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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전집 세트 - 전7권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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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수업을 빼먹은 프란츠가 모처럼 마음을 고쳐먹고 들판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교실로 돌아간다다시 학교로 가는 길면사무소 앞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게시판 앞에 모여 있다. 2년 전부터 패전징발 명령포고령 등 나쁜 소식들이 오르내리던 게시판이다교실로 돌아간 프란츠는 '어쩌다' 선생님이 프랑스어로 하는 마지막 수업에 참여한다.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마지막 수업 The Last Lesson)은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면서 알자스-로렌 지방을 프로이센(독일)에 넘겨준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선생님은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해오늘 못한 일은 내일 하면 되지!”, "프랑스어를 굳건히 지키면 남의 지배를 받더라도 영원히 빼앗기지는 않을 것마치 감옥에 갇혔지만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명대사를 날린다

하루 종일 직접 재배한 유기재배(사양의) 땅콩을 까면서 향년 84세를 일기로 막 천상의 세계에 진입하신 고전번역가 천병희 선생님을 생각했다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마지막 수업>의 몇몇 장면들이 떠올랐는데,  그 이야기할까 한다소설의 이론 강의에서 이 작품을 인용할 때는 실제 전쟁의 참상은 등장하지 않으면서 어수선한 분위기전쟁으로 인한 혹은 전쟁 패배에 따른 변화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점에 주목한다게시판 앞에 모여든 주민들의 불안한 분위기는 생활이다선생님이 프랑스어로 하는 마지막 수업은 학교 생활인데, 여기에서 전쟁의 결과를 알 수 있다그러나 가장 빛나는 대목은 소설의 끝 부분멀리서 대포 소리가 쿵쿵 울린다와 같은 마무리다이 한 대목 때문에 이 소설은 전쟁소설 갈래에도 넣을 수 있게 되었다프랑스인들의 모국어에 대한 자부심의 속살을 엿보게 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해지는 풍경을 손에 쥔 모래알들이 흩어지는 것에 비유한 이도 있거니와 세상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해서 '마지막'이란 단어에는 아련한 뭔가가 함유되어 있다남원 광한루원 북동쪽에 자리한 춘향 사당의 뒤안 가득 핀 상사화를 볼 때의 느낌이랄까(성춘향과 이몽룡이 사랑은 해피엔딩이 아니었다라는 상징일까)? 고전번역가 천병희 선생이 저세상으로 가셨다. 12월 21, 23시 무렵그리고 24일 화이트 크리스마스 이브에 고향 땅 고성의 한 묘역에 안장되었다그러므로 이제 천병희 선생이 한국어권 독자들에게 남기 마지막 번역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게 되었다어쩌다 혹은 다행히 선생님의 80세 생일에 맞춰 완간된 플라톤전집(5중 하나위작임이 분명하다고 학자들이 판정한 작품 중 하나이지 않을까추정할 수 있다

 '이 분은 저희 어머니가 확실합니다!'와 같이 플라톤이 쓴 플라톤의 대화편임이 확실한 <소크라테스의 변론>, <향연>, <국가이어 <법률>까지 ,  굵직한  대작들, 그리고 상징적인 대화편들을 먼저 번역하여 세상에 내놓은 상태였다그럼에도 위작들까지는 모조리  번역하여우리말로 그것도 한 번역가가 <플라톤 전집>을 완역하는 대역사를 천병희 선생님은 이루고 가셨다그것도 철학전공자가 아닌 독문학자 혹은 고전학자가 이룬 성과다

하루 종일 글제목을 뭘로 뽑을까지루하기 짝이 없는 피땅콩을 알땅콩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면서 생각했다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독자들에게 천병희 선생께서 남기신 마지막 선물마지막 수업내가 이런 것까지 해야하나 번역의 고역을 행하는 중에 선생은 회의감이 일었으리라하지만 꾹 참아내시고 번역에 집중했다위작인지 아닌지도 반신반의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작품들까지 원전 번역을 하여 한국어 독자들도 위작 논란에 참여하게 해주셨다.

