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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으로 가는 길 - EBS 명강사와 함께하는 SKY 고전 100선 비행청소년 1
이진희.김하규.김동린 지음 / 풀빛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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뮈엘 베게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최인훈의 광장’, 김만중의 구운몽’,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 정지용의 정지용선집’, 고전소설 춘향전’,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비롯해 기타등등.

읽고 싶게 만드는 목록이 한가득이다선물용으로 포장된 과일 바구니의 탐스러움처럼, 달콤하고 상큼한 내음이 코끝을 자극하는 과일향처럼 EBS 명강사와 함께하는 SKY 고전 100<대학으로 가는 길>은 마치 동서고금의 고전들을 풍성하고 달콤하게 담고 있는 선물바구니 같다이미 읽어본 책이든 제목만 들어 익숙한 책이든, 아예 제목조차 낯선 책이든 먹어본 과일부터 안 먹어본, 또는 흔하게 맛볼 수 없는 과일이라도 입맛에 맞게 골라 먹듯 책의 어느 곳을 펼쳐도 맛있게 읽을 수 있다. 

 

 

책은 출판사 비행청소년의 야심작답게 열린 시각과 발칙한 상상으로 자유롭게 세상을 비행(飛行)하는 청소년 교양 시리즈물로 나온 고전안내 서적이다.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다고는 해도 쉽사리 삼키기 어렵듯 고전이 삶의 지혜를 높이고 내면의 아름다움을 채우는 데 시공을 뛰어넘는 교양서적이라고는 해도 쉽사리 소화해내기에는 어려움이 많은 게 사실이다. 특히나 요즘처럼 흥미위주의 가벼운 글이나 자기계발 류의 실용서적이 난무하고 있는 시대에 짧은 독서력으로 고전을 대하기에는 무엇을 어떻게 읽어야할지 책 선택에서부터 읽기 방법까지가 만만치 않다. 그것은 고전이 담고 있는 의미가 단순히 문자적 해석이나 줄거리 요약만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닌, 시대의 역사와 사상적 흐름, 인간의 근원적이면서도 본질적인 물음에 다가서는 앎과 깨달음에 기인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전이 당대에만 머물지 않고 시공을 초월해 대중에게 사랑받는 이유 또한 같지 않을까? 시대적 유행에 그치지 않고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에 이르기까지 상황과 배경은 달라져도 본질의 유사성에는 변함이 없는. 

 

 

전의 가치를 새삼스럽게 강조하지 않아도 고전 읽기의 필요성은 누구나가 공감하는 바, 특히나 대한민국 10대들에게는 입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예문으로 출제되는 고전 지문을 보며 머리가 지끈거리는 경험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독서와 토론, 논술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는 시대적 요구에 과연 교과공부만으로도 빠듯한 시간에 고전 읽기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일까? 시간적 여유는 둘째치고라도 어떤 책을 무엇에 초점을 두고 읽어야할지 몰라 호소하는 독자들에게 EBS 수능교재 집필진들이 모여 공동으로 펴낸 <대학으로 가는 길>은 학생들에게 궁극적인 대안은 아닐지라도 현실적 융통성으로 양질의 훌륭한 길라잡이가 돼주리라 본다. 굳이 입시를 염두에 둔 학생이 아니더라도 동서양의 고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하는 독자에게도 이 책은 한 권으로 만나보는 동서양 핵심 키워드로 유용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전통과 역사가 숨 쉬는 여행길에서 만난 친절하고도 박학다식한 안내자처럼 말이다. 

 

 

4개의 파트로 구성된 이 책은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첫 걸음으로 문학, 도전과 성찰, 시간 속 인간들에 대한 탐구 면에서 역사, 사회를 바라보는 합리적인 눈으로는 과학, 끝으로 사실과 현상에 대한 과학적 탐구 영역인 자연과학으로 나누어 총 100권의 고전을 소개한다. 작품의 분위기를 맛볼 수 있도록 작품 설명에 앞서 본문의 일부를 소개하고 있으며, 작가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이나 창작 동기, 당대의 유행사조( 또는 사상의 흐름), 책이 지닌 현대적 의미와 가치 등을 간략하면서도 핵심적으로 전달한다. 

 

 

인적으로는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 훑어본 목록에 한국 고전이 무려 23권이나 포함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 반갑고도 흐뭇한 심정이 들었다. 고전을 지나치게 서양문화와 사상에 치중한다거나 동양고전 역시 중국고전에 치우쳐 생각하기 일쑤인 독서풍토에 우리의 유구한 전통과 문화 속 빛나는 고전을 다수 품고 있음에 반가웠다. 내 것을 바로 알지 못하면 바깥 것을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추종하는 습성이 생길 수 있음을 경계하는 차원으로서도 말이다.

