는 일.

  안단테, 안단테......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밝혔듯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에 대해 막연한 기대감을 품게 된다. 나이가 들면 기대가 작아지는 것이 순응을 배워가는 것이라지만, 저자가 끝까지 버리지 않고 싶은 기대감은 예전처럼 온 가족이 둘러앉아 엄마가 만들어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날에 대한 소망이다. 소박한 희망, 실낱같은 그 기대감이 간절한 기도 의식처럼 만나 이뤄진 것이 3부 <안단테, 안단테, 안단테>이다. 막을 수 없고 되돌릴 수는 없어도 천천히 진행되기를 바라는, 천천히 잊혀지기를 바라는 저자의 현실적 소망이 고스란히 담겨있어서인지 먼저 손이 가고 이내 마음을 울린다. 저자의 차분한 기도의식이 독자의 응원 속에 지침 없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3. 어쩌면

 

이 책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에 대한 저자의 시인적 관찰 보고서인 동시에 사물이 지니고 있는 상징적 설명서이기도 하다.

늘상 곁에 두고도 스쳐지나갈 만큼 하찮거나 사소한 것들에 대한 저자의 섬세한 관찰력과 사물의 속성에서 기인한 새로운 의미 부여는 마치 시인의 눈을 닮아 있다. 나는 어쩐지 광수씨가 그림에 가까운 화가라기보다 문학에 가까운 시인같은 느낌을 받곤 하는데 그건 아마도 짧지만 긴 여운을 주는 그의 시심(詩心) 때문인 것 같다. 일상에서의 한 단면을 인생으로 연결시켜 풀어갈 수 있을 만큼 그의 관찰력과 통찰력은 타인의 공감력을 이끌어낸다. 그림과 함께 봐야 제맛이지만 아쉽게나마 몇 편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계란 후라이 - 그 사람이 웃으며 내게 물었습니다. "깨뜨릴까? 깨뜨리지 말까?"

                     계란이야 어찌 되었든, 우리의 사랑은 깨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안경 - 내 눈에 사람들이 보는 것과 다른 것이 보인대도.

           사람들이 이제 그만 벗어버리라고 해도.

           난 당신이 내게 씌워준 안경을 벗지 않으련다.

           당신이 내게 씌워준 콩깍지라는 안경.

 초콜릿 - 언젠가 녹아서 없어지겠지만,

           당신과 나의 달콤했던 추억은 잊지 말아 주세요.

  편의점 - 당신의 사랑은 너무 게으르오. 어느 날은 열렸다가 어느 날은 닫혔다가.

           내 사랑은 24시간 항상 당신을 위해 열려있는.

  선풍기 - 내가그 사람을 잊을 수 있을까?

              내 물음에 선풍기가 머리를 좌우로 돌리며 대답한다.

              못 잊어. 넌 그 사람 절대 못 잊어.

  전화기 - 내가 사는 곳에 눈이 왔다고 말하니 전화기 너머의 그녀가 말했다.

             "이곳은 비가 왔어요. 이곳은 씻어버릴 것들이 많고,

             당신이 있는 곳은 덮어버릴 것들이 많은가 보네요."라고.

  성냥개비 - 상대가 눈앞에서 멀어지면, 보통의 사랑은 잊히고

              큰사랑은 그 사랑이 더 커진다.

              바람이 불면 성냥의 불은 꺼지고 들판의 큰불은 더 불길이 세지는 것처럼.

  망치 - 망치는 못을 박는 도구만이 아니다. 반대로 못을 빼는 도구이기도 하다.

           나는 내 망치로 그동안 내가 타인의 가슴에 박은 못들을 모두 뺄 것이다.

이쯤되면  광수씨에게 만화가/화가라는 호칭 뒤에 작가/시인이라는 호칭을 붙여도 억지스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참고로 글쓰고 그림 그린이 박광수의 신작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에는 쪽수를 나타내는 숫자가 없다.