덧붙여 <마지막 수업>이란 단편소설을 떠올린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한국어판 플라톤 전집이 간행됨으로써한글이 모국어인 이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준 일인데소설 속 상황과 오버랩이 되는 이유이다아이스퀼로스비극전집소포클레스비극전집에우리피데스비극전집(2권), 아리스토파네스희극전집), 이어 플라톤의 대화편전집(7)까지선생은 전집 완역에 노년을 고스란히 바치셨다특히 플라톤전집은 기존의평생 진행한 그리스와 로마 문사철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존의 번역과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또한 죽음이 이승에서 저승으로의 이주와 같은 것이 사실이라면 배심원 여러분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 또한 여러분 가운데 누가 오르페우스,  무사이오스헤시오도스호메로스와 함께 할 수 있다면 그 대가로 얼마를 내겠습니까이런 이야기가 사실이라면나는 몇 번이고 죽겠습니다."

-천병희 옮김, <소크라테스의 변론후반부,


죽음(사형)이 결코 두렵지 않을 뿐만 아니라 차라리 행복이라고 역설하는 <소크라테스의 변론> 중 일부입니다지금 천상에 갓 진입하셨을 천병희 선생께서 가장 먼저 만나보고 싶은 사람은? 플라톤일 것입니다. "당신 뭔 글을 그리 난해하고 난삽하게 쓰신 것이오집이  말씀대로 캐묻고 따지고 싶은 대목이 참 많읍디다. " 그런 하소연을 통역없이 번역도 없이 희랍어로 나누고 계시지 않을까고인의 명복을 빌며사는 동안 한국인들에게 서양 고전에 접근 가능한 지름길을 내어준 천병희의 플라톤전집(전7)을 일독할 것을 권하면서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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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일의 유리 1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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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그리스 신화부터 비극와 희극, 플라톤의 대화편들까지 천병희 선생의 원전 번역 읽기에 푹 빠져 지냈고, 이곳에 상당한 리뷰, 페이퍼 등을 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2년 반 가까이 훌쩍 지나갔다. 가끔 책을 사려고 이곳에 들렀을 뿐(지방의 오프 서점에서 원하는 책 구하기란 너무너무 어려웠어요). 그러다 최근에 『이솝우화』(천병희 옮김) 관련 리뷰 등을 읽게 되었고, 공감하는 바 있어 한 작가의 작품을 소환한다. 


일본 작가가 쓴 소설. 그러나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독특한 구성 그렇다고 우화로 분류하기엔 좀 애매, 딱 이 정도였다. 책 표지를 보면 알겠는데 작가도 떠오르지 않고 작품 이름도 떠오르지 않았다. 최근에야 3년 만에 겨우 공간을 확보하여 박스에 담겨 여기저기에 피로감을 준 애물단지 책 짐들을 겨우 푼 상태였기에, 두 권으로 엮인 이 책들을 직접 찾아보기 시작했다. 한나절을 할애했지만 실패. 


막고 푼다고 이곳에서 ‘국내도서> 소설/시/희곡> 세계의 문학> 일본문학’이라는 분류에 따라 정확히는 번역 출간된 ‘일본소설’을 하나하나 검색하기 시작했다. 25권의 책이 한 묶음으로 모니터에 나타나는 검색을 얼마나 했을까? 국내도서로 번역 출간된 일본소설이 과연 몇 권이나 될까? 지루하고 단순한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문득 ‘유희’라는 단어가 그 책과 관련하여 떠올랐다, 유희(遊戲).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와 뭔 상관? 뭔가 연관이 있는 듯하기는 하지만 그간 검색에 할애한 시간이 아까워서 계속 막고 푸는 검색을 계속했다. 


그렇게 다시 만난 책이 『천일의 유리1』과 『천일의 유리2』다. 원제 ‘千日の瑠璃’(1992년).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문학동네(2007-04-04) 펴냄. 자주 나가는 책은 아닌 모양이다. 며칠 기다려야 함에도 이 작품을 구매하여 입수했다. 


지난해 봄, 난데없는 부음(訃音)을 수신했다. 서울 출장에서 돌아오는 KTX 안이었다. 약간의 ‘불법’을 감행하며 목적지를 광주로 변경했다. 해남에서 누군가를 만나 그이의 집에도 갔는데, 문득 그대가 생각이 나더라, 종가(宗家)의 후손이면서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친구가 확인차 전화했을 정도로 나와 닮은꼴이 많았던 형이었다. 