 

학을 알아갈수록 고전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철이 들수록 인생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재밌는 것은 고전이나 인생이나 어려울수록 깊이의 참맛을 제대로 알아가는 재미 또한 황홀하다는 것이다. 모쪼록 이 책이 그저 대학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기 위한 필수코스로써의 고전 해설서가 아닌, 인문학적 교양을 갖춘 사람으로서 삶의 바른 이치를 깨달아 가는 길잡이로 활용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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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를 구한 개 - 버림받은 그레이하운드가 나를 구하다
스티븐 D. 울프.리넷 파드와 지음, 이혁 옮김 / 처음북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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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림받은 자들의 동병상련이 빚어내는 담담하고도 따뜻한 이야기 <늑대를 구한 개>는 한때는 승자였다가 현재는 패자가 된 실직 변호사와 폐기처분되듯 버려진 경주용 개의 만남을 통해 서로에게 힐링이 되어가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다루고 있는 실화이다. 반려동물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책은 동물이 단순히 애완용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존재감이 있음을 감정의 과잉됨 없이 진솔한 고백으로 들려준다.

 

때는 잘 나가는 변호사였으나 만성 척추통증으로 인해 혼자서는 걷지도 못하는데다 직장도 잃고 가족과도 떨어져 지내게 된 울프(저자 이름)’는 크레이트(철창)에 갇힌 채 경주용 개로 훈련돼 앞으로만 달릴 뿐 계단도 잘 못 올라가는 개 카밋(comet)’을 운명처럼 만나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간다. 자신을 돌보기도 힘든 상황에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개를 입양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기에 처음에는 망설이지만 울프는 이내 상업논리에 따라 쉽게 버려지는 경주용 개로 키워진 그레이하운드 종 카밋에게 이끌려 삶의 동반자로 받아들인다. 화려했던 시절을 보내고 인생의 밑바닥에서 만난 인연이기에 더 깊고 애틋했던 것일까? 울프와 카밋은 사람과 동물의 주종 관계, 상하 관계를 뛰어넘어 깊은 정을 나누는 교감의 대상으로 발전해나간다.

 

러나 정상적인 예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없다는 울프의 불안감은 이제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법은 물론 주변과의 사회성에도 균열이 생기게 되자 자기만의 세계로 스스로를 가두는 삶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자학적 생각에 빠져 강박증 환자처럼 구는 울프에게 지칠 대로 지친 아내는 결국 이별을 통보한 후 떠나버리고 스스로를 실패한 인생이라 여기며 한없이 추락하는 울프 곁에는 오로지 카밋만이 여전한 친구로 남는다.

 

로 남은 상황에서 카밋과의 관계를 통해 부부관계에서의 연약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게 된 울프는 평생을 장애인으로, 그리고 실업자로 살아가야한다는 연약한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서서히 깨닫기 시작한다. 새로운 삶의 기회마저 고마워할 줄 모르고 과거에 발목이 묶인 채 나약한, 때로는 지나치리만큼 강인한 자기 최면에 빠져 있었던 자신을 아무런 대가나 요구 없이 그의 곁에서 손발이 돼주고 있는 카밋을 보며 자신의 진짜 문제는 허리통증에서 오는 장애가 아닌 믿음의 문제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카밋이야말로 날 때부터 인간에게 지독한 학대를 받고 급기야 버림까지 받은 상황에도 여전히 인간에게 마음을 열고 따뜻한 눈으로 그들 곁에 다가와 용서의 눈길을 보내고 있음을 마음으로 읽었다고 할까?

 

이 멋진 개가 날 선택한 이유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카밋은 경견장에서 엄청난 시련을 겪어야 했다.그런데도 모든 걸 용서할 수 있는 그 마음의 깊이를 결코 다 헤아릴 순 없을 것이다. 카밋은 사랑, 우정, 그리고 새벽에의 무한한 기대감과 같은 영원불멸의 가치들을 일깨워주기 위해 애써왔다. 왜 그토록 오랫동안 날 위해 애써왔는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p281)

 

 

후 울프는 아내에게 진심으로 다가가 화해를 하고 관계를 회복한다. 그리고 비록 장애를 안고 평생을 살아가야 할 가혹한 시련의 나날들이지만 남은 날들을 신세진 사람들에게 빚을 갚는 시간으로 보낸다. 무료법률상담은 물론 그레이 하운드 구조 단체의 모금 활동과 행사를 돕기도 한다.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있어야만 하는 날도 있었지만 그런 날들도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밋은 학대받는 그레이하운드 경견용 개의 대명사가 되어 지역의 유명인사가 되었으며, 2010년에는 네브래스카 동물보호단체로부터 올해의 보조견으로 선정되기도 했었다고 한다. 책 출간 이후 노골적인 경견 학대에 대한 묘사로 경건업계 종사자로부터 심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하니 책의 파급 효과가 어떠했는지 짐작해볼 만하다. 다행히도 이후로는 은퇴한 경주견들의 상당수가 보호소에 보내지거나 추후에라도 가족에 입양될 수 있도록 다른 개나 사람과 어울릴 수 있도록 신경써준다고 한다. 그레이하운드 종이 지닌 조용하고도 강인한 특성을 살려 경주견 대신 보조견이나 치료견으로 훈련되기도 한다니 반가운 일이다

