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eBook] 번역청을 설립하라 - 한 인문학자의 역사적 알리바이
박상익 지음 / 유유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성적으로 일본을 경제에서 이미 따라잡았다, 얼마 남지 않았다 하면서도, 축구는 말할 것도 없고 한-일전이라면 무조건 흥행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가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분야가 있다면, 번역 분야. 자국어 번역콘테츠 생산 결과와 시스템일 것이다. 이것은 좋은 번역입니까, 라고 필자에게 묻는다면 '그런 것 같아요!' 정도이지 해당 언어에 정통한 것도 아니고, 그 우리말 번역을 평가할 위치에 있지 않다. 우리말 번역 콘텐츠를 소비하는 입장에 있지 생산자는 아니라는 것. 생산자이면서 소비자라면 이런 질문에 나름의 '견해'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번역 환경이 놀라울 정도로 척박하다는 것은 뉴스를 통해서든, 이런저런 강연 등을 통해서 실감한다. 이 경우,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한국과 일본의 번역환경을 비교다.

 

한글이 아무리 과학적인 문자이면 무엇해, 세계는 넓고 숱한 외국어 콘텐츠가 넘쳐 나는데 그것을 번역한 우리말 콘텐츠는 턱없이 부족하고, 관련 분야 전문가들이 그것들을 번역할 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음으로써 이런 빈곤함은 더욱 깊어간다. 박상익 선생은 <번역청을 설립하라 - 한 인문학자의 역사적 알리바이>에서 12년 만에 다시금 우리  번역환경 개선을 역설하고 있다. 청와대홈페이지 국민청원도 하셨다고 하는데, 그게 이 책이 출간된 2018년이니, 4년이 또 흐른 지금은 좀 달라졌을까? 지난 대선에서 유력 후보가 소확행(그러나 번역은 기간산업이다) 공약으로 번역청을 설립하겠다고 했다. 19대 대선은 촛불혁명으로 갑자기 진행되어 공약에 반영할 수도 없었다고. 이번 당선자의 경우, 인문학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고 폄하 발언까지 해서, 비판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박상익 선생은 번역 콘텐츠는 말할 것도 없고, 번역 환경이 너무도 대조적인 우리 현실을 다음과 같은 말로 비유한다. 근래에 직접 촬영한 사진과 에세이를 엮는 글쓰기를 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 듯 하여 더욱 다가오는 대목이다. 


"고가의 최신형 DSLR 카메라(한글)을 들고 폼 잡고 거들먹거리면서 막상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찍을 줄 모르는 얼치기 아마추어 사진사,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이에 비해 일본은 다 낡아 빠진 필름카메라(가나)로 멋진 작품을 뽑아내는 노련한 사진가의 모습이다. '번역 왕국' 일본의 현주소다." -<뛰어난 과학성, 빈약한 콘텐츠>


명칭이 어떻든 국가 주도의 번역 전담기구가 있어야 한다. 시장에만 캍겨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 이유는 그 시장에 있다. 1)한국의 인구는 남한 기준으로 고작 5,000만 명이다. 일본 인구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2)게다가 국민 1인당 독서율 역시 일본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경제협력개발기수OECD 회원국 중 꼴찌 수준이다. 이런 어려움은 번역서 출판만이 아니라 우리 출판시장 전체에 산재해 있다. 국민1인당 독서율이야, 나라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반드시 "한글로 번역되어야만 하는",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번역가들이 기본 생활을 보장 받고, 실적으로(번역물 자체가 석사학위가 되고 박사학위를 받게 하는 등) 인정받을 수 있어야, 좋은 번역물을 생산할 수 있다. 

