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솝 우화』에는 “동물 말고도 식물, 사람, 신(神) 등이 등장하며 이야기는 대체로 강자의 승리로 끝난다”(옮긴이 서문) 동물들이 나오는 교훈이 담긴 이야기를 이솝우화라고 통칭하는 것에서 보듯 우화에는 동물들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좋은 것’과 ‘나쁜 것’과 같은 개념도 등장한다. 가급적 텍스트 인용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이솝 우화』의 ‘미리보기’(알라딘)가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라 첫 번째 우화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미리보기가 가능하다면 굳이 입력하지 않았을 것).   

좋은 것들은 허약한지라 나쁜 것들에 쫓겨 하늘로 올라갔다. 그러자 좋은 것들이 어떻게 해야 사람들에게 갈 수 있겠는지 제우스에게 물었다. 제우스가 좋은 것들에게 이르기를, 사람들에게 다가가되 한꺼번에 몰려가지 말고 하나씩 가라고 했다. 그리하여 나쁜 것들은 가까이 사는 까닭에 늘 사람들을 공격하지만, 좋은 것들은 하늘에서 하나씩 내려와야 하기 때문에 드문드문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이다. -<001.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 전문


첫 번째 우화가 우화 하면 으레 떠올리는 동물과는 거리가 먼 개념이 등장하는 점이 흥미롭다. 123번째 이야기도 이와 유사하다. 


제우스는 좋은 것들을 모두 항아리에 담은 뒤 어떤 사람에게 간수하라고 맡겼다. 호기심 많은 그 사람은 항아리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고 싶어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좋은 것들이 모두 신들에게로 날아가버렸다. -<123.제우스와 좋은 것들이 든 항아리> 전문


인간의 호기심을 그 누가 말리겠는가? 우화에서는 호기심 때문에 나쁜 결과에 이르렀는데, 플루타르코스의 윤리론집 『수다에 관하여』(천병희 옮김)에는 인간의 호기심이 어떻게 작동되고, 나쁜 습관의 원인이 되는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편으로 이 호기심이 없다면 오늘날과 같은 문명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역설이다. 이쨌든 123번 우화는 ‘판도라의 항아리’[『신들의 계보』 관련 글은 올린 바 있다. 이 책 「일과 날」(47~105행)에서 언급]라는 신화 이전의 유사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천일의 유리1』 리뷰는 이미 썼고, 페이퍼는 『천일의 유리2』와 관련해서 쓰기로 한 것은 『천일의 유리2』는 ‘미리보기’(알라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2권을 1권에 이어 ‘나는 지혜의 고리다’라는 2월 13일 화요일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1권과 2권을 통틀어 모두 1,000꼭지의 에피소드가 한 페이지에 하나씩 소개된다. 그래서 ‘천일’이다. ‘미리보기’에 등장하는 화자들만 나열해도 한눈에 구성의 특이점을 파악할 수 있다. ‘나는 □□이다’의 20일 동안의 □□은 다음과 같다. 지혜의 고리(2월 13일 화요일~) 민요, 스코프(Scope), 눈사람, 길가에 선 채 나누는 대화, 고드름, 관찰, 덧없는 세상, 에어즈 록, 거절, 향응, 흉내, 실의, 폐옥, 선망, 장갑, 귀향, 골격, 자만, 오토바이, 치와와, 색종이(~3월 6일 화요일)


마침 겨울인데, ‘눈사람’은 유쾌하고 ‘고드름’은 평범한 일상의 풍경에 감추어진 익살과 섬뜩한 뭔가를 담고 있다. 굳이 1,000일 동안의 1,000개의 에피소드를 나열한 것은 설화의 집성본인 『천일의 전설』이라는 유실된 페르시아 책에서 유래한 『천일야화 Book of the Thousand and One Nights』 덕분일 것이다. 그리고 ‘천일의 유리’는 1,000개의 시선을 땀은 1,000개의 에피소드(우화들)를 통해 서사를 이어간다. “아직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은 산지에 위치한 마호로 마을의 언덕 위 외딴집에 살고 있는 소년 요이치의 짧은 생애”가 담긴, 소설이다. 속세를 벗어난 (공간) 배경이지만 ‘도시=퇴폐’와 같은 등식에 따른다면 “헛된 집착과 욕망의 포로가 되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무능력함”을 풍자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어 번역본이나 영어 번역본을 거쳐 소개되는 과정에서 그런 ‘가위질’이 다반사가 되는 바람에 이솝은 오히려 딱딱하고 근엄한 도덕 교사로 변해버렸다. 서너 편 정도만 읽어봐도 우리가 알고 있던 이솝의 모습이 그의 본디 모습과 얼마나 다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솝 우화』, 옮긴이 서문 중에서 


왜 원전을 읽어야 하는지, 한 언어의 집인 콘텐츠를 다른 언어의 집으로 제대로 옮기는 일은 국가가 지원해야 할 사업이며, ‘천일의 유리’라는 콘텐츠는 거슬러 올라, 가령 '『이솝 우화』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환경이기에 가능했다고 하겠다. 왜 우리는 아직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 없는가? 