아무 데나 펼쳐 읽어도 아무렇지 않게 쉽고 편안하게 읽혀지는 책.

그러나 깊은 울림과 떨림이 있어 자꾸만 또다시 들춰보게 되는 책. 

내게 박광수의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은 '자꾸만, 자꾸만, 자꾸만' 들춰보게 되는 책이 될 것 같다. 보고 또 보고 또 보게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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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개의 지속가능한 희망 - 35,000km 착한 투자를 위한 드라이브, 아시아에서 아프리카까지
스티븐 수용 리, 머라이어 멜리저스 지음, 황미영 옮김 / 꿈결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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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전 한 지인의 장례식장에서 아랫단은 하얀 국화꽃으로, 윗단은 쌀포대로 장식된 특이한 2단 화환을 보고는 낯설기도, 신선하기도 해 주위사람에게 물은 적이 있다. 알고보니 사회적 기업으로 등록된 꽃집화환으로, 희망하는 고객에 한해 화환의 꽃 장식을 줄이는 대신 주문한 고객의 이름으로 금액 중 일부를 지역 사회의 저소득층 자녀에게 장학금으로 지원해주는 정책 중 하나라 한다. 사회적 기업이란 나눔의 가치를 생산자와 소비자, 지역민이 함께 누리는 실용적인 아이디어로 기업 특성에 따른 저마다의 독창성이 사회적 공익성과 결합해 이루어낸 경제 활동의 한 형태인 것이다. 

 

결에서 출간된 <100개의 지속 가능한 희망> 역시 환경이나 복지 등 사회 현안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수익을 창출해내는 기업을 찾아 이런 곳에 착한 투자를 하고자 하는 임팩트 투자자들이 여러 대륙을 여행하면서 이 분야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쌓는 과정을 여행기로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임팩트 전문가이자 펀드매니저이기도 한 스티븐과 변호사이자 유엔난민기구 전임 보호 담당관이기도 한 머라이어 두 사람은 각 나라마다의 사회문화적 환경 속에서 나타나는 경제적 특성을 통해 사회적 기업의 형태가 어떻게 나타나고 발전해가는지를 살펴보고자 중앙아시아, 동유럽, 중동 아프리카에 이르는 35,000Km를 자동차로 횡단하며 그 속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일상을 다큐멘터리로 정리해 나간다.

  

팩트 투자(착한 투자)자로서 창의성과 가능성이 있는 사회적 기업을 찾아내 그것이 성공하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는 스티븐은 이익창출에만 초점을 둔 주류 자본 사회를 극복하고 생산과 소비, 인권과 복지에서 소외된 이들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살아가고픈 바람을 갖지만 자선과 기부에만 의존하는 전통적인 NGO방식에 한계를 느끼게 된다. 결국 상업 자본주의의 폐해를 감안하면서도 역으로 그것의 장점을 활용하는 효과적 방법으로 사회적 기업에 관심을 두게 된다. 사회적 기업이야말로 제대로 성장하기가 무척 어렵지만 제대로 성장한다면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 두 가지를 동시에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허나 사회적 기업과 임팩트 투자라는 개념이 생겨난 지 얼마 안 된 만큼 딱히 정해져 있는 최선의 진로나 성공모델 자료가 부족한 상황인 만큼 아직은 초기 단계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글로벌 드라이브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된 이 여행기는 나라별, 도시별로 다양하게 나타나는 사회적 기업을 파악하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진행 상황을 조사하는 도전적, 모험적 여행으로 각국의 정치 사회 문화적 배경은 물론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나누는 경제활동이 소개된다. ·

 

중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 광산업 붐으로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뤘으나 극심한 빈부 격차의 몸살을 앓고 있는 몽골은 울란바토르의 게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45%가 최저빈곤선 이하의 삶을 살고 있다. 빈부에 따른 정보 격차가 심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Nomsys는 게르 지역에서 이용 가능한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해ㅏㄴ준다. Nomsys는 게르 주민과 직접 계약을 맺음으로써 와이파이 타워를 설치할 국유지를 허가받는 비용을 줄일 수 있으며 주민들은 자유롭게 정부의 웹사이트에 접속함으로써 수도나 위생시설 같은 공공 서비스와 관련된 정보를 보다 쉽게 얻을 수 있게 됐다.  