끝으로 인용하는 소개하는 에피소드는 부럽기도 하고 일본을 너무 쉽게 보지 않나 하여 두렵기도 하며, 문화선진국 운운하는 우리의 지금을 생각하면 부끄럽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일본 교토산업대학교의 마스카와 도시히데 교수는 "영어를 못해 물리학을 택했다'라고 농담할 만큼 영어와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다. 대학원 시험 때 지도교수가 그의 외국어 시험을 면제해 줄 정도였고, 평생 외국에 나가 본 적이 없어 여권도 없었다. 하지만 일본어밖에 할 줄 몰랐던 그는 2008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스웨덴에서 열린 노벨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는 "아이 캰 놋토 스피쿠 잉구릿슈(I cannot speak English)"고 입을 뗀 후 일본말로 강연을 했다. 일본어만으로도 세계 최고 수준의 학문적 성취가 가능했음을 뜻한다." -<모국어만으로도 노벨상을 타는 일본>에서


1)번역은 자국어의 흥망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한국 수준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2)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한글만으로도 세계 최고 수준의 지적 성취가 가능할까? 물론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림도 없다고 진단한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한국어 콘텐츠가 턱없이 부실하기 때문이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들의 계보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헤시오도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생존은 늘 힘겹고 비참하다. 인간에게도 그렇다. 이를 전제로 헤시오도스는 우리에게 교훈과 함께 경고한다. 인간들은 땀 흘려 농사짓고 배를 타고 장사하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렇게 되었다. 그 어느 날부터? '그 어느 날'에 대한 이야기, ([알라딘서재]판도라의 항아리와 노동의 탄생1 (aladin.co.kr)에 이어지는) 2부다 


판도라는 왜 항아리 뚜껑을 열었을까?

헤시오도스의 「일과 날」에 등장하는 '판도라의 항아리'에서 튀어나온 것은 인간의 몸(육체)를 괴롭히는 온갖 질병들이었다. 또한 인간의 마음(정신)을 괴롭히는 불안, 걱정, 질투, 원망, 복수, 집착 등등이 줄지어 나왔다. 그리고 항아리에는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모를 희망만이 남았다. 그날 이후 인간은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했다. 노동하는 삶, 일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는 노동이 시작된 것이다. 일의 탄생이다. 

그 과정에서 그 옛날의 행복한 기억마저 잊히지 시작했다. 이전까지 인간 종족은 '지상에서 재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힘겨운 노고도 없이, 인간들에게 죽음의 운명을 가져다주는 병(病)도 모르고 살았던 것'. '희망'에 대한 해석도 분분한데, 희망만이 항아리에 남았다는 것은, 희망이 우리한테서 멀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며 고통을 완화해주는 진정제 노릇을 한다는 것, 옮긴이(천병희)의 주석이다.


없다면? 늘 우리 곁에서 고통을 완화해주는 진정제, 희망

그렇다면 이 에피소드 주인공들은 저마다 어떤 실수를 했을까?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의 죄를 응징하기 위해, 그가 아끼는(챙기는) 인간들에게 위해를 가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 앞에서 늘 약자이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의 가장 아픈 곳을 저격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사전에 당부하였으나, (그런 줄 아는) 동생을 끝까지 챙기지 못하였다. '에피메테우스'는 형처럼 슬기롭지는 않으나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행동하고’ '나중에 생각하는' 스타일이 다를 뿐이다. 영화 어벤저스 시리즈를 보라(굳이 해당 편을 찾을 필요는 없을 듯하고), 아이언맨은 프로메테우스 스타일의 전형이다. 동맹에 참여하여 거대악을 물리치는 부류 중에는 일단 공격하고 보는 에피메테우스 스타일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두 유형은 상보(상호보완) 관계다. '사전에 생각하는' 스타일이 가진 신중함은 실수를 줄인다. 그러나 실행하기 전에 너무 고민하다가 결정적인 기회(의 시간 '카이로스')을 놓칠 수 있다. 보수와 진보라는 것도 그렇다. 보수가 ‘신중’하게 기존 흐름에서 점진적인 변화를 기획한다면, 진보는 개혁이라는 목표를 위해 먼저 ‘저지르는’ 측면이 있다. 두 형제의 이름에 담긴 의미다. 곧 협동(協同)하며 살라. 그렇다면 판도라는? 판도라는 왜 항아리의 뚜껑을 열었을까? 'WHY?'에 알맞은 대답이 <일과 날>에는 나오지 않는다. 정황상 '호기심(好奇心)' 때문이다.


