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초겨울 딸과 함께 서해안의 구시포(해수욕장)에 가는 길이었다. '해가 넘어가는' 풍경이 좋아 제철이 아닌 때에도 주말이면 찾는 발길들이 상당한 포구다. 그즈음에 16년 만에 나온 『곽재구의 포구기행』(해냄, 2018) 개정판을 살피고 있었다. 이 책(초판)에 구시포를 다룬 글이 있다(<천천히, 파도를 밟으며, 아주 천천히…… -전북 고창군 상하면 구시포>). 그렇다고 새삼스럽게 이 책 때문에 구시포를 찾았다기보다는, 가까이에 구시포가 있어 찾아가는 길에 마침 개정판이 나와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인근 지리에 좀 익숙하다는 티를 내려고, "너, 상하면의 한자가 어떻게 되는지 아니?" 딸에게 물었다. 돌아온 답은 '글쎄!'다. 마침 상하면 소재지를 막 벗어난 군내버스가 상하중학교 앞을 지나 구시포 방면으로 달리고 있었다. "위 상(上)에 아래 하(下), 해서 상하(上下)야, 우리말로 '위아래' 면(面)." 여기까지였으면 좋았는데, 한 발 더 나간 것이 문제였다. 그런데 이 학교의 교가가 뭔지 알아? <위아래>야. 위아래, 위아래, 위위 아래~ 그 유명한 EXID(이엑스아이디)의 <위아래UP&DOWN>를 언급했으니, '아재' 소리를 들을 수밖에! 응원가라고 했으면 그나마 면(面이 섰을 텐데..

 

상하면(上下面) 상하중학교의 교가는 <위아래>?  

어쨌든 구시포가 있는 상하면은 행정구역 개편 전의 '상이면(上二面)'과 '하이면(下二面)'에서 앞 글자를 따 상하면(上下面)이 되었다. 상이면과 하이면에 이(二)라는 한자도 왜 그런지 궁금하기는 하다. 어쨌든 필자가 알기로는 충남 예산군 삽교읍, 충남 홍성군 홍북읍, 전남 영광군 홍농읍 등에 상하마을(上下里)이 있는데, 이들 한자도 상하(上下)다. 도시에는 상동이나 하동이 즐비하다. 지형의 높고 낮음에 따라, 놓인 형상에 따라, 서울을 올라간다고 하듯이, 위와 아래로 구분하는(혹은 중간까지도), 상하는 지형상 자연스럽게 붙여지는 이름일 수밖에 없다.
어쨌든 상하면 소재지에서 6킬로미터쯤 733번 지방도로를 타고 달리면 구시포에 이른다. 개정판 ‘포구기행’ 해당 페이지를 확인한다. 포구기행의 작가가 이곳을 처음 찾은 계기도 이곳의 특이한 이름 때문인 듯하다. 주민들이 기억하는 구시포의 원이름은 '새나리불똥'이었단다. '새나리'는 갯가(바닷가)를 의미하는 우리말이다. '불똥'은 '불뜸'에서 전이된 말인데, '뜸'은 우리말에서 자연부락을 의미한다. 작가는 구시포의 옛이름 새나리불똥을 '새 바닷가의 불같이 일어날 마을' 쯤으로 풀이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이 포구 이름이 ‘구시포(九市浦)’로 바뀐다. '아홉 개의 도시, 혹은 아홉 개의 저자(市場)를 먹여 살릴 마을이라는 뜻이니 바뀐 이름의 의미 또한 낮은 것은 아니다.'라고 작가는 덧붙인다. 구시포의 바다가 백합조개가 무럭무럭 자라는 개펄바다인데다 조기들로 유명한 그 칠산바다가 아닌가?

 

'아홉 개의 도시, 혹은 아홉 개의 저자(市場)를 먹여 살릴 마을'
‘그렇다는 구나!’ 하고 이야기를 마칠 참인데,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왜 그럴까, 이름 곧 여기서는 지명, 그 지명은 왜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이야기가 깊어지고 있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이야기도 나눈 기억이 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서가에서 플라톤의 대화편 한 권을 꺼내 새롭게 이야기했다. ‘이름의 올바름에 관하여’라는 부제를 가진 플라톤의 대화편 『크라튈로스』다. 천병희의 번역은 『이온/크라튈로스』(숲, 2014년 10월)로 두 편이 묶여 있다.