“...나는 고양이만이 아니라 인간의 몸에도 구멍을 뚫을 수 있는 힘을 숨기고 있다. 그걸 잘 알고 있을 그가 아직은 더 살아야 한다는 말을 뱉자마자 벌렁 큰 대자로 드러누워, 당당하게 가슴을 내 쪽으로 향한다. ...” -나는 고드름이다, 2월 18일 일요일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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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7 20: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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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랏말싸미>는 여인(궁녀)의 구강 구조까지 클로즈업을 하는 등 표음문자이자 '설형문자'인 한글의 창제원리를 디테일하게 소개한다. 알고 있다고 여겼지만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을 영화를 통해 대중들이 알게 되었다. 이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나름의 역할을 한 것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 한 편의 영화에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없고, 사실이 그렇다. 천만관객 국내 영화가 너무 많아서인지, 이 영화의 관객이 채 100만을 넘지 못하는 현 상태가 아쉬운 이유다. [영화 <나랏말싸미>(THE KING'S LETTERS, 2018 제작, 2019.07.24 개봉, 954,800명(2019.08.31, 영진위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01. 말은 있는데 문자가 왜 없을까, 한글창제는 호기심에서 시작되었다. 
모든 주의(主義)는 프레임(frame)이 그렇듯, 맹목적일 때 고착화될 때 위험해진다. 항상 예외는 있는 법이고, 세월이 흘러 한때 사론이 정론으로 자리바꿈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主義)는 주의(注意)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이 세계(시장)에 내놓아도, 이것만은 우리것이라고 자랑스럽게 내세울 세 가지 정도를 꼽으라면 그 첫째가 한글이다. 셋 중 하나로 조선후기에 시작된 민화(民畵)를 꼽기도 한다. 일본의 강점에 의해 조선이 근대화된 것이 아니라, 상인세력들의 급부상과 양반계급의 몰락 등 자발적인 근대화의 싹을 '민화'의 제작과 거래, 소유 등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광화문 한복판에 세종대왕상이 서 있는 것은 타당하다. 세종대왕이 주도한 한글창제는 우리 민족의 자부심이며, '민족주의'를 얘기할 때, 제1근거가 된다. 그런데, 왜 한글을 창제하기로 마음먹은 것일까? 결과적으로 애민(愛民)에 따른 훈민(訓民)의 필요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왕조의 4대 왕에 이르러 왜 갑자기 이런 사업이 추진된 것일까? 그 계기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거창한 이유가 아니고 (어쩌면 사소한) '호기심'의 발로라고 본다. 말은 있는데 왜 그 말을 기록할 문자는 없는 것일까? 그러나 이런 사소한 호기심은 문자혁명을 이룩했다.
조선창업 프로젝트를 주도한 정도전은 왕권과 신권의 조화, 공정하게 경쟁하고 건강한 갈등이 있는 그런 나라를 꿈꾸었다. 한쪽으로 치우침으로써 권력이 남용되는 것을 경계한 것. 세종대왕은 아버지 태종과는 다른 방식으로 왕권 강화책을 도모하는데, 창제한 한글은 결정적인 무기가 된다. 중앙집권의 강화, 민심을 왕정에 반영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말을 그대로 기록할 수 있는 문자의 발명이었다. 특권(양반)층이 반발하는 것 또한 당연했다. 한글 창제와 반포를 두고 왕권과 신권이 극렬하게 신경전을 벌인다. 이 영화에서도 세종대왕이 왜 한글을 창제할 생각을 하게 되는지, 그 출발이 '호기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에피소드(잘 기억나지 않는다)를 부각시켜야 했다.
철학이든 과학이든, 하드웨어이건 소프트웨어이건 새로움 또는 새로운 것의 창조는 이 호기심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면 불편함의 발견인데, 이 발견이 곧 호기심이고 호기심 때문에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 이 호기심을 억누르지 않고 그 궁금증을 풀었을 때, 발명품이 탄생한다. 한글의 탄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세종대왕 제위 시에 현대의 과학에 힘입은 발명품처럼 그런 새로운 창안 품들이 속속 개발되었다는 사실을 두루 감안할 때, 세종대왕은 호기심이 무척 많은, 그러나 생각에만 머물지 않고 실천적으로 결과물을 낸 과학자이자 언어 철학자가 된다. 이 영화의 영어명은 <THE KING'S LETTERS>다. 난독증도 아니고, 한글의 실체, 한글이 가진 힘을 제대로 홍보한 영화가 역사왜곡 논쟁의 거미줄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올해 아니 내년쯤의 한글날 TV영화로 방영하는 1순위 영화가 될 것인데, 새삼스럽게 불필요한 논쟁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호기심’에 대해 살핀다.

 

#2. ‘지혜 사랑’(철학) 원천은 호기심, 당대 현실에 대한 실망감에서 시작

"플라톤과 그를 따랐던 많은 철학자에 따르면, 지혜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철학의 원천은 호기심입니다. 우리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왜 전지전능한 신이 있는데도 악이 있는지, 무엇이 선을 선으로 만드는지 궁금해 합니다. 심지어 아이들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철학이 필요한 순간』(스벤 브링크만 지음, 다산초당) 29면
덴마크 사람. 철학 강연으로 유명하며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벤 브링크만의 ‘강의록’(책) 중 일부다. 철학은 우리가 1)지닌 개념을 검토하고, 2)더 명료하게 질문하고, 3)보다 더 정확하게 대답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 그런데 철학이 호기심에서 시작된다는, 플라톤 철학의 출발점과는 좀 다른 관점이 있다. 현대 철학자 사이먼 클리츨리의 의견인데, 철학이 ‘실망감’에서 나왔다는 것. 우리 마음에 있는 '사회가 정의롭지 않다는 실망감'이 정치철학에 대한 필요를 낳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열망을 낳았다는 것이다. 한편 크리츨리는 철학은 ‘신이 없다는 실망감’에서 나온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폭력적이며 불공정한 세상'에서는 선이 끝끝내 승리할 때가 드물고, 악인이 행복하게 살기도 합니다."(앞의 책)
그렇다면 플라톤에서 전환점을 맞이하는 철학의 출발점이 '호기심'이란 것과, 현대 정치철학의 출발점이 '실망감'이라는 의견은 상호 충돌하는 것일까? 소크라테스를 떠올린다. 학교에서 배웠거나 인터넷에서 읽었거나 역사적 인물로서의 소크라테스도 좋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에서, 크세노폰의 진솔한 회상에서 만나는 보다 진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떠올려도 좋다. 그는 호기심이 많았고, 그것을 억제할 수가 없어 아테네 시내를 어슬렁거린다. 그리고 당대의 내로라하는 지성들, 권력을 쥔 정치가들,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예술가들을 만나 공개토론을 진행했다. 논쟁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인 양, 그의 분주한 행보는 호기심의 발로였다. 그러나 당대의 현실정치에 대한 실망감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초기 플라톤의 대화편들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가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는 철학자라면, 중기에서 후기에 이르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는 현실(정치를 포함 거의 모든 것)에 대한 '실망감'에서 (플라톤이) 철학하고 교육효과를 늘리려 집필한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이 있었고, 당대에도 직접 혹은 간접으로 현실정치에 개입하는 소피스트(연설가들)들이 있었지만, 서양철학의 진정한 출발은 소크라테스-플라톤이라도 보는 데 이의는 없을 듯하다. 서양철학의 전통은 이처럼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어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고, 때로는 동양의 사상과 교류했다. 철학자를 뜻하는 영어 'philosopher'은 '지혜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다.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플라톤)는 '지혜 사랑'을 직접 언급한다. 철학자들에게는 있지만 소피스트들에게는 없거나 결여되어 있는 것, 그 차이를 설명하면서다. 최근 발간된 『철학의 역사』에서도 공감할 수 있는 의견을 발견한다.

