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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솝 우화
이솝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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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어릴 때부터 이야기를 많이 읽었어요. ‘이솝 우화’를 읽고 이야기 속에 담긴 교훈에 대해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곤 했어요. 그렇게 이야기에 대한 관심은 십대가 될 때까지도 쭉 이어져 영화 쪽으로 관심을 갖기에 이르렀지요."
『이야기의 힘-매혹적인 스토리텔링의 조건』(황금물고기, 2011년 9월)에 실린 전설적인 시나리오 닥터 '로버트 맥기'와의 특별 인터뷰(스토리텔링 공식)의 일부다. 실제로 EBS에서 진행한 인터뷰의 녹취록이다. 어떻게 스토리텔링에 관심을 갖게 됐으며, 특히 어떻게 스토리닥터로 활동하게 되었나, 첫 질문에 대한 답변의 초반부다. 그의 대표작으로 시나리오 작법의 교과서인 『Story: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전2권)의 책 소개는, 난데없는 퀴즈로 시작된다. "<반지의 제왕>, <디어 헌터>, <X파일>, <슈렉>, <프렌즈>의 공통점"은 무엇이냐? 정답은 이들 작품을 쓴 사람들 모두가 '로버트 맥기'의 제자라는 것. 그는 아홉 살 때 처음 연극계에 발을 들여놓으며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고, 극단원으로 10대 시절을 보냈다. 프로필이 예사롭지 않다. '이야기 의사'라는 그의 직함을 살피노라면, 어린 시절부터 (관객 반응을 직접 확인하는) '현장'을 경험했기에 살아 있는 이야기의 힘을 실감했으리라, 여기게 된다. 

 

10대 시절을 극단원으로 보낸 '이야기 의사', 로버트 맥기

그런데, 작가로서 명성을 쌓은 이들이 인터뷰에서 으레 글을 쓰게 된 동기를 이야기할 때,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옛날이야기"를 거론하는 것처럼, 그는 아버지와 함께 읽은 『이솝 우화』를 꺼낸다. 이야기의 가장 기본적인 것, 하나의 이야기(STORY)의 최소 단위를 담고 있는 책이 바로 『이솝 우화』이고,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눈 '아버지와의 대화'에도 또 하나의 방점이 찍혀 있는 듯하다. 대화, 번역 그대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이 왜 중요한가? 한 편 한 편의 우화를 읽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는 아버지에게 질문하였을 것이고, 아버지는 아들의 질문을 두고 대화를 시작했다는 얘기다. 이 과정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좋은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책을 읽으면서 받은 '자극'에 대한 '반응'을 관찰하고, 가능하다면 이런 변화를 객관적하여 관찰할 수 있다면, 바로 여기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생산)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들이 던진 질문은 '해석적 질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아버지가 기다린 질문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텍스트를 공유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답할 수 있는 질문, 그 질문에 딱 들어맞는 정답은 없다. 그런  질문이, '해석적 질문'이며, 이것이 왜 중요한가에 대해서는 독서토론이나 독서지도(‘지도’라는 말이 좀 그렇지만)의 방법을 다루는 '교육학'에서 중요하게 취급하지만, 가령, 자녀와 함께 같은 책을 읽는 부모들을 위한(해석적 질문을 유도하고,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필요한) 깊이 있는 그리고 친절한 안내서는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 같다.

 

핵심 포인트는『이솝 우화』를 읽고, 나눈 '아버지와의 대화'

어쨌든, 『이솝 우화』>는 가장 짧은 시간에 읽고(미리 읽어올 필요도 없다), 해석적 질문을 할 수 있는 그런 텍스트다. 그 질문에 참가자들이 나름대로 의견이 발표하고, 그것이 또 다른 질문을 낳고, 다른 의견을 낳는 등 각종 독서토론의 '오프닝'에 활용할 수 있으리라(필자 또한 실제로 실행해보고서 하는 말이다). ‘청소년과 성인들을 위한 정본’ 『이솝 우화』(천병희 옮김, 숲)에는 현존하는 이솝 우화 전편(258편)이 (그리스어→우리말) 원전번역으로 수록되어 있다. 전편을 이솝의 작품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은 사실이라, 논란이 이어진다. 그러나 수록된 우화들이 가진 일관성은 논란을 잠재우기에 충분하다. 또한 (앞서 강조한 해석적 질문 활용과 관련) 몇 편을 제외하고 우화마다 덧붙여진 '교훈'이 걸림돌이 된다. 가령, 아래 인용한 <살인자>의 경우 교훈은 <이 이야기가 말해주는 것은, 죄지은 사람에게는 뭍에도 공중에도 물에도 안전한 곳이 없다는 것이다.>
"'교훈'은 헬레니즘 시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더러 추상적이고 고지식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우화의 요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많다. 필요한 경우에 참조하되 굳이 '교훈'에 얽매이지 않고 읽기를 바란다."
옮긴이 서문‘(재미와 교훈을 갖춘 명작’)에서 번역가는 '교훈'을 '정답'이 아니라 하나의 '의견'으로 받아들일 것을 권장한다. 아마도  『이솝 우화』란 제품에 관한 사용설명서가 있다면, 맨 위에서 고딕체 등으로 강조하여 언급해야 할 사항이지 않을까?

 

교훈을 어떻게? 『이솝 우화』란 제품에 관한 사용설명서

다시 로버트 맥기의 인터뷰다. 이야기의 힘, 그 생명력은 '플롯, 플롯, 플롯!'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갈등 구조'에 대해 묻자,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한다. 『시학』을 말하고 있는 것. "극장이든 책이든 이야기 작업의 규모와 크기에 따른 필수적인 반전의 개수에는 모종의 관계가 있다." 출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라고 우리말로 옮기는데, 특히 비극과 관련하여 플롯의 중요성을 언급한 대목들을 요약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극장이든'이라고 할 때 비극경연(연극이란 공연예술)의 ‘대본’으로서의 비극을, '책이든'이라고 할 때는 읽는 것(곧 책으로)만으로도 ‘비극(작품)’이 소비됨을 포함하고 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시학』) 이 점을 짚고 있거니와 오늘날에도 비극은 공연으로, 책(작품)으로 저마다의 완결성을 갖추고 ‘소비’되고 있다.
그리고 로버트 맥기는 '한마디로 관객을 지루하게 하지 말라'며 이야기의 핵심을 강조한다. 이야기의 1번 법칙을 지켜야 하는데, '반전'이며, 이야기가 필요로 하는 반전의 개수(個數)가 있다는 것. "극장이나 공연, TV, 영화에서 2시간 정도(120분) 분량이면 최소 3회의 역전이 필요"하다는 것, 여기서 역전이란 ‘반전’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한 작품의 플롯에는 (반전은 기본이고) 반드시 '급반전'이 있음을 역설한다. 로버트 맥기가 말하는 ‘역전’은 (보통 '막'이라고 부르는데) 인물의 인생에서 중차대한 변화를 말하는데, "최소 3회, 많게는 4회 그 이상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공연으로 책(작품)으로, 저마다의 완결성을 갖추고 ‘소비’되는 비극