 

의 원제목이 <comet’s tale : 카밋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나 국내 번역 제목이 <늑대를 구한 개>인 것을 감안해볼 때 이 책의 주인공은 저자라기보다는 저자와 함께 인생의 후반부를 함께 보낸 개 카밋이라고 보는 게 적절할 것 같다. 그만큼 카밋이 저자의 삶에 끼친 영향력은 지대한 것으로 이후 그의 삶의 태도를 바꿔 놓게 했으며, 더 나아가 경주용 개에 대한 끔찍한 동물학대에 대해 사회적 인식 변화까지 이끌어 냈으니 말이다. 결국 울프와 카밋의 불완전한 만남은 서로에게 치유와 안정으로, 완전한 성숙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 둘이 들려주는 이 아름다운 말을 남기며 글을 맺는다.

인생이란 건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게 아니에요.

빗속에서도 춤을 출 수 있다는 걸 배우는 거죠.(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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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콘서트 - 지루할 틈 없이 즐기는 인문학
이윤재.이종준 지음 / 페르소나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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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일 듯 말의 파장이 운명을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삶의 깊이와 진정성이 담긴 말 한마디는 때로 칼보다 무서운 무기가 되기도, 아세피린보다 잘 듣는 진통제가 되기도, 꽃보다 아름다운 향기가 되기도 한다. 때로 화려한 업적보다 그가 남긴 소박한 말 한 마디가 후대 사람들에게 더 인상적인 이미지로 기억되거나 회자되기도 할 만큼 말의 위력은 실로 대단하다.

이 책에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각 분야에서 내로라할 만한 유명인들의 사물을 꿰뚫는 날카로운 화법 속 유쾌한 재치나 유머 속 삶의 여유를 보여주는 말들을 풍성하게 소개한다.

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말인 리파티(repartee)-재치즉답 또는 현답모음집인 <말 콘서트>는 제목 그대로 각양각색의 재치있고 유머있는 말을 독자 앞에 볼거리 풍성한 콘서트 양식으로 보여주는 재치현답과 같은 책이다. 단순히 유명인이 남긴 명언이라고 하기엔 톡! 쏘는 뒷맛에 뭔가가 부족하고, ‘유머라고 제한하기엔 가볍지만은 않은 진중함이 느껴져 그것 또한 부적합하게 느껴지는 말들의 향연이랄까? 저자가 특별히 리파티라는 말을 사용해 쾌활한 위트나 지적인 유머라는 뜻으로 달리 표현한 것도 이와 같은 경계선의 필요함 때문이 아니었나 싶어진다. 때문에 이 책에 인용된 수많은 리파티는 그 말이 출생하기까지의 사회적, 정치적, 철학적, 문화적, 생활적 배경으로서의 상황을 폭넓게 들여다볼 때라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책은 1부 대문호예술가철학자성직자 편을 시작으로 2부 영웅편, 3부 대통령총리주석 등의 유명정치인이 남긴 경세지세의 말, 4부 한 시대를 빛낸 세기의 여배우여가수 편, 5부 인생처세지혜 등 현대인에게 유용한 처세담을 지나 6부 세련된 입담인 익살과 7부 사고의 폭을 넓혀주는 역설과 모순어법에 이르기까지 출판사 소개 그대로 어디를 펼쳐 봐도 순서와 상관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발자크, 헤밍웨이, 오스카 와일드, 톨스토이, 볼테르, 김수환 추기경, 춘성 스님 등 세계적 대문호와 철학자들이 남긴 1부가 삶의 깊이와 통찰이 느껴져서인지 가장 읽을 만했고 재미있었다. 수록된 내용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이지만 몇편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프랑스 문학의 거장으로 꼽히는 발자크는 나폴레옹이 칼로 이루었던 모든 일을 나는 펜으로 이루리라.”는 말을 통해 문학의 나폴레옹이 되고자 했던 열망을 드러낸다. 여담이지만 그는 글을 쓰기 위해 하루 40여 잔의 커피를 마신 것으로도 유명하다.

커다란 감정이 커다란 단어에서 나오는가?라는 헤밍웨이의 이 말은 헤밍웨이는 사전을 찾아봐야 독자가 알 수 있는 단어는 결코 사용하지 않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는 포크너의 말을 전해 듣고 한 말이라 한다. 헤밍웨이의 문장이 쉬운 단어와 짧은 문장으로 간결한 반면, 포크너는 어려운 단어로 긴 문장을 쓴 것으로 유명했다는 것이 말의 탄생을 실감나게 뒷받침해준다.