 

*카자흐스탄의 경우 주변국가에 비해 생활수준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장애아동에 대한 사회적 차별로 인해 많은 가정에서 장애아를 숨겨두고 키우는데다 성인이 되어서도 고용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아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 사회적 기업 Eldany는 장애아동에게 필요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한 설립된 단체로 처음에는 NGO의 기부금에 의존해 출발했으나 현재는 장애아동들이 만든 예술품 판매 및 정부 입찰 등 매출활동에 의해 수입의 절반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렇게 창출한 수입은 장애아동들을 위한 예술 수업과 상담, 물리치료, 체육 활동 등에 쓰이고 있으며, 대중에게 장애인 인식을 재고시키는 데에도 의미있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 1994년에 발생한 르완다 집단 학살 후 지역 여성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설립된 'Gahaya Links'는 공정무역을 통한 여성 경제권 강화를 기본으로 방직기술을 향상시킴과 동시에 민족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상생해야 하는지를 교육하는 기관이기도 하다.

 

* 말라위의 'People of Sun'은 농촌과 도시의 비공인 장인들을 모집하여 가구 및 홈 액세서리 분야에서 국제적 수준의 상품을 제작하여 판매한다. 이를 통해 빈곤한 예술 장인의 경제력 향상뿐 아니라 말라위 사회, 문화적 가치를 보존하는 데 가치를 둔다.

 

*선진국과 개도국의 모습을 둘다 가지고 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사회적 기업은 주로 기술이나 생산공정 혁신에 중점을 두고 있다. 많은 노력이 투입되고 있으나 사회적 약자에 해당하는 인구는 급증하나 그들을 위한 적절한 교육 기회나 일자리는 부족한 편이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설립된 'The Maharishi Institute'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 대학으로 10시간 중 절반은 일을 하고 절반은 배우는 시스템으로 운영한다. 학생들은 배움과 동시에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고, 일부는 대학으로부터 받은 대출금을 갚을 수 있다.  

 

적과 방향성은 나라마다, 기업마다 다를지라도 취약계층에게 사회서비스 및 일자리를 제공하여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취지는 동일함을 알 수 있다. 그동안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과 온정이 주로 일방적 베풂인 기부나 정부보조금에 의해 이루어진 것에 비해 이와 같은 사회적 기업의 출현은 단순한 물질적 도움을 넘어 그들의 동참은 물론이거니와 자립의 기회까지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쌍방간의 협업으로 이루어지기에 더 의미있어 보인다. 또한 자선 단체와 달리 꾸준한 수익을 냄으로써 일회성이 아닌 지속 가능한 사회적 가치 실현이 가능하다는 점도 꽤나 매력적이다. 이윤극대화가 아닌 이윤의 효과적 분배를 우위에 두고 있는 만큼 수익의 일부는 지역공동체에 재투자하거나 취약계층에 대한 사회적 서비스에 사용되고 있다. 

 

럽,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1970년대부터 시작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고령화가 진행되던 2000년 대에 들어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기증받은 물건이나 재활용품을 수거한 후 재판매하여 수익금을 자선과 공익 부문으로 이용하는 '아름다운 가게'가 대표적이랄까?  이밖에도 지적장애인이 우리밀 과자를 생산하는 '위캔', 친환경 건물청소업체 '함께 일하는 세상'등이 사회적 기업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취약계층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회적 기업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식이 가능하도록 개조한 트럭 한 대를 몰고 아시아에서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고된 여정길을 착한 투자를 위한 드라이브로 감행한 두 사람의 행보가 아름다운 것은 이들이 꿈꾸는 좀더 나은 세상이 어쩌면 우리 모두가 꿈꾸는 세상과 동일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진심으로 바라고 기대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착한 투자와 착한 소비로 이어지는 지구촌의 경제활동 변화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양극화된 모순 속에서 장점은 살리면서 단점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이 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이들이 둘러본 100개의 지속가능한 희망이 씨앗에서 열매로 자라 새로운 씨앗을 뿌릴 때까지 멀리서나마 응원을 보내는 심정이다.