전설적인 시나리오 닥터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은 누구일까, 훌륭한 이야기를 창작(생산)하고자 하는 이들일 것이다. 가령, 소설가나 시인이 되는 데 대학과정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우리말로 작품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작품이 좋은 작품인지를 알아야 한다. 때문에 '국어국문학과'나 '문예창작학과'를 거치는 것이 유리하다. 전문가들의 도움을 필요하니까. 다만, 국어국문학과라고 할 때, '국어학'과 '국문학'이란 두 갈래의 학문이 결합된 것임을 ‘나중에야’ 깨닫는 것 같다. 국어학은 언어학의 영역으로 (지금은 다른 대학에도 개설되어 있겠지만), 서울대의 경우 ‘언어학과’로 (국어국문학과와) 독립되어 있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기 때문에 ‘언어학과’는 ‘국어학’을 위주로 다루지만, 세상의 모든 언어 자체가 본위의 연구대상임을 알 수 있다. 어쨌든 한국 문학은 한국어를 재료로 한다는 것 말고는(거칠게 말하자면), 두 분야는 연관성은 깊지만 한데 묶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또한 창작을 위해서, '국어국문학과'에 가는 것이 나은가, '문예창작학과'를 가는 것이 나은가도 해묵은 고민이다. '문예창작학과'를 얼른 떠올릴 것이나, 단답형으로 대답할 수 있는 '정답'은 아니다. '문예창작'이 글을 쓰는 기술(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작시술作詩術‘)을 우선하여 가르치고 배운다는 데서 그러한데, 가령, 시(詩)를 쓰는 법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것인지, 하는 질문에서부터 시원스럽게 답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 대답이 『시학』에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작품이 좋은(훌륭한) 작품인가(what)를 이야기하면서도 어떻게(how) 하면 그런 작품을 쓸 수 있는지, 구분하지 않고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이야기를 생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창작을 준비하는 이에게)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시학』만큼 좋은 가이드북이 없다.

 

좋은 작품을 쓰려면(how) 무엇(what)이 좋은 작품인지 알아야.. 

자주 인용하거니와, 『시학』을 읽으며 새롭게 발견한 개념 하나가 바로 '전체'이다. 작품에서 이 '전체'란 방대한 서사시 『일리아스』 한 권일 수 있고, 『이솝 우화』의 수록된 <여우와 덜 익은 포도송이>(아직도 '여우와 신 포도'로 옮기는 번역이 존재한다), 세 문장으로 이뤄진 우화일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완결되고 일정한 크기를 가진 전체적인 행동의 모방'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에서 '전체'란 처음과 중간과 끝을 갖는다. 참으로 간명한 정의다. 그런데, 중언부언처럼, 이 '처음'과 '중간'과 '끝'을 설명한다. 처음과 끝을 먼저 정의하고, 끝으로 '중간'을 정의하는 데 주목하자.

 

"'처음'은 필연적으로 다른 것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그다음에 필연적으로 다른 것이 존재하거나 생성되는 것이다. 반대로 '끝'은 필연적으로 또는 대게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그다음에 다른 것은 필연적으로 존쟈하지 않는 것이다. '중간'은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그다음에도 다른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_『수사학/시학』 중 '시학' 제7장(''는 필자)

 

이야기가 하나로서 생명을 부여받으려면 처음과 끝 그리고 중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이야기의 최소(기본) 조건이다. '처음'과 '중간', '중간'과 '끝' 사이에 끼어드는 이야기 단위가 에피소드다. 그런데 어떤 에피소드도 허용하지 않는, 이야기의 최소 단위를 『이솝 우화』는 상당수 포함하고 있어, 이야기란 무엇인가, 이야기의 기본을 살피는 데 필독서가 된다. 언제든 어디서든 사전 준비(텍스트 읽기) 없이도 즉석에서 독서토론을 나눌 수 있는 텍스트인 것이다. 다음 우화는 단 두 문장으로 이뤄졌지만, 처음과 중간과 끝을 지닌 하나의 이야기다.

 

"새끼를 한 마리밖에 낳지 못한다고 여우가 암사자를 헐뜯자 암사자가 말했다.“한 마리이지만 사자야.”"
-『이솝 우화』, <194.암사자와 여우>

 

로버트 맥기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해서 강조한 역전(반전)을 포함하고 있는 우화도 적지 않다. 이 짧은 우화에 '있어야 할 것들이 다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사람을 죽인 뒤 피살자의 친척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살인자가 나일 강가에 이르렀을 때 늑대가 다가오자 겁이 난 그는 강가의 나무 위로 올라가 숨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큰 뱀이 자기를 향해 기어오는 것을 보고 살인자는 강물로 뛰어내렸고, 그러자 강물 속에 있던 악어가 그를 먹어치웠다."
-『이솝 우화』, <045.살인자>

 