내 천부적 재능 말고는 신고할 게 없소.” <행복한 왕자>로 유명한 오스카 와일드의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이 말은 그가 뉴욕에 도착했을 때 세관원이 질문한 신고할 게 있습니까?”라는 말에 대한 대답이라 한다. 스스로를 천재로 여겼을 만큼 문학적 자부심이 뛰어났던 그는 영어권에서는 세익스피어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작가이기도 하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재치있는 묘비명으로 유명한 버나드 쇼의 이 말은 우리에게 알려진 것과는 달리 원 문장은 나는 알았지. 무덤 주변에서 머무를 만큼 머물다 보면(=오래 살다보면) 이렇게 무덤에 들어갈 줄을.’이라고 한다.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앞 문장이 더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버나드 쇼의 묘비명 못지않게 재미있는 원효대사의 일화 중 한 토막. 어느 날 원효대사가 절친한 친구의 사망 소식을 듣고 문상을 가서는 , 이놈아. 너 태어날 때부터 죽을 줄 알았다.”라고 했다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실로 도의 경지에서 집약해낸 명언이 아닌가?

마크 트웨인은 진실이 신발을 신고 있는 동안에 거짓은 지구의 반을 갈 수 있다.”는 말로 진실과 상관이 없는 온갖 루머나 비방, 과장과 허위의 말들이 지닌 허상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담배를 끊는 것은 내가 해본 일 중에서 가장 쉬운 일이다, 나는 그것을 천 번 해보았기 때문에 잘 안다.”는 그의 말은 담배 끊기가 얼마나 어려운 지를 특유의 유머 감각을 통해 반어적으로 보여준 말이기도 하다.

세익스피어는 우리 행성을 대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오.” 카잔차키스는 인간의 말을 그처럼 힘차고 부드럽게, 그처럼 감미롭게, 신비롭게 사용할 수 있었던 사람은 세익스피어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는 극찬의 말로 존경을 표한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는 찬성하지 않으나 당신이 그것을 말할 권리는 죽을 때까지 옹호한다."는 볼테르의 말은 이후 언론의 자유를 언급하는 자리에서 종종 입에 오르내릴 만큼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며 다름을 주장하는 멋진 표현으로 내 가슴에 새겨진 말이기도 하다.

 철살인이나 정문일침과도 같은 한 마디의 위력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걸까? 이 책을 읽다보니 말의 매력에 흠뻑 빠져 여기저기 밑줄을 긋다 정답에 가까운 답을 찾아내고는 탄성을 질러댔다. 영국의 비평가 존 러스킨이 남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가능한 적은 수효의 낱말로 말하라. 그렇지 않으면 읽는 사람은 틀림없이 대충 훑어볼 것이다.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알기 쉬운 말로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분명히 오해할 것이다." 이보다 간결하고 명료한 표현이 또 있을까? 말의 기능과 역할을 고려해 볼 때 결국은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어떻게 이해하느냐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지사인 것 같다. 이 책을 읽은 독자로서 앞으로의 언어생활에 상당한 힌트를 얻은 듯한 느낌이 드는 건 뿌듯한 수확이기도 하다.

자가 영어칼럼니스트로 오랫동안 활동해 온 만큼 언어만이 아닌 생활문화까지 짚어가며 말의 탄생과 유전을 풀어주고 있어서일까? 책이 단순한 말모음집에 그치지 않고 인문학적 배경까지 돋보이게 하는 풀이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 여정을 말 한마디로 압축하는 데는 무리가 있겠으나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여기저기 흘리는 말들은 자기 삶의 가치관과 정서를 드러내는 조각들임을 볼 때, 이 책은 동서고금의 수많은 영웅들과 유명인들을 편하게, 그러나 가볍지 않게 만나 볼 수 있는 스타다방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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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걸으며 제자백가를 만나다
채한수 지음 / 김영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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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역사상 가장 오랜 분열기와 혼란기였던 춘추전국 시대(기원전 770~기원전 221)에 중국 사상과 학문의 기초요, 동양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위대한 사상이 가장 활발하게 출현했다는 것은 모순일까? 순리일까? 이 책을 펼쳐든 순간 처음 든 생각은 바로 이러한 아이러니였다. 흔히들 난세가 영웅을 부른다고 하는데 이는 세상이 어지러운 때일수록 그것을 바로잡거나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려는 움직임 또한 평화로운 안정기에 비해 더욱 강렬하고 적극적인 다양성으로 나타나므로 일면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를 합쳐 역사상 550여년이라는 긴 세월 속에서 난세는 여러 영웅들을 불러냈을 것이고, 영웅의 활약상에 시대의 힘을 모을 수 있는 역사관이나 세계관을 부여할 사상의 필요성까지 대두됐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그렇다면 처음에 지녔던 아이러니한 상황은 모순이 아닌 마땅한 순리로 보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든다. 

