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석의 진짜인생 - 세계 최고의 '위폐감별 전문가'
서태석 지음 / 스마트비즈니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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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몇년 전(그러니까 우리집 거실에서 TV를 추방하기 전)에 TV광고와 기억나지 않는 프로그램을 통해 세계적으로 실력을 인정받는 위폐감별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제는 그가 쓴 책으로 그를 만났다. 그가 들려주는 책의 내용도 궁금했지만 '진짜인생'이라는 제목에 나를 향한 질문부터 먼저 떠올랐다. '과연 내 삶은 진짜일까?' 

아무튼,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세계적인 위폐감별사'라는 범상치 않은 수식어가 전부였는지라 그가 말하는 '진짜인생'이 무엇인지 새삼 궁금했다. 그의 삶은 대체 어떠했길래?? 사실 제목만으로도 그의 삶이 온전히 순탄하지는 않았으리라 짐작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들려주는 오늘날의 자신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는 예상대로 대부분의 성공한 사람들의 삶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요즘에야 대졸 혹은 대학원졸마저도 평범한 학벌이 되어버렸지만, 1943년생인 그의 중학교 중퇴라는 학력은 요즘의 우리가 생각하듯 그렇게 보잘 것없는 학력은 아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졸업도 아닌 중퇴라는 것이 약점이 될 수도 있을테지만, 그 당시의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해보면 그의 중학중퇴라는 학력이 전적으로 부족한 것은 아니지 않았을까 말이다. 

아무튼, 중학중퇴네 졸업이네가 그에겐 문제가 되었을까? 짐작컨데 아마도 그렇지는 않았으리라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은행입사라는 당시로서는 절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었겠지만, 그래서 더욱 간절하게 매달리지 않았을까? 이것이 아니면 안된다는. 

어쩌면 일찍부터 자신의 길(가야할 길)을 찾게된 것은 오히려 행운이고 축복이지 않을까. 더구나,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일이 아니기에 더욱더 말이다.
요즘처럼 목적도 없이 공부에만 매달려 살아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부모로서 그의 인생이야말로 '진짜'삶이고 제대로 된 삶이란 생각에 더욱 안타깝다.  

물론, 누군가의 삶을 놓고 진짜네 가짜네 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그가 들려주는 '진짜'인생이 세계최고의 위폐감별사로서의 화려한 수식어보다도 자신이 살아낼 삶을 스스로 깨닫고 또 온전히 자신의 길로 닦아온 열정과 간절함이야말로 '진짜'인생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리라. 

이제는 두 명의 후계자를 키우며 그동안 자신이 쌓아왔던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다는 그는 아직도 '부름'을 받고 있다고 했다. 여러 기관에서 정말로 중요한 '시점'에서는 그를 필요로 한다고 한다는 이야기를 며칠전 라디오프로그램에서의 인터뷰에서 들었다. 

이미 책을 읽었던 터라 참 반가웠고, 문득 그가 이 책을 통해 들려주려던 것은 자신의 화려한 '성공'이 아니라 삶을 향한 간절함과 열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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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여행 - 다르게 시작하고픈 욕망
한지은 지음 / 청어람장서가(장서가)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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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여행'이란 제목이 나에게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느끼게 하는 책이다. 그리고 현재를 좀더 적극적으로 몰아부칠 필요가 있다고 긴장하케 하는 책이다. 

이미 딴지일보에서 여행기사를 쓰던 기자였던 저자는 자신이 특별한 서른을 맞이하기 위해 스물아홉에 주위의 만류에도 불고하고 과감한 일탈(?)을 감행한다. 그것이 바로 250일 동안의 여행이었다. 오로지 기사마감이 자신이 해야할 마땅한 전부(일상)으로 여기던 그녀가 어느 봄날 듣게된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란 노래로 인하여 말이다. 

흠... 서른. 그러고보니 나 역시도 '나의 서른'을 위해 바짝 긴장하며 이유없는 의미를 부여하며 '특별한' 서른 맞이를 준비하던 과거가 있었다. 저자처럼 어느날 우연히그리고 깨달음처럼 '서른'을 생각한 것과 달리 이미 20대 중반을 넘어가니 머지않아 서른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다보니 '미리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나의 서른'을 위한 준비로 내가 한 것은 회사건물 아래층에 있던 서점에서 <삼십세>란 책을 떨리는 손끝으로 아주 신중하게 뽑아낸 것이었다. 지금도 책꽂이에 꽂혀있는 그 책의 책등에 찍혀있는 제목을 보면서도 내가 그 책을 읽었는지, 읽다 말았는지..조차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못하지만, 그 때 그 책은 내게 소중한 무엇이었다. 