'전체'를 이해하는 데 『이솝 우화』, 처음과 중간과 끝을 지닌 이야기의 최소 단위

늑대와 큰 뱀과 악어.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피할 곳이 없다(정말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뭍에도 공중에도 물에도 안전한 곳이 없다는 것, 하늘과 땅과 물(바다와 강), '어디에도' 마땅한 피난처가 없다는 것이다. 하늘은 제우스가, 땅(지하)은 하데스가, 바다는 포세이돈이 분할 통치한다는 점을 떠올려보라. 온 지구, 온 우주라고 해야 할까?
새 학년 새 학기다. 특히, 신입생 가운데 어떤 장르이건 글쓰기를 직업으로 희망하는 이들이라면, 이 글에서 소개한 몇몇 책들을 평생의 교과서로 삼기를. 특히, 『시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또 다른 저서 『수사학』과 한 권으로 묶여 있는데, 번역가 천병희가 ‘시학’을 처음 번역한 해가 1975년이다. '시학'을 개론으로 읽고 ‘수사학’을 읽든, '시학'을 원론으로 읽고 ‘수사학’을 부록으로 읽든 『수사학/시학』(천병희, 숲, 2017)은 문학을 창작하거나 연구하려는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도움을 주는 교과서 중의 교과서이며, 인류의 고전 중의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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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연히 이것은 수기(手記)이다." 상하 두 권으로 펴낸 장미의 이름_서문 앞에는 으레 헌사(獻詞)가 놓일 자리에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이 서문은 198015일에 썼다. 탈고 시점부터 39년이 흘렀다. 움베르토 에코는 2016219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84세. 소설은 픽션(fiction)이다. 사실이 아니지만 독자가 사실처럼 받아들일 때(개연성 확보) 파장은 클 수밖에 없다. 소설가는 서문에서조차 사실인 것처럼 거짓말을 하려는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가장 위대한 거짓말은 서문에 있다다. 소설론 강의에서 들은 얘기다. 장미의 이름처럼 꼭 들어맞는 경우가 또 있을까?

에코는 작가이기 전에 볼로냐대학교 기호학과 교수(1971~ )였다. 어떤 의미가 생성되고 소비 되는 현상을 다루는 학문. 언어의 구조와 그 의미를 연구한다는 데서 언어학 분야와 맞닿아 있다 하지만 언어학과 다르게 기호학은 비언어 기호 체계도 연구 대상이다. 기호학(記號學)이 그렇다. 현대 사회의 세기말적 위기를 소설에 담고 싶다, 에코의 바람이었다. 마침 출판사에 근무하는 여자 친구가 추리소설을 써보라고 권유하고, 장미의 이름2년 만에 썼단다. 여자 친구, 고마우신 분이다.

장미의 이름은 일독만으로 의미 파악이 쉽지 않은 작품이다. 노년에 이른 화자가 7일 동안, 자신이 겪은 인생 최고의 경험을 회상하는 방식이다. 그래도 추리소설답게 끊임없이 일렁이는 호기심 덕분에 책은 읽힌다. 화자의 내레이션이야말로 독자의 눈길을 붙드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작가가 책머리에 "당연히 이것은 수기(手記)이다."라고 한 수수께끼를 풀고 싶은 것이다.

장미의 이름은 웃음(희극, 코미디나 개그, 정치풍자)이 가진 강력한 힘을 역설한다. 말 그대로 민주주의가 실현된 국가일수록 정치풍자가 허용되고 권장되며, 풍자 대상에서는 예외가 없다. 전문가들이 제공하는 웃음에는 서슬 퍼런 날이 서 있다. 비극에 이어 고()희극이, 비극과 동시에 희극이 축제 마당 연극 경연에 오르던 황금기의 아테나이가 그랬다. 그러한 맥은 오늘 미국의 정치문화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는 언론자유(지수)와도 비례한다.

이참에 장미의 이름을 다시 읽은(거의 처음처럼) 계기가 있다. <김현정의 뉴스쇼>(유투브)를 시청하는데 공중파 시간이 끝나고 앵커와 제작진들, 일부 게스트가 후일담을 나누는데(시청자들은 실시간에 댓글 참여, '댓꿀쇼')에서 누군가 희극이 가진 힘을 이야기하면서 장미의 이름을 언급했다. 한 권의 금서를 둘러싸고 살인사건이 이어지는데 그 책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썼다고 여기는 <시학> 2권이란다. 장미의 이름1(시학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그리스) 희극에 관해 다루고 있다는 것. ", 그랬지!, 그런 대목이 있었지."하고는 천천히 그리고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25장으로 구성된 시학의 핵심은 6장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비극의 정의가 시작되는 것. 그 앞은 비극을 정의하는 데 필요한 기초를 다뤘고, 이어질 장들은 이에 대한 부연설명이 되는 것이다. 6장에서 비극은 '완결되고 일정한 크기를 가진 전체적인 행동의 모방'이라고 정의한다. 7장에서는 '전체는 처음과 중간과 끝을 갖는다.'며 비극의 정의 중 '전체'에 대해 자세히 다루는 식이다.

"처음은 필연적으로 다른 것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그다음에 필연적으로 다른 것이 존재하거나 생성되는 것이다. 반대로 끝은 필연적으로 또는 대게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그다음에 다른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중간은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그다음에도 다른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언어유희로 여길 수 있고,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당연하신 말씀을 왜 늘어놓는 것일까? 간결하고 명징한 문체로 예술론을 전개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왜? 나는 이 대목이 늘 궁금했다. 그런데, 앞서 얘기한 6장 첫머리에 바로 그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6절 운율에 의한 모방과 희극에 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먼저 비극에 관해 이야기하기로 하자."

‘6절 운율에 의한 모방은 서사시다. "서사시에 관해서는 23·24·25장에서 거론하지만 희극에 관한 논의는 없다."(옮긴이 주석) 바로 이 대목에서 에코는 추리소설 장미의 이름을 착안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소개한 '발견(무지의 상태에서 앎의 상태로 이행하는 것)의 종류 가운데 네 번째인 '추리에 의한 발견'을 주로 사용하면서 말이다. 희극에 관해 논한 후속편, <시학> 2권이 '없을 리 없다' 에코는 그런 심증에 기반하여 논픽션처럼 픽션의 세계를 펼친다.

희극시학6장 첫 대목의 언급 말고 시학의 어디 쯤에 숨어 있는 걸까? 앞서 언급한 '전체'에 대한 부연 설명에 있다고 본다. '전체는 처음과 중간과 끝을 갖는다.' 그런데 현존하는 시학의 끝부분은 파손되어 있다. "비극과 서사시의 일반적 본질과 그 종류, 구성 요소의 수와 성질, 성공과 실패의 여러 원인, 비평가들의 비판과 그에 대한 해결에 관해서는 이쯤 해두자……."로 끝나는 것. 옮긴이(천병희)도 이와 관련 "이 파손된 부분에서는 (최소한)비극과 희극의 비교론이 펼쳐졌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주석을 달았다.