 

 

자백가의 출현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출발하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 나라의 봉건제가 약화됨에 따라 각 지방의 제후들은 자신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끊임없는 전쟁을 벌이게 된다. 혈연 중심의 가족적 봉건제에 의해 세습되던 주() 왕조의 권력구조에 비해 뛰어난 지략과 능력을 겸비한 다수의 영웅들이 난무하는 춘추전국시대의 패권 다툼은 초야에 묻힌 실력 있는 인재를 재발견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며, 나아가 백성의 지지를 얻기 위한 차별화된 사상의 필요성을 불러일으키게 됐을 것이다. 제자백가의 출현은 이러한 사회적 혼란기에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는 시대적 부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생한 사상으로 이후 오늘날 중국문화의 사상적 토대요, 동양사상의 기초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인류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칭에서도 알 수 있듯 제자백가(諸子百家)는 중국 춘추 전국 시대에 활동했던 다양한 사상의 학파와 학자들을 통칭하는 말로, 제자(諸子)는 여러 학자를, 백가(百家)는 수많은 학파를 뜻하는데, 이는 다양한 사상과 이론을 가진 학자들이 수많은 학파를 구성하여 자유롭게 학문을 닦았던 당시의 상황을 드러낸다. 제자백가 학파의 종류에는 도덕적인 정치를 강조한 유가, 엄격한 법으로서의 통치를 강조한 법가, 도덕과 법률의 인위적 잣대보다 자연 그대로를 본받아 살아가는 삶을 강조한 도가, 사랑과 평화의 삶을 강조한 묵가, 논리학파로도 불리는 명가, 군사론을 펼친 병가, 군주의 외교책을 논한 종횡가, 농업생산에 의한 자급자족의 생활을 주장한 농가, 음양5행을 조합하여 하나의 철학 체계로 만든 음양가, 제자백가의 다양한 이론과 주장을 절충한 잡가 등이 있다. 이들은 정치사상뿐만 아니라 다양한 학술 분야에서 활동하며 사회 전반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중에서 공자는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바탕으로 유가를 창시하여 중국은 물론이요, 이후 조선의 이념적 통치사상의 축을 이루는 성리학으로 발전해 나간다. 유가 사상을 담은 <<논어>>는 공자와 그의 제자 및 당대의 인물들이 서로 주고 받은 대담을 엮은 언행록으로 공자 사후 그의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편찬한 책이며 이후 동양 고전의 핵심을 이룬다. 장자는 전국 시대 송나라 사람으로 공자 사후 100년 뒤 탄생했으며 노장사상을 구체화하여 도가의 중심을 이룬다. 이어 전국 시대에는 맹자가 그 체계를 확립한 유가와 묵자를 중심으로 한 묵가학파에 노자 학설을 구체화시킨 장자의 노장사상이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또한 자신들의 사상을 내세우기 위해 반대 학파(다른 사상)를 공격하기도 한다. 

 

 

히 묵자는 공자가 말한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백성은 백성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것에 신분 차이와 계급 의식이 숨어있음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공자가 말한 인이나 충, 효는 결국 상하질서를 아무런 불평 없이 순순히 따르라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지배계층이 하층민을 부려먹기 좋게 길들이려는 사상임에 틀림없다. 결국 공자는 겉으로는 어짊이란 그럴듯한 사탕발림을 하고 통치자, 지배자에게 빌붙어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백성들을 기만하고 있었다. 인의와 예악이라는 깃발을 흔들고 다녔던 위선자인 것이다.(p535)”

 

라며 공자의 상하질서를 전제로 한 사랑을 별애(別愛)로 치부해버린다.

 

 

 

자는 전국시대 초기에 활약한 묵가학파의 시조로 맹자와는 동시대 사람이다. ‘겸애교리(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두루 사랑하고 서로 이롭게 함)’, 반전론(反戰論), 박애와 만민평등, 절용 등 민생과 직결된 사상을 펼쳤으나 봉건 시대 위정자들의 입맛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상을 담은 <<묵자>>는 널리 읽히지는 못했다고 한다.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었던 조선 시대에는 금서로 낙인찍힐 정도였다 하니 정치이념과의 이해관계가 사상의 흐름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대략 짐작할 만하다. 어쩌면 묵자가 주장한 인본주의적 평등과 나눔의 철학은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현대인의 삶에 더욱 필요한 사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가 직설적인 화법으로 공자를 비판했다면, 장자는 좀더 우의적인 화법으로 비현실적인 유가의 이상론을 비꼬거나 겉으로는 성인군자인 척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공자의 표리부동함을 비난하면서 반대로 도가가 추구하는 무위의 다스림을 옹호하기도 한다. 공자가 자신을 알아줄 군주를 찾아 10여 년간 유랑한 것과 달리 장자는 초나라에서 제의한 재상자리를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만 보더라도 그들 각자가 추구하는 사상의 가치 요소가 외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지 알 만하다. 공자 사후에 수많은 군주들이 앞다투어 ()’을 바탕에 둔 유가의 덕치주의를 정치이념의 발판으로 삼았다는 것 또한 지배층과 권력층에게 유가 사상이 얼마나 덕스럽게 다가갈 수 있는 매력적인 사상인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장자>>에 나오는 대표적인 우화 호접몽은 장자가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지 본래는 나비인데 나비가 인간이 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그 경계가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 물아일체(物我一體)를 보여줌으로써 자연과 인간은 본시 하나로 겉모습이 나비나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은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다는 철학적 경지를 보여준다. 이는 단순히 인생의 덧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변환을 거듭하는 자연이나 우주의 시공 속에서 인간의 편협과 아집, 집착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p48)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고 저자는 해석해 준다. 고전에 대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이 독자의 이해도에 명쾌한 도움을 주는 장면은 이뿐만이 아니다.

