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원정기 - 아나바시스
크세노폰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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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략분은 아래 *1참조) 자유의 이행에는 전후좌우의 설명이 필요 없다. 그것은 원군(援軍)이다. 원군은 비겁하다, 자유는 고독한 것이다. 그처럼, 시는 고독하고 장엄한 것이다. 내가 지금-바로 지금 이 순간에-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한 횡설수설을 그치고,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다. 당신이, 당신이, 당신이 내 얼굴에 침을 뱉기 전에……."

인용이 좀 길어 앞부분을 이 글 아래에 실었다. 스무 살 시절, 아니 그보다 앞서 80년대 초반 고교 시절에 만난 김수영 시인의 거침없는 시론(詩論)-<詩여, 침을 뱉어라>-의 일부이다. 시인의 삶과 정신세계를 이해하는데 너무나 유명한 시론이기도 하고, 포도송이에 알알이 박힌 알맹이처럼 숱하게 인용되고 재해석되고 새로운 논지 전개에 물꼬를 터주는 유명한 시론이다. 그리고 상당한 세월이 흘렀다. 마침내 내게는 겨우 한 문장쯤으로 이 시론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다. "원군은 비겁하다." <그것은 원군(援軍)이다. 원군은 비겁하다, 자유는 고독한 것이다.>  '자유하다'는 좀 그렇고 '자유롭다'의 상태에 스스로 도달하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를 살아간다는 얘기였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억압하고 검열하는 프레임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을 얘기한다.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만 되뇌이고 다른 버전으로 이야기할 뿐 진정 자유로운 시를 내용에서도 형식에서도 쓰지 못하고 있음, 쓸 수 있음에도 쓰지 '않고' 있음에 대한 자기 비판이 담겨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지금 얘기하는 김수영의 시론(詩論)은 '당시에도 혹은 지금도' 시론(時論)이기도 하다. 시인이 시론을 쓰던 당시에도 지금도 우리나라는 원군인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휴전 상태인 것이다. 80년 광주민주항쟁 당시 미국이 취한 태도를 보면서 우리는 마침내 미국(미군)이 한국에 머무는 이유를 알아버리고야 말았다. 심증은 가득하나 '물증'이 없던 시절은 가도 비로소 그들의 존재(정체)를 자각한 계기가 광주민주항쟁이었다. 어쩌면 김수영의 '원군은 비겁하다'라는 말은 이러한 한반도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도 담고 있는 것이라, 나는 생각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사상가이자 저술가인 크세노폰 (Xenophon). 그는 기원전 431년경에 아테네에서 태어나 기원전 354년경에 죽었다. 기원전 399년, 독배를 마시고 죽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며, 플라톤과는 동문수학한 사이. '아나바시스'로 알려진 그의 대표작  <페르시아 원정기>(Anabasis)를 읽으면서 나는 끊임없이 앞서 언급한 '원군'이라는 단어와 거기에 묻어 있는 이런저런 의미를 떠올리곤 했다. 아테나이 출신의 크세노폰은 페르시아의 왕위를 찬탈하려는 퀴로스에게 고용된 그리스인 용병대에 참가한다. 당시 그는 꽃다운 20대. 페르시아. 부왕 다레이오스(2세)는 맏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죽는다. 그러나 왕비인 파리사튀스는 남편이 살아있을 때에도 차남인 퀴로스가 왕위를 물려받도록 강추!! 차남 퀴로스-소 퀴로스-도 당연히 자신이 왕위를 물려받을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형이 즉위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암살기도를 하여 사형될 운명이지만 역시 어머니의 간청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결국 쿠로스는 그리스 원군(용병)까지 동원(고용)하여 반역을 꾀하는 것. 바로 이 전쟁에 크세노폰이 원정군의 한 사람으로서 참전하고 있다. 원군이 지원군의 약자라고 할 때, 원군은 도움을 구하는 나라에 도움을 주는 나라가 어떤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파견하는 군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크세노폰이 참여한 이 원정대는 '원군'이라기 보다는 '용병'에 가깝다. 국가 차원에서의 파견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인 이익-돈, 물질적인 부, 잔리품을 포함함-을 목적으로 파견된, 거래로서의 전쟁(참전)으로만 보기에는 당시를 전후한 세태를 살필 필요가 있다. 바로 이 부분이 <페르시아 원정기>를 읽으면서 자꾸 확인해야 했던 질문이다.

사실, 아테나이인들이건 스파르테인들이건, 거슬러 올라가 <일리아스>(호메로스의)에서부터 만나는 전쟁마다 그 전후과정을 살피면 답은 분명하게 나온다. 전쟁을 해야 하는 명분도 중요하지만 실제 참전하는 이들은 장군이고 사병이고 간에 전리품에 관심이 더 많다. 역설적으로 전리품을 탐내지 않는 장군들의 인품이 빛난다(영웅전의 주요 인물들, 그렇지 못한 인물들의 사례도 담겨 있다). 궁극적인 목적이 전리품을 획득하기 위한 일종의 '비지니스' 였음을 알고 다소 실망하게 되는 전쟁들이 수두룩하고, 어쩌면 '약탈'은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으로까지 보인다.