그해 여름, 그 형과 나는 그 형의 집(문화재)에서 특이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길이 5m 최대지름 3m인 계란(유선형) 모양 조형물을 대나무로 엮어 닭장을 만드는 일이었다. ‘장태’, 인근 동학혁명기념전시관에 전시될 소품을 만드는 일을 둘이서 하기로 한 것이었다. '장태'란 '닭장'인데 대나무로 엮은, 천적들로부터 닭들 보호하려고 왕대를 쪼개고 얇게 다듬어 타원형으로 엮은 일종의 닭 사육장이다. 


동학농민혁명 때 우리는 칼과 화살로 원군인 왜군들의 조총 방사에 맞서야 했다. 그 장태 안에 솜이불을 넣어 이것을 엄폐물로 삼아 굴리면서 전투를 했다. 그런 동학혁명전쟁의 상징인 장태를 재현하는 프로젝트를 그 형과 진행한 것이다. 


그렇게 전시품을 재현하는 며칠 동안 윤 형(‘윤’이라고 하자)과 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취중진담을 위한 퍼포먼스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많은, 그리 길지 않은 동안 에피소드는 적지 않았다. 그렇게 거기 머무는 동안 내가 그의 서재에서 간택하여 읽은 책이 『천일의 유리1』과 『천일의 유리2』다. 


문득 생각하자니 윤의 책장에서 읽는 책의 주인공이 어쩌면 윤과 비슷한지, 그렇게 읽던 책에 메모를 해버렸다. 그래서 결국 그 집을 떠나면서 이 두 권을 책을 양해 없이 가져왔다. 그런데, 숱한 책 짐에도 없는 것을 보니, 누군가에게 그의 책을 빌려준 모양이다. 


1,000개의 시선 혹은 관점. 우화적인 너무나 우화적인 발상의 소설, 우화적이든 우회든 우의이든.. 그것은 지금 생각하면 기술적으로는 시발점은 영화 <감시자들>도 있지만, 상당 부분은 소년의 시선이고 관점이지만 1,000일의 1,000가지 관점이 에피소드인데 연결이 되어 한 편의 작품(소설)이 된다. 


빨간 우체통/윤재철


누구에게도

아직 부치지 못한

편지 한 통쯤은 있어

빨간 우체통 거기 서 있다


... (2연 생략) 


그래도 누구에게나

아직 받고 싶은

편지 한 통쯤은 있어

빨간 우체통 거기 서 있다. 


돌려줄 수도 돌려받을 수도 없게 된 이 책들, 그 주인공에게 조금 미안하고 화가 난다. 

지난해 봄 그 주인공이 떠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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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들의 사생활 - 이승우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7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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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칸느영화제)을 받았다. 축하한다. 며칠 전 집 뒷편의 그리 높지 않은 산에 올랐다가 중턱 전망대에서 항구 도시 이곳저곳을 바라보다가, 이곳에서 삼십 년 이상을 살다 이사갔는데, 그리워서 옛 보금자리 주변을 살피러 왔다는 부부를 만나 뜻밖의 도시의 내력에 대해 들었다. 여행 책자에는 없는 새로운 이야기들, 행운이었다.
마침 그날이 부처님 오신 날, 저녁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전망대 아래에서 들려, 보통 등산객들은 가지 않는 샛길을 따라 절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산기슭에 종려나무 몇 그루가 서 있는데, 꽃이 활짝 핀 상태다. 그런데 꽃이 황금색이다. 축하용 화환이건 조문용 화환이건 화환의 장식으로 종려나무 잎은 자주 사용되기에 익숙한데, 맘껏 개화한 꽃을 본 기억은 아마도 처음이었지 싶다. 다른 영화제의 그랑프리 황금사자상이나 그리스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황금양모피, 뭐 이런 식으로 '황금'을 종려나무 앞에 접두사처럼 붙인 것이려니 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식물들의 사생활』을 읽은 지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이승우 작가의 작품들은 거의 읽은 상태이고, 소장 도서들이라 당연히 있겠지, 싶어 찾아보지만 없다. 아마도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나 보다. 몇몇 장면은 떠오르는데, 정확히는 나무들로 변신하는 이야기, 필자에게는 익숙한 그리스-로마의 신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정도 아슴프레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아마도 그때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들에 푹 빠져 살던 때는 아니었다. 관련하여 어딘가에 쓴 글이 있는데 그것도 찾을 수가 없다. 확인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 급한 김에 eBOOK으로 주문해서 곧바로 읽기 시작했다. [미리보기]로 도입부는 이미 읽은 상태, 좀더 읽어나가니 옛 기억들(첫 만남의) 새록새록 재생되기 시작한다.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식물들도 이동을 한다. 『식물의 정신세계』(정신셰계사)에서 입증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 중에서 수긍이 가는 연구 결과이다. 그런데 이 책의 부제는 '식물도 생각한다'이다. 플루타르코스의 철학에세이 중에는 「동물들에게도 이성이 있지에 관하여」가 있다. 어쨌든 이 작품을 읽는데 기본 바탕은 정적인 식물이 가진 식물성, 동적인 동물이 가진 동물성의 대비 혹은 대조다. 능동성과 수동성의 대립과 갈등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처음 이 작품을 읽을 때의 감동은 많이 사라져 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나오는 여러 종류의 나무로 변신하는 이야기, 특히, 「월계수가 된 다프네」신화는 이 작품의 밑그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모티브일 뿐만 아니라, 나의 형의 <나무들의 변신 이야기>라는 기록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플라톤의 대화편들(34편 가량) 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 하나를 꼽으라면 『향연』인데, 거기 등장하는(대담자) 인물 중 하나인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주장하는 사랑론, 자웅동체설로 소설 속에는 직접 인용되면서 '변주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작품에는 고대 서양 고전들의 영향이랄까, 반영이랄 수 있는 모티브들이 이것 말고도 등장하는데, 동서양의 신화가 닮아 있으니 꼭 이렇게만 말할 수는 없다. 어쨌든 작품을 작품 자체로 읽어야 하는데, 자꾸만 그 배경이 떠올라 '감동'이 처음 같지는 않았다는 것.