(약간의 스포일러) 세상에서 사라지고 없는 것들까지 희귀한 장서(藏書: 책을 간직해 둠. 또는 그 책.)들을 소장하고 있는 베네딕트 수도원(가상의, 공간 배경) 전체가 한 권의 장서(:감출 장) 때문에 불에 타 사라진다. 희극에 관해 논하였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스스로가 말한 시학의 전체 가운데 끝부분, "필연적으로 또는 대개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그다음에 다른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을 감추려는 세력과 찾으려는 이들의 갈등(문제)이 소멸되는 즈음에, 수도원은 소실(燒失)되어 끝장을 보게 되는 셈이다. 발상도 그렇거니와 훌륭한 마무리가 아닐 수 없다.

소설은 후반부에서 (가상의) <시학> 2권의 첫 대목을 소개한다.

"……1부에서 우리는 비극을 다루면서 이 비극이 연민과 공포를 야기함으로써 카타르시스의 창출을 통해... 이제 약속대로 희극을 풍자극, 광대극과 더불어 다루면서 이 희극이 어리석은 자들을 즐겁게 함으로써 비극과 같은 작용을 하는 과정을 검토해보기로 하자. "(장미의 이름831)

천병희 선생의 시학(원전번역, 문예춢판사) 초판은 1982년에 발행된다. 선생은 1975년에 처음 <시학> 그리스어 번역을 시도했다고 한다.(수사학/시학옮김이 서문) 이 책 이윤기 선생이 장미의 이름초판을 펴낸 해는 1986년이다. 움베르토 에코가(서문) 장미의 이름을 탈고한 해는 19801월 이전이다. 그래도 문학 전공자가, 창작을 고민하면서 천병희의 시학이 원전번역으로 나와 있음에도 너무 가볍게 읽지 않았나, 때늦은 후회다. 천병희 선생은 시학을 생활고로 힘들게 공부하던 시절에 옮겼다. 한 출판사에 매절(인세가 아닌)로 넘길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다. 근래에 이르기까지 그 출판사의 손에 꼽히는 스테디셀러였는데, 선생의 희랍어·라틴어 원전 번역서들을 꾸준히 펴내는 출판사에서 수사학/시학(2017)으로 묶어 발행하였다.'시학'은 고전번역가의 인생 역정을 읽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에코는 희극을 다룬 시학 후속편이 집필되고 발행이 되었지만 너무 위험한 내용이라 극소수만 독점하고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설정(픽션)에서 장미의 이름을 썼다. 그런데 천병희 선생은 출간 당시, 그리고 십수 세기 동안 묻혀 있다가 발굴되어 세계사를 뒤흔들었던 사연 많은 금서(禁書)를 번역하기도 했다.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20123, ). 한 권의 책이 가져온 파장은 위험천만했으며, 순혈주의에 토대가 되어 유대인 학살의 근거가 되었다. 실제의 책(시학)과 관련한 가상의 책(에코의 경우) 때문에 벌어진 참사(장미의 이름)가 아니라, 게르마니아라는 책(논픽션)이 야기한 비극(논픽션)이 실제 일어난 것더불어 크리스토퍼 B. 크레브스가 쓴 가장 위험한 책-로마 제국부터 나치 독일까지 <게르마니아> 오독의 역사(20129, 민음인, 현재 절판)게르마니아(최초의 원전 번역)에 이어 번역·출간되어 입체적인 독서가 가능하게 되었다

장미의 이름은 책(시학)을 다룬 책일까? (시학)이 미처 다루지 못한 책을 다룬 책인 것은 분명하다. 움베르토 에코는 웃음(희극)이 가진 신비한 힘과 그 '파괴력'을 충분히 다뤘다, 그 안에 시학_희극편을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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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road 2022-05-22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9년 3월에 작성한 글을 2022년 5월 22일, 기존 글을 대폭 수정하여 별도의 카테고리에 올렸습니다.
 

* 스티브 잡스(1955~2011)의 스탠퍼드대학 졸업식 연설은 지금도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명연설이다. 2005년 6월, 이 대학 졸업생들에게 그는 자신이 사는 동안 깨달은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첫 번째는 인생의 전환점(connecting the dots), 두 번째는 사랑과 상실(love and loss), 세 번째는 죽음(death)에 대한 것. 이 연설을 하고 6년쯤 지나 그는 세상을 떠난다. 세 번째로 이야기한 그 병, 췌장암 때문이다.

* 필멸의 존재로 태어난 인간은 유한한 삶을 살다 간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인간의 죽음을 이해하는 것과 나의 죽음을 인정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대체로 부모 두 분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나의 죽음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내 순서가 되었음을 비로소 인정하는 거다. 그는 죽음의 문턱을 밟고 돌아왔다. 그의 경험담은, (스티브 잡스에게는 좀 모질지만) 그 자신의 죽음으로 자신의 죽음을 비로소 인정한 사례로 남다른 경험이라 하겠다. (대체로 고대 그리스의 영웅들은 저승을 한번쯤은 다녀와야 그 영웅 반열에 오른다. 헤라클레스, 테세우스가 그랬으며, 오뒷세우스가 그랬다.) 해서 그 경험은 공유하는 이들에게도 각별한 의미가 된다. 그 ‘때문에’ 힘들었다. 그러나 그 ‘덕분에’ 삶의 눈에 띄는 변화가 생겼다. 그런 소회쯤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 병 때문에 결국 작고했다. 그래서 세 번째 이야기는 물론이고, 연설문 한 문장 한 문장을 숙연한 느낌으로 읽게 된다.

* 이 연설문은 그 자체로 그와 관련된 책이나 수많은 언론보도, 그를 언급하는 강연들과 각종 책에서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였으므로, 나는 이 연설에서 그가 언급하거나 인용한 대목들의 본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그 출처를 추정하고 ‘의견’을 덧붙이려 한다. 연설문의 우리말 번역은 웹서핑으로 무작위로 수집한 두 종인데, 이들 번역을 비교할 것이나, 결코 번역의 옳고그름, 나음과 그렇지 않음을 비교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미리 밝히며 양해를 구한다.

 

<<<필자가 이 글에서 인용한 연설문 번역은 이 책의 텍스트와 무관함을 밝혀둡니다. 