 

“누가 맨 처음 이름들의 올바름에 관해 모른다면 나중 이름들의 올바름에 관해서도 알 수 없네. 나중 이름들은 그가 모르는 맨 처음 이름들로 설명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 나중 이름들을 과학적으로 이해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분명 무엇보다도 맨 처음 이름들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네.”-플라톤 『클라튈로스』 426a~b), 천병희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알겠는데, 한 걸음 더 들어가려하면 복잡해지고 심오해지는 대화편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그 무엇(사물이나 사람이나 이름의 대상)에 대해 그 이름을 붙인 사람은 누구일까? 책에서는 '입법자'라고 한다. 어쨌든 입법자는 어떤 기준으로 그것에  [그것]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인가? 이 대화편 서두에서는 헤르모게네스는 '이름의 올바름은 합의와 동의에 의해 정해진다'는 규약주의를 주장한다. 그것을 [그것]이란 이름으로 부르기로 합의한 '약속'이란 얘기다. 반면에 크라튈로스는 '있는 것들 각각에는 이름의 올바름이 본래 자연적으로 있다.'(객관적으로)는 자연주의를 주장한다. 그것이 [그것]으로 불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것이 '본래'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무 목(木)이나 물 수(水)와 같은 한자의 상형문자를 떠올리면 크라튈로스의 주장은 자연스럽게 이해가 된다. 하지만, 한자의 갈래에는 상형문자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혀의 모양에 따라 자음을 정하고(설형문자) 천지인(天地人)의 원리에 따라 기본 모음을 정한 한글의 경우는 어떠할 것인가? 어쨌든 소크라테스는 먼저 헤르모게네스와 긴 토론을 한다. 인용한 부분은 둘의 대화가 거의 마무리되는 시점인데, 앞선 대화들의 상당부분이 희랍어의 어원에 관한 고찰이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나중 이름(현재 사용하는)은 맨 처음 이름(이전 이름)과의 연관 관계에서 왜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연관지어 설명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2권 후반부 '함선목록'에서 읽기를 멈추는 것처럼, 어원에 대한 이야기는 희랍어를 잘 모르는 독자들에게는 지루하고 시험에 든 것처럼 갈등하지 않을 수 없다. 희랍어 고전을 좀 읽었다는 사람에게도 이는 마찬가지다. 신들과 영웅들의 이름이나 중요한 철학의 개념어들이 눈에 들어오기는 하지만, 어원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사실 우리말에서도 쉽지 않은 영역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앞서 포구기행의 지명 유래에 대한 추적을 예시한 것이다.)

 