그러므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다. 일단 『식물들의 사생활』을 읽은 독자라면, 앞서 언급한 이 작품에서도 직접 거론한 고전 두세 권쯤을 읽는 것으로 책읽기의 새로운 길을 내보시라는 것. 『변신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에 익숙한 독자라도(희랍어) 신명, 영웅이름, 지명들이 라틴어로 표기되기에 낯설 수 있다. 그래도 오비디우스의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기 때문에, 일단 펼친 책을 덮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앞서, 황금종려상 이야기로 시작한 데는 이유가 있다. 잘 알려졌듯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가 이 소설의 작가 이승우야 말로 한국 작가들 가운데 노벨문학상을 탄다면 가장 근접해 있다는 찬사를 보냈기 때문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런한 지에 대해서는 물음표를 찍지 않을 수 없었디. 이승우 작가에 대한 찬사와 기대는 서양인의 시각에서 노벨문학상과 같은 상의 수상자가 선정이 되기 마련이고, 그만큼 그들의 정신세계의 원형에 해당하는 신화나 고전들을 바탕에 깔고 새롭게 창조하는 작품일수록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아서 평할 수는 없지만,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뭔가를 건드린 작품인지가 관람 포인트가 될 것 같다.

4인 가족이 식탁에 앉아 만찬을 한다. 『식물들의 사생활』이 마무리되는 즈음이다. 여지껏 제각각 생활공간만 공유하던 구성원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는 대목이 나온다. 4인용 식탁(부부와 두 아들 형제)에 대한 이야기는 최근에 간행된 '세월호의 시간을 건너는 가족들의 육성기록'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창비, 2019년 4월)의 눈시울을 젖게 하는 모티브의 글을 떠올리게 한다. (4인용 식탁#1_55면/4인용 식탁#2)56면) 이안 감독의 오래된 대만 영화 <음식남녀>의 요리사인 아버지와 그 딸들을 떠올리기도 했는데, 가족소설로의 면모가 확인되는 지점이다. 4인용 식탁에 앉기 위해 그동안 우여곡절을 겪었구나, 마치 영화의 엔딩 크레딧 같은 장면이다. 작가의 최근 저작에서의 언급처럼 "그러나 음식은 오래 씹어야 제 맛이 나듯"(『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 작품도 느리게 읽기, 단숨에 읽었더라도 그 배경이 되는 콘텐츠들을 읽으면서 다시 읽으면 제 맛을 느낄 수 있으리라.