'사전에 생각하는' 보수, 실행을 앞세우는 진보

헤시오도스는 기원전 700년경에 활동했다. 기원전 2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아테나이 출신 대학자 아폴로도로스의 그리스 신화(천병희,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에 '판도라'라는 단 한 번 등장한다. 프로메테우스에게는 데우칼리온이란 아들이 있다. 데우칼리온은 판도라가 에피메테우스에게 낳아준 딸 퓌르라와 결혼한다. 제우스가 대홍수를 일으켜 청동 종족을 멸하고자 할 때, 이들 부부는 프로메테우스의 조언에 따라 방주를 만들어 살아남는다.(『그리스 신화』 1.7.2.) 헤시오도스보다 900년쯤 후에 집필된 아폴로도로스의 저작에서 판도라는 에피메테우스의 아내, 퓌르라의 어머니 정도로 '1)신들이 만든 2)최초의 여인'이지만 문득 등장할 뿐 「일과 날」에서와 같은 디테일은 없다. 제우스가 일으킨 대홍수는 인류에게 재난이다. 그런데, 이 재난을 예측하고 대비하기란 쉽지 않다. 두 형제의 아들과 딸답게 아버지들에게서 물려받은 ‘신중함’과 ‘실행력’ 덕분에 살아남아, 새로운 시대 인류의 기원이 된 것은 아닐까.  


대홍수 생존자, 데우칼리온과 퓌르라는 부부 이전에 사촌간

한편 소개하였듯 제우스의 지시에 따라 헤르메스는 판도라의 가슴속에 '거짓말과 알랑대는 말과 교활한 기질'을 심는다. 그녀가 항아리를 연 것은 세 가지 기질 가운데 어느 것 때문일까? 그 마음을 '호기심'이라고 해석하는데, 굳이 하나를 선택하면 '교활한 기질'이지 싶다. 그런데, 「일과 날」에서 제우스가 헤르메스에게 명령하여, "그녀 안에 개의 마음과 교활한 기질을 넣게 하셨소."(68행)와 같은 언급이 있다. 개의 마음과 호기심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살기 위해 먹는지 먹기 위해서 사는지, 하루 두세 끼니 식당에 앉아 메뉴를 고를 때마다 하는 생각이다. '먹고살려고'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이는 또 다른 차원이다.


호기심 ‘ 때문에’ 호기심 ‘덕분에’, 날마다 노동하는 인간

판도라의 항아리(인간의 것으로)에 끝까지 남아 있었다는 '희망'은 인간이 오늘날' 날마다 노동하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노동하는 인간으로 살아가자, 노동의 신성함이 「일과 날」의 주제라서 더욱 그렇다. 비록 필멸의 인간이지만 "신들과 한곳에서 태어나" 신적인 혜택을 누리던 인간들이 '추락하여' 오늘날까지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으로 살게 된 것은 판도라의 '호기심'에서 ‘때문’이고, 노동의 신성함을 고려하면 그 호기심 ‘덕분’이다. 제우스의 기획으로 판도라의 마음에 심어진 것인지, 그와 별도로 인간 본성 중 하나가 발현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판도라의 '호기심'은 희망을 발견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희망이 때로는 ‘희망 고문’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지. 어쨌든 우리는 오늘도 일을 하고 있고, 일을 해야 한다. 


맺으며, 관련하여, 『이솝 우화』 123/358 에피소드. <123.  제우스와 좋은 것들이 든 항아리> 

”제우스는 좋은 것들을 모두 항아리에 담은 뒤 어떤 사람에게 간수하라고 맡겼다. 

호기심 많은 그 사람은 항아리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고 싶어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좋은 것들이 모두 신들에게로 날아가버렸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imeroad 2022-03-28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어벤저스 시리즈를 보라(굳이 해당 편을 찾을 필요는 없을 듯하고), 아이언맨은 프로메테우스 스타일의 전형이다. 동맹에 참여하여 거대악을 물리치는 부류 중에는 일단 공격하고 보는 에피메테우스 스타일이 등장한다.
 
