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쓰려는 이야기 제목은 일찌감치 정해져 있었다. '두 여자 이야기'. 『일리아스』 속 크뤼세이스와 브리세이스, 처지가 비슷한 듯 보이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간 두 여인에 대한 이야기. 역사만이 아니라 모든 글은 과거, 기원전 13세기(또는 12세기)에 있었다는 전쟁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례라고 하더라도 2019년 현재를, 그것도 우리나라 상황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기획한 두 여자 이야기의 현대판은 당분간 숙성이 필요할 것 같다. 지난 이야기를 하자.
'두 여자 이야기'는 당분간 숙성이 필요할 것
두 여인은 포로로 잡힌 상태로 한 사람은 그리스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에게, 다른 한 사람은 맹장 아킬레우스에게 배정된 '트로피 여인'인데, 유일한 공통점이다. 하지만 두 여인의 운명은 엇갈렸다. 크뤼세이스의 아버지 크뤼세스 노인은 아폴론 신을 섬기는 사제였고, 그리스연합군을 전멸 위기까지 몰아붙이면서 딸을 구출한다. 『일리아스』 는 이처럼 극적인 순간에서 '문득' 시작된다. 그런데 이런 상황 '때문에' 피해를 보는 쪽은 자신의 트로피 여인 브리세이스를 내주어야 하는 아킬레우스이다. 어쩌다 그리스연합군 내분의 도화선이 된 브리세이스의 입장에서 일련의 사태를 바라보자,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크뤼세이스와 브리세이스, 서사시 『일리아스』 에서 두 여인의 다른 점은 간명하다. 크뤼세이스에게는 배정된 대사가 한마디도 없다. 반면, 브리세이스는 대사가 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 왕의 두 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는 현장에 '있는 것으로' 설정되었을 뿐 한마디의 대사가 없다. 이처럼 『일리아스』 에서 크뤼세이스는 그냥 거기 있는 사람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브리세이스는 다르다. 『일리아스』 19권 파트로클로스가 죽자 아킬레우스는 복수를 위해 아가멤논의 화해를 받아들이고, 앞서 협상이 결렬될 때(9권) 제시한 선물이 아킬레우스의 막사에 도착하는데, 그 가운데에는 브리세이스가 있다(마치 물건처럼 취급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아킬레우스의 막사로 돌아온 브리세이스는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마주하고는 통곡하는데, 거의 스무 번 가까이 『일리아스』 를 읽었지만, 그때마다 '이거 뭐지?'하고 물음표를 표기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브리세이스의 발언이다.
"파트로클로스여, 가련한 내 마음에 누구보다도 소중하던
분이여! 내가 이 막사를 떠날 때는 그대가 살아 있었건만
이제 다시 돌아와 보니, 백성들의 지배자여! 그대는 이미
죽어 있구려. 이렇듯 내게는 불행에 불행이 겹치는군요.
나는 아버지와 존경스런 어머니께서 내게 주신 남편이
우리 도시 앞에서 날카로운 청동에 찢기는 것을 보았고,
같은 어머니께서 낳아주신 사랑하는 세 오라비들도
마찬가지예요. 그들도 모두 파멸의 날을 맞았지요.
하지만 그대는 날랜 아킬레우스가 내 남편을 죽이고
신과 같은 뮈네스의 도시를 함락했을 때 나를 울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나를 신과 같은 아킬레우스의 결혼한 아내로
만들고 또 나를 그대들의 함선들에 싣고 프티아로 데려가서
뮈르미도네스족 사이에서 결혼식을 올려주겠노라고 약속했지요.
그대가 늘 친절했기에 나는 그대의 죽음이 한없이 슬퍼요."