"서양철학의 전통에서 중시하는 지혜란 단지 어떤 대단한 인물이 참이라고 말해주었다는 이유로 믿는 게 아니라 논쟁하고 추론하고 질문하는 데에 바탕을 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지혜는 수많은 사실을 아는 것이나 어떤 일을 하는 법을 아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의 한계 등 우리 존재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했다. 오늘날 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가 한 것과 거의 흡사한 일을 하고 있다." -『철학의 역사』12~13면, 나이절 워버턴, 소소의책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은 거의 대부분이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당수는 자문자답, 대답하기 위해 스스로 하는 질문이다. 질문은 관심, 질문은 문득 고개를 쳐든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앞서 사이먼 클리츨리의 의견(철학은 실망감에서 출발한다)은 소크라테스 시대에 이미 시작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새로운 관점에서 아테네를 바라보았고,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하기에 미워할 수도 있는 것. 그러나 역설적으로 아테네 정치가들(실력자들)이나 명망가들, 투표권을 가진 시민의 상당수에게 소크라테스는 존재 자체가 불편함이었다. 사형판결로 자명했고, 자살과도 같은 것이었다. 세계의 실재에 대한 객관적인 앎, 과학의 출발점도 호기심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왜 당대의 아테네 시민들은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궁금증을 풀기 위해 아테네 시내를 배회하는 소크라테스를 불편하게 여겼을까? 호기심의 어두운 면이 있다.

 

#3. 수다에는 수다 자체 못지않은 큰 악덕이 따르는데, 호기심이다.

플루타르코스(기원후 50년 이전~120년 이후)의 철학에세이 「수다에 관하여」에서는 수다와 관련된 호기심의 실체가 드러난다. 수다에는 수다 자체 못지않은 큰 악덕이 따르는데, 호기심이란다. 수다쟁이는 (무엇이건) 말을 많이 할 수 있기 위해 많이 듣고 싶어 한다는 것, 세상사 이것저것, 근동의 장삼이사에 대해 필요 이상의 호기심을 갖고, 필요 이상의 호기심이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는 것. 가짜뉴스가 판치는 작금의 세상은 또 어떠한가!
"그들은 특히 자신의 수다에 새로운 소재를 공급하기 위해서 비밀스러운 또는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내려고 꼬치꼬치 캐묻고 돌아다닌다. 그들은 얼음을 손에 들 수 없으면서도 놓으려고 하지 않는 어린아이들과도 같다. 그러므로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다쟁이는 남의 비밀을 가슴에 품지만, 그곳에 간직하지 못하면 마치 뱀에게 물리듯 그 비밀에 물리고 만다고. 동갈치나 독사는 새끼를 낳다가 터져 죽는다는데, 비밀도 입 밖에 나오면 누설자를 파멸케 하기 때문이다." -『수다에 관하여_플루타르코스의 윤리론집』 12장 508c~d
앞서 수다쟁이는 "말을 많이 할 수 있기 위해 많이 듣고 싶어 한다"고 했다. 상대방의 의견을 귀를 기울이는 '경청'은 그 자체로는 훌륭한, 특히 현대의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미덕이다. 그런데, 말을 많이 하려고 듣는, 곧 정보수집 차원에서 ‘엿듣거나’ ‘캐묻는’ 경청은 지양되어야 하는데, 그 동력이 호기심에서 나온다는 얘기다. 인용에서는 수다쟁이의 호기심보다는 비밀을 간직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폐단을 문제 삼았다. 하지만 과도한 호기심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는 사형된다. 이후 500년이 지난 기원후 100여 년 무렵, 플루타르코스는 수다 관련 글을 썼다. 그런데 이 저자는 소크라테스가 활동하던 그리스(아테네)의 황금시기에 쏟아진 저작들과 작품들도 두루 읽고, 사례를 수집하여 집필했음을 인용과 주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금은 조심스럽지만 소크라테스를 플라톤처럼 '섬김' 수준으로 보기보다는 그냥 당대를 함께 살았던 사람들에게 소크라테스는 어떤 사람으로 보였을까, 호기심이 발동한다. 당시 아테네 시민들은 소크라테스를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할 뿐 아니라 곳곳에서 이야기좌판을 펼치는 수다쟁이, 성가신 존재로 여겼던 것은 아닐까? 보통 사람들로서는 살아가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논리를 펼치는 것이며, 이것저것 관심사가 아닌 것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대화를 엿보았다면 그랬으리라. 소크라테스 자신이 '캐묻지 않은 삶을 살 가치가 없다'(<변론>)고 재판과정에서 당당히 밝혔다. 그간의 삶이 그랬고 앞으로도 영원히, 죽어 저세상에 가서도 이런 철학의 방법론을 고수할 생각이라고. 소크라테스의 수다는 제자 플라톤에 의해 정리되고 보완됨으로써, 서양철학의 아침 해, 둥근 해로 떠올랐음에도 말이다. 플루타르코스는 같은 책에서 '수다'라는 고질적인 병에서 벗어나는 처방을 한다. 여기에 거론되는 소크라테스를 보면, 소크라테스를 그렇고 그런 수다쟁이쯤으로 폄하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호기심은 철학의 출발점이기도 하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50%의 확률로 잘못 그리고 과도하게 작동하면 수다쟁이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하는 등,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갖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허기나 갈증을 느끼지 않는데도 먹거나 마시도록 유혹하는 먹을거리와 마실 거리를 피하라고 권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수다쟁이는 가장 마음에 들거나 평소 지나치게 심취하는 화제는 조심해야 하며, 그런 화제에서는 밀려오는 말의 물결에 완강하게 저항해야 한다." -『수다에 관하여_플루타르코스의 윤리론집』 22장 513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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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장르'라는 말이 태어난 영화 <기생충>을 개봉일(5월 30일)에 봤다. 이틀 뒤 지인에게서 카톡이 왔다. 지금 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이라고. 감상평을 듣고 싶었으나 하루를 참았다. 한국 영화사의 새로운 역사를 쓴, 칸느영화제의 그랑프리_황금종려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 때문일까, 좋은 작품이기는 한데, 내게는 개운치 않은 뭔가가 남은 작품이었던 것, 그렇게 열심히 관련 기사를 읽은 것 같지는 않은데,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내가 극장을 나선다는 지인에게 보낸 문자는 다음과 같다. '스포일러에 특히 취약하다는 것이 이 영화의 약점'.

