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뺀드비치 할머니와 슈퍼 뽀뽀 ㅣ 사계절 그림책
브리트 페루찌 외 지음, 모아 호프 그림, 신필균 옮김 / 사계절 / 2009년 11월
평점 :
처음 '뺀드비치 할머니와 슈퍼 뽀뽀'란 제목에 마이애미 비치와 같이 외국의 어느 나라 어디쯤에 있는 해변의 이름으로만 생각했다. 따라서 뺀드비치에 사는 할머니와 표지그림의 손자에 관한 이야기쯤으로 짐작하며 펼쳐본 책.
그러나, 곧 나의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뺀드비치'란 내가 마음대로 상상한 그림같은 파도가 출렁이는 해변이 아니었다. 다름아닌 '샌드위치'의 또다른 이름. 바로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샌드위치'를 기억하지 못하고 붙여버린 '뺀드비치'.
비로소 '뺀드비치'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샌드위치'의 실종된 이름이었음을 깨닫고 난 후부터는 왠지모르게 '뺀드비치 할머니'라는 낱말에 가슴이 울컥거렸다.
'치매'.. 주로 노인들에게서 발병하는 것으로 알려진 병으로, 알츠하이머병으로 불리는 치매는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노망'이라고 했다던가......
요즘에는 젊은 사람들에게도 발병하여 어느새 노인들만의 병이라는 인식을 깨트림과 동시에 우리를 바짝 긴장하게 하는 병이기도 하다. '치매'의 증상으로는 기억력과 사고력이 현저히 저하되어 일상적인 대화는 물론 생활조차도 어려워진다.
밸런타인데이에 태어나 원래 이름이 밸런타인이지만 치매에 걸린 외할머니는 그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발레로, 또는 칼레로, 또 가끔은 날레로 부르기도 한다. 그래도 바닷가에 아름다운 하늘색 집에 사는 발레는 세상에서 첫 번째로 외할머니 에밀리아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외할머니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특별한, 아주 좋은 친구이기때문에.
처음 학교 앞에서 발레를 알아보지 못하는 외할머니는 집에 와서도 평소 제일 좋아하던 양탄자 놀이를 끝내 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야 엄마로부터 외할머니가 '치매'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된 발레. 치매때문에 기억이 사라지고 생각이 혼란스러워져 혼자서는 뭐든 못하게 된 외할머니는 부둣가에 있는 커다란 노란 집으로 이사를 한다.
그후 노란 집에 사는 외할머니를 만나러가는 발레. 어느 날 저녁 외할머니는 평소 잘 드시던 샌드위치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날레'에게 '뺀드비치'를 만들어 주신다.
그리고 외할머니는 손수 만든 뺀드위치를 '날레'와 함께 다섯 쪽이나 해치운다.
또 어느 일요일엔 외할머니를 찾아온 발레가 할머니의 틀니 빼는 것을 도와드리고, 통 속에 틀니를 얌전히 넣어두자 할머니는 고맙다며 세상에서 가장 진한 '슈퍼 뽀뽀를 발레에게 해준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할머니를 찾아가는 발레. 그러나 할머니는 3년 동안 발레가 한 번도 오지 않았다며, 생강빵 옆에 놓여 있는 손수건 조차도 찾지 못한다.
'별이 잘 보이는 맑은 날 밤, 별똥별이 하나 떨어질 때' 소원들 빌며 작은 소리로 기도를 올리는 발레의 표정이 왠지 짠해온다.
내게도 '치매'는 무관하지 않은 병이다. 벌써 10년이 다 되어가는 것같다. 치매로 아버지가 뺀드비치 할머니처럼 요양원에 계시다 돌아가신 것이. 그 무렵엔 우리나라에서도 '치매'란 병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던 시기였다. 그래서인지 그 뒤로는 '노망'이니 '망령'이니 하는 말들은 차차 사라진 것 같다.
처음에는 치매라는 것도 몰랐는데... 나중에야 치매라는 것을 알게 되어 산속에 공기도 맑은 곳에서 책 속의 바닐라크림 집처럼 치매에 걸린 노인들이 모여 살고 있는 요양원에 입원하게 된 아버지. 그곳에서 몇년간 생활하시다가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발렌의 뺀드비치 할머니처럼.......
발렌과 외할머니의 이야기가 가슴 아프지만 그래도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이 책에 담긴 작가와 실비아 왕비를 비롯한 여러 이들의 치매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관심과 정성때문인 것 같다.
더불어, 스웨덴 사람들의 모습(발렌과 외할머니를 비롯하여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등등)을 엿볼 수 있는 그림이 한층 이야기를 실제로 다가오게 하는 것 같다.
치매. 더이상 노인들만의 병이라 치부해서도 안되는 우리의 일부가 될 수도 있는 삶의 모습이다.
본문 중 손꼽아 본 몇 장~
발레가 처음 외할머니가 이상하다고 발견한 날.
외할머니 에밀리아는 평소처럼 방과 후에 다려와 품에 안기는 발레는 마치 모르는 아이처럼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넌 누구냐?"
무심한듯 두 눈을 감은 외할머니와 그런 외할머니를 멀뚱 바라보고 있는 발레의 거리가 한없이 멀게 느껴진다.
평소 거실에 깔린 푸른색 양탄자 위에 올라앉아 세계 여행을 하는 놀이를 제일 좋아하던 외할머니와 발레. 그러나 그날은 양탄자에 발끝도 대지 않고 멀치감치 떨어져서 그저 우뚝 서 있기만 한 외할머니.
발레는 그런 외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중에야 집으로 돌아와 엄마로부터 외할머니가 치매에 걸렸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
점심식사로 나온 시금치 수프를 뱉어 버리고 라자니아가 먹고 싶다고 큰 소리 치는 할머니와 그런 할머니를 무심하게 바라보는 간호사들....
옛날 이야기를 자주 꺼내는 외할머니는 가끔 이야기가 옆길로 새거나 너무 길어지면 손에 과자를 쥔 채 잠이 들기도 하고......
치매에 걸린 탓에 간혹 오른쪽 왼쪽이 헷갈려서 왼쪽 구두를 오른쪽 발에 신느라 애를 먹기도 하고, 오줌 실수를 할까 봐 기저귀를 차는 외할머니.
일요일마다 하마 인형을 들고 할머니를 찾아가는 발레. 할머니의 틀니 빼는 것도 도와드리고 얌전히 통에 넣어두자, 고맙다는 뜻으로 발레에게 세상에서 가장 진한 슈퍼 뽀뽀를 해주는 할머니~
별이 잘 보이는 맑은 날 밤, 두 눈을 꼭 감고 소원을 빌며 할머니가 밤사이 편안하게 주무시도록 해달라고 작은 소리로 기도를 올리는 발레.
그런 발레를 가장 소중하고 가장 좋은 친구로,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에밀리아 할머니는 더 이상 치매때문에 외롭지도 괴롭지도 않을 것이란 생각이 절로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