 

행의 목적이 그저 아름다운 대자연을 감상하거나 위대한 인류 유산을 돌아보는 감탄이 아닌, 지구상 여러 나라의 사회 경제상을 엿보기 위함이라는 뚜렷한 목적을 가진 두 사람의 행보는 여행지가 늘어날수록 놀랍기도, 흥미롭기도, 존경스럽기도 하다. 나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지속 가능한 발전과 행복을 위해 떠난 두 사람의 발자취를 책으로나마 따라가 보는 일은 그래서 의미있고 즐겁다. 다소 무모한 도전으로 보이기도 한 이 대단한 드라이브를 신념과 열정으로 무사히 마친 저자의 뒷 고백은 현실과 타협해가며 하고싶은 일을 나중으로 미루는, 이상일 뿐이라며 덮어놓는 내 무수한 꿈들에 신선한 자극을 준다. 나도 이들처럼 해볼 수 있을까?

 

 

예전에 꿈꾸었던 그 한 가지를 함으로써 주변 사람들을 실망시킬 것인지

아니면 그걸 하지 않음으로써 내 자신을 실망시킬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 머나 먼 여정을 마친 후에 쓴 머라이어의 에필로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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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경제학 - 경제학은 어떻게 인간과 예술을 움직이는가?
문소영 지음 / 이다미디어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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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부터 엉뚱한 소리일는지 모르지만 최근 교육계에서는 '창의적 융합 인재 양성'이 관심 용어로 떠오르고 있다. 이는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각 분야의 전문성은 별개의 영역이 아닌 융합과 조화의 영역임을 나타내는 말로, 가령 전혀 다른 분야로 인식되어온  과학과 예술, 철학과 공학이 결합하여 새로운 창의적 생산물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거울을 이용한 구조물을 만들고 그것을 광고하는 글을 쓰거나 거울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 활동을 하는 등 다양한 경험과 관찰 모두가 거울의 원리를 이해하는 전반적인 과정으로 융합 교육의 한 방법이 되는 것이다. 과학 수업인지 작문 수업인지 미술 수업인지 경계가 모호하지만 결론은 겨울에 대한 총체적 이해가 주된 목적이 된다.

21세기 창조 경제 시대에 지식과 기술, 예술이 만나 이루는 융합형 인재는 어쩌면 다변화되고 세분화되는 시대에 또 다른 요구에 의해 만들어지는 인재 유형이 아닐까 싶다.

 

접적으로 대면한 적은 없지만 저자에 대해 굳어진 이미지가 내게는 위에서 언급한 융합형 인재와 흡사하다. 책으로 만나기 전 저자가 운영하는 네이버 블로그 <미술관 속 비밀도서관>을 비밀스럽게 출입하던 방문객인지라 그간 저자의 그림 소개를 줄기차게 읽어왔기에 그의 해박한 인문학 지식과 그림을 풀어가는 문장력에 탄복하고는 했는데, 이번에 출간한 <그림 속 경제학>을 통해서는 저자의 또 다른 전공 분야인 경제학 풀이에 감탄을 금치 못했으니 말이다. 사람이 한 분야에서만이라도 전문성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은 법인데 역사와 철학이라는 인문학적 배경에 숨겨진 명화를 찾아내 맛깔스럽게 소개하는 그의 필력은 주말에 가까운 미술관이나 박물관이라도 찾아가보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다.