그러나, 일찌감치 서둘렀던 '나의 서른' 맞이에도 불구하고 정작 나의 서른은 일상에 묻혀 그 전과 그 후와 마찬가지로 나이 한 살 더 먹은 것에 지나고 말았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병환으로 그때 나는 나이 서른같은 것에 신경을 쓸만큼 한가하지 못했다고나 할까....... 돌아보면 항상 안타까움이 먼저 밀려오는 나의 서른이다. 

그러고보면, 이 책의 저자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현재를 과감히 벗어버린 그 용기와 결단에 부러움과 약간의 질투마저 느낀다. 그녀가 특별한 서른 맞이를 하며 보았던 세상(물론 이미 업무상 가보았다는 곳도 있엇지만)은 내게 더 큰 부러움과 질투를 느끼게 하였다. 이미 여행기사를 쓰던 이여서 그런지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왠지 편안함을 느끼게 하고, 직업적(?)인 카메라 앵글에서 벗어나 그녀가 걷고 머물렀던 그곳의 일상을 보여주는 사진은 왠지 갈증을 느끼게 한다. 

결혼 후 아이를 키우면서 나의 바람(소망?)은 '여행'이다. 수식어를 달자면 '세상을 향한' 여행이라고나 할까...
아버지의 병환으로 갑작스레 나의 삶이 그전까지 내가 그려오던 방향과는 달라진 탓에, 그저 온전히 현재에만 살아야 했던 나에게 언젠가의 여행은 작지만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나의 가슴 한 켠에서 여태껏 남아있다.  

서른여행을 통해 저자는 이미 스물아홉의 그녀가 아니었다. 여행기사를 쓰던 일상은 이제 과거가 되었고, 그녀에게는 '레인트리'가 새로운 현재이고 미래가 되었다. 여행에서 계획하지 않았던 '깨달음'을 얻는 그녀처럼 나 역시도 당장에라도 여행가방을 꾸리고 싶다. 아니 그전에 그녀의 서른여행이 곳곳에 담겨있을 카페 '레인트리'에 살짝 다녀오고 싶다. 

나도 거기에서 그녀의 결단과 용기로 기를 얻고, 여행에 필요한 알짜팁도 얻어와서 아직은 가슴 속 불씨로만 머물고 있는 '나의 여행'을 현실로 끌어내고 싶다. 그녀처럼 나도 스스로 내 삶의 터닝포인트를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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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다윈의 시대 - 인간은 창조되었는가, 진화되었는가?
EBS 다큐프라임 <신과 다윈의 시대> 제작팀 지음 / 세계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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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은 다윈의 탄생 200주년, 그의 대표저서 '종의 이론' 출간 150주년이라는 기념비적인 해였다. 그의 조국 영국뿐만 아니라 그가 미처 알지 못했던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조차도 그를, 그의 위대한 주장을 담은 저서를 기억하며 '인간'에 대해 되돌아 보는 대대적인 행사가 있었다.

나 역시도 때마침 새롭게 개관한 국립과천과학관 특별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던 <다윈>전에 두 번이나 방문했던 특별한 한 해였다.
그 후유증(?)인 것일까? 이후 다윈이나 그와 관련된 저서 혹은 이야기에 어느새 귀가 쫑끗해지고는 한다. 덕분에 초등생 딸아이에게도 반가운(?) 인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다윈이 아닐까 짐작해 보고는 한다. 