먹지 않으면 먹히는, 먹어야 사는 '동물의 세계'를 보라. 목숨을 빼앗지 않으면 목숨을 유지할 수 없는 절대절명의 존재를 위한 순간들, 고대의 인간들이 미개해서가 아니고 어쩌면 그들에게 전쟁은 자연으로 보일 정도이다. 그리고 전쟁은 21세기를 사는 현재에도 동물성에 충실한 '약탈'의 유전자를 충실하게 이어가고 있지 않은가!  바로 이러한 시각은 명분이 약한, 크세노폰의 참전에 대한 '변론'이 된다. 어쩌면 '명분'을 앞세우나 결국은 '약탈'이 목적인 것보다는 비겁하지 않은 참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들 '1만인' 용병 이전에도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기에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의) 태수들에게 고용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1만 인'과 더불어 비로소 용병의 역사에서 새 시대가 열렸다고 할 수 있다."(옮긴이 서문) 그런데 자신들을 고용한 퀴로스가 어이없이 죽고, 설상가상으로 자신들을 인솔하던 장군들와 대장들이 페르시아왕측의 술수에 의해 처형된다. 타국에서 오도가도못할 상황에 처한 것. 그러나 이들은 흩어지기는커녕 오히려 한데 뭉쳐 나중에 스파르테군에 합류할 때까지 2년 가까이(기원전 401년 여름부터 399년 봄까지) 성공적으로 전쟁을 수행한다. 용병인 그들에게 궁극의 목적이었던 전리품은 제대로 얻지 못했지만 '살아남은' 목숨이 그들의 전리품이었던 셈이다. 특히, 크세노폰은 비전투 참모로 용병부대에 끼어 있었는데, 마침내 그들을 지휘하는 위치에 오르고, 본인의 참전기이기도 한 <페르시아 원정기>라는 고전을 집필하였으니 노고에 대한 품값을 톡톡히 받은 셈이다.
***이 원정기의 초반부 상황은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서도 엿볼 수 있다. 플루타르크는 영웅전에서 퀴로스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 소개를 상당 부분 생략하는데, 크세노폰의 <원정기>가 이미 있기에 그러하다, 라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전투에 대해서는 많은 역사가들이 자세하게 기록했는데, 그 중에서도 크세노폰의 기록은 마치 눈에 보이듯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크세노폰의 생동감 있는 묘사는 직접 전쟁터에 나간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필자는 여기서 크세노폰이 빠뜨린 것을 보충하는 정도로만 기록하겠다."(영웅전, 동서문화사 간 1857면)그런데, 플루타르크(기원후 50년 이전~120년 이후)는 크세노폰보다 한참 후에 기록들에 의지해서 당시의 전투를 소개하고 있다. 그럼에도 당시 원정군으로 참전했던 크세노폰을 비전투요원이었기에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여 자신의 기록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퀴로스가 죽고 목과 손이 절단되는-관행적으로- 바로 그 현장에 크세노폰이 없고,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현장성과 그리고 다름 아닌 그 전투의 결과로 갓끈떨어진 처량한 신세에 이르른 그가 수집하고 정리한 정보들이 만만한 것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별도의 글에서 다루겠지만 오히려 '영웅전'에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동생 퀴로스를 자신이 직접 죽였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벌이는 여러 해프닝이야말로, 흥미롭기는 하나 그저 비하인드 스토리 혹은 아님은 말고 식의 기록일 수 있음을 언급해두고자 한다.

"군대에는 크세노폰이라는 아테나이인이 있었다. 그는 장군도 대장도 사병도 아니었고, 그가 행군에 참가한 것은 그의 옛 친구 프록세노스가 사람을 보내 그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프록세노스는 또 그가 오면 퀴로스의 친구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며, 자기에게는 퀴로스가 조국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페르시아 원정기>, 3권 1장 4정) 원정에 참가해야 하나, 말하야 하나 크세노폰은 스승이면서 친구와도 같은 소크라테스와 상담까지 했다는, 자기 이야기를 제3의 서술처럼 시치미 뚝 떼고 이어가는 모습이 귀엽다고 할까?

*한편, 스파르타의 왕 아게실라우스(기원전 444무렵~360년).는 "당시 그리스 최고의 인물로서 뛰어난 왕이자 장군이었다. 84세까지 장수를 누렸으며, 이집트 원정에서 돌아오다가 숨을 거두었다." 이처럼 동서문화사의 영웅전은 서두에 아게실라오스의 프로필을 소개한다. 팔십이 넘은 이 양반은 말년에 메세네라는 작은 땅덩어리라도 손에 넣으려고 하나 전쟁경비가 모자라 시민과 친구들에게 경비를 빌리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힘들자 급기야 이집트의 왕 타코스를 위해 싸움에 나선다. 전쟁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용병이었으니 반대와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스 최고의 장군으로서 세상에 이름을 떨치던 위대한 그가, 이집트의 한 야만인 우두머리에게 고용되었다는 것은 추태라는 것이 세상의 평가였다. 그는 타코스가 보낸 돈을 받아 용병을 모집한다. 그리고 그 병력으로 함대를 구성한 뒤-페르시아 원정 때처럼 30명의 스파르테 장군을 고문으로 임명하여- 이집트로 출항했다. 이제까지의 전쟁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몸을 가누기도 힘든 늙은 장군(왕)이 왜 그러한 선택을 했을까? 그의 속마음(믿음)을 플루타르크는 이렇게 읽고 있다.

'어떤 일이든 그것이 자기 자신만의 명예가 아나라 나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집 안에 틀어박혀 죽는 날만 기다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노년에 관하여>의 주 대담자 대 카토의 삶을 떠올리게 하는 플루타르크의 진단에 별풍선 세 개를!) 상당히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또한 국익을 위해 갖은 반대와 수모를 견뎌내는 노년의 왕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2012년 현재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바로 이 대목에서 어떤 생각을 할까?(단적으로 李대통령-맥쿼리 유착의혹 다룬 ‘맥코리아’ 개봉!).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의 용병 파견은 일종의 인력수출이다. 스파르테는 이미 알고있듯이 문(文)보다는 무(武)를 숭상하는 상무국가로, 비록 나라살림이 넉넉하지도 않고 또 그렇게 부를 축적하기보다는 부가 인간을 타락시키는 악의 근원이라는 점을 법과 체제에 반영한 나라였다.

그러나 모든 전쟁은 군인들로만 싸우는 것이 아니고, 나라살림이 넉넉해야 군수물자와 군량을 댈 수 있는 경제전쟁이기도 했다. 영화 <300>의 테모필라이 고개에서의 전투에서보듯 스파르테 전사들은 그야말로 일당백의 전사들이었다. 그러니, 스파르테가 가진 최대 자산은 전투능력과 지휘능력이 출중한 군대였고, 아게실라우스 왕은 그들이 가진 경쟁력 있는 군인(인력)들을 수출해서라도 국가재원을 마련했던 것이다.

크세노폰 (Xenophon, 기원전 431년경~기원전 354년경)의 페르시아원정은 기원전 401년 여름부터 399년 봄까지이다. 아게실라우스(기원전 444무렵~360년)는 84세에 세상을 뜨는데, 이집트 용병출전이 80이 넘어서라고 했으니 기원전 366년무렵이다. 페르시아원정 시점이 35년쯤 앞이다. 그리스 세력의 한 축인 스파르테의 왕도 용병으로 돈벌이에 나서는 것은 후에 일이지만 크세노폰이 용병대의 일원으로 페르시아의 내전에 참전하는 것이 그렇게 큰 흉은 아닌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 (당시의) 인지상정일까? <페르시아 원정기>를 쓰기 위한 참전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당시 크세노폰의 젊은 혈기,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충동, 모험심.. 로드무비의 원조인 <오뒷세이아>의 애독자였을 그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자꾸만 동쪽으로 간 까닭은? 알맞은 대답이 있다면 그것은 동시에 크세노폰의 참전 동기에 대한 답도 되지 않을까. 원군은 비겁하다. 그러나 목적이 선하다면 혹은 명분이 솔직하다면 원군 그 자체라도 비겁하지 않을 수 있다. 플랜트 수출(plant export)은 생산설비나 대형기계 등을 비롯하여 관련기계의 설치·가동에 이르는 모든 것을 포함한 공장 전체를 수출하는 것을 말한다. 페르시아 내전에 참전한 용병들, 그리고 아게실라우스 왕이 이끈 스파르테 군인들의 이집트 용병 파견은 단지 용병들만이 아니라 일종의 전투력을 갖춘 시스템을 판매한 플랜트수출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아래*1: "나는 아까 서두에서 시에 대한 나의 사유가 아직도 명확한 것이 못되고, 그러한 모호성은 무한대의 혼돈에의 접근을 위한 도구로서 유용한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호성의 탐색이 급기야는 참여시의 효용성의 주장에까지 다다르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도 '여직까지 없었던 세계가 펼쳐지는 충격'을 못 주고 있다. 이 시론은 아직도 시로서의 충격을 못 주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여직까지의 자유의 서술이 자유의 서술로 그치고, 자유의 이행을 하지 못한 데에 있다. 모험은, 자유의 서술도 자유의 주장도 아닌 자유의 이행이다." (김수영 시론, <시여 침을 뱉어라>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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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우 2012-11-27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군은 비겁하다! 헉헉 거리면서도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이 있네여. 김수영과 크세노폰과.. 아게실라오스 스파르테,, 잘 읽었슴다.