 

* 그는 우선 자기 인생의 전환점(connecting the dots)에 대해 이야기한다. 제가 지금 세계적인 명문대 학생들의 졸업식장에 와서 연설을 하고 있네요. 그런데 저는 여러분과 달리 대학을 중퇴한 사람입니다. 진솔한 또는 낯선 고백으로 시작되는 연설은 곧이어 드넓은 삶의 바다로 항해를 시작할 학생들의 귀를 쫑긋하게 만든다. 사실 그는 유난히 등록금이 비싸다는 리드 칼리지에 입학한 지 6개월 만에 중퇴했다. 이후 18개월 동안 학적 없는 상태로 대학에 머물면서 듣고 싶은 강의를 청강한다. 정확히는 도강이다. 졸업은 할 수 없게 되었지만 더 이상 학사 일정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마음에 끌리는 강의를 들었던 것이, 훗날 누구나 인정하는 성과를 거두는데 적시적절한 자양분이 되었다. 미혼모 대학원생인 생모에게 잉태된 순간부터 일정한 성공을 거두기까지 그의 인생에는 숱한 변곡점이 있었다. 첫 번째 이야기를 시작하는 문장은 이렇다.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1)첫 번째는 점들을 연결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2)첫 번째 이야기는 인생의 전환점에 관한 것입니다.

 

전자(1)는 직역에, 후자(2)는 의역에 가깝다. 이후의 인용문들도 이런 특징들이 유지된다. 사는 동안 어쩔 수 없이 혹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이전과는 다른 변화된 삶을 살기 마련이고, 그 순간들을 그는 점들(dots)이라고 한다. 그러나 ‘점들을 연결하는 것’이란 번역은 모호하고, 다분히 또는 역설적이게도 철학적인 뉘앙스를 가진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인생의 변곡점들이 내게는 있다. 그땐 몰랐지만, 10년쯤 흘러 그 지점들을 연결해보니, 뭔가를 깨달음이 있더라. 나는 오늘 그 이여기를 여러분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그런 얘기다.

 

생모에게 잉태되는 순간부터 입양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고, 생모가 끝내 관철한 입양 조건이 대학 졸업이었음에도 아이는 끝내 대학을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젊은 날의 고단했던 삶……. 하지만 호기심과 직관을 믿고 행동한 많은 일들이 결국에는 값을 매길 수 없이 소중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한 가지 예는 이렇다. "(내가) 만일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결코 이러한 캘리그래피(calligraphy) 강좌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개인용 컴퓨터는 지금처럼 아름다운 타이포그래피를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소회는 세월이 흐른 지금에야 말할 수 있는 , 당시에는 그 지점들이 삶의 전환점이 될 수 있을지, 그 의미를 결코 알 수 없었다. 와 닿는 이야기다. 지금(현재) 지난 삶의 결정의 순간(點)들을 연결해보니 그 순간이, 그 순간들이 내 인생을 바꾼 전환점이었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그런 얘기다.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1)물론 제가 대학에 있을 때는 점들을 앞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2)물론 내가 대학에 있을 때는 그 순간들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지금 청중들인 졸업생들은 갈 길이 정해진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청년실업이 10%대에 가까워지는 우리나라 대학의 졸업생들을 생각해보라. 진로가 분명하건 불분명하건 새로운 세상과 만나야 하는 청중들에게 졸업은 중요한 인생의 변곡점이다. 걱정 반 설렘 반일 수밖에 없다.)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1)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뒤를 돌아보니 모든 것이 명료해졌습니다.
(2)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에 돌아보면 모든 것이 매우 분명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다음 대목이 중요하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1)다시 말하면, 앞을 보면서 점들을 연결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단지 뒤를 보면서 점들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점들이 어떻게든 당신의 미래에 연결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2)다시 말하면, 지금 여러분은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만을 연관시켜 볼 수 있을 뿐이죠.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현재의 순간들이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지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만 합니다.

 

익숙한 사자성어 새옹지마(塞翁之馬), 네 글자로 대치할 만 이야기 아닌가. 그리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때는 불행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때 그런 것이 참 다행이었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시점이 언제이냐 하는 거다. 바로 지금 할 수 있는 말이고, 지금에는 현재(상태)와 이전인 과거의 경험이 포함된다. 미래를 얘기할 수도 없으려니와 미리 이럴 것이다, 라고 예단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인생의 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 세 시기로 나뉜다. 그러나 ‘과거-현재’와 ‘미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큰 강(江 )이 놓여 있음에 대한 인정, 그 발견이 소중한 것이다.


세네카의 철학에세이 『인생이 왜 짧은가』(이하 '인생 짧음')에는 이와 맥락이 닿는 대목들이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허둥지둥 살며 미래에 대한 기대에 젖어 현재에는 싫증을 내지요.(인생 짧음 8-8) 그렇지만 순간순간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쓰고, 하루하루를 마치 자신의 전 인생인 양 꾸려나가는 사람은 내일을 바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지요.(인생 짧음 8-9)“

 

내일(미래)이 다가오는 것을 막을 수도 없으려니와, 오늘 이 순간(현재)도 잠시 후면 어제(과거)가 되지 않느냐. 하루하루 알뜰하게 쓰면서 담담하게 살아가라. 그런 얘기다. 세네카는 좀 더 구체적으로 유사한 주장을 펼친다. 

 

세네카의 <행복한 삶에 관하여>,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가 필사책으로 나와 있다.

 

“세상에 자신의 선견지명을 자랑하는 자보다 더 어리석은 자가 또 있을까요? 그들은 더 잘 살려고 정신없이 분주하지요. 그들은 인생에 대비하기 위해 인생을 보내고 있지요. 그들은 먼 미래를 내다보며 계획을 세우지만, 인생에서 가장 큰 손실은 뒤로 미루는 것이지요. 뒤로 미루는 것은 다가오는 족족 하루하루를 앗아가고,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약속하며 현재를 낚아채가지요. 기대(期待)야말로 내일에 매달리다가 오늘을 놓쳐버리게 하니 인생의 가장 큰 장애물이지요. 그대는 운명의 여신 수중에 있는 것을 탐내다가 그대 수중의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오. 그대는 무엇을 원하며, 어디로 향하고 있지요? 미래는 모두 불확실한 법이오. 현재를 살도록 하시오!”('인생 짧음' 9-1 전문)

 

현재를 살라! 많이 슬프고 도저히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는 현재가 그런 것일지라도 그것은 당신에게 주어진 당신의 시간이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혹은 과도한 혹은 조급한) 기대야말로 인생의 가장 큰 장애물이다.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목표나 희망 없이 살라는 얘기? 그건 아니다. 불확실한 미래의 나를 그리며 흘러가는 현재의 시간들을 놓치지 말라는 얘기다. 또한 나의 과거는 누구의 것도 아니며 고정불변이고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나만의 자산이라는 다음 인용에서 세네카의 메시지는 더욱 분명해진다.