시대와 사상을 확실하게 거슬러 혹은 초월하듯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인간의 진화론은 다윈이란 평범한 과학자를 세기의 스타로 우뚝 세운 것만은 틀림없다. 어찌보면 다윈이란 개인을 한차원 높은 인간으로 격상한 인간의 진화론은 비단 그의 머릿속에서만 꿈틀대던 것은 아닐진대(다윈을 태양으로, 자신을 달로 표현하며 다윈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냈던 월리스가 있었다) 행운의 여신은 다윈의 손을 들어준듯 논문 발표의 기회(물론 는 다윈의 차지가 되고, 이후 진화론의 창시와 관련한 모든 영예 역시 그의 것이 된다. 월리스는 영원한 다윈의 달로 남고 만다. 아.. 역사란 이렇듯 '순간'에 의해 규정되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더불어 좀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깨달음도 함께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다윈과 그의 진화론을 약간이나마 학창시절의 교과서에서 벗어나 새롭게 접한 후라 이 책이 참으로 친근하게(?) 다가왔다. '신과 다윈의 시대'..라는 제목이 어쩌면 영원히 끝낼 수 없는 논쟁거리의 우두머리로, 맞수로서의 신과 다윈을 느끼게 했다.
또한,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종교적 과학적으로는 창조론과 진화론을 자연히 떠올리게 하는 제목이 아닌가.

이미 EBS 다큐프라임을 통해 방송했던 프로그램(교육방송에서 기획하고 취재한)을 바탕으로 쓰여진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된 지적설계론은 '어떤 지적인 존재가 세상을 계획적으로 설계하고 만들었다'이론이자 '그 존재가 신이든 신이 아니든 분명한 의지와 지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이며, 그 존재가 처음부터 생명을 디자인하고 계획적으로 만들었다(본문 37쪽)'는 이론이다.
물론, 지적설계론자들은 자신들은 창조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며, 종교가 아닌 과학적 이론이라며 진화론자들과 맞서고 있다고 한다. 

흠... 섣부르게 아니 감히 진화론이 맞다 창조론이 맞다를 주장할 아무런 나름의 근거를 갖지 못한 나로서도 지적설계론자들의 주장은 무늬만 다를 뿐 창조론과 다를 바가 없다고 느껴지는 건 무엇때문인지?? 

어쩌면, 지적설계론을 주장하는 이들로서는 보다 포괄적이며 친근한(?) 느낌의 이름표를 새로 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진화론에 맞서는 창조론하면, 일단 종교적인 냄새가 찐~한 탓에 비종교적 혹은 비기독교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그 자체에 반감을 갖고는 한다. 그렇다고 반감 자체가 진화론에 전적으로 수긍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다만, 창조론을 흔쾌히 받아들이지(인정하지) 못하는 것 뿐일지도 모른다. 

성경에서야 태초에 인간의 수명이 백 년을 훨씬 넘어 몇백 년을 살다갔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요즘에야 길어야 백 년을 조금 넘게 사는 것이 인간의 수명이다. 문득, 인간의 세상과 삶은 그칠줄 모르고 발전하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수명은 어쩌다 이렇게 어이없이 줄어들고 말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겨난다. 

어떤 이들은 '신'이나 '종교'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근원을 확신할 수 없어 자구책으로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인간은 어쨌거나 없는 것도 만들어 내는 비상한 재주가 없지 않으니 말이다.
이른바 놀라운 두뇌의 힘!이 아닐까? 

신과 다윈, 창조론과 진화론, 이제는 지적설계론의 등장으로 인간의 근원에 대한 인간 스스로의 궁금증은 더욱더 깊어가는 셈이랄까?
영원히 끝날 수 없는 논쟁이 분명한 신과 다윈, 그리고 지적인 존재의 인간에 대한 정의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는 않을까?
아니면,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근원을 영원히 밝힐 수 없는 이 문제는 다름아닌 시지프스의 바위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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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기적이야 그림책이 참 좋아 1
최숙희 글.그림 / 책읽는곰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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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닮아보이는 엄마와 아들의 표지그림이 절로 미소가 번지게 한다.
'너는 기적이야'라는 제목에 어느덧 십삼 년째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는 엄마로서 어렵지 않게 그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흔히들 말하는 '초심'을 떠올리듯 말이다. 

성인이 되어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하면 으레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 자연스런 삶의 이치려니 했다. 그러나 정작 나 자신이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여 열 달을 품어 한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은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경이로움이었다. 

눈 앞에 엄연한 현실이면서도 하루에도 몇번씩 신기로움을 느끼게 하던 가녀린 생명은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어느 순간에서는 버거움을 느끼게도 하였다. 사소한 것 하나조차도 나를 통해 세상을 보던 아이가 자란다는 것은 어쩌면 '나'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의미이리라.  