신들의 계보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헤시오도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생존은 늘 힘겹고 비참하다. 인간에게도 그렇다. 이를 전제로 헤시오도스는 우리에게 교훈과 함께 경고한다. 인간들은 땀 흘려 농사짓고 배를 타고 장사하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렇게 되었다. 그 어느 날부터? '그 어느 날'에 대한 이야기다.

“헤시오도스는 그 원인을 인간들에 대한 신들의 시기심에서 찾는다. 인간들은 분수 이상으로 잘살고 싶어 하고, 그래서 신들이 그들의 삶을 고단하게 만든다는 것. 신들은 인간적 존재와 신적 존재의 차이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인간들이 운명을 개선할 기회가 생기면 신들은 그들에게 새로운 고통을 부과하여 그 ‘차이’를 유지한다. 이런 경향을 헤시오도스는 인류의 옹호자인 프로메테우스 이야기에서 발견한다. 

신들과 인간들이 재물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을 속여야 했다. 때문에 신들은 화가 나서 양식을 감춰버렸고, 인간들은 더욱 힘들게 양식을 구해야만 했다. 제우스는 불도 감춰버렸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훔쳐 지상으로 내려와 인간들이 고도의 문명을 이룩할 수 있게 해준다. 그 벌로 제우스는 판도라라는 가장 뻔뻔스럽고 교활하고 멋있게 치장한 아름다운 여자와 함께 갖은 악(惡)을 인간들에게 보낸다(<신들의 계보> 591~612행 참조).“ _『신들의 계보』 (천병희 옮김), <헤시오도스 작품의 이해> 중 정리.


신들의 시기심 발동, 인간 존재와 차이 유지하고 싶어

제우스가 이처럼 여자를 매력 있게 만든 것은 인간들이 "모두 자신의 재앙을 껴안으며 마음속으로 기뻐하게"(「일과 날」 58행) 하기 위해서였다. 저자는 「일과 날」에서 프로메테우스 관련 기술을, 90행까지는 「신들의 계보」를 따르는데, 이후부터는 독창적으로 전개한다.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인데, 정확한 번역은 '판도라의 항아리'다. 프로메테우스는 불(火光)을 훔쳐 인간들에게 선물하고 그 응징으로 제우스가 인간들에게 보낸 재앙이다. 이름난 절름발이 신(헤파이스토스)이 제우스의 계획에 따라 '얌전한 처녀와도 같은 것'을 흙으로 빚은 것. 그런데 「신들의 계보」에서는 '얌전한 처녀와도 같은 것'이라고 할 뿐 이름은 없다. '판도라'라는 이름은 「일과 날」(47~105행)에서야 등장한다. 판도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일과 날」은 자세하게 기술한다. 제우스의 명에 따라 헤파이스토스는 곧바로 '정숙한 처녀를 닮은 것을 흙에서 빚어냈고'(71행) 아테네는 그녀에게 허리띠를 두르며 치장해준다 등등.


'얌전한 처녀와도 같은 것'(신들의 계보)은 판도라(일과 날)

"……그러나 그녀의 가슴속에 아르고스의 살해자인 심부름꾼은/ 거짓말과 알랑대는 말과 교활한 기질을 만들었소./ 요란하게 천둥 치시는 제우스의 뜻에 따라, 신들의 전령은/ 안에다 목소리를 넣고는 이 여자를 판도라라고 이름 지었으니/ 올륌포스의 집들에 사시는 모든 신들께서 빵을 먹고 사는/ 인간들에게 고통이 되도록 그녀에게 선물을 주셨던 것이오." -「일과 날」 77~82행

판도라가 신들이 인간(들)에게 준 선물이라면 그 판도라, ‘그녀에게 선물을’ 주었다는 것(82행). 따라서 선물의 주인은 판도라이므로 판도라가 개봉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녀에게 준 선물’이 그녀에게 부여한 여러 권능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어쨌든 제우스가 보낸 선물은 '상자'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항아리(pithos), '판도라의 항아리'(천병희의 번역)다. 판도라는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의 아내가 된다. 제우스의 선물을 수령한 이가 에피메테우스다. 그의 형 프로메테우스는 지혜롭기에 사전에 제우스의 의중을 간파하고 어떤 선물도 받지 말라 당부하였다. 프로메테우스는 그 이름에 ‘사전에 생각하는 자’라는 의미가 답겨 있기 때문이다. 그런 형과는 대조적으로 동생은 '나중에 생각하는 사람(에피메테우스)'이었다. 재앙을 당한 뒤에야 그런 줄 알게 되는 운명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


'상자'가 아니라 항아리(pithos), '판도라의 항아리'다.