 

“하지만 과거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이미 봉헌된 신성한 부분이며, 인간에게 닥칠 수 있는 모든 우연을 초월하여 운명의 지배에서 벗어나 있어요. 과거는 궁핍에도, 두려움에도, 질병의 엄습에도 동요하지 않지요. 과거는 방해받을 수도 빼앗길 수도 없지요. 과거는 지속적이고 근심 걱정 없는 재산이지요. 현재의 날들은 하루씩 다가오며, 그 하루는 순간순간으로 다가오지요. 그러나 과거의 날들은 그대가 명령하기만 하면 모두 한꺼번에 다가와서는 마음대로 관찰하고 붙잡도록 내버려둘 것이오.“(인생 짧음 10-4)

 

과거는 흘~러갔다! 대중가요의 한 자락처럼 과거는 이미 마침표가 찍힌 문장이며, '불가역적인' 것이다. 아름답고 달콤한 것이든 쓰라린 아픔이든 과거는 내가 잊고자 해서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아픈 기억일수록 당장 쉽게 잊히지 않고, 자신을 오래 괴롭힐 것이다. 그 오랜 앓이를 통해 우리는 단련된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그 순간의 점들을 반추할 수 있을 때, 연결지어 볼 때 보이는 뭔가가 있단다.

* 스티브 잡스에게 그 기간은 10년가량이었다. 지난 10년 동안 무엇을 Y축의 기준으로 하건 X측을 흐르는 시간으로 할 때, 그때그때 찍히는 좌표(점)들이 있고, 그것들을 연결하는 동안 오늘의 내가 누구인지 성찰할 수 있으며, 그것은 누구의 것도 아닌 나만의 자산(資産)이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명령하기만 하면 모두 한꺼번에 다가와서는 마음대로 관찰하고 붙잡도록 내버려“두는 과거라는 경험 자산을 살피는 대신에 내일과 미래의 내 모습을 그리워하는데 시간과 열정을 쏟는다는 것이다.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1)그래서 그 점들이 어떻게든 당신의 미래에 연결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2)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현재의 순간들이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지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만 합니다.

 

혹자는 그럴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성공을 거둔 당신(스티브 잡스)의 이야기니 귀에 솔깃하지 않느냐, 그렇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더 많고, 그들에게 인생은 잔혹한 기억으로만 남을 뿐이라고. 이런 얘기에는 ‘내 상관할 바 아니’라고 단호하게 선을 그으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 세네카의 주장은 단호하다.  “인간의 수명이 짧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수명을 짧게 만들었고, 수명이 넉넉지 못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수명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세네카(BC4년경~AD65년)는 1세기 중엽에 활동한 로마의 대표적 지성으로, 네로 황제 재위 초기인 54~62년에 동료들과 함께 로마의 실질적 통치자였다. 오늘날 그는 인류의 고전으로 널리 읽히는 철학에세이들을 상당수 집필한 저술가로 살아 있다. 예수의 탄생으로 기원전과 기원후가 나뉘는데. 생전의 세네카는 자신의 일생 또한 기원 전과 후로 나뉠 것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어쨌든 그는 인류의 연대기에서 가장 확연한 구분점을 포함한 그 시기를 살다 갔다. 그 종교인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겠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구약과 신약 『성경』은 인류 최대의 베스트셀러일 뿐이다. 또한 스테디셀러, 고전 중의 고전으로 꼽히는 필독서일 뿐이다. 오늘날의 성경으로 집필되고 출간되기까지는 더 많은 세월이 필요했지만, 세네카는 예수가 지상에 머문 시간을 포함하는 인생을 살면서 인간의 삶을 성찰한 글들을 남겼다. 오늘날 『명상록』의 저자로만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는 로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더불어 그는 숱한 명언이나 격언들, 곧 말들의 원 저작권자로 후세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철학에세이라고 분류하기는 하나, 오늘날 우후죽순으로 태어나고 도처에서 난전을 형성하는 ‘자기계발서들의 원조’라고 불릴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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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씀이라도 너무 많이 읽거나 자주 듣노라면 잔소리로 다가와 싫어질 때가 있다. 해서 『문장대백과사전』(이어령 편저)을 읽되, 내키는 대로 페이지를 펴서 서너 페이지를 읽다 잠의 나라로 가곤 한다. 그러다가 다음 일화를 발견했다. 괄호 숫자는 필자가 임의로 부여한 것이다. 

 

"(1)옛날 인도에 아름다운 공주가 살고 있었다. 이 공주는 무척 새를 사랑해서 세계에서 예쁘다는 새들은 모두 사들여서 궁전 속이 온통 새로 꽉 차 있었다. 그래서 모든 대신도 서로 다투어 공주의 눈에 들려고 다른 일은 않고 새 기르기에만 열심이었다. 그 때문에 나라의 정사는 엉망이 되어 백성들의 불평은 자꾸만 높아졌다. 

(2)그런데도 아직 비어 있는 새장이 하나 남아 있었다. 공주는 지금까지 이 새장보다 아름다운 새를 본 일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비워두고 한탄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하들에게 새장 속에 넣을 만큼 아름다운 새를 구해 오면 많은 상과 여기 있는 새를 모두 주겠다고 약속했다. 

(3)그런데 어느 날 한 늙은이가 세계에서 제일가는 새를 가지고 왔다고 말했다. 공주가 새를 보니 과연 기막히게 아름다운 새였다. 공주는 많은 상금을 그 늙은이에게 주고 자기의 모든 새는 날려 보냈다. 모든 새가 미워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새의 깃털은 매일 낡아 가고 울음소리도 흐려져 갔다. 