 

 

소 필자의 관심도에서 멀었던, 아니 무지했던 <열자> 편은 내가 이 책에서 만난 가장 낯설고도 반가운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정나라 출생으로 노자의 후배이며 장자보다 조금 앞선 시대, 즉 공자와 맹자의 중간쯤에 생존한 인물인 열자는 노자의 사상을 이어받아 꿈과 현실, 삶과 죽음을 동일시 여기는 물아일체와 무위자연 사상을 우화 형식으로 들려준다. 열자가 바람을 타고 다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 허공을 밟고 바람을 타다편에서는 내가 바람을 타는 건지 바람이 나를 타는 건지 모를 지경’(p204)이라며 도에 이르기 위해서는 마음 속 시비와 이해득실을 없애야 하고 그것이 소멸된 단계를 지나면 무심, 망아, 무아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때 드디어 물아일체와 자연합일을 이룩할 수 있다’(p205)고 전한다. 전개 방식의 흐름만 보면 노자보다 장자에 가까운 사상이라는 생각도 든다. <노자>, <장자>와 더불어 도가 삼서로 널리 읽히는 <열자>는 고전에 대한 압축적 교육만을 받고 자란 우리에게는 다소 낯설기도 하나 심오한 사상의 경지는 노자, 장자에 못지않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다   

 

 

미로운 인물 중에는 법가 사상의 체계를 이룬 한비자도 독서의 중심에 있다. 한비자는 전국 시대 말 한나라 귀족 출신으로 선천적인 말더듬이인지라 변론에는 서툴렀으나 저술에는 뛰어났던 인물이다. 한나라가 쇠약해지는 것을 보고 임금에게 간언하는 글을 올렸으나 한왕이 이를 외면하여 어지러운 정치를 바로잡지 못하자 법치를 근간으로 하는 정치 사상을 담은 <한비자>를 짓게 되었다(p272)고 한다. 한왕과 달리 진시황은 <한비자>를 읽고 감탄한 나머지 한비자를 신하로 얻기 위해 한나라를 공격, 마침내 그의 법치사상을 바탕으로 천하통일의 위업을 이룬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위대한 영웅의 자질 중 하나는 인재를 귀히 여기는 태도, 시대를 꿰뚫어보는 혜안이 아닐까 싶어지기도 하는 대목이다. 이 책에 수록된 화씨의 보석편 역시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전하고 있어 위정자의 경솔함과 나태함에 대해 자질론을 떠올리게 한다

 

 

책은 중국 고전을 다루고 있는 만큼 우리가 익히 들어온 수많은 고사성어들을 그 유래와 함께 발생 당시의 시대적, 정치적 상황 하에서의 본래 의도대로 만나볼 수 있는 색다른 재미가 있다. 조삼모사, 우공이산, 순망치한, 대기만성, 호가호위, 어부지리, 가정맹어호, 풍수지탄, 당랑거철, 백아절현, 새옹지마 등 친숙한 고사가 곳곳에서 등장한다. 시대적 상황에서의 의미는 퇴색된 채 보편적 상황에서의 의미가 남아있는 오늘날의 통용되는 뜻과는 달리 각 고사성어가 품고 있는 우의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한 뜻은 당대 사람들을 감탄케 하기도, 뜨끔하게 만들기도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중 나무의 그루터기를 지키면서 토끼를 기다린다는 뜻의 수주대토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노력은 게을리 하면서 요행만 바란다는 뜻과는 달리 원래는 법가 사상가인 한비자가 옛 성현들의 치국 이념을 그대로 따르려는 고지식한 유가들을 비판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히들 소문난 맛집에 가짓수만 많을 뿐 정작 먹을 게 없다지만, 이 책은 정갈하게 잘 차려진 한식 상차림처럼 중국 고전 10편에 대한 각각의 소개가 담백한 글 읽기로 꿀떡꿀떡 넘어간다. 이야기체로 술술 읽혀지는 데다 소개된 각 편마다 작가의 해설이 뒤따르는 고로 깊이 있는 이해를 돕고 있다. 30여 년간 고등학교에서 고전문학을 가르쳐온 저자의 약력이 고전 해석의 깊이를 뒷받침해주듯 단편적 일화 소개에 그치지 않고 고전이 우리 삶의 현장에 어떻게 적용되고 변형되는지를 설득력 있게 전해준다. 

