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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원정기 - 아나바시스
크세노폰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1년 8월
평점 :
"...(생략분은 아래 *1참조) 자유의 이행에는 전후좌우의 설명이 필요 없다. 그것은 원군(援軍)이다. 원군은 비겁하다, 자유는 고독한 것이다. 그처럼, 시는 고독하고 장엄한 것이다. 내가 지금-바로 지금 이 순간에-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한 횡설수설을 그치고,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다. 당신이, 당신이, 당신이 내 얼굴에 침을 뱉기 전에……."
인용이 좀 길어 앞부분을 이 글 아래에 실었다. 스무 살 시절, 아니 그보다 앞서 80년대 초반 고교 시절에 만난 김수영 시인의 거침없는 시론(詩論)-<詩여, 침을 뱉어라>-의 일부이다. 시인의 삶과 정신세계를 이해하는데 너무나 유명한 시론이기도 하고, 포도송이에 알알이 박힌 알맹이처럼 숱하게 인용되고 재해석되고 새로운 논지 전개에 물꼬를 터주는 유명한 시론이다. 그리고 상당한 세월이 흘렀다. 마침내 내게는 겨우 한 문장쯤으로 이 시론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다. "원군은 비겁하다." <그것은 원군(援軍)이다. 원군은 비겁하다, 자유는 고독한 것이다.> '자유하다'는 좀 그렇고 '자유롭다'의 상태에 스스로 도달하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를 살아간다는 얘기였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억압하고 검열하는 프레임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을 얘기한다.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만 되뇌이고 다른 버전으로 이야기할 뿐 진정 자유로운 시를 내용에서도 형식에서도 쓰지 못하고 있음, 쓸 수 있음에도 쓰지 '않고' 있음에 대한 자기 비판이 담겨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지금 얘기하는 김수영의 시론(詩論)은 '당시에도 혹은 지금도' 시론(時論)이기도 하다. 시인이 시론을 쓰던 당시에도 지금도 우리나라는 원군인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휴전 상태인 것이다. 80년 광주민주항쟁 당시 미국이 취한 태도를 보면서 우리는 마침내 미국(미군)이 한국에 머무는 이유를 알아버리고야 말았다. 심증은 가득하나 '물증'이 없던 시절은 가도 비로소 그들의 존재(정체)를 자각한 계기가 광주민주항쟁이었다. 어쩌면 김수영의 '원군은 비겁하다'라는 말은 이러한 한반도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도 담고 있는 것이라, 나는 생각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사상가이자 저술가인 크세노폰 (Xenophon). 그는 기원전 431년경에 아테네에서 태어나 기원전 354년경에 죽었다. 기원전 399년, 독배를 마시고 죽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며, 플라톤과는 동문수학한 사이. '아나바시스'로 알려진 그의 대표작 <페르시아 원정기>(Anabasis)를 읽으면서 나는 끊임없이 앞서 언급한 '원군'이라는 단어와 거기에 묻어 있는 이런저런 의미를 떠올리곤 했다. 아테나이 출신의 크세노폰은 페르시아의 왕위를 찬탈하려는 퀴로스에게 고용된 그리스인 용병대에 참가한다. 당시 그는 꽃다운 20대. 페르시아. 부왕 다레이오스(2세)는 맏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죽는다. 그러나 왕비인 파리사튀스는 남편이 살아있을 때에도 차남인 퀴로스가 왕위를 물려받도록 강추!! 차남 퀴로스-소 퀴로스-도 당연히 자신이 왕위를 물려받을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형이 즉위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암살기도를 하여 사형될 운명이지만 역시 어머니의 간청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결국 쿠로스는 그리스 원군(용병)까지 동원(고용)하여 반역을 꾀하는 것. 바로 이 전쟁에 크세노폰이 원정군의 한 사람으로서 참전하고 있다. 원군이 지원군의 약자라고 할 때, 원군은 도움을 구하는 나라에 도움을 주는 나라가 어떤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파견하는 군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크세노폰이 참여한 이 원정대는 '원군'이라기 보다는 '용병'에 가깝다. 국가 차원에서의 파견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인 이익-돈, 물질적인 부, 잔리품을 포함함-을 목적으로 파견된, 거래로서의 전쟁(참전)으로만 보기에는 당시를 전후한 세태를 살필 필요가 있다. 바로 이 부분이 <페르시아 원정기>를 읽으면서 자꾸 확인해야 했던 질문이다.
사실, 아테나이인들이건 스파르테인들이건, 거슬러 올라가 <일리아스>(호메로스의)에서부터 만나는 전쟁마다 그 전후과정을 살피면 답은 분명하게 나온다. 전쟁을 해야 하는 명분도 중요하지만 실제 참전하는 이들은 장군이고 사병이고 간에 전리품에 관심이 더 많다. 역설적으로 전리품을 탐내지 않는 장군들의 인품이 빛난다(영웅전의 주요 인물들, 그렇지 못한 인물들의 사례도 담겨 있다). 궁극적인 목적이 전리품을 획득하기 위한 일종의 '비지니스' 였음을 알고 다소 실망하게 되는 전쟁들이 수두룩하고, 어쩌면 '약탈'은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으로까지 보인다.