다만, 한 가지 필자만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읽을수록 화자인 나(기현)의 캐릭터가 좀 작위적이랄까, 그런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작품이 처음 선뵌 때가 2000년이란 점을 감안하면(그리스-로마 등 서양 고대 고전의 원전번역이 쏟아져나온 것은 그 이후이다) 저자의 성실한 독서에도 박수를 보낼 만하다. 이승우 장편소설 『식물들의 사생활』이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 007이라는 점도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흥미롭다. 영화 007시리즈는 다시 봐도 새롭고 재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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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우리들의 이야기 - 1980년 5월,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광주서석고등학교 제5회 동창회 엮음 / 심미안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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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껍아, 두껍아, 새 집 줄게 헌 집 다오' 목포 구도심, 국도1호선과 2호선의 기점임을 알리는 표지석 뒤로 일제강점기 시절 (구)일본영사관 건물이 서 있는데, 지금은 사적 제289호로 지정, 근대역사관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근대역사관 본관에 전시되어 있는 '결전' 식기. 우리 입장에서는 해방의 그날이 다가오던 무렵, 전쟁 무기를 만들기 위해 전국의 모든 쇠붙이를 징발해갔다. 놋그릇을 수탈하고 대신에  사기 밥그릇을 공급했는데, 주발에는 ‘결전(決戰)’이라는 글씨를 로고처럼 새겨놓았다. '두껍아, 두껍아' 살피다가 떠올린 동요 한 대목이다.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이 어느덧 39주기를 맞이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생각해보니 5.18 이전과 이후 무엇이 달라졌나 생각해보니 프로야구가 생겼고, 때가 되어 그랬는지 알 수 없으나 흑백TV 시대가 가고 컬러TV 시대가 열렸다는 것이다. <국풍81>이라는 듣보잡 축제를 아마도 컬러TV로 보았을 것이다. 야구광인 형님을 따라 멀리 시골 농촌마을에서 광주까지 가서 무등경기장에서 열리는 프로야구를 관전했던 기억이 있고, 오래지 않아 그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랬구나, 역사의 저 편으로 잊히기를 바라는, 세력들이 있었구나, '결전' 식기를 보다가 왜 이런 기억을 상기했는지 알 수 없다.

 

그랬구나, 역사의 저 편으로 잊히기를 바라는, 세력들이 있었구나,

39주기를 맞이하는 5월의 첫 날, 의미 있는 책 한 권이 세상에 나왔다. 한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인터뷰에 문득 저자 중 한 분이 등장했다. '편의대'라는 낯선 이름, 현역 군인들이 근무하는 군부대 이름이라는데 부마항쟁 때도 광주  5.18 때도 이들이 시위군중 속에서 이른바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미군의 정보원으로, 보안사 일원으로 당시 활동했다는 두 분의 증언도 폭풍 급이었지만, '편의대'라는 단어를 기억의 창고에 보관하게 된 일이야말로, 2019년 5월 광주의 특별한 일이 아닐까 싶다.

 

당시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서 공수부대가 집단 발포를 할 때 총상을 입은 사람, 시위대원으로 위장한 계엄군 ‘편의대’에 의해 고문을 받고 영창에 갇힌 사람, 전남도청을 지키다가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진압할 때 가까스로 탈출한 사람, 가두방송으로 유명한 전옥주 씨의 가족이 자취방 옆집에 살아 누나가 간첩혐의로 끌려가 조사를 받은 사람, 공수부대원에게 붙잡혀 전남대와 광주교도소에서 46일간 고초를 당한 사람---.

 

광주광역시 한 고등학교 5회 동창생들이 자신들이 체험한 5월 광주 이야기를 엮은 책,
『5.18, 우리들의 이야기-1980년 5월,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광주서석고등학교 제5회 동창회 지음, 심미안, 2019-05-01) 이야기다. 이 책은 광주서석고 제5회 동창회(회장 임영상)에서 1980년 5월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동기들의 5·18민주화운동 체험담을 기록한 것이다. 모두 12명으로 구성된 ‘5·18체험담출판준비위원회’는 한 사람이 각 30여 명의 동기들을 대상으로 2년여 동안 체험담을 수집, 정리했다.
준비위원 중 한 사람인 고재철 님(광주 전남공업고등학교 교사)의 <역사의 현장이 된 자취방>이 첫 번째 글인데, 누나와 여동생, 셋이서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였는데, 2층 옆방에 살던 부부 중 아저씨의 여동생이 가두방송으로 유명한 전옥주 씨였다는 것. 인터뷰에서 소개된 '편의대' 부대원의 활동을 증언하는 이야기도 그렇고, 시민군 트럭에서 검도를 가르치는(이 학교는 체육시간의 일부를 검도에 할애한다) 선생님이 타고 있어 조우했다는 얘기도 흥미롭다. 당시 광주서석고 3학년이던 졸업생 61명이 참여했다(아래 사진은 이 책의 뒷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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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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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다섯 시면 어김없이 수협공판장에서는 왁자지껄 경매시장이 펼쳐진다고 한다. 그렇고 그런 항구가 아니니까, 볼만할 것이다. 가까이에 있지만 아직 가보지는 못하였다. 후미진 어디쯤에서 소매도 가능은 하다는데, 낮에 지나다보니 소매를 금하는 문구가 있다. 그래도 '야매' 구입은 가능하다는 얘기다. 어쨌든 그러므로, 보다 가까이에 있는 □□시장에서 반(半)건조 생선을 비롯해 필요한 것은 구할 수 있다.
 