맨 처음 이름들의 올바름에 따르는 나중 이름들의 올바름
플라톤은 궁극적으로 이데아(idea) 이론을 펼치기 위해 사물의 이름 이전의 사물 자체가 가진 본성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의 프레임을 벗어나서 결론에 이르는 과정 일부를 이야기한다. 어쨌든 소크라테스는 "맨 처음 이름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 그가 나중 이름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허튼소리일 뿐이라고 진술하고, 헤르모게네스의 동의를 구한다.
포구기행의 작가는 구시포가 왜 구시포인지, 이전 이름인  '새나리불똥'이 왜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인지, 나름대로 해석했다. 상하면의 구시포는 나중 이름(현재 이름이면서)인데, 그 처음 이름(이전 이름)은 '새나리불똥'이었다. 그렇다고 '새나리불똥'이 현재 구시포의 맨 처음 이름이었다고 할 수 없다. 현재 이름에 대한 이전 이름일 뿐이다. 다만 한자어가 아닌 고유한 우리말 지명인 점에서 처음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어쨌든 작가는 국토지리를 기본으로 인문지리와 거기에 시인의 상상력까지 가미하여 그럴듯한 설명을 하고 있다. 김춘수의 시에 따르자면 ‘구시포’가 비로소 구시포가 되는 셈이다(실제로 해당 지명이 왜 그 지명인지를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구시포가 비로소 구시포가 되는 순간, 그러나 맨 처음 이름은?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논점은 여기에 있지 않다. 인용부분 대사의 앞에서 그는 얘기한다. "사물들이 자모와 음절을 통한 모방에 의해 밝혀진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워 보일 걸세."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다! "맨 처음 이름들의 참됨에 관한 한 우리는 이보다 더 나은 설명에 의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사물을 그 [사물]이라고 부르는 이름은 언어이고, 언어는 자음과 모음으로 이뤄져 있다. 자음과 모음은 결합하여 음절을 이루고, 한 음절이 한 사물의 이름이 되기도 하지만 음절과 음절의 결합으로 한 사물의 이름이 된다. 그 사물에 그 [사물]의 이름을 붙이는 재료가 언어인데, 이를 모방이라고 표현한다. 사물이 가진 본질을 모방하는 수단이 언어인 것. 이렇게 언어로 된 그 [이름]은 사물을 대신한다. 곧 대치(代置)한다. 그러나 그것이 왜 그러한지에 대해서도 의문이고, 그것이 적절한지 그 원칙은 무엇인지 등 의문투성인데, 이 대화편의 주제다. 일단 우리는 그 이름(언어)에 의존해서 ‘구시포가 구시포인‘ 이유, 구시포가 구시포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을 수밖에 없다. 소크라테스는 지금 언어의 한계를 얘기하고 있는 것인데,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접목시켜야 비로소 이해가 가고, 후반부 크라튈로스와의 대화에서 앞서 인용한 부분과 관련된 흥미로운 얘기를 꺼낸다. 그러나 논점은 조금 달라진다. 소크라테스는 묻는다. “우리는 이름들이 어떤 힘을 갖고 있으며, 어떤 훌륭한 일을 한다고 주장할 텐가?” 크라튈로스는 대답한다. “소크라테스님, 이름들의 힘은 가르치는 거예요. 그리고 사물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사물도 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어요.” 이어지는 대화다. 잠시 따라가 보자.

 

이름들의 힘은 가르치는 것, "삼척동자도 알 수 있어요."
소크라테스: 크라튈로스. 자네 말은 아마도 누군가 이름의 본성을 안다면―이름의 본성이 사물의 본성일세― 사물은 이름을 닮은 만큼 사물도 알며, 서로 닮은 사물은 모두 같은 기술(技術)에 속한다는 뜻인 듯하네. 내 생각에 그래서 자네는 사물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사물도 안다고 주장하는 것 같네.
크라튈로스: 지당하신 말씀이에요.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자네가 방금 말한 가르치는 방법이라는 게 무엇인지. 그보다 더 열등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는지. 아니면 그와 다른 방법은 없는지 살펴보기로 하세. 자네 생각은 어떤가?
크라튈로스: 나는 다른 방법은 없고, 그것이 하나뿐이자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크라튈로스』(435d~436a), 천병희

소크라테스는 크라튈로스의 주장이 독단으로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 배려하지만 그는 고집스럽게 주장을 철회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 그것은 또한 사물을 발견하는 방법이기도 해서. 사물의 이름을 발견한 사람은 사물도 발견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자네는 탐구와 발견은 다른 방법으로 해야 하고, 배우는 것은 이 방법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크라튈로스: 나는 탐구와 발견도 같은 수단에 의해 같은 방법으로 해야 한다고 확신해요.
소크라테스: 자, 크라튈로스. 우리는 이 점에 유의하세. 자네는 이름들을 길라잡이 삼아 그것들의 뜻을 뒤쫓으며 사물들을 탐구하는 사람은 속을 위험이 크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크라튈로스: 어째서 그렇지요?
소크라테스: 맨 처음 이름을 지은 사람은 분명 사물들의 본성과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이름들을 지었네. 그것이 우리의 주장일세. 그렇지 않은가?
크라튈로스: 네. 그래요.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그의 생각이 올바르지 못한데 그가 그에 근거해 이름을 짓는다면, 자네는 그를 길라잡이로 삼는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하리라고 생각하는가? 속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
『크라튈로스』(436a~436b), 천병희

 