먹지 않으면 먹히는, 먹어야 사는 '동물의 세계'를 보라. 목숨을 빼앗지 않으면 목숨을 유지할 수 없는 절대절명의 존재를 위한 순간들, 고대의 인간들이 미개해서가 아니고 어쩌면 그들에게 전쟁은 자연으로 보일 정도이다. 그리고 전쟁은 21세기를 사는 현재에도 동물성에 충실한 '약탈'의 유전자를 충실하게 이어가고 있지 않은가! 바로 이러한 시각은 명분이 약한, 크세노폰의 참전에 대한 '변론'이 된다. 어쩌면 '명분'을 앞세우나 결국은 '약탈'이 목적인 것보다는 비겁하지 않은 참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들 '1만인' 용병 이전에도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기에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의) 태수들에게 고용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1만 인'과 더불어 비로소 용병의 역사에서 새 시대가 열렸다고 할 수 있다."(옮긴이 서문) 그런데 자신들을 고용한 퀴로스가 어이없이 죽고, 설상가상으로 자신들을 인솔하던 장군들와 대장들이 페르시아왕측의 술수에 의해 처형된다. 타국에서 오도가도못할 상황에 처한 것. 그러나 이들은 흩어지기는커녕 오히려 한데 뭉쳐 나중에 스파르테군에 합류할 때까지 2년 가까이(기원전 401년 여름부터 399년 봄까지) 성공적으로 전쟁을 수행한다. 용병인 그들에게 궁극의 목적이었던 전리품은 제대로 얻지 못했지만 '살아남은' 목숨이 그들의 전리품이었던 셈이다. 특히, 크세노폰은 비전투 참모로 용병부대에 끼어 있었는데, 마침내 그들을 지휘하는 위치에 오르고, 본인의 참전기이기도 한 <페르시아 원정기>라는 고전을 집필하였으니 노고에 대한 품값을 톡톡히 받은 셈이다.
***이 원정기의 초반부 상황은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서도 엿볼 수 있다. 플루타르크는 영웅전에서 퀴로스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 소개를 상당 부분 생략하는데, 크세노폰의 <원정기>가 이미 있기에 그러하다, 라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전투에 대해서는 많은 역사가들이 자세하게 기록했는데, 그 중에서도 크세노폰의 기록은 마치 눈에 보이듯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크세노폰의 생동감 있는 묘사는 직접 전쟁터에 나간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필자는 여기서 크세노폰이 빠뜨린 것을 보충하는 정도로만 기록하겠다."(영웅전, 동서문화사 간 1857면)그런데, 플루타르크(기원후 50년 이전~120년 이후)는 크세노폰보다 한참 후에 기록들에 의지해서 당시의 전투를 소개하고 있다. 그럼에도 당시 원정군으로 참전했던 크세노폰을 비전투요원이었기에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여 자신의 기록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퀴로스가 죽고 목과 손이 절단되는-관행적으로- 바로 그 현장에 크세노폰이 없고,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현장성과 그리고 다름 아닌 그 전투의 결과로 갓끈떨어진 처량한 신세에 이르른 그가 수집하고 정리한 정보들이 만만한 것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별도의 글에서 다루겠지만 오히려 '영웅전'에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동생 퀴로스를 자신이 직접 죽였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벌이는 여러 해프닝이야말로, 흥미롭기는 하나 그저 비하인드 스토리 혹은 아님은 말고 식의 기록일 수 있음을 언급해두고자 한다.
"군대에는 크세노폰이라는 아테나이인이 있었다. 그는 장군도 대장도 사병도 아니었고, 그가 행군에 참가한 것은 그의 옛 친구 프록세노스가 사람을 보내 그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프록세노스는 또 그가 오면 퀴로스의 친구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며, 자기에게는 퀴로스가 조국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페르시아 원정기>, 3권 1장 4정) 원정에 참가해야 하나, 말하야 하나 크세노폰은 스승이면서 친구와도 같은 소크라테스와 상담까지 했다는, 자기 이야기를 제3의 서술처럼 시치미 뚝 떼고 이어가는 모습이 귀엽다고 할까?