 

스포일러주의보 발령! '스포일러에 특히 취약하다는 것이 이 영화의 약점'

이 영화의 감독도 영화제 현장에서 세 개의 언어로 스포일러 주의를 당부했다 하고, 귀국 후 인터뷰에서 그런 당부를 잊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다. 기존 영화 문법의 모범답안을 뛰어넘는 플러스 알파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칸느영화제를 의식하고 제작한 것은 아닐 테지만 결과적으로 칸느영화제 수상을 위한 영화가 되지 않았나 싶다(칸느 영화제 수상작들을 살펴보면 나름대로의 흥행과는 반비례하는 독특한 특성이 있기에 하는 말이다). 
영화를 보면 재미 삼아, 또는 나의 대중성 인지 정도를 측정하기 위해 흥행 예측을 해보곤 하는데, 수상 효과가 적지 않게 작용하겠지만, 그런 사실을 배제한다면 ‘대박’까지 기대하기는 좀 힘든 영화가 아닐까! 한 편의 영화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 그런 기준으로 볼 때 말할 수 없는 뭔가가 앙금처럼 남았다. 해서 개봉중인 다른 영화 한 편(<악인전>)을 극장을 옮겨가면서까지 관람해야 했다. 그리고 이 글은 어제 조조(5000원이란 착한 가격 덕분에)로 한 차례 더 <기생충>을 보고서 쓰고 있다(그게 뭐지? 스포일러 때문에 훗날 쓰기로 한다).

 

이틀 만에 한 차례 더 본 영화, 말할 수 없는 뭔가가 앙금처럼 남아
내가 혹은 우리가 한 편의 영화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팝콘영화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그렇게 분류되는 영화들은 작품성이란 측면에서 폄하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한 편의 영화에서 기대하는 것은 그리 큰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너무 진지하고 고단한 삶에서 잠시 떠나 있고 싶은 소박한 바람, 영화 한 편을 보는 동안이라도 현실을 잠시 잊고 싶은 그런 어루만짐에 대한 기대, 이것을 거의 모든 영화들이 지향하는 '대중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이에 있다. 그러니까 '봉준호 장르'는 문제소설이라고 하듯 문제(예술)영화와 대중영화라는 '사이' 어딘가에 있고,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시험대에 올랐다.

 

한 편의 영화에서 기대하는 것은 그리 큰 것이 아니지 않을까?

이승우는 문고판으로 펴낸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에서(<저 아래층에서 끌어올려라>) 얘기한다. "소설은 대체로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그것만이라면 어쩐지 허전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어쨌단 말이야? 하는 질문과 맞닥뜨리지 않겠는가"(책 146면)라고, ‘그래서 어쨌단 말이야?’라는 핀잔을 듣는 소설은 지표수의 물론 만든 맥주와 같다는 것, 그는 '지하 150미터에서 끌어올린 암반수로 만든' 맥주의 히트 사례를 예로 들면서 현실을 기반으로 하되 필요하다면 신화를 활용하고 상상력을 풀(full)가동할 것, 상징과 은유를 적극 활용한 소설로 다양성과 개성을 확보할 것을 주문한다.


"만일 그들의 사랑이 현실(지상)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한 주인공들의 지하(비현실)에 대한 꿈꾸기나 신화 속 인물에 대한 동일시의 과정을 보여준다면 소설은 달라질 것이다. 층이 생기니까. 그 내부의 깊은 층에서 끌어올리려 한다면 메타포나 상징은 지표면의 그렇고 그런 사연들에 대한 및을 비춘다." (책 146면)

 

 

주인공들의 지하(비현실)에 대한 꿈꾸기나 신화 속 인물에 대한 동일시 과정을…….

