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화리뷰로 쓴 것인데, 여러 책과의 관련성을 고려하여 페이퍼로 작성한 것입니다.  

호/불호가 눈에 띄게 엇갈리는 영화인 것은 분명하다. 모든 작품에 대한 평가가 안고 있는 어떤 틀, 그러니까 그 작품의 성과와 한계를 같이 언급하면서 알맞은 수위를 유지하는 언론매체의 평가-몇몇 리뷰를 읽었지만-에서는 얻을 것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정치적'이기도 하고 어쩔수없이 적절한 '예우'와 우회적인 비판 정도에 머물고 있으니까,

악마를 보았다, 내게는 악마가 보이지 않았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영화 제목은 악마를 보았다, 라고 하는데 내게는 악마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캐릭터)들의 어떤 연기에서도 악마-에 대한 정의가 선행되어야 하겠으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에, 피시방 컴퓨터 앞에서 옆 사람에게 방해가 되건 말건 소리를 내지르면서-헤드셋이 있어 옆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방법이 있음에도- 게임에 열중하는 손님들이 있고, 거의 대부분 피시방을 찾는 고객들이 게임을 위해서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지 않은 목적으로 집중해야 하는 사람도 있음을 무시하는 피시방의 직원들의-사장도 예외는 아닌듯- , 수수방관하는 고객관리만이 있을 뿐이다. 모방범죄를 유도할만한 잔혹한 장면은 없지 않으나 너무나 극적인 몰입을 이끄는 데에 무신경한 영화이며, 또 그것이 이 영화(감독)의 의도라고 읽어주기를 바라는 것 같아, 하나마나 한 소리이겠지만, 리뷰는 감독이나 제작자와 대화가 아니라, 그 영화(제품)의 소비자들간의 공유라는 점에서 하고싶은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늦지 않았다면, 이 리뷰는 스포일러성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영화(소설, 이야기)의 묘미는 반전이므로 내용을 먼저 아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포일러성 리뷰에 대해서 의연한 두 작품군(群)을 떠올려보자. 1)아무리 내용을 많이 알아도 그 감동은 반감되지 않는다. 나아가 알면 알수록 새로운 것이 보인다. 2)내용을 알거나 말거나 영화를 제대로 읽는데 지장을 주지 않는다-까지는 (1)과 같은데, 어차피 이 영화의 제작의도는 '스토리'에 있지 않으니까? 적어도 <악마..>의 생산자들은 앞서의 (2)의 입장에 서 있는 듯하고, (2)의 입장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하고 있다. (매체 면에서)장르가 다르지만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에서의 스토리나 디테일한 제작배경에 대해서 (많이)아는 것과 실제 보는 것이 재미와 감동을 반감시키기보다는 배가시킨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1)의 사례가 될 것이다.
그런데, 제아무리 생산자가 우리가 만든 이 영화는 (2)의 지점에서 기획된 것이므로 스포일러성 리뷰가 상관이 없어요, 라고 강변해도 소비자(관객)는 (1)이건 (2)이건 암튼 '편견' 혹은 '선입견' 없이 그 상품을 소비하려고 할 것이므로, 나는 그런 분들에게 누를 끼칠 수 있으리라. 그것은 서로에게 불행이다.