timeroad 2012-12-09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길어서 죄송!!
 
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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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멸의 인간들에게 죽음은 운명에 따르는 순명,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렇게 목숨을 잃는 것이 다른 어떤 이에게는 복수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생물학적인 죽음은 정말 잔인한 복수는 끝이 아니라 시작일 수 있다. 바로 시신을 훼손하고 장례절차를 밟을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것. 해서 헥토르는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 간청한다.


"내 그대의 목숨과 무릎과 어버이의 이름으로 애원하건대,/ 나를 아카이오이족의 함선들 옆에서 개들이 뜯어먹게/내버려주지 말고"

화장하게 하는 등 장례 절차를 밟게 해달라고..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청을 받아주지 않는다. 애초에 받아줄 마음이 없었다. 아니 헥토르가 그렇게 간청했으므로 그것을 받아주지 않는 것이 처절한 복수가 된다. "함선들 옆에는 파트로클로스가 아직 문상도 받지 못하고/ 묻히지도 못한 채 누워 있는" 상태이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고귀한 헥토르에게 치욕적인 일을 생각해냈다.(395행)"

그는 두 발의 뒤쪽 힘줄을 뒤꿈치에서 복사뼈까지 뚫고
그 사이로 소가죽 끈을 꿰어서 헥토르를 전차에 매달아
머리가 뒤에서 끌려오도록 해놓았다. 그런 다음 그는
이름난 무구들을 전차 위에 올려놓고 자신도 올라 채찍을
휘두르며 말을 보니 말들도 마다않고 나는 듯이 달렸다.
헥토르가 끌려가자 그 주위에서는 먼지가 일고, 그의 검푸른
머리털은 양쪽으로 흘러내려 전에는 그토롭 곱던 그의 머리가
온통 먼지투성이가 되었으니, 제우스가 이제 그를 적군에게
내주어 그 자신의 고향 땅에서 그를 모욕하게 했기 때문이다."(22권, 396~404행)


그리고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죽이고 모욕한 헥토르의 시신을 방치해둔 채 전우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른다. 심지어 전차에 헥토르를 매단 채 축성한 친구의 무덤 주변을 몇 바퀴를 도는 퍼포먼스까지,, 분풀이를 한다. 그리고 이 광경을 헥토르의 가족들은 지켜보고 있다. 좀 심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지만.. 불사의 신인 어머니(테티스)야 그럴 일이 없겠지만 친아비와 친아들의 죽음보다도 더 안타깝게 생각하는 친구의 죽음을!! 장례경기까지 치르게 하면서 성대하게 치르면서 애도한다.


2012년. 김기덕 감독의 영화 <피에타>는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도대체 어떤 영화이기에 그런 훌륭한 상을 받았을까, 궁금해서 너무 늦지 않게 극장을 찾았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트럭에 남자 주인공 이강도가 끌려가면서 자살을 하는 장면, 엔딩장면을 보면서 <일리아스>의 중요장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었다. <피에타>를 보았느냐? 아직 보지 못했다는 사람에게는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강한 스포일러일 것이고 마지막 장면이 지닌 의미가 아주 크기에 한 차례 보시라고.. 그리고 보았다는 사람에게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가 있나 묻지만 정말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공감하는 얘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일리아스>를 며칠에 걸쳐 다시 읽었보았다. 부분부분 전투신들이 지리하게 느껴져서 띄어넘었던 부분들까지 해서 거의 새롭게 읽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만큼 제대로 몰입하지 않으면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그 싸움이 그 싸움 같기 때문이다. 또한 늘 그렇듯이 숱한 영웅들의 이름이며 행적들까지, 속도가 나지 않지만 그래도 촘촘하게 읽어나갔다.

피에타! 역시 베니스, 이탈리아의 도시 이름을 단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는 것이 결론이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의 '빈 자리'라는 틈새를 집요하게 뚫고 들어와 결국은 자기 아들을 죽인 상대에게 복수하는 엄마 미선(조민수)에게서 우리는 우리 시대의 아킬레우스를 만난다. 그녀도 일리아스에서처럼 죽은 아들의 장례마저 미루고 복수를 준비하고 서서히 그 지점을 향해 나아간다.

아킬레우스가 아테네의 도움으로 아폴론에게 버림받은 헥토르를 죽이고 있다. 기원전 5세기, 포도주 희석용 동이 세부(위).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의 시신을 전차에 매달고 끌고 가고 있다. 기원전 500년경, 물항아리 세부(아래). <일리아스>(천병희 역, 숲 펴냄) 앞 화보 촬영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이라는 말을 하는데, 강도(이정진)를 응징하고자 하는 미선에게는 이중적으로 적용된다. 자식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네 원한을 풀어주리라, 그리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자식의 원한을 풀고야 말기에 하는 소리다. 그동안 아들의 시신은 자살을 했던 작업장의 대형냉장고에 보관된 상태이다. 오랜 휴식을 끝내고, 자신의 절친의 죽인 헥토르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전열을 다듬는 아킬레우스에게는 아침 한 끼를 먹는 시간도 아깝다. 그러나 미선은 주도면밀하고 냉정하게 복수극을 이끌어간다. 그녀라고 해서 아들을 죽인 원수 앞에서 넘기는 밥이 잘 넘어갔을리 없다. 그러나 그 침착함이 더 소름이 끼친다.