(4)그러던 어느 날 이 새가 목욕하고 온 것을 보니, 그것은 제일 미운 까마귀였다. 까마귀에 아름다운 색을 칠하고 목에는 은방울을 달아서 좋은 울음소리를 내게 한 것이었다. 공주는 너무도 기가 막혀 그만 울화병으로 죽어 버렸다. (5)개나리는 그 무덤에서 돋아난 나무였다. 까마귀에게 빼앗긴 새장이 너무 아까워 가지를 쭉쭉 뻗어 금빛의 꽃으로 장식할 새장 같은 꽃나무로 변한 것이다."

 

('개나리'50P-5) 출처가 분명하지 않다. 본문 내용으로 보아 인도의 전설 가운데 하나인가 보다. 『변신 이야기』(오비디우스)에 수록된 여러 글들, '현재의 생명체 B는 사실 이런저런 사연에 얽힌 A의 다른 모습이다'라는 변신 공식에 충실한 얘기다. 어쨌거나 이 이야기를 조금 살펴보자. 왕국인 듯한데, 살아있는 새들을 수집하는 공주의 취미 때문에, 나라의 정사가 엉망이 되었다. 왕도 아니고 왕비나 여왕도 아니고 공주가 다스리는 나라도 있나보다. 왕이 무남독녀 외딸인 공주 하나를 남겨놓고 급히 세상을 떠났나 보다. 그리 이해하자. 그리고 공주는 결혼을 아직 하지 않았거나 독신주의자인갑다. 공주가 세상을 떠난 이후는 어떡하지, 선거로 왕을 뽑는 것 아닌 것 같은데.. 둘째, 최고로 가치 있는 하나가 아니면 나름 우수한 다른 새들은 의미가 없다. 이 부분에서 공주는 대(代)를 이를 고민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새는 어쩌면 공주의 배필이 될 남자이고, 최고의 사랑(연인)을 찾는 과정의 상징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공주는 사기꾼이 기획-연출한 제비족을 만났고, 그 충격 때문에 죽음에 이른다. 공주가 죽어 '개나리'라는 꽃나무로 변신했다는 전설인데, 여기에서의 포인트는 새가 아니라 '새장'에 있으므로, 나무 개나리의 줄기가 곧은 듯 하면서도 교차하는 그래서 새장처럼 보이는 바로 그 줄기의 생김에 있지, 황금색 개나리꽃은 그저 장식에 불과하다. '미운 까마귀'와 아주 닮은 사례를 찾아보자. 이솝우화의 '갈까미귀'다.

 

162. 갈까마귀와 새들

제우스는 새들의 왕을 정하려고 새들에게 전원 출석할 날짜를 정해주었다. 제우스는 그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새를 새들의 왕으로 정할 참이었다. 새들은 모두 강가에 가서 목욕을 했다. 갈까마귀는 제가 못생긴 것을 알고는 강가로 가서 새들에게서 떨어진 깃털들을 모아 제 몸에 붙이고 입혔다. 그리하여 갈까마귀는 모든 새들 중에서 가장 잘생긴 새가 되었다. 정해진 날이 되자 새들은 모두 제우스에게 갔다. 갈까마귀도 알록달록하게 치장하고 제우스에게 갔다. 그의 아름다운 외양을 본 제우스는 갈까마귀를 새들의 왕으로 뽑으려 했다. 그러자 새들이 화가 나서 갈까마귀에게서 저마다 제 깃털을 뽑았다. 그래서 그는 깃털을 벗고 도로 갈까마귀가 되었다.

 

이솝 지음, 천병희 옮김 『(정본)이솝 우화』(숲 펴냄) 162번째 이야기다. 훗날 어느 편집자가 덧붙인 이 우화의 교훈은 *이와 같이 사람도 빚쟁이는 남의 돈을 쥐고 있는 동안에는 대단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남의 돈을 돌려주고 나면 자신이 도로 옛날의 자신임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버린 것을 주웠을 뿐인데(일종의 재활용) '빚'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어쨌거나 다른 경쟁자들이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들거나 민의를 반영한 절실한 공약을 자신의 깃털인 양 몸에 붙여  화려하게 '연출'해낸 갈까마귀... 첫 이야기나 둘째 이야기나 모두 까마귀의 일종들이다. 그리고 앞 얘기의 상징을 언급하였듯이(20년 동안 왕 오뒷세우스를 기다리는 『오뒷세이아』의 페넬로페와 그 구혼자들을 떠올려보라) 인도의 공주는 어쩌면 아버지 왕의 유지를 받들어 왕권을 잇기 위한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었으리라.

 

언제 다시 오려나, 바야흐로 내년 총선 이듬해 대선이 이어지는 정치의 계절이 왔다. 시끄럽다. 까마귀와 갈까마귀들의 치장이 한창이다. 국회의원도 아니고 유력 대선주자도 아니지만, 할 말을 하는 정치인, 어느 지방도시의 시장이 얼마전 자신의 책 발행 기념 토크콘서트에서 한 말을 우연히(동영상으로) 보다가, 와 닿는 대목이 있어 옮긴다. 

 

“대한민국 정치를 보면요. 정치인들의 수준, 의식수준이 국민의 정치의식을 결코 넘지 못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국민의 정치의식을 기반으로 (해야)하는 정치인이 훨씬 수준이 낮은 거죠. 대중을 안 믿어요. 오히려 훨씬 수준이 낮아요. 그러다보니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정치를 하되 이것을 농사처럼 해야 되는데, 봄에 씨뿌리고 여름에 김 메고 그리고 그 성과를 가을에 거둬야 되는데, 이런 농사를 짓는 게 아니고, 정치를 하는데 남 농사지은 것을 훔치려고 다니거나 가을 되면 여름 내내 팽팽 놀다가 대중을 설득하거나 아니면 자기가 뭔가 평소에는 잘, 하지 않아. 그러다가 딱 때만 되면 그것을 훔치려고 해, 아니면 농사 안 짓고 있다가 가을 되면 어디 혹시 열매 맺힌 거 없나, 약탈경제 이런 거 하고 있는 수준인 것 같아요, 평소에 투자해야 해요. 저는 이게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고요.”