거기서 거기인 복수 드라마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다!
둘째, 이 영화의 내용상의 주제는 '복수'이다. 아직도 '복수'를 주제로 말하고 또 뭔가 보여주고 싶은 영화가 있을까? 이런 질문은 당연히 우문이 된다. 누군가를 밟지 않으면 일어설 수 없고 누군가를 적절히 이용(활용)하는 것이 '당위'를 넘어서 '미덕'인 되어버린 이윤추구와 세계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숱한 원한 관계가 발생하고 그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는 어쩌면 현실의 칼부림보다도 더한 마음의 칼부림이 잔인하게, 날마다 일어나고 있으니까? 마음으로도 간음하는 것도 죄가 되듯이, 아마도 관객들은 저마다의 피해자로서의 기억, 가해자였지만 그때는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에 대한 자기반성, 나름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서의 마음을 가다듬고 다스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을 것이니까, 그러므로 '복수'라는 주제는 사람의 이야기(소설, 이야기)에서는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것이다. 저, 그리스 비극의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스 3부작은, 대를 잇는 복수 3부작이라고 할 수 있고, 비슷하게 박찬욱은 복수 3부작을 스크린에 담아내지 않았던가. 기타 등등 숱한 복수 이야기가 있지만, 그래도 '복수'를 주제로한 이야기는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지 않을 것이며 그 끝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 <악마...>는 복수를 주제로 한 이야기의 바닥을 보았다는 듯이, 지지부진한 거기서 거기인 복수 드라마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다! 그것은 우리가 하려는 이야기가 아니다, 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잡았다 풀어주고 잡았다 풀어주는' 사냥놀이일 뿐이라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 이 말은 복수의 기본 공식이다. 영화(만화) <이끼>에는 아예 이 대목을 언급한 성서와 해당 페이지가 등장한다. <악마를 보았다>가 펼치는 복수극도 바로 이 한마디로 압축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복수물과 아주 다른 점은 복수를 '왜' 하는가, 그리고'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개연성 자체를 무시하면서까지-일부러- 갖은 희생이 이어지는 (사회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어떤 눈에 어떤 눈을, 어떤 이에 어떤 이러 맞서는지 그 복수의 행위 자체에 집착(집중?)하고 있다. 사람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느냐, 이보다 더 잔인할 수는 없다,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다, 가 아니고. 그러므로 그런 복수행위를 서슴지않는 이들은 악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악마의 다이어리를 훔쳐보고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악마를 보고 있는 것이다. 잔혹한 장면들 앞에서 관객들은 이런 생산자들의 '의도'에 성실하게 따라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견디기가 쉽지 않다. 해서 나는 게임에 비유하였으며, 현실감 있는 섬뜩함 대신에 영화가 초반부를 벗어날 즈음부터 '몰입'에서 훌훌 벗어나 불행하게도 살인의 관찰자 역할에 충실하게 된 것이다. 해서, 나는 이 영화를 보실 분들에게 제안하고 싶다. 심야상영과 같은 한적한 시간대에, 맨 앞자리나 맨 뒷자리, 주위 사람들이 거의 없는 데서 친구(지인)과 함께 앉아 충분히 논평하면서(속삭이면서) 영화를 봐도 된다고, 내가 산 말이 1등으로 완주해주기를 바라는 경마장의 풍경처럼. 수현인가 경철인가, 아님 그들을 지켜보는 영화 속의 눈들인가, 아님 그 생산자들인가. 진정한 악마는.. 