<일리아스>는 영화로 치면 스펙타클한 전쟁영화이다. 이를 소재로한 <트로이>도 있지만.. 그리고 토로이 전쟁은 그야말로 복수극이다. 헬레네를 납치하다시피 끌고간 파리스를 응징하고자 하는 헬레네의 본 남편 메넬라오스의 대척점에서부터..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의 갈등도 그리고 그로인한 숱한 영웅들과 전사들의 희생이라는 것도.. 더구나 호메로스의 다른 대서사시 <오뒷세우스> 모험과 여행을 바탕에 깐 로드무비의 원형이라면 <일리아스>는 스펙타클한 전쟁영화의 원형일 것이다. 특히 살육의 장면들이 생생하게 묘사되는데, <피에타>에서도 기존의 김기덕영화처럼 직접적인 장면들은 많이 가렸으나 여러 종류의 죽음과 상채기가 도처에 깔려 있으며 상해의 장면들이 참 다채롭고 백화점 수준이다. 그러나 무슨 까닭이 있겠으나 희생자들이 왜 그런 지경에 이르렀는지에 대해서는 다만 사채를 썼고 제 때에 갚지 못해서만 있을 뿐 그 내력은 중요하지 않다. <피에타> 영화소개를 보니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영화의 제목이자 주제를 관통하는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비탄에 잠겨 있는 모습을 묘사한 미술 양식을 통칭한다. 미켈란젤로, 들라크루아, 고흐 등 세기의 예술 작품에 이어, 새로운 <피에타>를 탄생시킨 김기덕 감독은 ‘피에타’가 지닌 고유의 통렬한 슬픔을 극적인 영상으로 재해석해냈다."
그러나 나는 르네상스라는 용어에 이미 그 답이 내포되어 있지만, 어쩌면 제목 때문에 혼선이 좀 있기는 하나 피에타는 '일리아스'를 소스를 얻었다고 할 만큼 닮은 부분이 적지 않다. 그리스 옆동네 베시스에서 상을 받을 만하지 않은가! 어디서 본듯한 고전(교양)의 세계와 맥락이 닿아 있으니 말이다.


"<피에타>는 강도와 엄마라는 여자 사이의 묘연한 관계를 통해 ‘피에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심장을 파고드는 강렬한 슬픔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옮겨낸 영화 <피에타>는 21세기 형 ‘피에타’ 신드롬 열풍의 시작을 알릴 것이다. 한편, 김기덕 감독은 “현대의 모든 큰 전쟁부터 작은 일상의 범죄까지,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는 공범이며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그 누구도 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므로 신에게 자비를 바라는 뜻에서 <피에타>라고 제목을 정했다.”

감독은 제목이 담긴 의미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용서는 없다. 그리고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일이아스>나 <피에타>나 결국 무자비에 대한 응징이 물고 물리는 이야기다. 복수를 위해 무자비로 끝까지 밀어부칠 때 양날의 검은 결국 본인도 결국 무자비의 희생양이 되게 한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알고 있다.


"죽어라! 내 죽음의 운명은 제우스와 다른 불사신들께서/ 이루시기를 원하는 때에 언제든 받아들이겠다."(22권, 365~366행)
헥토르를 죽이고 나서 아킬레우스가 하는 말이다. 영화 <피에타>는 고전 <일리아스>와 많음 점에서 닮아 있다.  서양의 고전이면서 인류문명의 고전이기도 한 호메로스의 작품들을 제대로 읽으면 보이는 것이 있다. 어쩌면 서양인들의 양식의 바탕에 그러한 고전이 있기에, <피에타>라는 영화는 작품 이전의 원전 덕분에 쉽게 '울림'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아니겠는가! 모범답안처럼 수상작으로 결정하게 되기까지. 아마도 나와 비슷한 내용의 글을 쓴 기자들이나 논객들이 없지 않으리라. 다만 웹상에서 '피에타' + '일리아스'로 검색했을 때 검색된 글이 없었음을 밝혀둔다.

 

영화 <피에타>의 스틸 컷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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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우 2012-11-13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랬군요. 사실 영화에서 마지막 장면이야말로 가장 센 스포일러죠. 알았건 몰랐건 설득력 만빵인 글입니다.

timeroad 2012-12-09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연히 영화만드는 감독이 일리아스를 안 읽었을리 없지만, 인터뷰를 함 해보고 싶은..
 
역사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헤로도토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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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랖이 넓다!" 무슨 일이고 참견하고 간섭하는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오지랖'이란 우리말로서 윗옷의 앞자락을 말한다. 곧 오지랖이 넓다는 것은 옷의 앞자락이 넓다는 뜻. 웃옷의 앞자락이 넓으면 안에 있는 다른 옷을 감싸버릴 수가 있는 것처럼 사람도 무슨일이나 말이든간에 앞장서서 간섭하고 참견하고 다니는 것을 비유하여 오지랖이 넓다고 말한다.

여기에 덧붙여 오지랖이 넓으면 몸을 구부릴 때나 움직일 때나 옷에 이물질이 묻을 확률이 높다. 고생이 상당했으리라. 해서 나는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읽을 때마다, 역사의 아버지께서는 오지랍이 참 넓으신 분으로 세계의 오지 곳곳을 찾아다닌 오지 기행가라고 생각하는데, 사라질 뻔한 이야기들을 세이브해줘서 감사하다는 얘기다.

헤로도토스가 <역사> 구조적 특징 가운데 하나는 여담 형식의 지리학적 인종학적 민속학적 역사적 자료들이 대량을로 제시되는데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신화의 소재 가운데 흥미로운 부분을 골라 '책을 다룬 책'처럼 새롭게 창조해내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곳곳에서 만나는 느낌이다. 인간의 역사는 대체로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될만큼 그 출발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전쟁 이야기 중간중간에 양념에 해당하는 삽화와 수집한 정보들을 아낌없이 넣어 버무린 덕분에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헬라스인과 비 헬라스인들의 행적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망각되고, 무엇보다도 헬라스인과 비 헬라스인이 서로 전쟁을 하게 된 원을 밝히는 데 있다."고 <<역사>> 서언에서 탐사보고서를 쓴 목적을 분명히 하면서도 말이다.

주로(主路)를 따라간다 싶으면 어느새 샛길, 말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정복할 대상을, 혹은 정복한 대상의 민족과 종족들의 이런저런 풍습들을 늘어놓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이 양반 구라가 대단하다는 감탄하게 된다. 어쨌거나 덕분에 역사는 우리가 아는 '그로테스크한' 역사가 아닌 흥미진진한 읽을거리가 되는 것이다.