-『일리아스』19권 287~300행(천병희, 숲, 2015년 6월, 개정판)
슬프다, 그대의 발언이, 그 상황이. 그리스연합군의 보급투쟁을 진두지휘한 사람은 아킬레우스였다. 아무리 당시의 해적행위가 보급투쟁이고 경제활동으로 인정되는 때라고 하더라도 브리세이스에게는 철천지 원수인 아킬레우스다. 그런데, 파트로클로스가 브리세이스에게 그의 아내가 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것. 더욱 심각한 것은 사건 당시 브리세이스는 이미 결혼한 여자였다. 그리고 세 오라비도 아킬레우스에게 죽임을 당했고, 아킬레우스의 '경제활동'으로 가계 전체가 무너진 상태다. 더구나 아킬레우스는 이미 결혼을 했고, 아들이 있으며, 이 친구가 트로이아 전쟁을 마무리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결혼식' 얘기까지 나온다. 공약(公約)이었을까, 공약(空約)이었을까? 그리고 그러한 희망을 준 파트로클로스의 부재를 브리세이스는 많이 슬퍼한다. 순수한 의미의 파트로클로스에 대한 애도가 없지 않지만 자신의 희망이 물거품이 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두드러진다. 사실, 살아 있는 사람은 가까운 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 망자가 다른 차원의 세계(하늘나라)로 간다고 보기에, 당면한 자기 소망을 해결해주기를 장례 과정에서 '기도하듯' 바란다(이상하지만, 이것은 수 차례의 조문 과정에서 관찰한 결과에 따른 의견이다). 이러한 과정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브리세이스의 심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것은 나의 오랜 숙제였다.
『일리아스』 를 읽을 때마다 찍는 물음표 '이거 뭐지?'
작가 양귀자의 유명한 소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개정판(쓰다, 2019-04-20, 초판출간 1992년)이 출간되었다. 젊은 여성이 인기 남자배우를 납치해서 감금하고 조종하는 이 소설은 발간 직후부터 독자와 평단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양귀자의 이 장편소설은 1992년에 초판이 나오자마자 페미니즘 논란과 함께 화제가 되었고, 그해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여성을 억압하는 현실을 고스란히 뒤집어 학대당하고 조련당하는 남성을 보여주는, 앞선 페미니즘 소설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공격적인 방법이 화제가 되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 불평등 문제를 제기하면서 처음부터 소설의 흡인력은 최대치로 고조되었다. 문제는 스티븐 킹의 소설 『미저리』에서처럼 처음부터는 아니나, 여주인공 강민주가 인질로 삼은 백승하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 이 소설은 1994년에 영화로 제작·개봉되어 '선전'을 했다. 27세의 강민주는 최진실이 당대의 톱스타이자 여성들의 우상인 백승하는 임성민이 연기했다. 두 분다 고인이 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어쨌든 전세계적인 흐름인 미투현상를 계기로 우리의 페미니즘 논의도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상태인데, 이 소설은 이른바 스톡홀름 증후군을 엿볼 수 있는 상황을 포함하고 있어, 다시 읽게 된다.
우리의 페미니즘 논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상태
1973년 스웨덴의 스톡홀름, 가장 큰 은행에서 전과자 두 명이 여자 세 명과 남자 한 명을 인질로 잡는 사건이 발생한다. 인질범은 인질의 목숨을 위협하는 동시에 친절을 베풀기도 했다. 긴 인질극이 진행되는 동안 인질은 인질범과 교김하고 감정적 유대감을 쌓는다. 급기야 인질은 자신을 구하려는 경찰을 적으로 돌리고, 인질범을 안정감을 주는 친구라고 느낀다. 이렇게 인질과 인질범이 서로 유대감을 느끼는 이상한 현상은 다른 사례에서도 관찰되었고, '스톡홀름 신드롬'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브리세이스의 상태를 어떻게 봐야 하나, 오랜 고민을 '스톡홀름 신드롬'과 연관하여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상은 최근에 출간된 한 번역서의 출판사제공 책 소개를 다듬은 것이다. 스톡홀름 증후군(신드롬) 이론으로 남성 지배 사회와 여자의 인질심리를 파헤치는 책, 『여자는 인질이다』(디 그레이엄,에드나 롤링스,로버타 릭스비 지음/ 유혜담 옮김/ 열다북스, 2019-03-15) 얘기다. 페미니즘과 관련해서 고대 그리스 고전 중에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만한 단골 소재는 없을 것이다. 페니미즘 시각에서 비극 한 편에 대한 재해석이 열렬히 이루어졌고, 상당한 연구 성과를 내놓았으며,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여자는 인질이다』 출간, '스톡홀름 신드롬'의 최초 사례는?
그런데 앞서 인용한 브리세이스의 발언(태도)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것을 일종의 '스톡홀름 신드롬'으로 봐야 하는가, 그렇다면 참 안타깝고 화가 난다. 기원후 2019년에 말이다. '트로피 아내'란 말(몇 년 전 드라마에 등장하기도 했다) 자체도 문제적이지만 아직도 이러한 성의 불평등과 불균형이 전제되어 있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주문한 두 권의 책,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개정판과 『여자는 인질이다』를 주문하고 기다리다가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