복수과정만을 보여주기 위해 스탠바이 된 인물들 그리고 시스템
오로지 복수를 위해 재산을 처분하고 거기에만 집중해서 10년을 기다리며 준비할 필요도 없다(<모범시민>), 15년쯤 사설 감방에 처넣고 공소시효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사육도 없다.(<올드보이>) 광랜 시대에 맞게 15일이면 충분하다. 처음부터 용서할 마음이 없다. 용서가 무슨 뜻이지요? 되묻는다. 아니 그의 사전에는 '용서'란 단어가 애초에 없었다. (<용서는 없다>와 달리) 엄밀하게 피해자 가족과 친지 혹은 패밀리(수현과 그의 장인, 그리고 방관하는 경찰 동료들, 지원하는 국정원 후배까지)들의 조직력을 전용(轉用)-예정되어 있는 곳에 쓰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돌려서 씀-이 있을 뿐이고, 그 시스템을 전용(專用)-1.남과 공동으로 쓰지 아니하고 혼자서만 씀. 2.오로지 한 가지만을 씀. 3 일정한 부문에만 한하여 씀-한다. 인터넷 게임에서 의상과 무기를 고르듯 수사자료를 입수하고(피해자의 아버지, 전직 강력계 형사인 수현의 장인이 건넨다), 최신 추적장비는 국정원 후배로부터 제공(?)받으면 되며, 수시로 경찰의 행적을 감청하고 있다. 그런 자세한 것은 묻지말아요! 그리고 15일이면 충분한데, 어차피 수배전단에 오른 놈들은 사회의 악이고 쓰레기이므로 만나는 족족 처리해버리면 된다. 왜, 분리수거를 기다리는 쓰레기니까? 이놈이 범인이 맞아라는 단서인 약혼자의 반지(커플링)은 기다렸다는 듯이 영화의 초반부에 수현(이병헌)의 눈에 들어온다. "저, 여기 있어요, 이미 알고 왔죠?!"라는 듯이. 경철(최민식)은 극악무도한 살인자, 살인을 밥먹듯이 할 뿐만 아니라 인육을 먹고-태주라는 친구의 식탁에서 보이지만-, 개새끼의 먹이로 인육을 던져주는 싸이코패스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에서 이 영화에는 싸이코패스(캐릭터)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알고 보면 표정만이 냉정과 열정일뿐 너무나 인간적인(?) 순간들이 있다.

복수영화의 '한계', 아님 장르영화의 '경계'?
시간관계상(지면 관계는 아니므로) 줄이거니와 요약하자면, 이 영화는 복수 영화-정통의 영화읽기-로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스타일을 중시하는-장르영화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그런 환경이 갖춰진다는 것은 다양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할 수 있다- 감독의 작품세계를 감안하여, 장르영화로 봐줄때 이 영화는 보통의 영화와 장르영화의 '경계'에 있다. 그런데, 그것이 분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경계'로 보기에는 이미 본듯한, 시츄에이션이 곳곳에서 드러난다는 점, 해서, 복수영화의 종합세트같다는 느낌을 곳곳에서 지울 수 없다. 영화를 고르는 기준 가운데 하나가, 이 영화는 실화(實話)인가의 여부인데, 무슨 시사프로그램의 재연 장면들을 모음과도 같다. <살인의 추억>, <추격자>을 비롯하여 우리 영화만 거론해도 많이 본듯한 장면들을 보는 듯하다. 심지어 그녀가 김옥분인 줄 착각(사실은 김인서)할 정도로 <박쥐>에서의 캐릭터와 아주 유사한 배역이 등장하여, 그럴듯한 장면까지 연출하는 서비스를 잊이 않는다. 여러분, 그동안 보신 스릴러-대체로 복수극인-는 우리랑은 차원이 달라요, 라고 패러디를 하듯. <올드보이>의 최민식이 <친절한 금자씨>에서 일방적으로 당하고, 재기를 노리는 노회한 복서처럼-마음은 팔팔한데 몸은 약간 말을 안 듣는- <악마> 대열에 합류했고, 수현(이병헌)은 <아이리스>를 촬영하다가 연인의 비보를 접하고 잠시 휴가를 내어-15일쯤- <악마>전선에 합류한 듯한 인상을 준다. 심지어 수현의 국정원 후배인 이준혁(<수상한 삼형제>에서 막내 아들 김이상 역)은 경찰청 소속에서 국정원으로 전직(특채)하지 않았나 싶다. 한마디로 그들 개개인의 연기가 빛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악마> 속으로, 해당 캐릭터로 몰입하게 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것이 어찌 배우 탓이라고 할 것이며, 도 아니라고 할 것인가, 인생은 새옹지마다. 산에 올랐으면 내려가기도 해야 한다.