이들 형제의 출생(「신들의 계보」 511행 전후 정리)은 이렇다. 복사뼈가 예쁜 오케아노스의 딸 클뤼메네와 이아페토스 사이에서 아틀라스(1,하늘을 떠받들고 있는)가 태어났다. 클뤼메네는 또한 거만한 메노이티오스와 '꾀 많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프로메테우스(2-1)와 '얼빠진 에피메테우스를'(2-2) 낳았다. 

복사뼈가 예쁜 오케아노스의 딸 클뤼메네 & 이아페토스→아틀라스(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클뤼메네 & 거만한 메노이티오스→프로메테우스(사전에 생각하는), 에피메테우스(사후에 생각하는)

에피메테우스가 빵을 먹고 사는 인간들에게 끼친 최대의 재앙은 제우스의 선물, 판도라를 아내로 받아들였다.(<신들의 계보> 507행~514행) '머리가 잘 돌아가는' 프로메테우스가 속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제우스는 '얼빠진' 에피메테우스라는 틈새를 공략한다. 판도라는 '호기심'이 많았다. 본래 인간이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처럼 판도라는 인간이 된 것이고, 그 항아리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해서 애를 태웠다. 집안 곳곳을 뒤져 항아리를 찾은 그녀는 마침내, 뚜껑을 열고야 만다.


"그러나 여자가 두 손으로 항아리의 큰 뚜껑을 들어 올려 그런 것들을/ 모두 내보내니, 인간들에게 그녀는 큰 근심을 안겨주었던 것이오./ 오직 희망만이 거기 부술 수 없는 집 안에, 항아리의 가장자리 아래 남고 밖으로 날아가지 않았는데,/ 그러기 전에 여자가 항아리의 뚜껑을 도로 놓았기 때문이오." -「일과 날」 94~98행


이와 관련하여 『이솝우화』 358편 중 제일 첫 번째 에피소드 <001.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를 떠올리게 된다. 사람들에게 좋은 일은 자주 생기지 않지만 나쁜 일은 날마다 일어나는 이유가 뭘까, 에 대한 해석이다. 


”좋은 것들은 허약한지라 나쁜 것들에 쫓겨 하늘로 올라갔다. 그러자 좋은 것들이 어떻게 해야 사람들에게 갈 수 있겠는지 제우스에게 물었다. 제우스가 좋은 것들에게 이르기를, 사람들에게 다가가되 한꺼번에 몰려가지 말고 하나씩 가라고 했다. 그리하여 나쁜 것들은 가까이 사는 까닭에 늘 사람들을 공격하지만, 좋은 것들은 하늘에서 하나씩 내려와야 하기 때문에 드문드문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이다.“ 


판도라(인간들이) 어떤 이유로, 문제의 항아리를 가끔 열 때만, 인간들에게는 좋은 일이 가끔 생긴다는 것일까? 호기심에 따른 결과는 동전의 양면처럼 긍정과 부정이 있는데,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을 가지고 호기심이 발현되어야만 좋은 결과도 낼 수 있다는 것일까?  


<판도라의 항아리와 노동의 탄생2>로 이어짐. 

[알라딘서재]판도라의 항아리와 노동의 탄생2 (aladin.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플라톤전집 세트 - 전7권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처럼 온라인서점에 왔다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의 플라톤전집 '세트'가 나왔음을 알았다. 지난 4월 하순이던가, <플라톤전집2>와 <플라톤 전집7> 간행으로 사실상 플라톤전집이 완역(완간)되었고, 주요 일간지들에 실린 인터뷰를 읽고 소개한 기억에 있어 반가웠다. 하지만 전7권이나 되는 전집 세트가 발간되기까지 시일이 좀 걸릴 것이라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세트 완간이 이뤄졌다. 그리고 문득, 앞서 기술한 경지정리가 한창인 겨울 들판의 논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전체가 신규번역이거나(전집7), 수록된 8편 중 3편(에우튀프론/에우튀데모스/메넥세노스)이 신규번역인 전집2는 큰 고민없이 전집의 일부로 펴낼 수 있었으리라.