 

 

자가 유독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공자><맹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장자><열자>, <한비자> 편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 것은 저자 개인의 선호도에 따른 편중으로도 볼 수 있겠으나 독자 입장에서 짐작하기로는 그간 역사 속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진 특정 사상의 중요도보다 시대 흐름 속에서 재조명해봐야 할 다양성에 초점을 둔 편집량의 선택이 아니었을까?라는 추측도 해 본다. 개인적으로도 그간 접해볼 기회가 부족했던 <열자><한비자> 편이 가장 재미있고 유용했다. 이름이나 책제목 정도로만 들어왔던 <여씨춘추>, <회남자> 역시 소제목 그대로 격동의 시대를 평정한 사상의 완결판이라는 문구가 전혀 근거없는 말이 아님을 책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즈음은 인문학이 대세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은 여전히 대부분의 독자에게 낯설고 어려운 영역이라는 이미지를 지우기 어렵다. 더욱이 2500여 년 전에 살았던 옛사람의 사상의 흔적을 쫓아가기란 시공의 차이가 너무도 크다는 압박감이 일기도 한다. 그러나 고전이라는 것이 단순히 옛날에 쓰여진 오래된 책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공감과 교훈을 자아내는 영향력을 지닌 책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비록 어렵더라도 접근해볼 가치가 있으며, 바쁘더라도 시간을 낼 필요성이 있는 책임에는 분명하다. 이 책은 동양 고전의 핵심인 10편의 고전을 한 권으로 쉽게 만나볼 수 있는, 그러나 내용이 가볍지는 않은 입문서와도 같다. 10편의 고전 중 저자의 주관적 기준에 따라 추려내 구성한 만큼 전문적이지는 않지만 중국 고전 전반에 걸친 이해를 돕기 위한 출발서로는 꽤 매력있는 책이다. 쉽고 재미있고 의미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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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노예 12년 - 체험판
솔로몬 노섭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2월
평점 :
판매중지


한 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해리엇 비처 스토우 부인이 쓴 <톰아저씨네 오두막집(Uncle Tom’s Cabin)>은 노예제를 반대하는 북부와 노예제를 옹호하는 남부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미국 남북 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당시 미국은 공업이 발달해 값싼 흑인노동자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북부와 목화, 사탕수수 등 농업의 발달로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한 남부가 노예제를 두고 19개의 비노예주와 15개의 노예주로 나뉘어져 있었다. 북부의 지도자였던 링컨이 <톰아저씨네 오두막집>에 감명을 받아 스토우 부인을 초청한 자리에서 생각보다 작고 왜소한 스토우 부인을 보고 당신이 남북 전쟁을 일으킨 사람이요?”라고 말했다는 얘기는 이미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톰아저씨네 오두막집>이 평등사상을 가진 백인에 의해 기술된 소설로 휴머니즘적 가치를 짙게 풍기는 책이라면, <노예12>은 자유인에서 노예로 살며 겪었던 채찍의 공포를 좀 더 사실적으로 그려내 인간이 만들어낸 비인간적 제도의 참상에 더욱 초점을 두고 있는 대필 자서전이다.

 

<12>의 주인공인 솔로몬 노섭(흑인)은 노예 자유주인 뉴욕 시민으로 아내와 아들, 딸을 두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평범한 가장이다. 바이올린 연주에도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 있던 노섭은 어느 날 공연을 미끼로 다가온 두 명의 백인 남자에 의해 납치되어 노예주인 남부에 팔려가 이후 노섭이라는 이름 대신 플랫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혹독한 노예생활을 하게 된다. 넓은 영토에 목화밭과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남부의 농장주에게는 당시의 노예 판매금지법이 오히려 자유인을 납치해서라도 노예로 부리게 되는 편법으로 작용하게 되고, 이에 노섭과 같은 희생자가 부지기수로 발생하게 된 것이다. 한순간에 가족과 이름을 잃은 채 처참한 가축인간으로 살아야했던 노섭은 자신이 본래 자유인이라는 주장이 혹독한 매질과 감금으로 이어짐을 깨닫는 순간부터 입을 닫고는 충실한 노예로 지내며 탈출 기회를 엿보며 살아간다. 제목에서 짐작해볼 수 있듯 12년 간의 억울한 노예 생활을 이겨낸 노섭은 인내와 용기, 신념과 지혜를 발휘해 결국 자유인의 신분을 회복하게 된다.

은 그가 자유인의 신분을 되찾는데 도움을 준 헨리 노섭의 제안으로 이루어졌으며, 실화를 바탕으로 한 대필 자서전 성격이 강한 만큼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이야기는 비록 노섭 본인이 아닐지라도 19세기 노예상인부터 영문도 모른 채 팔려온 흑인노예와 노예주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역사의 한 단면과도 같다.

노섭 자신이 당시 노예들의 생활을 가축인간으로 표현했을 정도로 대부분의 노예주는 흑인노예를 감금과 폭행, 폭언 등 인간 이하의 대상으로 무자비하게 다루었으며, 노섭 역시 첫 번째 주인인 포드를 제외하고는 두 번째 주인인 티비츠와 세 번째 주인인 엡스에게서 매 순간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불안한 삶을 살게 된다.