페르시아의 퀴로스 왕이 난공불락으로 축성한 앗시리아의 바뵐론을 정복한, 그러나 생각보다 쉽게 정복이 된 바뵐론에 대한 전쟁담과는 달리 그들의 축성이나 풍습 몇가지에 더 비중을 두고 얘기한다. 그가 소개하는 바뵐론의 가장 현명한 관습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들의 관습들 가운데 내가 보기에 가장 현명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인데  듣자 하니, 일뤼리콘의 에네토이족도 이 관습을 지킨다고 한다.) ..마을마다 매년 한 번씩 다음과 같은 행사가 열렸다. 시집갈 나이가 된 처녀들이 소집되어 전부 한 곳에 모이면, 남자들이 그들을 둘러선다. 그러면 전령이 처녀들을 한 명씩 일으켜 세워 경매에 붙인다. 경매는 가장 예쁜 처녀부터 시작되는데, 그 처녀가 높은 값에 팔리면 그 다음으로 예쁜 처녀를 경매에 붙이곤 했다. 처녀들은 노예가 아니라 아내로서 팔렸던 것이다. 장가들고 싶은 바뷜론 남자들 가운데 부자들은 젊고 예쁜 여인을 사려고 서로 더 높은 값을 제시했다. 그러나 장가들기를 원하는 하층민은 미색(美色)은 따지지 않고, 못생긴 처녀를 아내로 얻고 돈까지 덤으로 받았다."(역사, 1권 196장 초반부)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등장하는 분위기 떠오르기도 하고, 은밀한 거래가 이뤄지는 술과 여인들이 등장하는 밤의 무대가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요즘처럼 농기계가 편리함을 주기 불과 얼마 전까지도 농자천하지대본이던 우리에게 가족의 수는 그 집안의 농업노동력이었듯이 인구를 늘리기 위해서는 어찌되었거나 적령기의 남녀가 결혼하도록 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리라. 예나 지금이나 미모가 기준이 되고, 그에 따라 돈이 가치 기준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유감스럽지만, 하지만 지참금을 여자가 가져오건 남자가 신부측에 바치건 '거래성 혼인'은 혼인 제도 그 자체에 깔려 있는 것이니..좀더 지켜보자.


"전령은 가장 잘생긴 처녀들을 다 팔고 나면 가장 못생긴 또는 불구인 처녀를 일으켜 세워 경매에 붙이되, 가장 돈을 적게 받고 그 처녀에게 장가들겠다는 남자에게 팔았기 때문이다. 그 돈은 잘 생긴 처녀들을 팔고 생긴 것이라, 어떤 의미에서는 잘 생긴 처녀들이 못생기고 불구인 처녀들을 시집보내는 셈이었다."

(이 점은 음음, 마음에 든다.)


"자기 딸이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시집보내는 것은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았고, 처녀를 샀다 해도 보증인 없이 집으로 데려가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실제로 그녀와 동거할 것임을 보증하는 보증인을 세워야만 그녀를 집으로 데려갈 수 있었다. 둘이 서로 의견이 맞지 않으면 남자는 받은 돈을 돌려주는 것이 관례였다. 다른 마을에서 온 사람도 원한다면 경매에 참가할 수 있었다. 이것이 그들의 가장 아름다운 관습이었으나, 지금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자꾸만 결혼 연령이 늦어지거나 독신을 고집하거나 또한 결혼하고 싶어도 청년실업 때문에 결혼은 꿈도 못꾸는 청춘들이 많은 우리의 지금 상황에 적용하기는 쉽지 않지만, 응용해볼 여기가 있는 관습이 아닐까? 결혼을 못하는 농촌총각들도 결혼할 수 있고, 먼 이국으로부터 온 며느리들, 다문화가정의 문제도 앞서 해소할 수 있었을 것인데 하는 생각 등등
그런데 바뵐론이 함락이 되면서 이런 전통도 사라져버렀다고 헤로도토스는 기술한다. "그들은 요즘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냈던 것이다. [그들이 여자들에게 부당한 짓을 하거나 외국으로 데려가지 않기 위하여.] 바뷜론이 함락되며 살기가 어려워지자 궁핍한 서민들은 모두 딸에게 매춘을 시키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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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우 2012-11-13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농촌총각들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이렇게 해야 인구정책이 좀 나아질 수 있을까요? 태어났으면 종족을 번식해야 하는 것은 자연의 법이거늘..

timeroad 2012-12-09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 사는 것 다 거기서 거기라고 하는데, 그렇담 더욱.. 지금이야 기계힘을 빌리지만 가족 수가 많으면 농본사회에서는 짱이었잖아요.
 
게르마니아
타키투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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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A to Z를 조망하게 만든 짧고 간결하지만 강력한 힘을 가진 특별한 로마의 게르마니아 문명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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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리뷰로 쓴 것인데, 여러 책과의 관련성을 고려하여 페이퍼로 작성한 것입니다.  

호/불호가 눈에 띄게 엇갈리는 영화인 것은 분명하다. 모든 작품에 대한 평가가 안고 있는 어떤 틀, 그러니까 그 작품의 성과와 한계를 같이 언급하면서 알맞은 수위를 유지하는 언론매체의 평가-몇몇 리뷰를 읽었지만-에서는 얻을 것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정치적'이기도 하고 어쩔수없이 적절한 '예우'와 우회적인 비판 정도에 머물고 있으니까,

악마를 보았다, 내게는 악마가 보이지 않았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영화 제목은 악마를 보았다, 라고 하는데 내게는 악마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캐릭터)들의 어떤 연기에서도 악마-에 대한 정의가 선행되어야 하겠으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에, 피시방 컴퓨터 앞에서 옆 사람에게 방해가 되건 말건 소리를 내지르면서-헤드셋이 있어 옆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방법이 있음에도- 게임에 열중하는 손님들이 있고, 거의 대부분 피시방을 찾는 고객들이 게임을 위해서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지 않은 목적으로 집중해야 하는 사람도 있음을 무시하는 피시방의 직원들의-사장도 예외는 아닌듯- , 수수방관하는 고객관리만이 있을 뿐이다. 모방범죄를 유도할만한 잔혹한 장면은 없지 않으나 너무나 극적인 몰입을 이끄는 데에 무신경한 영화이며, 또 그것이 이 영화(감독)의 의도라고 읽어주기를 바라는 것 같아, 하나마나 한 소리이겠지만, 리뷰는 감독이나 제작자와 대화가 아니라, 그 영화(제품)의 소비자들간의 공유라는 점에서 하고싶은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늦지 않았다면, 이 리뷰는 스포일러성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영화(소설, 이야기)의 묘미는 반전이므로 내용을 먼저 아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포일러성 리뷰에 대해서 의연한 두 작품군(群)을 떠올려보자. 1)아무리 내용을 많이 알아도 그 감동은 반감되지 않는다. 나아가 알면 알수록 새로운 것이 보인다. 2)내용을 알거나 말거나 영화를 제대로 읽는데 지장을 주지 않는다-까지는 (1)과 같은데, 어차피 이 영화의 제작의도는 '스토리'에 있지 않으니까? 적어도 <악마..>의 생산자들은 앞서의 (2)의 입장에 서 있는 듯하고, (2)의 입장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하고 있다. (매체 면에서)장르가 다르지만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에서의 스토리나 디테일한 제작배경에 대해서 (많이)아는 것과 실제 보는 것이 재미와 감동을 반감시키기보다는 배가시킨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1)의 사례가 될 것이다.
그런데, 제아무리 생산자가 우리가 만든 이 영화는 (2)의 지점에서 기획된 것이므로 스포일러성 리뷰가 상관이 없어요, 라고 강변해도 소비자(관객)는 (1)이건 (2)이건 암튼 '편견' 혹은 '선입견' 없이 그 상품을 소비하려고 할 것이므로, 나는 그런 분들에게 누를 끼칠 수 있으리라. 그것은 서로에게 불행이다.