그런데, 2012년 <소크라테스의 변론>과 <향연> <파이돈> 등을 묶은 플라톤 대화편 첫 권을 출간한(플라톤전집1에 해당) 이후 신규 번역원고가 들어올 때마다 몇 편씩 묶어 간행된 천병희의 플라톤 대화편 단행본이 한두 권이 아니다. 거기다 양장본들이니 재고 부담도(반양장에 비해) 클 수밖에 없다. 완역을 했고, 마지막 번역까지 책으로 간행되어 플라톤전집을 완간된 것은 사실이지만 전집 '세트'로 단장하는 일은 물심양면으로 겨울논들의 경지정리 못지 않은, 또 나름대로의 고민을 안은 '사업'이지 않았을까? 여느 때보다 출판시장이 위축된 사정을 감안하면 물심양면 더욱 그렇다. 천병희 선생의 플라톤 대화편들이 간행될 때마다 빠짐없이 구입해서 읽은 필자로서 '전집 세트' 제작 과정을 복기(復棋)하듯 살피는 것이다.

생각보다 일찍 전집 세트가 출간된 사실이 반가우면서도 고민의 흔적을 엿본다. 물론 기존 독자들은 억울함이 없지 않다. 새롭게 장정된 전집을 읽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간 어렵게만 느끼던 플라톤의 대화편들 상당수를 천병희 선생님 덕분에, 출판사의 끊임없는 투자 덕분에 읽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다. 이제 새롭게 플라톤의 세계에 진입하는 한국어 독자들에게 전집 세트 발간은 큰 선물이 아닐 수 없다. 독서의 모든 시작과 끝은 텍스트 자체의 독해(와 해독)에 있다. 신비평이 지향한 작품 자체에 집중하시오, 와는 다른 의미이지만, 텍스트 자체를 읽으면서 그 행간의 의미까지 읽을 수 있다면, 번역서에서 더 바랄 것이 없으리라. <한겨레>인가 완간기념 인터뷰에서 “끝까지 읽도록 쉽게 번역하는데 공을 많이 들였죠.”(기사 제목)라고 번역가가 밝혔듯이, 천병희의 번역이 난해하기로 소문난 플라톤과 한국어 독자들이 친해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 기대한다.


얘기가 길어지고 있다. 다시 한 번 플라톤전집이 완역되어 세트로 제작된 일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주머니가 헐거운 독자들, 특히 청년들에게는 부담스럽지 않을까? 무엇보다 책의 장정이 고급스러워지고 두꺼워지면, 가격만이 아니라 혹시라도 있을 오류를 수정하거나, 표현을 더 다듬는 일이 더뎌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테아이테토스>나 <향연>과 같이 반양장으로 저렴한 가격에 플라톤의 대화편들의 낱권들을 펴내는 일, 이 출판사의 푸른시원 시리즈도 독자들의 의견을 반영해 계속 나왔으면 좋을 듯하다. 낱권들의 쇄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보다 매끄러운 번역으로 수정하는 일이 계속되고, 전집의 낱권들이 쇄를 거듭할 때에 반영되면 좋지 않을까, 반가움에 이런저런 생각을 보탠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2-03-22 0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당신에게, 섬 - 강제윤 시인과 함께하는 꽃보다 아름다운 우리 섬 여행
강제윤 지음 / 꿈의지도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당신에게, 섬』을 읽기 전에 당신은 독자들, 강제윤 시인의 가이드를 받아 섬을 여행하게 될 사람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하루에 몇 꼭지씩 그 섬들을 여행하듯 읽기를 다 마친 지금 내게 제호는 <섬, 당신에게>로 다가온다. 찾아간 섬 하나하나와 저자가 만나 나누는 대화, 다녀와 '인격'이 된 섬에게 보내는 편지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01."다리가 생긴 섬들은 육지와 교통이 편리해졌지만 대신 섬의 정체성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금오도 주민들은 육지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금오도를 섬으로 남겨 놓았다. 초창기에는 섬 주민들 대다수가 연육교 공사에 찬성했지만 섬의 정체성을 잃고 몰락한 타 지역의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끝내 섬으로 남기로 결정한 것이다. 참으로 고맙고 아름다운 선택이었다. 그 결정 덕에 금오도는 섬의 향취를 찾아오는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62면(금오도_전남 여수)