어느새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시선을 가지려는 딸아이는 새삼 대견스럽기도 하지만 반면에 왠지모를 서운함도 함께 안겨주는 요즘이다.
그래서일까.... 왠지 '초심'을 떠오르게 하는 책이다. 

나의 몸을 빌어 이 세상에 태어난 딸아이에게 나(엄마)란 존재는 세상 그 자체였던 때가 있었다. 나의 손짓, 나의 배려, 나의 관심만이 딸아이의 생명줄이었던 그 시절말이다. 아직 옹알거림은커녕 고사리같은 손마저도 온전히 자신의 것처럼 다루지 못하던 가냘픈 어린 생명을 보며 얼마나 놀라워했던지... 그때가 새삼스레 떠오른다. 

약하디약한 아이의 눈빛을 들여다보노라면 절로 마음을 다잡게 되고,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딸아이를 지켜주리라는 다짐과 각오가 날마다 새로웠던 그시절이 결코 오래전 일이 아니었는데.... 어느새 사춘기의 꽃을 피우며 투덜거리는 딸아이가 멀게만 느껴지는 요즘이었다.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라면 누구나 겪었을 과정들..
이 세상 어느 꽃보다 눈부신 웃음을 터뜨리고,
비로소 나에게 '엄마'라는 이름표를 달아주던 그 순간,
헛발질을 하듯 불안한 걸음걸이로 내달리던 그 모습,
고열에 시달리며 밤새 가슴을 졸이게 하던 기억까지도
지나고나면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는 추억들. 

'네가 내 아이라는 것, 그게 바로 기적이야'라는 그 말이 어느새 잊고 있었던 엄마로서의 초심을 떠올리게 한다. 
잠든 딸아이의 모습은 그 어떤 노여움도 눈녹듯 사라지게 하던 감동을 느끼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어느새 까맣게 잊고 있었던 탓에 기적은커녕 골칫덩어리로만 여기지 않았던가. 

그러고보니 사춘기로 힘든 것은 다름아닌 딸아이 자신일텐데..하는 생각이 미친다. 요즘들어 사소한 것에도 예민하게(날카로운 송곳처럼) 행동하며 나의 신경을 긁는 딸아이가 괘씸하기만 했는데....초심을 떠올리자니 안팎으로의 변화에 누구보다 당황스러울 딸아이가 더없이 안쓰럽기만 하다. 

아이를 품에 안은 채 기적을 느끼는듯 두눈을 감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푸근하게 느껴지는 그림이 나의 기적을 새삼 상기시켜 준다.
네가 아무리 뾰족한 송곳처럼 나의 신경을 긁어대도 너는 변함없는 나의 기적이라고..... 

만족스런 표지그림과 달리 본문그림에서는 약간의 아쉬움을 느낀다.
아이가 커가는 과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는듯 등장하는 동물들과 배경에 비해 아이가 좀 작게 그려져, 표지그림에서 느끼는 인물의 표정을 풍부하게 느끼지 못하는 점과 (이건 정말 유치한 아쉬움일지도 모르겠지만...^^;) 앞에서의 동물들이 모두 등장하는 처음 학교에 가던 날의 그림에 두더지와 새들이 빠져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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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라크슈미입니다 청소년문학 보물창고 9
패트리샤 맥코믹 지음, 최지현 옮김 / 보물창고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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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침이 심한 푸슈파의 아들, 데이비드 베컴 소년 하리슈가 가르쳐 준 첫 문장,
"내 이름은 라크슈미입니다."
"나는 네팔에서 왔습니다."
"나는 열세 살입니다."
를 배우며 소녀는 데이비드 베컴이 신의 이름같다고 했다. 

거울에 비친 송장같은 자신의 얼굴을 보며 소녀는 거울 속 늙은 여자에게 말을 건넸다.
"내 이름은 라크슈미입니다. 나는 네팔에서 왔습니다. 나는 열세 살입니다." 

그러나 이 책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이 끝나고 있었다.
"내 이름은 라크슈미입니다. 나는 네팔에서 왔습니다. 나는 열네 살입니다."