<노부인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잘 들으세요. 부디 이것만은 꼭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완벽하게 옳은 일을 했어요. 우리는 그 남자가 범한 죄를 벌하고 앞으로 발생할 불상사를 차단했습니다. 더 이상의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한 것이예요. 아무것도 마음에 거리낄 일이 없습니다."(무라카미 하루키 <<1Q84>> 2권 429-430면, 문학동네 간행 번역본 인용)

<악마..>에는 잔혹한 복수에 대해 관객의 지지를 호소하는 한마디가 거의 없다. 피해자인 1)수현의 약혼녀나 또다른 2)희생자가 되는 처제는 새로운 인물(배우)으므로, 전작의 영향 때문에 이 영화에의 '몰입'에 걸림돌이 될 인물들이 결코 아니므로, 1-1)왜 복수가 그토록 잔인하게 해야 하는지 특별한 계기점이나, 2)무모해보이는 형부를 설득하는 장면에서 짧지만 특별한 복수의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한 뭔가가 필요했다(김인서가 깜빡 등장하는 그 순간들 못지 않은). 경철의 친구인 태주와 '김옥빈'이 구급대 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형사반장(천호진)이 던지는 "저런 놈들까지 살려야 하나"(정확하지는 않다, 대사가)하는 냉소와 대사는 흘러보내기에는 적지 않은 시서점이 있는 것 같다. 아예 넣지 말거나 '옳고 그름'에 대한 뭔가를 던져야 할 순간이었다. 장르문학(소설)으로 매니아층이 두터운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 틀을 벗어나 대중성을 확보하는 소설로, '안전장치'(위 인용은 소설에서 자꾸 반복된다. 주문을 걸듯)를 잊지 않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저런 인간쓰레기들은 죽여야 마땅해!"라는 식의 발언을 법집행자 그것도 해당사건의 책임자가 관망하듯 내뱉고 있는 것이다. 그것인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천호진-좋아하는 배우다-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애드립도 아니고 진지하지도 않는 뭔가 겉도는 듯한 대사들을 토해내고 그렇게 연기한다. 모든 것은 오로지(ONLY) 복수의 속도 올리기에 복무하고 있다. 이런 관내(?)의 카르텔이 작동하면서 목숨줄을 죄어오는 가운데 경철(최민식)이 생각하는 최대의 반전(복수)는 경찰에 자수해버리는 것이다. 사실 감옥 안보다 세상이 더 무섭고, 사람보다 무서운 존재는 자연이 만들어 낸 것 가운데 없다. 그것이 수현을 가장 아프게 하는 지점이라는 것을 간파하는데, 그 과정에서 살육은 멈추지 않는다.

눈(SHOWING)에는 풍년, 입에는 흉년(TELLING)?
해를 입은 만큼 앙갚음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보이는 대로, 보여주고자 하는 대로 영화의 장면들을 요약하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이르는 과정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다. 그러나 내게는 그렇게 잔혹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어느 끔찍한 영화에서도 하지 못했던 그 장면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응시했다. 사실 <용서는 없다>의 부검장면은 반전을 위해 꼭 필요한 장면이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보여줄 필요가 있었나, 라는 입장이고, 그 장면을 제대로 보지 못했음에도.

1)"아니, 그냥 좀 신경이 쓰여서, 경찰에선 내가 장경철의 뒤를 쫓는다고.. 경찰에서도 장경철을 쫓는 모양이야 그래서 말인데 이쯤에서 그만 두는 게 어떨까? 그만 뒀으면 좋겠어"(장인이 수현에게 전화로)
2)"형부 나예요. 형부는 잘 지내세요. 그래요, 무슨 일로 바빠요... 모르게 하는 일을 묻는 거예요. 아빠에게 수사자료.. 형부 마음 잘 알지만 그일을 그만 두었으면 해요. 어떤 처벌을 가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어요. 그런다고 언니가 살아돌아 오는 것도 아니고, 복수 같은 것 영화에서나 하는 거지"(처제가 수현에게 전화로)

1)의 대해 수현은 "저기요 아버님......", 2)에 대해서 수현은 "미안한데 처제한테 해줄말이 없어"라고 대답한다. 해서 처제가 반문한다.