맨 처음 이름을 지은 자의 생각이 올바르지 못하다면?
크라튈로스의 이름의 올바름에 관한 자연주의 이론이 앞서 인용에서 균열을 일으킨다. 소크라테스는 다음 인용에서 결정적으로 크라튈로스의 주장이 가진 한계를 지적한다. 아래 인용은 [판본A]와 [판본B]로 두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판본A]의 일부 내용이다. 그만큼 이 대화편의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얘기로 받아들인다.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말해보게. 최초의 입법자들이 맨 처음 이름을 지었을 때 이름 지은 사물들을 알고서 지었을까, 아니면 모르고 이름 지었을까?
크라튈로스: 나는 그들이 알고서 이름 지었다고 생각해요, 소크라테스님.
소크라테스: 여보게 크라튈로스, 아마도 모르고 이름 짓지는 않았을 걸세.
크라튈로스: 나도 그들이 모르지 않았으리라 생각해요.
소크라테스: 그런데 만약 이름을 통해서만 사물들을 알 수 있다면, 이름이 존재하기 전, 그러니까 이름을 알 수 있기 전, 우리는 어떻게 그들이 알고 이름을 지었다거나 그들이 입법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
『크라튈로스』(437e~438b7)

 

이름을 통해서만 가르칠 수 있고, 탐구와 발견도 가능하다고 '믿는' 크라튈로스의 주장이 자가당착에 빠지는 부분이다. 인식론이니 존재론이니 하는 철학의 영역으로 대화편은 깊이를 더해간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철학자가 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클라튈로스의 주장은 외골수에 가까운 것으로 판명이 되지만, 그만큼 보통의 삶에서 언어를 재료로 만들어진 이름(단어, 언어, 말)이 하는 역할은 크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필자도 한글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가벼운 얘기처럼 다가오던 『클라튈로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생각의 깊이를 더해갈수록 인식의 숲에서 헤매게 하는 묘한 대화편이다.

 

이름을 통해서만 사물들을 알 수 있다면.. 크라튈로스의 자가당착

탐구와 발견은 물론이고 가르치는 것도 이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고집을 부리는 클라튈로스, 그러나 우리는 상당 부분 이러한 이름을 통하여 책을 읽고 또한 글을 쓰며, 대화하고 있다. 이름의 근원을 찾아가는 여행, 그리고 이름 이전의 사물의 본질을 찾아가는 여행은 좋은 기행수필 작가의 아름다운 여행과 다를 바 없다. '미법도彌法島. 처음 섬의 이름을 만났을 때 가슴이 뛰었지요. 미륵의 불법이 존재하는 섬.' 작가는 여정을 미법사로 정한 이유가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이름 때문이었음을 고백한다. 곽재구의 신新 포구기행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참 좋았다 』(해냄, 2018년 7월) 한 대목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거제의 포구를 여행한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참 좋았다 -욕지도 자부포에서」의 일부다. 이 글을 위해 이 책에서 작가가 여행한 곳의 지명과 관련된 언급들을 여러 군데 골라냈는데, (너무 길어지니 문제라) 그 중 하나 고르 것이 우연히도 이 책의 제목이 된 기행수필이다. 2018년 1월호 『전원생활』에 처음 소개되었다.


"1시간 15분 항해 끝에 욕지도에 이른다. 섬의 이름은 난해하고 철학적이다. 욕지慾知, ‘알기를 원한다면’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는 동안 곤궁한 생화두에 시달리지 않는 이가 있을 것인가. 왜 사는가. 왜 먹는가. 왜 걷는가. 그 이유를 알려줄 테니 어서 오라 손짓하는 것만 같은 이름. 사실 이 섬의 이름을 정확히 인식하기 위해선 ‘욕지 연화장 두미 문어 세존 慾知蓮華藏頭尾問於世尊’이라는 불가의 전언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_『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참 좋았다 』354~355면)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ransky 2019-05-11 17: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시포!
여기에 사진을 올리 수 없으니 그날의 광경을 못 다 이야기하네!
파도와 모래폭풍!

timeroad 2019-05-13 19:36   좋아요 0 | URL
정확히는 구시포해수욕장과 동호해수욕장 사이 명사십리해수욕장이겠지요. 얼마 전에 갔더니 명사십리의 그 고운 모래들을 헤집어놓아 속이 상했어요. 자연은 곧 복원을 하겠지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