 -작가는 소설 작법을 다룬 이 책에서 몇몇 작가들의 작품을 제시하지만, 인용한 부분의 사례로 그의 장편소설 『식물들의 사생활』이 대표작이라고 필자는 생각했다.

-또 하나의 예를 든다면 2015년(39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김숨 작가의 중편소설 「뿌리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보이지 않지만 있는, 보이는 것 이상으로 대칭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로 인식의 지평을 넓힌 혹은 연장한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이승우의 『식물들의 사생활』에서도 인간이 나무로 변신하는 모티브 못지않게 지하(뿌리)의 세계가 신화적인 상상력을 자극하여 새로움을 창조한다.

-오디비우스의 『변신이야기』는 그러한 일이 가능하게 만드는 가장 오래된 상상력 사전이라고 할 수 있으면, 이런 관련성은 다른 글에서 이미 살폈다.  

 

 

 

 

신화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변신이야기』, 가장 오래된 상상력 사전

시간(서사)과 공간(묘사)은 소설에서나 영화, 모든 이야기의 기본 구성요소다. 우리 삶의 전제다. 봉준호의 <기생충>은 좋은 소설(이야기)에 대한 이승우의 주문에도 A플러스 학점을 받을 만큼 모범작이라고 할 수 있다. 지하-반지하-지상이라는 현실 속 공간에 대한 설정, 그것은 또한 상상력의 영토를 확장이며, 동시에 인간들의 빈부 차이(계급갈등)에까지 연결되고 있다. 이 점이 돋보인다.

영화의 주요 공간인 글로벌 IT기업 CEO인 박사장의 저택이라는 공간의 1층에서 2층으로 ‘오르는’, 부엌 창고에서 지하의 세계로 ‘내려가는’ 혹은 ‘떨어지는’ 계단에 주목한다. 잘 다듬어진 잔디 정원은 '그렇고 그런' 풍경일 수 있지만 지상층과 2층(이상) 공간들은 실제 집의 구조보다도 넓고 쾌적한데, 지하의 세계와 극적 대비를 이루는 설정으로 읽힌다. 어쨌든 영화 <기생충>은 서사를 제외하고도 공간에 대한 묘사(세트 설정과 세팅)만으로도 상당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지하와 반지하 그리고 지상, 현실 공간에 대한 설정, 빈부 갈등에까지 연결

"아무리 튼튼한 담론이라고 해도, 아니, 튼튼할수록 더욱더 스스로 몸을 해체하여 다른 몸으로 변신하여야 한다."(이승우 같은 책, 141면)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에서 지하(저승)를 통치하는 은둔의 신 하데스가 딱 한 번 직접 등장할 법한 사건이 벌어진다. 제우스의 재가로 올룀포스의 신들까지 자신이 지지하는 세력(그리스연합군과 트로이아군)에 가세하여 총력전이 벌어지는 20권에서다. "좀 조용히 살게 해주면 안 되겠니?" 요란한 지상의 전투에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그저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참전하는 것(여기까지),

 

*영화 <기생충>에서 펼쳐지는 지하의 세계에 대한 설정은 (특히, 3월에 개봉한 <어스US>를 비롯 지하세계를 다룬 영화들이 적지 않지만) '한국적인' 현실성이 겸비되면서 관객을 새로운 차원으로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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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road 2019-06-02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이승우) <시간이 만든 소설, 공간이 만든 소설> 마무리 부분에서 이 글의 제목을 차용했다. ˝안개나 비고 그냥 내리지 앟는다. 현실 속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소설 속에서는 내릴 만할 때 내리고 표현할 이지가 분명할 때 내린다. 그것들이 만드는 분위기와 이미지가 소설의 몸을 이룬다. 때때로 공간이 곧 캐릭터라고 말해지는 것은 이런 경우다 ˝(153면)
 

2017년에 제작된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 Roméo et Juliette>(독일, 감독 위르겐 플림)은 2018년 5월에 개봉되었다.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은 현재 무대에 올라 공연중(2019.03.02~2019.06.30, 서울 종로구, 명작극장)이다. 연극으로 영화로 책으로,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과 함께 잘 알려진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에 대한 사랑은 식을 줄 모른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원형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수록된 「퓌라무스와 티스베」다.
[자세한 이야기는 필자의 리뷰: '변신이야기'와 '이솝우화'에서 만나는 뽕나무와 오디, 참고].

필요시 클릭, https://blog.aladin.co.kr/791561146/8257185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의 원형은「퓌라무스와 티스베」
19세기 근대 역사학자 랑케는 로마 문화를 호수로 비유하면서 고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라는 호수로 흘러들어갔고, 근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의 역사에서 다시 흘러나왔다고 말했다.(위의 책 옮긴이 서문) '흘러들어갔고' 앞에는 '그리스문화'가 자리할 것이다. 결국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의 원형은 그리스 신화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사랑의 완성은 결혼'이라는 믿음에는 숱한 균열이 생겼지만, 그래도 남녀 혹은 여남의 사랑이 완전하고 안전한 것이기 위해서는 결혼이란 제도가 필요하다. 다만 결혼이 사랑의 새로운 시작이기를 바랄 뿐. 어쨌든 결혼은 당사자들만의 결합이 아니라 집안과 집안의 관계 맺음이다. '때문에' 서로 눈이 맞은 연인들이 숱한 장애물을 넘고 넘어 결혼에 이르고, 그 사이에 안타까운 사연들이 많다.

 

랑케, "고대의 모든 역사는 로마라는 호수로 흘러들어갔고,

근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의 역사에서 다시 흘러나왔다."