 

다미디어에서 출간된 <그림 속 경제학>은 언뜻 낯선 조합처럼 보이는 두 영역을 저자 특유의 문체인, 합리적 사고 방식이 빚어내는 정갈한 언어로 미술 작품 속에 반영되어 있는 당대의 세태는 물론이거니와 숨어있는 경제학코드를 알기 쉽게 풀이해낸 책이다. 모든 예술이 당대 사회를 반영하고 있다고는 하나 감상자 입장에서는 오랜 시간이 흘러 삶의 양식이 바뀌었기에 들여다보지 못한 구석도 있을 것이며, 작가가 은밀하게 처리한 탓에 전문가가 아니라면 보지 못하는 구석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내게는 이 책이 후자의 경우에 더욱 속하는 것으로서 저자의 설명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만큼 의외의 숨겨진 구석이 많아 호기심이 비례적으로 작용한 책이기도 했다. 차례만 훑어보더라도 일단 구미가 당긴달까? 예감은 종합적 판단을 전제로 하기에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세의 종교그림부터 현대의 벽화미술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상황별, 사상별로 이슈가 되었던 작품들을 토대로 경제용어와 재미있는 미술사를 섞어가며 풀어가는 이 책은 총 12 파트로 진행되는 미술사 수업인 동시에 경제학 강의이기도 하다. 청강생이 되어 12파트를 수강하는 기분으로 한 장 한 장을 넘기다 보면 때로 오래도록 시선이 머무는 그림이 있는가 하면 때로 밑줄을 긋게 만드는 구절이 있어 색다른 즐거움을 독자에게 선사해 준다.

 

 

Part 1 에서 다루고 있는 지오토 디 본디네가 그린 프레스코 벽화 중에는 인류 구원의 상징인 예수가 무서운 눈빛으로 채찍을 휘두르는 그림이 있어 온화하고 자비로운 예수의 이미지에 익숙한 이들에게 낯선 경험을 안겨준다. 유대인의 큰 명절 중 하나인 유월절(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명절) 제사를 위해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성전에 모여 외국 화폐를 성전 반세겔 은화로 바꾸는 가운데 환전이 성행하게 되었으며, 흠없고 순결한 제물을 구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가축상들의 가격 횡포가 극심하게 이뤄지던 풍경을 목격한 예수가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이르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이 안에서 저자는 당시 서민의 등골을 휘게 만드는 독점과 담합의 실체를 읽어내며 제물용 가축과 성전세용 환전 서비스에 대한 수요는 이들에게 절대적인 만큼 가격 변화에 지극히 비탄력적일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분노한 예수의 표정 하나에, 채찍을 휘두르는 손짓 하나에, 쏟아지고 흩어지는 동전과 인파들의 동작 하나에 독점과 담합원리는 물론이거니와  이를 묵과하고 뇌물을 챙기는 부도덕한 종교지도자에 대한 비판과 조롱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공정거래법이 등장하게 된 바탕에는 이러한 인류 역사의 진행이 있었음을 그림은 증언처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자'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의 이야기를 그린 얀 요세프 호르만스의 그림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이어 대금업에 대한 당대인들의 부정적 시각을 그린 히에로니무스의 <죽음과 구두쇠>를 통해 대금업으로 부를 축적한 구두쇠가 죽음의 순간 직전까지도 돈자루에 본능적으로 손이 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영혼 구원과 물질의 세속 사이에서 오가는 심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오늘날의 대부업계 또한 여전히 높은 이자율로 인해 절박한 사정으로 급전이 필요한 서민들에게 삶의 부담을 가중시켜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으니 합법적 사채업에 대해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논쟁거리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Part 3 '여왕은 지구본 위에 손을 얹었다'는 제목부터가  대항해시대를 통한 식민지 개척과 중상주의 정책을 자동적으로 연상시킨다. 인류 역사상 위대한 여왕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영국의 엘리자베스1세를 그린 <아르마다 초상화>에는 화려한 장신구로 꾸며진 위풍당당한 여왕의 모습에 가려 지나치기 쉬운 부분으로 지구본에 살짝 손을 얹은 부분이 있다. 당대 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시각 자료라 할 만한 이 그림에서 여왕이 손으로 덮은 북아메리카 동부의 한 지역은 나중에 여왕의 별명이 된 '버진 퀸'을 따서 '버지니아(Virginia)'라고 불리게 됐다고 한다. 또한 그림의 왼쪽 상단에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영국과 에스파냐의 범선들이 보이는데 당시 바다를 가로지르던 무역상들이 국가와 군주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생활과 밀접한 항구 풍경을 화가들에게 자주 주문했다고 한다. 고전주의적 풍경화의 대가인 클로드 로랭의 < 빌라 메디치와 항구 풍경>은 웅장한 돛대의 배가 정박한 해안가와 분주하게 움직이는 선원들을 그리고 있어 대항해 시대의 경제적 변화와 부흥을 절감케 한다. 한편 대항해 시대가 낳은 활발한 교역과 중상주의는 국가 간 식민지 쟁탈전의 문제점을 낳기도 했으며, 유럽의 서민들 또한 낮은 임금과 비싼 상품 값으로 인해 중상주의의 폐해에 시달려야만 했다. 일반 국민의 부가 아닌 절대군주의 부와 소수의 특혜 권력층을 만들어낸 강력한 중상주의와 보호무역은 우리나라의 경우 급격한 경제성장의 대명사가 돼버린 '한강의 기적'을 이뤄내기도 했으니 그림 한 장에 담긴 경제학적 속뜻은 의미심장하기만 하다. 