처제: 나는 딴 식구예요. 뒤돌아봐요. 그런데 해줄말이 없다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그러니까 형부, 의미 없어요 이제 그만 둬요.
수현: ...이 일 그렇게 의미 없지 않아.

뭐가 '미안하고' 없지 않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렇게 대사는 이어진다. 도무지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만들려는 개연성은 애초에 거세시켜놓고 시작하는 영화-영화 초반에 용의자 중에 한 녀석의 성기를 불능으로 만들어버리듯이-가 아닌가!
'말하기(TELLING)'를 거세함으로써 '보이기(SHOWING)'에 집중했다. 물론 이 영화에 찬반이 엇갈리듯 잔혹한 장면들을 맘껏 보여주는(여러분, CG로 이렇게도 만들 수 있답니다) 데서 눈(眼)에는 풍년(?)을 만끽한 이들이 있을 수 있으나 입(말하지, 이야기)의 영역에서는 철저하게 무감각으로 일관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개연성을 획득하기 위한 말하기(TELLING)가 왜 필요하지? 그 공감과 이성적인 판단에서 무신경했다는 점에서 영화 자체가 싸이코패스적이다. 반면에 정작 싸이코패스로 보여져야 할 '악마'들은 영화 속에는 없다. 대신에 아들의 복수를 위해 조폭들(?)을 야산으로 끌고 가서 땅에 파묻는 어느 대기업회장의 자식사랑(?) 같은 무모함은 엿볼 수 있다.

크레타 섬 사람이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라고 할 경우 크레타 사람이 거짓말쟁이인지 아닌지 결정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 <악마를 보았다>에서 악마를 보았다라고 강변함으로써 정작 이 영화에 악마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오로지 악마들이 등장하는 영화들을 쭉 나열한 영화소개프로그램의 편집된 영상을 보는 기분이다. 영화 대 영화, 오버 엔 오버... <아Q정전>에는 물에 빠진 개를 끝까지 때려잡아야 한다는 노신의 유명한 글이 나온다. 제 때에 범인을 처리하지 못함으로써, 여고생, 아가씨, 별장주인인 아줌마(?), 택시강도(그들이 아무리 사회악이라도), 장인어른, 처제, 의사.... 숱한 피해자들이 속출하는 것을 방치하는, 오로지 복수가 어디까지 가는지 보통의 문장이라면 "…."으로 처리했어야 할 것들을 '보여주는' 영화. 어쩌면 이 영화의 상영불가 여부 고민은 잔혹한 장면들보다는 사회악을 근절해야 하는 소명을 띤 '시스템'의 작동불능 상황이 더 문제적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러한 그것이 옳고 그느냐를 판단하기에 앞서 우리 쪽에 유리하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시스템이 작동하는' 이 사회의 현실에 대한 냉소쯤으로 받아들여야 할지-그렇다면 참 좋은 영화다.

"소설이 상품으로 유통되고 소비되어야만 하는 조건을 한탄하는 문장을 보았다..
..지금 문제가 되는 건 오히려 소설이 상품으로서 소비의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상황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라카피 하루키는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를 무너뜨려야 하는 것을 소설로서 직접 보여줬다고, 일본의 비평가가 그의 이번 작품(앞서 인용한)이 거둔 성과를 두고서 한 말이다. 나는 이 말을 '소설' 대신 '영화'라는 단어로 대체해서, <악마를 보았다>를 평가하고 싶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오리혀 영화가 상품으로서 소비의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상황"을 만들었노라고. 장르영화를 표방했으나 대중영화와의 '경계'가 불문명하며, 대중성을 표방한 영화로서의 '한계'가 너무도 분명한 영화라고. 어쩌면 그리스 비극 3대작가가 활약하던 시절에 이미 인간들 사이에서 연출되는 '복수'를 주제로 한 드라마는 충분히 제작되었다, 그러므로 후세의 작가들은 참 불행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처절하고 참혹하기로 한다면 <악마를 보았다>는 결코 그리스 비극이나 신화의 세계를 따라잡지 못한다. 단지 보여줄 수 있게 된 도구(TOOL)을 가지고 있다고 인간 본성의 끝을 탐색하는 작업이 진지해지고 깊이를 더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 비극은 무대에서 잔혹한 장면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더 처절한 장면을 전달했다.