거기서 거기인 복수 드라마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다!
둘째, 이 영화의 내용상의 주제는 '복수'이다. 아직도 '복수'를 주제로 말하고 또 뭔가 보여주고 싶은 영화가 있을까? 이런 질문은 당연히 우문이 된다. 누군가를 밟지 않으면 일어설 수 없고 누군가를 적절히 이용(활용)하는 것이 '당위'를 넘어서 '미덕'인 되어버린 이윤추구와 세계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숱한 원한 관계가 발생하고 그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는 어쩌면 현실의 칼부림보다도 더한 마음의 칼부림이 잔인하게, 날마다 일어나고 있으니까? 마음으로도 간음하는 것도 죄가 되듯이, 아마도 관객들은 저마다의 피해자로서의 기억, 가해자였지만 그때는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에 대한 자기반성, 나름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서의 마음을 가다듬고 다스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을 것이니까, 그러므로 '복수'라는 주제는 사람의 이야기(소설, 이야기)에서는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것이다. 저, 그리스 비극의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스 3부작은, 대를 잇는 복수 3부작이라고 할 수 있고, 비슷하게 박찬욱은 복수 3부작을 스크린에 담아내지 않았던가. 기타 등등 숱한 복수 이야기가 있지만, 그래도 '복수'를 주제로한 이야기는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지 않을 것이며 그 끝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 <악마...>는 복수를 주제로 한 이야기의 바닥을 보았다는 듯이, 지지부진한 거기서 거기인 복수 드라마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다! 그것은 우리가 하려는 이야기가 아니다, 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잡았다 풀어주고 잡았다 풀어주는' 사냥놀이일 뿐이라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 이 말은 복수의 기본 공식이다. 영화(만화) <이끼>에는 아예 이 대목을 언급한 성서와 해당 페이지가 등장한다. <악마를 보았다>가 펼치는 복수극도 바로 이 한마디로 압축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복수물과 아주 다른 점은 복수를 '왜' 하는가, 그리고'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개연성 자체를 무시하면서까지-일부러- 갖은 희생이 이어지는 (사회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어떤 눈에 어떤 눈을, 어떤 이에 어떤 이러 맞서는지 그 복수의 행위 자체에 집착(집중?)하고 있다. 사람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느냐, 이보다 더 잔인할 수는 없다,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다, 가 아니고. 그러므로 그런 복수행위를 서슴지않는 이들은 악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악마의 다이어리를 훔쳐보고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악마를 보고 있는 것이다. 잔혹한 장면들 앞에서 관객들은 이런 생산자들의 '의도'에 성실하게 따라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견디기가 쉽지 않다. 해서 나는 게임에 비유하였으며, 현실감 있는 섬뜩함 대신에 영화가 초반부를 벗어날 즈음부터 '몰입'에서 훌훌 벗어나 불행하게도 살인의 관찰자 역할에 충실하게 된 것이다. 해서, 나는 이 영화를 보실 분들에게 제안하고 싶다. 심야상영과 같은 한적한 시간대에, 맨 앞자리나 맨 뒷자리, 주위 사람들이 거의 없는 데서 친구(지인)과 함께 앉아 충분히 논평하면서(속삭이면서) 영화를 봐도 된다고, 내가 산 말이 1등으로 완주해주기를 바라는 경마장의 풍경처럼. 수현인가 경철인가, 아님 그들을 지켜보는 영화 속의 눈들인가, 아님 그 생산자들인가. 진정한 악마는.. 

복수과정만을 보여주기 위해 스탠바이 된 인물들 그리고 시스템
오로지 복수를 위해 재산을 처분하고 거기에만 집중해서 10년을 기다리며 준비할 필요도 없다(<모범시민>), 15년쯤 사설 감방에 처넣고 공소시효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사육도 없다.(<올드보이>) 광랜 시대에 맞게 15일이면 충분하다. 처음부터 용서할 마음이 없다. 용서가 무슨 뜻이지요? 되묻는다. 아니 그의 사전에는 '용서'란 단어가 애초에 없었다. (<용서는 없다>와 달리) 엄밀하게 피해자 가족과 친지 혹은 패밀리(수현과 그의 장인, 그리고 방관하는 경찰 동료들, 지원하는 국정원 후배까지)들의 조직력을 전용(轉用)-예정되어 있는 곳에 쓰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돌려서 씀-이 있을 뿐이고, 그 시스템을 전용(專用)-1.남과 공동으로 쓰지 아니하고 혼자서만 씀. 2.오로지 한 가지만을 씀. 3 일정한 부문에만 한하여 씀-한다. 인터넷 게임에서 의상과 무기를 고르듯 수사자료를 입수하고(피해자의 아버지, 전직 강력계 형사인 수현의 장인이 건넨다), 최신 추적장비는 국정원 후배로부터 제공(?)받으면 되며, 수시로 경찰의 행적을 감청하고 있다. 그런 자세한 것은 묻지말아요! 그리고 15일이면 충분한데, 어차피 수배전단에 오른 놈들은 사회의 악이고 쓰레기이므로 만나는 족족 처리해버리면 된다. 왜, 분리수거를 기다리는 쓰레기니까? 이놈이 범인이 맞아라는 단서인 약혼자의 반지(커플링)은 기다렸다는 듯이 영화의 초반부에 수현(이병헌)의 눈에 들어온다. "저, 여기 있어요, 이미 알고 왔죠?!"라는 듯이. 경철(최민식)은 극악무도한 살인자, 살인을 밥먹듯이 할 뿐만 아니라 인육을 먹고-태주라는 친구의 식탁에서 보이지만-, 개새끼의 먹이로 인육을 던져주는 싸이코패스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에서 이 영화에는 싸이코패스(캐릭터)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알고 보면 표정만이 냉정과 열정일뿐 너무나 인간적인(?) 순간들이 있다.