 

Part 5에서는 프랑스 왕 루이 15세를 사로잡은 여인을 그린 <퐁파두르 후작부인>과 그녀의 주치의였던 <프랑수아 케네>의 초상화를 통해 계몽주의와 중농주의를 살펴보게 된다. 단순히 아름다운 미모와 세련된 패션 감각만을 엿보는 것이 아닌, 초상화 뒤로 보이는 백과사전과 지구본, 손에 들고 있는 악보를 단서로 그녀가 한낱 왕의 정부가 아니라 당시 많은 학자와 예술가를 후원한 여장부였음을 드러내준다. 케네는 그녀의 주치의로서 의학뿐만 아니라 경제에도 관심이 많아 계몽주의 시대에 농업, 제조업, 상업 사이의 자연스런 경제적 상호작용과 순환관계에 주목했으며, 이후 퐁파두르 부인의 후원으로 중농주의 학파를 창시하게 된다. 무역업을 통한 금과 은의 획득이 아닌 생산에서 부가 창출된디고 믿었던 중농주의 사상과 되도록 정부 간섭과 규제를 줄이고 내버려두라는 자유방임주의는 이후 근대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애덤 스미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밖에도 산업혁명의 견인차 역할을 한 증기기관차의 발명을 매력적으로 나타낸  윌리엄 터너의 <비, 증기, 속도>나 우리에게 인상주의 화가로 잘 알려진 클레드 모네가 그린 <생 라자르 역> 과 같은 그림은 현대인인 우리에게 일상적인 경험인 기차가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인 속도의 경험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기계와 분업이 가져온 속도의 혁명만큼이나 몸으로 체험하는 교통수단의 변화는 수증기를 내뿜으며 기차가 들어오는 역에 빽빽하게 모여있는 사람들의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읽어내게 한다.

 

디를 먼저 펼쳐 읽든 손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재미있게 읽혀지는 < 그림 속 경제학>은 책의 앞부분인 추천의 글에서 이주헌 미술평론가가  '경제는 물질적으로, 미술은 정신적으로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이'는 영역이라 말했듯이 이 두 영역을 한 번에 만나볼 수 있는 색다른 독서 경험이 될 것이다. 책에 담긴 수십 편의 그림만 물끄러미 바라봐도 시대와 소통하는 기술이 반쯤은 생길 듯한데 그림 속에 담긴 경제학적 메시지까지 읽어본다면 예술과 경제학이 결합해 이뤄낸 당대의 풍속을 좀더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계기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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