 

#02."실상 섬에 다리가 놔져서 주민들에게 이득이 되는 것은 많지 않다. 육지와 소통이 쉬워지는 것 말고는. 대문 없이 살던 사람들도 늘 도둑 걱정을 해야 한다. 섬에 관광객이 많이 올 거라고 선전하지만 대부분은 차로 한 바퀴 휙 돌아보고 나간다. 섬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지나가는 곳이 되어버린다. 처음에는 섬사람들도 다리가 생기면 좋아질 거라는 기대를 가졌었지만 직접 겪어보고야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다리가 놔지면 섬은 그저 육지의 또 다른 오지로 편입되는 것뿐이다. 그래서 섬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다리보다 섬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기반환경의 조성이다."  -78면(시산도詩山島_전남 고흥)

 

#03."사람이 섬으로 와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풍경일까, 휴식일까. 싱싱한 해산물들일까. 얻을 수 있다면 무엇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 하지만 이들은 섬에 오는 누구나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는 것들이지 오롯한 자신의 것은 아니다. 누구도 얻지 못하고 나만이 온전하게 얻어갈 수 있는 오직 '한 생각'뿐이다. 새로운 '한 생각'을 얻는 일이야말로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던 '한 생각'을 떨칠 수 있는 지름길아다. 섬에서는 걷기가 그것을 가능케 한다. 자동차의 방해 없이 걸음에 몸 맡기고 온전히 걸을 때 생각은 자유를 얻는다. (온전히 걷기) 그것은 잠들어 있는 생각을 깨우고 사유의 폭을 확장시키는 정신의 운동이기도 하다." -110면(연화도_경남 통영)

 

나만이 온전하게 얻어갈 수 있는 오직 '한 생각'을 만나는 섬
곳곳에는 [인용3]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자신만의 '한 생각'들이 담겨 있는데, 인용하고 싶은 구절들이 많다. 좋은 글(책)은 읽는 이로 하여금 새로운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인용1]과 [인용2]는 섬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섬이 섬인 이유를 깨닫고 섬이 섬으로 남기를 랐다는 것은 그 자체로 아릅답다. [인용1,2]와 같은 지킴이 없이 [인용3]과 같은 섬이 여행자에게 주는 선물을 있을 수 없다. 물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뱃길도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상에 난 길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섬에는 마침표가 있다. 육지도 예외는 아니겠지만, 자그마한 섬들에는 한 컷의 사진, 한 편의 시가 그렇듯이 깨달음의 순간이 반드시 그리고 자주 온다고 해야 할까? 시와 사진이 그렇듯이 섬들은 시인 강제윤을 만나면서 '순간의 꽃'의 범주에 포함된다.

 

시와 사진처럼 한국의 섬들은 시인을 만나 '순간의 꽃'이 된다
그리고 섬에는 사람들이 산다. 그것도 연식이 오래된 승용차와 같은 사람들,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섬들에 살고 있다. 문득 메모를 하다가 '연식'이란 단어를 검색한다. 두 가지 한자가 다른 의미가 눈에 들어온다. 먼저 연식(年式)이다. '기계류, 특히 자동차를 만든 해에 따라 구분하는 방식'이다. 흔히 '연식이 오래된'이라고 비유할 때 쓰인다. 그런데 연식(年食)이 있다. '사람이나 생물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온 해의 수효'다. 이 경우는 '나이가 많은'과 같은 의미로 곧바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당신에게, 섬』에는 섬에서 살아가는 연식이 많은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섬에 사는 당신들의 이야기,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일 수도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