우리 사전에 복수는 있고, 그 정의를 보다 완전하게 할 뿐
사실 어떠한 사전도 온전하게 믿을 수는 없다. 나폴레옹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라는 단어가 없었던 것이 아니고, '불가능'이란 단어에 대한 정의가 적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소설이나 영화, 곧 이야기는 인간본성의 이모저모를 그리고 시대가 바뀜에 따라 변화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탐색을 멈출 수 없다. 이창동은 왜 <밀양>과 <시>에서 피해자와 가해자 입장에서 '용서'라는 주제에 천착하는 것일까? '복수'를 주제로 한 드라마(영화)는 앞으로도 우리 인간의 삶이 계속되는 동안 새롭게 변주될 것이다. 아래 러셀의 지적처럼 만족할 수 없지만 만족해야 하는 상황에 이를 것이고, 어느 시대나 가장 최고의 작품은 이것이 완결이라고 '만족'하거나 '착각'하게 만드는 작품일 테니까,

"어떤 말을 정의 한다는 것은 언제나 같은 그것을 다른 말로 정의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는 정의의 출발점으로 삼을 말을 골라서 그것은 정의 없이도 이해될 수 있는 말이라고 간주하는 선에서 만족하지 않으면 안된다." -버트란드 레셀,

너무 가혹한 평가였다면, 장르문학(영화)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사람쯤의 푸념쯤으로 여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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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든손예쁜손 2010-08-16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우리 영화만 사랑해달라고 하기 전에, 좋은 영화는 알아서 보잖아요.

timeroad 2010-08-17 13:10   좋아요 0 | URL
제작비의 한계가 영화의 한계도 되지만, 대로는 그 한계가 작품성 높은 작품을 만드는 역할도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여치 2010-08-16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익한 글 감사해요. 영화를 보기는 좀 꺼려지지만, 책읽기에 도움을 주는 글인듯해요

timeroad 2010-08-17 13:13   좋아요 0 | URL
영화 보시는데 부담 드린 것은 아니지요, 어쨌거나 부담을 준다는 것은 분명해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미나사랑 2010-08-17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잡았다 풀어주고 잡았다 풀어주는' 좀 심했지요? 하긴 그러기 위해서 싱겁게 두 악마(?)가 만난 것이지만..

timeroad 2010-08-17 16:3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리뷰를 쓰고 난 다음에 생각해본 것인데, 동해안에서 명태(생태)를 가공하여 북어를 만드는 과정이나 포항 등지에서 꽁치로 만드나요, 과메기를 만드는 과정이 떠올랐어요. 밤이나 추우면 얼었다가 해가 드는 낮이며 해동되고 그렇게 반복하는 과정처럼, 복수놀이를 하는 것이 꼭 그런 식이라는..

라라 2010-08-17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에서 최근 영화, 최근 소설까지 아우르는 글 잘 읽었습니다. 소금의 역할을 하시는 듯

timeroad 2010-08-17 16:39   좋아요 0 | URL
소금도 소금 나름이겠지요. 햇살에 잘 말라 굳어진 자연산 소금이기를, 감사

yess1985 2010-08-17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고요, 영화는 보겠지만 큰 기대는.. 과연 어떨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드네요 작품외적인

timeroad 2010-08-17 16:41   좋아요 0 | URL
저 때문에 영화가 싱거웠다는 말씀은 하지 않기입니다.

motoko3 2010-08-17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속시원한 글입니다. \뭔가 아쉬움을 잘 드러낸듯 싶네요

timeroad 2010-08-17 16:40   좋아요 0 | URL
아무튼 고마워요, 잘 읽으셨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