이것은 실화다! 한국의 섬이란 섬을 두루 여행하며 글을 쓰는 강제윤 시인은 섬을 탐사하는 동안 수집한 신화와 전설들을 들려주는데, 다듬으면 보석이 될 원석의 발견과 유포라고 할까? '섬'이라는 고립성 '덕분에' 그러한 이야기가 탄생하고, 대대손손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당신에게, 섬』(꿈의지도, 2015)에는 신화와도 같은 현대의 실화가 등장한다. 제주 서귀포 가파도라는 섬 이야기(「가파도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등장하는 김동욱 전 이장님의 사랑 이야기다.
그에게는 두 살 아래 여동생이 있다. 여동생이 고등학교를 서울로 갔다. 방학 때마다 고향에 와서 놀이 삼아 물질을 했는데, 어느 날 물속으로 들어간 뒤 나오지 않았다. 여동생의 해녀 친구는 해녀대장이던 자기 어머니에게 구조를 요청한다. 그러나 다들 외면했다.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을 건져 주면 죽은 사람에게 남은 숨을 다 줘 버리기" 때문에 "다시는 해녀 노릇을 할 수 없다."는 오래된 믿음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이장님 집안은 여동생의 친구네 집안과 원수가 되었다. 여동생의 죽음에 죄책감을 가진 친구를 위로하고 달래는 동안 이장님과 여동생의 친구는 연인 사이가 된다. 그러나 결혼 허락은 떨어지지 않고, 이장님은 유랑의 길을 떠나 객지에서 살아간다. "귀신이 세 개 들어도 남녀 간의 사랑은 못 말린다는데 내가 졌어." 그렇게 10년 만에 이정님은 결혼 허락을 받는다.(책 172~174면 요약) 강제윤 시인은 '사랑은 힘이 세다'며 실화 소개를 마무리한다.
어쨌든 한국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해피엔딩이다. 그는 가파도를 떠나 몇 달씩 떠돌다 돌아와 살기를 반복했다. 제주도 한 읍의 사무실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기도 하지만 집을 떠나 유랑하는 시간이 늘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이기에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멀리 벗어나야만 하는 선택, 문득 이 이야기를 읽으며 떠오르는 소설이 있다.

 

이것은 실화! 서귀포 가파도 이장님 부부의 '로미오와 줄리엣'
"형에 대한 내 감정은 날로 사나워졌다. 그녀에 대한 말 못할 사랑이 간절해질수록 형에 대한 미움도 커졌다. 나는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결코 허물이 될 수 없다는 명제에만 편집적으로 집착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은 떳떳하고 자랑스럽고 나아가 바람직한 것이다. 사랑의 대상이 누구든, 나는 사랑의 보편성에 매달렸다. 하나의 관념, 또는 추상화된 사랑을 붙잡고 늘어졌다."

_이승우 장편소설 『식물들의 사생활』(문학동네, 2014, 발표는 2000년) 61면

 

어느날 문득 형의 애인을 사랑하게 된 동생이 겪는 번민인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도의적으로 힘든 사랑, 이 소설의 내레이터인 '나'의 사랑은 처절한 비극의 씨앗이 된다. '나'는 자신의 사랑을 다스릴 수 없어, 가출을 하고 수년 동안 객지를 떠돈다. 나와 형과 형의 연인 사이의 삼각 관계는 이 소설의 사랑 이야기 중 '메인'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어머니가 사랑한 '그분'의 사랑도 있다. 그래서 장편소설 제목이 '식물들의 사생활'('들의')이다. '나'는 가출하면서 사진가를 꿈꾸던 형의 촬영장비 일체를 팔아넘기고, 그 안에 든 필름 때문에 형은 강제징집을 당하고, (당국자들의 고의적인 행위로) 지뢰에 두 발목이 잘려 장애인이 된다. '동물'의 세계에서 '식물'의 세계로 진입한 것. '한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좌절된 사랑의 고통을 식물적 교감으로 승화해가는 과정을 처절하고도 아름답게 풀어낸 작품'. (더 이상 얘기하면 스포일러가 될 듯) 어쨌든 이승우는 『식물들의 사생활』로(프랑스 등에서 번역 출판되면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르 클레지오가 '한국 작가 중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작가'로 지목할 만큼 찬사를 받았다.

 

'한국 작가 중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성 가장 높은 작가'로 주목받아
"매끈한 나무줄기가 날씬한 여자의 나신을 연상시켜" 형은 취한 것처럼 말했다. "정말 황홀한 것은 흰 꽃이지. 5월이니까 조금 있으면 꽃이 필 거야. 땅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때죽나무의 흰 꽃들은 은종 같아. 그 아래 서 있으면 딸랑딸랑 종소리가 울리는 것만 같지." 그의 목소리가 깊은 바다에 떨어지는 닻처럼 어두운 숲속으로 유영해들어갔다.  _같은 책, 47면

이승우의 작품들에는 서양의 신화들이 배경에 깔리곤 하는데, 그가 '노벨문학상 수상이 유력한 한국 작가'라는 기대를 모으는 것과 연관이 있다. 서양인들의 시각에서 대체로 수상작이 결정되기에 하는 얘기다. 다시 말하면 이승우의 소설들에 그리스-로마의 신화들이 이야기의 원형으로 차용되고 변주된다는 점이 그들의 '공감을 이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플라톤의 대화편 『향연』에서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펼치는 사랑론이 소개된다(75면). 하지만 소설 전반에 걸쳐 주요한 뿌리가 신화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천병희, 숲, 개정판 2017.10. 초판 2005. 3.)에 소개된 「월계수가 된 다프네」 이야기다.
'활의 신' 포이부스(아폴론)은 쿠피도(에로스)가 활을 구부리는 것을 보면서 비웃고, 쿠피도는 앙갚음으로 화살 두 개를 쏜다. 하나는 사랑을 쫓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을 불지르는 것. 쿠피도는 사랑을 쫓는 화살을 페네오스의 딸인 요정 다프네를, 다른 화살로 아폴로를 쏘아 그의 뼈와 골수를 꿰뚫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시작! 쿠피도의 복수는 잔인하다. 쫓고 쫓기는 사랑의 공방전이 펼쳐지고, 막다른 골목에 이른 다프네는 아버지 신(페네오스의 강물)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그 자리에서 한 그루 나무로 변신한다.