복수영화의 '한계', 아님 장르영화의 '경계'?
시간관계상(지면 관계는 아니므로) 줄이거니와 요약하자면, 이 영화는 복수 영화-정통의 영화읽기-로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스타일을 중시하는-장르영화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그런 환경이 갖춰진다는 것은 다양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할 수 있다- 감독의 작품세계를 감안하여, 장르영화로 봐줄때 이 영화는 보통의 영화와 장르영화의 '경계'에 있다. 그런데, 그것이 분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경계'로 보기에는 이미 본듯한, 시츄에이션이 곳곳에서 드러난다는 점, 해서, 복수영화의 종합세트같다는 느낌을 곳곳에서 지울 수 없다. 영화를 고르는 기준 가운데 하나가, 이 영화는 실화(實話)인가의 여부인데, 무슨 시사프로그램의 재연 장면들을 모음과도 같다. <살인의 추억>, <추격자>을 비롯하여 우리 영화만 거론해도 많이 본듯한 장면들을 보는 듯하다. 심지어 그녀가 김옥분인 줄 착각(사실은 김인서)할 정도로 <박쥐>에서의 캐릭터와 아주 유사한 배역이 등장하여, 그럴듯한 장면까지 연출하는 서비스를 잊이 않는다. 여러분, 그동안 보신 스릴러-대체로 복수극인-는 우리랑은 차원이 달라요, 라고 패러디를 하듯. <올드보이>의 최민식이 <친절한 금자씨>에서 일방적으로 당하고, 재기를 노리는 노회한 복서처럼-마음은 팔팔한데 몸은 약간 말을 안 듣는- <악마> 대열에 합류했고, 수현(이병헌)은 <아이리스>를 촬영하다가 연인의 비보를 접하고 잠시 휴가를 내어-15일쯤- <악마>전선에 합류한 듯한 인상을 준다. 심지어 수현의 국정원 후배인 이준혁(<수상한 삼형제>에서 막내 아들 김이상 역)은 경찰청 소속에서 국정원으로 전직(특채)하지 않았나 싶다. 한마디로 그들 개개인의 연기가 빛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악마> 속으로, 해당 캐릭터로 몰입하게 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것이 어찌 배우 탓이라고 할 것이며, 도 아니라고 할 것인가, 인생은 새옹지마다. 산에 올랐으면 내려가기도 해야 한다.

<노부인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잘 들으세요. 부디 이것만은 꼭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완벽하게 옳은 일을 했어요. 우리는 그 남자가 범한 죄를 벌하고 앞으로 발생할 불상사를 차단했습니다. 더 이상의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한 것이예요. 아무것도 마음에 거리낄 일이 없습니다."(무라카미 하루키 <<1Q84>> 2권 429-430면, 문학동네 간행 번역본 인용)

<악마..>에는 잔혹한 복수에 대해 관객의 지지를 호소하는 한마디가 거의 없다. 피해자인 1)수현의 약혼녀나 또다른 2)희생자가 되는 처제는 새로운 인물(배우)으므로, 전작의 영향 때문에 이 영화에의 '몰입'에 걸림돌이 될 인물들이 결코 아니므로, 1-1)왜 복수가 그토록 잔인하게 해야 하는지 특별한 계기점이나, 2)무모해보이는 형부를 설득하는 장면에서 짧지만 특별한 복수의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한 뭔가가 필요했다(김인서가 깜빡 등장하는 그 순간들 못지 않은). 경철의 친구인 태주와 '김옥빈'이 구급대 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형사반장(천호진)이 던지는 "저런 놈들까지 살려야 하나"(정확하지는 않다, 대사가)하는 냉소와 대사는 흘러보내기에는 적지 않은 시서점이 있는 것 같다. 아예 넣지 말거나 '옳고 그름'에 대한 뭔가를 던져야 할 순간이었다. 장르문학(소설)으로 매니아층이 두터운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 틀을 벗어나 대중성을 확보하는 소설로, '안전장치'(위 인용은 소설에서 자꾸 반복된다. 주문을 걸듯)를 잊지 않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저런 인간쓰레기들은 죽여야 마땅해!"라는 식의 발언을 법집행자 그것도 해당사건의 책임자가 관망하듯 내뱉고 있는 것이다. 그것인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천호진-좋아하는 배우다-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애드립도 아니고 진지하지도 않는 뭔가 겉도는 듯한 대사들을 토해내고 그렇게 연기한다. 모든 것은 오로지(ONLY) 복수의 속도 올리기에 복무하고 있다. 이런 관내(?)의 카르텔이 작동하면서 목숨줄을 죄어오는 가운데 경철(최민식)이 생각하는 최대의 반전(복수)는 경찰에 자수해버리는 것이다. 사실 감옥 안보다 세상이 더 무섭고, 사람보다 무서운 존재는 자연이 만들어 낸 것 가운데 없다. 그것이 수현을 가장 아프게 하는 지점이라는 것을 간파하는데, 그 과정에서 살육은 멈추지 않는다.

눈(SHOWING)에는 풍년, 입에는 흉년(TELLING)?
해를 입은 만큼 앙갚음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보이는 대로, 보여주고자 하는 대로 영화의 장면들을 요약하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이르는 과정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다. 그러나 내게는 그렇게 잔혹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어느 끔찍한 영화에서도 하지 못했던 그 장면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응시했다. 사실 <용서는 없다>의 부검장면은 반전을 위해 꼭 필요한 장면이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보여줄 필요가 있었나, 라는 입장이고, 그 장면을 제대로 보지 못했음에도.

1)"아니, 그냥 좀 신경이 쓰여서, 경찰에선 내가 장경철의 뒤를 쫓는다고.. 경찰에서도 장경철을 쫓는 모양이야 그래서 말인데 이쯤에서 그만 두는 게 어떨까? 그만 뒀으면 좋겠어"(장인이 수현에게 전화로)
2)"형부 나예요. 형부는 잘 지내세요. 그래요, 무슨 일로 바빠요... 모르게 하는 일을 묻는 거예요. 아빠에게 수사자료.. 형부 마음 잘 알지만 그일을 그만 두었으면 해요. 어떤 처벌을 가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어요. 그런다고 언니가 살아돌아 오는 것도 아니고, 복수 같은 것 영화에서나 하는 거지"(처제가 수현에게 전화로)

1)의 대해 수현은 "저기요 아버님......", 2)에 대해서 수현은 "미안한데 처제한테 해줄말이 없어"라고 대답한다. 해서 처제가 반문한다.

처제: 나는 딴 식구예요. 뒤돌아봐요. 그런데 해줄말이 없다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그러니까 형부, 의미 없어요 이제 그만 둬요.
수현: ...이 일 그렇게 의미 없지 않아.

뭐가 '미안하고' 없지 않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렇게 대사는 이어진다. 도무지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만들려는 개연성은 애초에 거세시켜놓고 시작하는 영화-영화 초반에 용의자 중에 한 녀석의 성기를 불능으로 만들어버리듯이-가 아닌가!
'말하기(TELLING)'를 거세함으로써 '보이기(SHOWING)'에 집중했다. 물론 이 영화에 찬반이 엇갈리듯 잔혹한 장면들을 맘껏 보여주는(여러분, CG로 이렇게도 만들 수 있답니다) 데서 눈(眼)에는 풍년(?)을 만끽한 이들이 있을 수 있으나 입(말하지, 이야기)의 영역에서는 철저하게 무감각으로 일관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개연성을 획득하기 위한 말하기(TELLING)가 왜 필요하지? 그 공감과 이성적인 판단에서 무신경했다는 점에서 영화 자체가 싸이코패스적이다. 반면에 정작 싸이코패스로 보여져야 할 '악마'들은 영화 속에는 없다. 대신에 아들의 복수를 위해 조폭들(?)을 야산으로 끌고 가서 땅에 파묻는 어느 대기업회장의 자식사랑(?) 같은 무모함은 엿볼 수 있다.