그렇게 소녀는 자신의 이름과 국적(돌아갈 집이 있는 나라)과 나이를 절망적인 독백이 아니라 자유를, 세상을 향한 외침으로 부르짖고 있었다. 그 외침 속에 소녀의 기나긴 절망의 냄새와 불안한 떨림이 함께 느껴지는 듯하다. 

그나마의 소박한 가정의 행복을 상징하는 듯한 '양철지붕'을 향한 소녀의 간절함으로 이야기는 시작되고 있었다. 궁색한 살림에 보탬이 되고픈 소녀의 도시행을 딱 잘라 거절하는 아마가 그래도 믿음직스러웠다. 아마도 딸을 키우는 공감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새아버지를 향한 아마의 생각이나 초경이 시작된 라크슈미에게 운명이라며 일러주는 대목에서는 적지 않은 실망을 느꼈다. (물론, 아마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전통적인 관습을 따르는 것이겠지만) 

소녀의 꿈은 절친이었던 지타처럼 도시로 나가 부잣집 마님의 가정부가 되어, 있으나마나한 새아버지라도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아마의 고생을 덜어주고픈 것이 고작이었다.
소녀는 예사롭지 않게 자신이 기르는 오이들에게 재치있는 이름도 붙여주고, 자기가 사람인 줄 아는 아기 염소 탈리에게 공부도 가르쳐 준다. 

그래서였을까... 새아버지가 노름으로 끝없는 빚을 지고 마침내는 소녀를 도시의 가정부로 보내게 되었다는 아마의 이야기를 읽을 때까지만 해도 소녀의 소박한 꿈을 이루는 따스한 이야기가 펼쳐지리라 기대했다. 간간이 눈물을 찍어내는 고생이 있겠지만 소녀가 가난한 아마와 어린 동생을 위해 '양철지붕'을 얹어주리라는.....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순진한 기대에 지나지 않았다. 바자이 시타의 가게에서 새아버지와 노란 드레스를 입은 낯선 여자와 '아이의 값'을 흥정하는 광경이 불길하게 다가왔다. 

'아직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엄청난 돈이 치러지는' 광경을 보며 이해할 수 없었지만, 소녀는 그때까지도(아니 결국엔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까지) 아마를 자랑스럽게 하고, 내년 축제 때는 돌아오리라는 순진한 기대를 품는다. 

낯선 여자를 따라 평소 꿈꾸던 도시로 향하던 소녀의 불안한 마음을 그나마 달래주던 '제비 꼬리 모양의 웅장한 산꼭대기'마저도 시야에서 사라지고 상상과는 전혀 다른 도시에 도착한 소녀, 라크슈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여태껏 한 번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끔찍한 악몽, 바로 그것이었다. 

열세 살 소녀, 라크슈미에게 도시는, 세상은 더이상 소박한 행복을 꿈꾸는 미래가 아니었다. 다만, 가난하고 힘없고 무지하다는(순박한 촌년) 이유로 인간으로서 누려야할 최소한의 권리는커녕 짐승에게조차도 할 수없는 일을 버젓이 강요하는 뭄타즈가 있을 뿐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저항을 해보지만 결국엔 뭄타즈의 간교한 계략으로 한낱 성 노예가 된 라크슈미가 마지막에 이방인의 도움의 손길을 끝까지 외면하지 않고 달려가는 라크슈미가 얼마나 다행인지..... 

철저한 이해(利害)가 세상의 이치인듯 살아가는 곳(도시?)과는 다른 세상(제비 꼬리 모양의 웅장한 산꼭대기가 있는)에서 단지 가난때문에 고통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세상이다. 어린 라크슈미처럼....
가난한 그들이 바란 것은 엄청난 돈도 아니고 그저 당장의 배고픔과 가난을 조금이나마 해결할 수 있는 약간의 물질이었을 것이다. 라큐슈미의 양철지붕처럼.... 

그럼에도 힘없고 순박한(무지한) 그들을 한낱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게다가 잔인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인간들이 함께 살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치를 떨게 한다. 

단지 소박한 '양철지붕'을 위해 막연하게 도시를 꿈꾸다 짐승같은 인간들이 쳐놓은 덫에 걸려 신음하는 어린 생명들의 울부짖음이 지금도 세상 어딘가에서 계속되고 있다니... 과연 그 죄값을 어떻게 치르려고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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