 

『식물들의 사생활』의 밑그림, 『변신이야기』중「월계수가 된 다프네」

그녀의 기도가 채 끝나기도 전에 짓누르는 마비감 같은 것이
사지를 사로잡았다. 부드러운 가슴 위로 엷은 나무껍질이 덮였고,
머리카락은 나뭇잎으로, 그녀의 두 팔은 가지로 자랐다.
방금 전까지도 그토록 빠르던 발이 질긴 뿌리들에 붙잡혔고,
얼굴은 우듬지가 차지했다. 빛나는 아름다움만이 남아 있었다.  _『변신이야기』, 550~552행

             VS

그래도 포이부스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는 나무줄기에 오른손을 얹어 그녀의 심장이
새 나무껍질 밑에서 아직도 헐떡이는 것을 느꼈고,
나뭇가지들을 인간의 사지인 양 끌어안고 나무에 입맞추었다.
나무가 되어서도 그녀는 그의 입맞춤에 움츠러들었다.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대는 내 아내가 될 수 없으니,
반드시 내 나무가 되리라. 월계수여, 내 머리털과 내 키타라와
내 화살통에는 언제나 네가 감겨 있으리라"  _위 같은 책, 553~559행


신화에서 소설에서 발견하는 또 하나의 사랑, "사랑은 하는 것"
쿠피도의 복수 때문이기는 하지만, 이 변신 이야기에서 '사랑은 하는 것'임을 추출할 수 있다. 『식물들의 사생활』에서도 나의 형의 연인인 순미를 향한 사랑, 아버지의 '그분'에 대한 사랑을 평생 간직하고 살아가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아폴로의 사랑을 닮았다. "그가 수집한 변신 이야기는 내가 알고 있는 식물의 숫자보다 많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좌절된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소설, 146면)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칸느영화제)을 받았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영화를 아직 보지 않았으니 이 정도)임을 입증하였다고 할까. 신화는 동서양이 닮아있다. 그럼에도 세계의 독자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신화나 그들의 정신세계의 원형이 되는 이야기들을 꼼꼼히 읽고 변용하여 사용할 때,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희소식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종려나무 꽃이랍니다: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칸느영화제)을 받았다. 트로피의 상징은 종려나무 잎이다. 다른 영화제의 대상인 황금사자상의 경우처럼  '황금'은 '최고'를 뜻하겠지만 사자는 황금색과 연관이 있다. 종려나무는 지중해 일원에 많기도 하고, 최근에는 우리나라 남쪽 지방에서도 이국적인 느낌을 주겠다면서 가로수로 종려나무를 심기도 한다.

최근에 종려나무 꽃을 보고 아 황금색이구나, 하고 핸드폰으로 촬영한 것인데, 마침 봉준호 감독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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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음식을 보면 왜 사랑하는 사람이 떠오를까요?'라는 물음으로 시작하는 광고, <사기열전>의 '미자하 이야기'를 상기한다. 그 다음인가, 효(孝) 시리즈의 다음 버전인가, "꼭꼭 씹으면 다 맛집" 이라는 카피가 와 닿는 잇몸 약 광고가 있다. <한국인의 밥상>을 진행하는 최불암 선생의 내레이션이다. 한 끼 식사만 그럴까? 모든 책은 아니지만 그래도 단행본 한 권으로 세상에 나올만한 요건을 갖춘 것이라면, 잘근잘근 씹듯 읽는다면 얻을 것이 있다. 너도 그래, 나도 그렇던데, 감칠맛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 책은 고전이 된다. 읽기는 곧 쓰기, 독서와 창작 관련 구절들을 모아보았다. 

 

방송인 최불암, "꼭꼭 씹으면 다 맛집", 책 읽기도 그런 것 같아

"느리게 읽기가 빨리 읽기보다 더 어렵다는 건 느리게 읽기를 해본 사람은 안다. 그것은 마치 오래 밥을 씹는 것과 같고 자동차를 버리고 자전거의 페달을 아주 천천히 밟는 것이 어려운 것과 같다. 음식은 식도를 타고 넘어가려 하고 자전거는 달리지 않으면 넘어지기 쉽다. 그러나 음식은 오래 씹어야 제 맛이 나듯, 자전거 페달을 느리게 밟다보면 그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된다."  -이승우,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마음산책, 2019-02-25) 24면

앞서 거론한 광고 카피가 여기서 나오지 않았을까, 정곡을 찌르는 문장이다. 작가 이승우는 우리나라의 중견작가이면서 한 대학의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소설 쓰기와 관련하여 자신의 노하우를 후학들과 나누는 것. 그러나 이 책에서 작가는 소설 창작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역설한다. 소설을 읽어라, 그러면 소설 창작 방법이 보인다. 소설 창작의 교과서가 따로 없다. 그런데 작가는, '가급적 느리게 깊이 읽는 것이 창작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독서법의 하나인 정독과 같은 듯 다른 점이 있는 것 같다. 어쨌든 그는 소설을 천천히 읽을 때 문장들은 독자의 사고를 자극하고 상상력을 추동한다는 것, 문장들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나는 1)대들거나 2)반문하거나 3)수용한다. "나의 대듦이나 반문이나 수용에 대한 소설 문장들의 대듦이나 수용이 이어지고, 이런 일들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면서 거기에 하나의 유연하고 둥글고 탄력 있는 공간이 생겨난다." 바로 이 공간에서 소설이 태어난다는 것.