크레타 섬 사람이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라고 할 경우 크레타 사람이 거짓말쟁이인지 아닌지 결정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 <악마를 보았다>에서 악마를 보았다라고 강변함으로써 정작 이 영화에 악마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오로지 악마들이 등장하는 영화들을 쭉 나열한 영화소개프로그램의 편집된 영상을 보는 기분이다. 영화 대 영화, 오버 엔 오버... <아Q정전>에는 물에 빠진 개를 끝까지 때려잡아야 한다는 노신의 유명한 글이 나온다. 제 때에 범인을 처리하지 못함으로써, 여고생, 아가씨, 별장주인인 아줌마(?), 택시강도(그들이 아무리 사회악이라도), 장인어른, 처제, 의사.... 숱한 피해자들이 속출하는 것을 방치하는, 오로지 복수가 어디까지 가는지 보통의 문장이라면 "…."으로 처리했어야 할 것들을 '보여주는' 영화. 어쩌면 이 영화의 상영불가 여부 고민은 잔혹한 장면들보다는 사회악을 근절해야 하는 소명을 띤 '시스템'의 작동불능 상황이 더 문제적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러한 그것이 옳고 그느냐를 판단하기에 앞서 우리 쪽에 유리하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시스템이 작동하는' 이 사회의 현실에 대한 냉소쯤으로 받아들여야 할지-그렇다면 참 좋은 영화다.

"소설이 상품으로 유통되고 소비되어야만 하는 조건을 한탄하는 문장을 보았다..
..지금 문제가 되는 건 오히려 소설이 상품으로서 소비의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상황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라카피 하루키는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를 무너뜨려야 하는 것을 소설로서 직접 보여줬다고, 일본의 비평가가 그의 이번 작품(앞서 인용한)이 거둔 성과를 두고서 한 말이다. 나는 이 말을 '소설' 대신 '영화'라는 단어로 대체해서, <악마를 보았다>를 평가하고 싶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오리혀 영화가 상품으로서 소비의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상황"을 만들었노라고. 장르영화를 표방했으나 대중영화와의 '경계'가 불문명하며, 대중성을 표방한 영화로서의 '한계'가 너무도 분명한 영화라고. 어쩌면 그리스 비극 3대작가가 활약하던 시절에 이미 인간들 사이에서 연출되는 '복수'를 주제로 한 드라마는 충분히 제작되었다, 그러므로 후세의 작가들은 참 불행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처절하고 참혹하기로 한다면 <악마를 보았다>는 결코 그리스 비극이나 신화의 세계를 따라잡지 못한다. 단지 보여줄 수 있게 된 도구(TOOL)을 가지고 있다고 인간 본성의 끝을 탐색하는 작업이 진지해지고 깊이를 더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 비극은 무대에서 잔혹한 장면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더 처절한 장면을 전달했다.

우리 사전에 복수는 있고, 그 정의를 보다 완전하게 할 뿐
사실 어떠한 사전도 온전하게 믿을 수는 없다. 나폴레옹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라는 단어가 없었던 것이 아니고, '불가능'이란 단어에 대한 정의가 적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소설이나 영화, 곧 이야기는 인간본성의 이모저모를 그리고 시대가 바뀜에 따라 변화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탐색을 멈출 수 없다. 이창동은 왜 <밀양>과 <시>에서 피해자와 가해자 입장에서 '용서'라는 주제에 천착하는 것일까? '복수'를 주제로 한 드라마(영화)는 앞으로도 우리 인간의 삶이 계속되는 동안 새롭게 변주될 것이다. 아래 러셀의 지적처럼 만족할 수 없지만 만족해야 하는 상황에 이를 것이고, 어느 시대나 가장 최고의 작품은 이것이 완결이라고 '만족'하거나 '착각'하게 만드는 작품일 테니까,

"어떤 말을 정의 한다는 것은 언제나 같은 그것을 다른 말로 정의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는 정의의 출발점으로 삼을 말을 골라서 그것은 정의 없이도 이해될 수 있는 말이라고 간주하는 선에서 만족하지 않으면 안된다." -버트란드 레셀,

너무 가혹한 평가였다면, 장르문학(영화)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사람쯤의 푸념쯤으로 여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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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든손예쁜손 2010-08-16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우리 영화만 사랑해달라고 하기 전에, 좋은 영화는 알아서 보잖아요.

timeroad 2010-08-17 13:10   좋아요 0 | URL
제작비의 한계가 영화의 한계도 되지만, 대로는 그 한계가 작품성 높은 작품을 만드는 역할도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여치 2010-08-16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익한 글 감사해요. 영화를 보기는 좀 꺼려지지만, 책읽기에 도움을 주는 글인듯해요

timeroad 2010-08-17 13:13   좋아요 0 | URL
영화 보시는데 부담 드린 것은 아니지요, 어쨌거나 부담을 준다는 것은 분명해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미나사랑 2010-08-17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잡았다 풀어주고 잡았다 풀어주는' 좀 심했지요? 하긴 그러기 위해서 싱겁게 두 악마(?)가 만난 것이지만..

timeroad 2010-08-17 16:3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리뷰를 쓰고 난 다음에 생각해본 것인데, 동해안에서 명태(생태)를 가공하여 북어를 만드는 과정이나 포항 등지에서 꽁치로 만드나요, 과메기를 만드는 과정이 떠올랐어요. 밤이나 추우면 얼었다가 해가 드는 낮이며 해동되고 그렇게 반복하는 과정처럼, 복수놀이를 하는 것이 꼭 그런 식이라는..

라라 2010-08-17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에서 최근 영화, 최근 소설까지 아우르는 글 잘 읽었습니다. 소금의 역할을 하시는 듯

timeroad 2010-08-17 16:39   좋아요 0 | URL
소금도 소금 나름이겠지요. 햇살에 잘 말라 굳어진 자연산 소금이기를, 감사

yess1985 2010-08-17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고요, 영화는 보겠지만 큰 기대는.. 과연 어떨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드네요 작품외적인

timeroad 2010-08-17 16:41   좋아요 0 | URL
저 때문에 영화가 싱거웠다는 말씀은 하지 않기입니다.

motoko3 2010-08-17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속시원한 글입니다. \뭔가 아쉬움을 잘 드러낸듯 싶네요

timeroad 2010-08-17 16:40   좋아요 0 | URL
아무튼 고마워요, 잘 읽으셨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