‘가격차이야 좀 있겠지, 그러니까 도매고 소매지’ 그런데 도·소매 시장이 너무 가까이에 있어 문제라면 문제이겠지‘
이사를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도 있고, 마땅히 밥을 해먹을 상황도 아니라서 한두 개씩 삶의 소품들을 사서 배치하는 동안 매식을 했다. 혼밥이 얼마나 어려운지, 가격도 그렇거니와, 아예 문전박대. 외로움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런데 이름이 중하(중간 크기의 새우)라던가, 가는 식당다 간장에 절인 그 반찬이 나오는 것이다. 수염과 머리를 뚝 떼어버리고 양념된 간장(게장 양념과 별 차이는 없는 듯)에 빠뜨리는 그런 반찬.
 

‘왜 가는 집마다 이것이 있지요,’ 하니 ‘얼마 전에 많이 잡혀서’,

싼값에 공급되었다는 얘기다. 사실 백반 하면 전라도 백반인데, 깔리는 반찬이 많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 단가를 생각하면 고민이 깊어진다. 많이 잡혀서 쌀 때 다량을 확보해서 말리거나(반건조) 절일 수 있다면, 그렇게 가격 저항을 이겨내면서 다양한 찬거리를 확보하는 것. 해서 나는 내가 만드는 첫 반찬으로 간장에 절이는 중하(간장새우)에 도전했다.

깐 바지락도 사가고, 가끔 반건조 생선도 한 묶음씩 사가는 나를 시장 입구의 할머니가 눈여겨보신 모양이다. 마침 중하가 적잖게 잡혔나 보다. 가는 집마다 특유의 플라스틱 바구니에 쌓여 있다. 기회다. 해서 그동안 간장게장(꽃게장은 아니다)을 서너 차례 사먹으면서 비축해준 게장국물을 떠올리고는 만 원어치 중하를 샀다. 하루 전 5천원어치를 사다가 삶아먹은 적이 있는데, 씻어서 데쳤더니 새우 수엽들이 엮어서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아, 그렇구나, 그래서 간장새우는 반 토막인 것이 밥상에 올랐던 것이구나. 해서 문득 사장 할머니에게 문의했다.

 

"요것들, 머리랑 수염 떼고 간장에 담가야지요,"

했더니 할머니 말씀, “아이고 잘도 해묵소, 어지간한 여자들보다 낫소! 요새 젊은 것들은 뭣이 뭔지도 모르고…….” 그나마 '주부'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칭찬으로 느꼈는데(사실 나는 어지간한 식재료에 대해서는 고급정보를 확보하고 있는, 이 분야의 일을 좀 했던 사람이다) 생각할수록 집이 가까이올수록,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시장 사장 할머니에게 이런 느낌을 얘기하면 이해하실까, 요리는 여자가 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그분에게…….”

 

주문한 책이 왔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1992년에 첫 발간된 양귀자의 개정판 소설이다. 읽다보니 책으로는 처음 읽는 것임을 알았다. 아마도 영화로 본 모양이다. 그때는 샐러리맨으로 정신없을 때이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중하 1만원어치를 구매하면서 받은 이상한 느낌을 사장 할머니에게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이것이 나의 리뷰다.

 

"나는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하나의 시작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시작했다. 그러므로 나는 반을 이루었다." -강민주의 노트에서(책 269면)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적용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사례가 될 수 있는 간단치 않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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