 

2015년 9월 5일. 성남시청 어느 공간에서 진행된, 『꼬리를 잡아 몸통을 흔들다』발간에 따른 행사, “카페트(카카오톡, 페이스북, 트위터) 친구와 함께하는 토크콘서트”에서 이재명 성남시장이 한 말('팩트TV' 동영상을 보며 해당 부분을 옮김)이다. 까마귀와 갈까마귀의 차이는 '검색'해보기로 하고, 암튼 인도에는 한때 공주가 다스리는 나라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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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뤼시스>와 친(親)하다는 것[1/5]
-천병희의『뤼시스/라케스/카르미데스>』

 

 

木蓮: 꽃들 모두 보내고야 알았네, 그대

또한 연꽃이었음을. 사진과 글: 타임로드

 

□<뤼시스>와 <라케스>와 <카르미데스>까지, 플라톤 대화편 셋이 묶여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천병희 원전번역으로 만나는 『뤼시스/라케스/카르미데스』 얘기다. 낯설기만 한 이 제목들은 고대 그리스의 한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이름들이다. 플라톤의 대화편들 대부분의 제목이 인명에서 따온 것들이다. 책의 제목이기도 이 사람들 대부분은 각 대화편에 중심인물로 등장하여 자신의 사상을 주창하기도 하고, 해당 대화편의 주제와 연관된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들과의 대화마당에는 어김없이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등장한다.

 

□ <뤼시스>와 <라케스>와 <카르미데스>는 초기·중기·후기로 나뉘는 플라톤 대화편들의 ‘초기’에 해당한다. 인간(사물)이 갖춰야 할 탁월하고 유능한 성질, 곧 미덕(arete)을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다. <뤼시스>는 우정이, <라케스>는 용기가, <카르미데스>는 절제가 무엇인가를 탐구한다. 이들 셋 외에도 미덕에 속하는 덕목들은 여럿 있다 하지만, 어떤 한 사람(조직)이 셋 가운데 하나만 제대로 갖춰도 “그 사람은 덕이 있는 사람”이란 칭찬을 받을 만하다. 한 가지를 제대로 갖추기도 쉽지 않은 까닭이다.

 

□ 그런데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생각보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들은 어렵지 않다.” “그러므로 고대 그리스의 내로라하는 인물들과의 대화에 참여하는 일은 가슴 설레는 일이 된다.” 무슨 소리냐, 이의제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아직도 우리의 독자들에게 ‘플라톤은 어렵다’. ‘플라톤은 (여전히)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상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누군가 그것이 ’선입관‘이라고 강변해도 어쩔 수 없다. 사실 플라톤은 쉽지 않다. 다만, 플라톤의 원전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은 ’진행중‘이었고 무엇보다 우리말로 와 닿게 읽을 수 있는 텍스트가 없었기에, ‘플라톤은 어렵다’는 부담감은 현실이 되었다.

 

□ 그러므로 이들 세 편의 대화편은 중기에서 후기로 접어들면서 더욱 난해해지는 플라톤의 대화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고, (독서에) 참여하기가 수월하다고 말해야겠다. 생각해보면 2500년 전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시대나 지금이나 태어나 살고, 살다가 죽어가는 필멸의 존재인 우리 삶의 면면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후대에 이를수록 선배들이 물려준 앎과 깨달음의 유산들 덕분에 살면서 만나는 문제들에 좀 더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우리는 날마다 그날의 괴로움을 맞아 하루 또 하루를 살아가는 것 같다.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든 문제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것들이지 싶다.


 

←<뤼시스>를 읽은 다음에 세네카의

<우정에 관하여>를 읽으면 좋을 것이다.

 

 

□ <뤼시스>에서 만나는 ‘우정’도 결코 만만치 않은 주제다. 이 사람들이 대체 뭔 이야기를 하는 거야, 싶지만 그렇게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부제가 ‘우정에 관하여’이지만 ‘우정’을 ‘사랑’으로 대치(代置)해도 상관없다. 다만 여기에서의 사랑은 흔히 떠올리는 남녀의 사랑과는 좀 다르다. 한 남자가 다른 한 남자를 사랑하는 동성의 사랑 때문에 시작된, 그리고 그 고민을 해소하기 위해 진행되는 대화가 <뤼시스>인 것이다. ‘동성애’ 문제를 다룬다고? 사실이다. 한 청년(남자)이 한 소년(남자)를 사랑하는데, 나 홀로 사랑을 불태울 뿐 이루지 못하는 사랑이다. 그렇다고 이즈음 우리나라처럼 세인들의 평판이 두려워서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 그런 사랑은 아니다.

□ 당시 그리스에서 동성(남자)끼리의 사랑은 사회 문제가 되지가 되지 않았다. 일상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상대를 갖지 못하는 처지가 안타깝고 뭇 사내들은 그런 사랑을 부러워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요즘 기준으로 따지면 ‘여성차별’의 현실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당대의 동성애는 지금의 여자를 향한 남자의, 남자를 향한 여자의 사랑이라고 봐도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나아가 여기에서 다루는 ‘사랑’은 그것이 남녀 사이의 것이든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의 것이든 ‘우정’에 포함된 혹은 우정의 하위 개념으로서의 사랑 혹은 그 역이라고도 할 수 있다. 때로는 어디까지가 우정이고 어디서부터 사랑인지 그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아무튼 표면상으로 <뤼시스>는 동성애에 따른 이야기를 다루는 대화편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니코마코스 윤리학>(아리스토텔레스)

8,9권 '우애'를 다룬 부분을 이어 읽으면 좋지 않을까?

 

 

□ (플라톤의 여러 대화편에서) 고전번역가 천병희는 일관되게 남자끼리의 연애에서 남자 구실을 하는 쪽을 '연인'(戀人; erastes)으로, 여자 역할을 하는 쪽을 '연동'(戀童: ta paidika)으로 옮기고 있다. 대체로 연인은 연동보다는 연상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나 명성이나 인품, (경제적으로) 가진 것에서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랑하는 쪽’이다. 역으로 연동은 사랑을 받는, 곧 연인에게 프러포즈를 받는 상대이다. 소크라테스의 연동은 알키비아데스(15살차, 대화편 <향연> 참조)였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인 파르메니데스(‘만물은 하나다’)의 연동은 자신의 이론을 충실하게 계승한 제자이기도 한 25살 연하의 제논이었다.

 (이어서, 4조각의 글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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