*한편, 스파르타의 왕 아게실라우스(기원전 444무렵~360년).는 "당시 그리스 최고의 인물로서 뛰어난 왕이자 장군이었다. 84세까지 장수를 누렸으며, 이집트 원정에서 돌아오다가 숨을 거두었다." 이처럼 동서문화사의 영웅전은 서두에 아게실라오스의 프로필을 소개한다. 팔십이 넘은 이 양반은 말년에 메세네라는 작은 땅덩어리라도 손에 넣으려고 하나 전쟁경비가 모자라 시민과 친구들에게 경비를 빌리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힘들자 급기야 이집트의 왕 타코스를 위해 싸움에 나선다. 전쟁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용병이었으니 반대와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스 최고의 장군으로서 세상에 이름을 떨치던 위대한 그가, 이집트의 한 야만인 우두머리에게 고용되었다는 것은 추태라는 것이 세상의 평가였다. 그는 타코스가 보낸 돈을 받아 용병을 모집한다. 그리고 그 병력으로 함대를 구성한 뒤-페르시아 원정 때처럼 30명의 스파르테 장군을 고문으로 임명하여- 이집트로 출항했다. 이제까지의 전쟁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몸을 가누기도 힘든 늙은 장군(왕)이 왜 그러한 선택을 했을까? 그의 속마음(믿음)을 플루타르크는 이렇게 읽고 있다.
'어떤 일이든 그것이 자기 자신만의 명예가 아나라 나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집 안에 틀어박혀 죽는 날만 기다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노년에 관하여>의 주 대담자 대 카토의 삶을 떠올리게 하는 플루타르크의 진단에 별풍선 세 개를!) 상당히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또한 국익을 위해 갖은 반대와 수모를 견뎌내는 노년의 왕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2012년 현재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바로 이 대목에서 어떤 생각을 할까?(단적으로 李대통령-맥쿼리 유착의혹 다룬 ‘맥코리아’ 개봉!).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의 용병 파견은 일종의 인력수출이다. 스파르테는 이미 알고있듯이 문(文)보다는 무(武)를 숭상하는 상무국가로, 비록 나라살림이 넉넉하지도 않고 또 그렇게 부를 축적하기보다는 부가 인간을 타락시키는 악의 근원이라는 점을 법과 체제에 반영한 나라였다.
그러나 모든 전쟁은 군인들로만 싸우는 것이 아니고, 나라살림이 넉넉해야 군수물자와 군량을 댈 수 있는 경제전쟁이기도 했다. 영화 <300>의 테모필라이 고개에서의 전투에서보듯 스파르테 전사들은 그야말로 일당백의 전사들이었다. 그러니, 스파르테가 가진 최대 자산은 전투능력과 지휘능력이 출중한 군대였고, 아게실라우스 왕은 그들이 가진 경쟁력 있는 군인(인력)들을 수출해서라도 국가재원을 마련했던 것이다.
크세노폰 (Xenophon, 기원전 431년경~기원전 354년경)의 페르시아원정은 기원전 401년 여름부터 399년 봄까지이다. 아게실라우스(기원전 444무렵~360년)는 84세에 세상을 뜨는데, 이집트 용병출전이 80이 넘어서라고 했으니 기원전 366년무렵이다. 페르시아원정 시점이 35년쯤 앞이다. 그리스 세력의 한 축인 스파르테의 왕도 용병으로 돈벌이에 나서는 것은 후에 일이지만 크세노폰이 용병대의 일원으로 페르시아의 내전에 참전하는 것이 그렇게 큰 흉은 아닌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 (당시의) 인지상정일까? <페르시아 원정기>를 쓰기 위한 참전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당시 크세노폰의 젊은 혈기,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충동, 모험심.. 로드무비의 원조인 <오뒷세이아>의 애독자였을 그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자꾸만 동쪽으로 간 까닭은? 알맞은 대답이 있다면 그것은 동시에 크세노폰의 참전 동기에 대한 답도 되지 않을까. 원군은 비겁하다. 그러나 목적이 선하다면 혹은 명분이 솔직하다면 원군 그 자체라도 비겁하지 않을 수 있다. 플랜트 수출(plant export)은 생산설비나 대형기계 등을 비롯하여 관련기계의 설치·가동에 이르는 모든 것을 포함한 공장 전체를 수출하는 것을 말한다. 페르시아 내전에 참전한 용병들, 그리고 아게실라우스 왕이 이끈 스파르테 군인들의 이집트 용병 파견은 단지 용병들만이 아니라 일종의 전투력을 갖춘 시스템을 판매한 플랜트수출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아래*1: "나는 아까 서두에서 시에 대한 나의 사유가 아직도 명확한 것이 못되고, 그러한 모호성은 무한대의 혼돈에의 접근을 위한 도구로서 유용한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호성의 탐색이 급기야는 참여시의 효용성의 주장에까지 다다르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도 '여직까지 없었던 세계가 펼쳐지는 충격'을 못 주고 있다. 이 시론은 아직도 시로서의 충격을 못 주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여직까지의 자유의 서술이 자유의 서술로 그치고, 자유의 이행을 하지 못한 데에 있다. 모험은, 자유의 서술도 자유의 주장도 아닌 자유의 이행이다." (김수영 시론, <시여 침을 뱉어라>의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