 

작가 이승우, '가급적 느리게 깊이 읽는 것이 창작에도 도움이 된다.'

"섬이 작으니 내도의 숲길은 다해 봐야 3킬로미터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아름다운 원시의 숲을 오래 즐기고 싶다면 보폭을 최대한 늦춰야 마땅하다. 급하게 걸으면 숲길은 금방 끝나고 만다. 섬 밖으로 추방당하지 않으려면 사람들도 달팽이나 거북이처럼 느리게 걸어야 한다. 느리게 걸을수록 우리는 숲이 주는 혜택을 더 많이 누리게 될 것이다. 몸속의 나쁜 기운들이 더 많이 빠져 나가고 숲의 정령들이 불어넣어주는 맑은 기운은 더욱 충만하게 되리라."  -강제윤, 『당신에게, 섬』(꿈의지도, 2015년 7월) 296면

책 읽기도 그런 것 같다. 일단 재밌고, 감동이 있으면서, 술술 읽히는 그런 책은 아껴 읽게 된다. '강제윤 시인과 함께하는 꽃보다 아름다운 우리 섬 여행'이란 부제를 가진 책에서 시인은 경남 거제의 섬 내도의 비경을 소개한다. 인위적으로 만든 섬이 잘 알려진 외도라면 내도야 말로 대조되는 자연 그대로의 섬이라는 것. 내도의 편백나무 숲이 가진 탁월함을 소개하면서 숲길이 길지 않다는 아쉬움을 토로한다. 몸이 건강해야 마음도 건강하다. 그래서 몸의 건강을 이야기하지만 궁극에는 마음의 평화가 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는 동안 생각은 더욱 깊은 어딘가에 이르게 될 것이다. "누구도 얻지 못하고 나만이 온전하게 얻어갈 수 있는" 오직 '한 생각'을 얻는 과정(같은 책 110면). 앞서 소개한 작가 이승우의 느리게 읽는 동안 '나만의' 소설을 쓰게 된다, "유연하고 둥글로 탄력 있는 공간"과의 만남을 떠올리게 된다. 사실 좋은 사진을 얻으려면 천천히 달리는 자전거마저 걸림돌이 된다. 천천히 걸을 때 비로소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프레임을 정하고 하루 종일 한 순간을 위해 잠복하는 형사처럼 기다리는 사진의 대가들이 있다.

 

시인 강제윤, ‘나만이 온전하게 얻어갈 수 있는’ 오직 '한 생각'

"창조적 아이디어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 죽을힘을 다해 몰입해야 나오는 것이 창조력이다. 열정과 고민의 산물이며, 뭔가를 개선하고 바꿔보려는 문제의식의 결과물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집중하고 몰입해야 한다. 절박해야 한다." -강원국, 『대통령의 글쓰기』(메디치미디어, 2014-02-25) 43면
그런데, 무엇에 집중하고 몰입해야 하는가, 관련해서 어떻게 쓰느냐와 무엇을 쓰느냐의 차이를 설명한다. 어떻게 하면 멋있게, 있어 보이게 쓸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는 것은 부질없는 욕심이란다. 그러나 무엇을 쓰느냐에 대한 고민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것. 앞서 소개한 인용들과 맥락이 닿아 있다.
"글의 중심은 내용이다. 하지만 글쓰기에 자신이 없다고 하는 사람 대부분은 전자를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명문을 쓸까 하는 고민인 것이다. 이런 고민은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부담감만 키울 뿐이다. 글의 감동은 기교에서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시인도, 소설가도 아니지 않은가."(바로 위의 책)

 

연설문작가 강원국, 글은 열정과 고민의 산물, “죽을힘을 다해 몰입해야 나오는 것“

말이 글이고 글이 말이다. 그런데 말은 잘하지만 글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글로는 논리정연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말은 어눌하여 상대방을 설득하는데 '걸림'이 많은 사람도 있다. 말이란 잘 쓴 글을 읽는 것과는 다른 현장성과 임기응변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듣는 이를 즐겁게 하는 '애드리브'는 독서를 비롯 숱한 직간접적인 경험이 축적된 상태에서 터지는 것.   그럼에도 말이든 글이든 숙고 끝에 정곡을 찌르는 것이 아닐 때는 하지 않는 것이 하는 것보다 낫다. 플루타르코스의 철학에세이 「수다에 관하여」가 수다쟁이는 어떤 사람이며, 폐해는 무엇이며, 처방까지 제시하지만 가장 심플한 지침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확실한 것은, 말을 하지 않아 이득이 된 경우는 많아도, 말을 해서 이득이 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말하지 않는 것은 언제든 말할 수 있어도. 일단 말한 것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 그것은 엎질러진 물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말하는 법을 가르치는 건 인간이지만, 침묵하는 법은 신들이 가르치는 것 같다. 우리가 비의(秘儀)에 입문할 때 침묵하는 법부터 배우기에 하는 말이다." -플루타르코스, 「수다에 관하여」 8장, 344~345면, 『그리스로마 에세이』(천병희 역, 숲, 2011.12.)

 

플루타르코스, “말하는 법을 가르치는 건 인간, 침묵하는 법은 신들이 가르쳐“
글로 말하기보다는 말로 말하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너 나 할 것 없이 유투브방송을 개설하고, '스피커'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그러나 뭔가 말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말을 하는(방송을 하는), 콘텐츠의 부재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필자만 그런지 모르겠으나 eBOOK의 '음성 듣기'도 거슬린다. 제3자가 개입되어 있는 느낌이랄까, 눈으로 읽으면서 생각하고, 자신의 견해와 일치(공감), 불일치(메모)를 확인하는 독서야 말로 말이든 글이든 창작으로 꽃피우는 진정한 독서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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