노섭과 마찬가지로 자유인 신분에서 노예로 팔려온 일라이자는 그녀의 아들, 딸이 서로 다른 주인에게 팔려가는 바람에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시름시름 야위어가다 끝내는 주인들의 눈밖에 나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밝은 성격에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흑인 노예 페치는 바이유 뵈프의 잔인한 주인 엡스에게 욕정의 대상이요, 그 아내에게는 질투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던지라 둘 사이의 희생물로 웃음을 잃어가는 모진 삶을 살아간다.

에는 플랫으로 살아야 했던 그가 노예 생활 중 경험한 목화밭과 사탕수수 농장에서의 재배과정을 상세히 기술한 부분이 있는데 비참한 노예제의 실상은 물론이요, 당대의 농업 기술과 생활문화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어 19세기 남부의 목화 재배에 관한 사료로써도 꽤나 유용할 것 같다. 물론 그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등가죽이 벗겨지도록 채찍의 공포에 시달리며 하루 목화수확량을 채워야했던 그들의 비명 소리이겠지만.

날카로운 채찍질 소리와 그보다 더 날카로운 노예의 비명이 울려 퍼지는 남부의 목화밭과 사탕수수 농장은 더 이상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풍요로운 남부 풍경만으로 남지는 않을 것 같다.

을 읽다보니 독서의 초점이 '자유를 되찾기 위한 노섭의 끈질긴 의지'에서 '노예제의 폐단'으로 이어지더니 최종 종착역은 '제도의 노예로 살고 있는 우리 모두'로 이동해가면서 부분 부분 궁금한 부분이 생겨났다.

그중 노섭이 여러 차례 강조하듯 말한 '생명, 자유, 행복 추구'에 관한 미국의 독립 선언서 내용이 궁금해 찾아보니 핵심은 아래와 같았다.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177674일에 발표된 미국 독립선언문의 내용은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에 대한 이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아이러니한 것은 미국의 건국이념을 만들었던 당시의 이상주의자들은 인도주의적 사상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노예12>에서 플랫의 첫 번째 주인이었던 윌리엄 포드가 이와 유사한 인물이 아닐까? 인간적이고 신사적이며 신앙심이 깊어 노예를 인격적으로 대해주었던 포드조차도 노예제라는 뿌리 깊은 관습에서는 자유롭지 못한 모순을 지닌 백인으로서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노섭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 노예소유자가 잔인한 것은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며, 오히려 그가 몸담고 있는 체제의 잘못이다.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관습과 사회의 영향을 이겨내지 못한다. 아주 어릴 때부터 보고 들은 모든 것으로부터, 채찍은 노예의 등을 후려치라고 있는 것이라 배우기 때문에, 그는 성장해서도 자신의 견해를 바꾸기가 쉽지 않게 된다.(p200)'라고 말한 점으로 보아 인간이 만든 제도와 체제의 굴레는 당대만이 아닌 후대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고로 ​참으로 신중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독자로서 이 부분에 특히 방점을 두는 글로 마무리하는 것은 아무리 선하고 훌륭한 인품을 지닌 사람일지라도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관습의 힘과 제도적 환경에 대해서는 무비판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마침 이 책을 읽고 있을 무렵 사회적으로는 전남 신안염전 현대판 노예가 사회적 공분을 자아내며 한동안 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현대판 노예를 다룬 사건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으나 시공간을 초월해 수법의 잔인성과 비인간적 학대, 폐쇄적이고 고입된 환경을 이용한 온 마을의 감시 체계 등은 <노예12>과 크게 다를 바 없이 느껴진다.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비인간적인 제도인 '노예제'는 이미 수 세기에 걸쳐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돼 후세대에게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생명과 자유와 평등에 대해 그 부당함과 잔인성을 이성적인 목소리로 들려주었다. 하여 야만보다는 문명에 가까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에게 과거의 노예제는 분명 인류차원에서 부끄러운 행태로 남을 것이 자명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곳곳에서는 여전히 음성적인 노예제가 자행되고 있음을 우리는 종종 목도하게 된다.

현실적인 필요는 관념적인 이상을 쉽게 무너뜨리​며, 심리적으로는 거부감이 있을지언정 현실적으로는 소극적 동조자로서의 모습을 취하게 되는 기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플랫'이 노예로 지냈던 남부의 루이지애나는 개인 소유로써의 노예 개념보다는 주 전체가 노예를 감시, 감독, 처분하는 공적 관리체계로 똘똘 뭉친 집단소유로써의 개념을 보임으로써 노예제를 더 공공히 만드는 효과를 가져오게 한다.노예 탈출이 성공할 수 없었던 결정적인 덫은 마을 전체가 노예제를 위해 협력하는 집단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안 염전 노예들의 사례 역시 마을주민은 물론이요, 지역 공무원조차 이들을 탈출을 감시하고 방해하지 않았던가?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모두가 누리기 위해서는 감정적 공분을 넘어 부당한 시스템에 저항하고 함께 바꿔가기 위한 노력이 뒷받침될 때라야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드니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개인의 역할에 더욱 큰 책임을 느끼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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