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2008년 7.8월 - 통권 101호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직접민주주의’라?

<녹색평론 101호> 2008년 7-8월호.



요즘 신앙서적 이외의 책은 잘 못 봤다. 그래도 이 <녹색평론>만큼은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았다. 그래, 몸이 좀 괜찮다 싶고 방학이라 몸도 쉬고 하기에 얼른 집어 들고 봤다. 오랜만에 보니 눈물이 난다. 이전 호가 100호라고 하는데, 그 중요한 100호도 아직 못 읽었다. 틈을 만들 생각이다.
이번 호의 주제는 한 마디로 이제 대의제 민주주의 접고 직접민주주의 하자인 것 같다. 촛불에서 명확히 민심이 드러났어도 한나라당과 조중동과 쥐박이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다. 왜? 지지율이 놓아서? 아직도 그들을 지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천만에. 제도 탓이다. 그 잘난 대의민주주의 때문이다.
쥐박이가 당선되던 “지난 대선은 유권자 10명 가운데 4명은 투표를 하지 않은 역대 최저 투표율의 대통령 선거였다. 결국 전체 유권자 10명 중 3명의 지지로 새 대통령이 권력을 차지하였다. 올해 4월 실시된 총선은 역대 최저인 46%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유권자의 절반 이상이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를 기피한 셈이다. 결국 전체 유권자 대비 18%의 득표율로 한나라당은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다. 심지어는 지역 유권자 10명 가운데 1사람 이하의 지지로 당선된 경우도 있었다. 대의민주주의의 핵심인 대표성에 심각한 의문점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승옥의 글 중에 나온 대목이다. 황당한 일 아닌가. 지금 한나라당 애들 저리 설치는데 따져보니 고작 18%지지를 먹고서 저리 설칠 수 있다는 게. 열불 난다.
그러니 직접민주주의를 해야 한다. ‘책을 내면서’에서부터 이어지는 좌담, 송기원의 <녹두장군> 서평을 쓴 이명원의 글에서도 그런 주장이 기본에 깔렸다. 당연하다. 촛불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를 해야 한다. 그러나 솔직히 현실감에 있어서는 우려가 된다. 직접 민주주의 좋은 거 모르는 사람 없다. 실현이 어려울 뿐이다. 규모가 이미 동네 정치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동네 정치라도 직접민주주의 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공동체 회복이 우선이다. 물론 이것도 어렵다. 소농 중심의 로칼 푸드 시스템, 뭐 이런 것들이 좍 깔려 같이 가야 한다. 암튼 그래도 꿈은 꾸어야지.
그 테마 말고도 있다. 특히 북한의 기아사태를 보며 새로운 시각으로 쓴 존 페퍼의 글이 심각하게 다가왔다. 그이 말에 따르면 북한의 기아사태는 단지 특이한 독재체제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소련이 붕괴하기 전까지 북한은 그래도 잘 살았다. 소련 붕괴로 값싼 에너지 공급이 끊어지면서부터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에너지가 끊어지자 농업 수확량이 줄었고, 그 타개책으로 산을 다 밀어 농경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우리가 잘 알듯이 비만 조금 와도 난리가 나는 북한의 모습이다. 즉 자연재해는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에너지 위기와 관련된 필연적 결과라는 것이다.
현재 세계의 위기는 에너지 위기, 농업 위기, 기후 변화에 따른 위기다. 근데 북한의 경우를 통해서 보면 이것은 모두 연결된 것이다. 그러니 이건 북한 단독의 문제가 아니다. 북한은 경고음을 먼저 울린 ‘세계의 카나리아’인 셈이다.
그런데도 세계는 여전 신자유주의의 맹폭격이 이어진다. 그 이름에 ‘자유’가 있어 본질이 은폐되고 미화된다. 근데 사실 이건 군사적 침략보다 더 무서운 ‘소리 없는 폭격’이라고 한다. 그 만큼 교묘해진 현실이다. 강수돌이 쓴 서평에 이런 내용이 많다. ‘세계화’ 관련 책 3권을 소개하며 비교 평했다. 그 책 중 <세계화의 가면을 벗겨라>는 세계화라는 용어조차 제국주의를 은폐하는 효과를 내는 헛소리라 보면 세계화는 결국 불가피한 과정이 아니라 새로운 국제적 자본가들의 ‘계급 프로젝트’라고 본다고 소개한다. “아시아가 거대한 파산을 겪고 브라질 경제가 몰락하는 동안 미국 경제가 성장을 계속하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세계화가 제국이라는 개념이다.”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지식인들은 세계화를 무슨 신성한 가치나 되는 양 떠벌린다. 속상하다. 그래서인가 지식인에 대한 서평도 있다. 김원이 쓴 것이다. 여기 소개되는 이명원의 <시장권력과 인문정신>, 그리고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은 따로 구입해서 읽어봐야겠다. 나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역사회에서 지식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겠노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병을 얻기 전까지.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해 대학원 박사과정까지 마쳤다. 근데 그 과정에서 지식인의 몰락을 직접 목격했었다. 프로젝트에 끌려 다니는 교수들. 프로젝트에 끌려 다닌다고 하면 고상한 말이고 노골적으로 말해서, 돈과 권력에 몸을 파는 교수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지식인의 몰락인지, 아니면 애당초 지역사회에 지식인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참담함을 느꼈다. 그래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생각도 있었는데, 건강 문제로 일찍 자리를 떴다. 다시 복귀하고 싶은 생각은 많지 않다. 뻔한 복마전이 눈앞에 그려지기 때문이다. 서평에는 “이론과 현실 분석을 통한 개입보다 과거보다 한층 경쟁이 강화된 대학사회내 구성원으로 진입하기 위한 ‘무한 경쟁’에 올인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비교적 얌전하게 써 놨다.
하지만 정작 서평자 말고 원 책의 저자인 이명원은 그의 책 말미에 이렇게 썼다고 한다.
“너 자신의 행복을 유예하고 결코 버릴 수 없는 좋은 삶에 대한 희망을 빠른 속도로 궤멸시키고 있는, 저 근대적인 삶 전체를 회의하라. 이 세상에는 경제주의와 시장권력으로도 장악할 수 없는 더 나은 세계에 대한 비근대적인 고뇌와 전망이 발 밑에 있다. 발견하라. 귀를 기울여라. 흔들림을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나는 이명원의 글을 좋아한다. 그의 기개와 그의 관점과 그의 처사를 좋아한다. 그렇기에 흔들림을 두려워하지 말고, ‘경제주의와 시장권력으로도 장악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영원히 추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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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07년 5~6월 - 통권 94호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귀를 물어뜯는 표현, 표현들

<녹색평론94> 2007년 5-6월호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잡지 <녹색평론>. 이번 호는 늦게야 읽었다. 어찌 그리 바쁜 핑계가 많았는지. 늦은 게 미안스러웠다. 나의 냉대에도 불구, 그는 여전히 나를 아프게 했다. 아니 함께 아파하는 것이겠지. 산업문명 그 자체를 넘어서지 못하면 이 고통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상업화 된 사회, 지식인의 자존심도, 농민의 생존권도 오직 글로벌 자본가 계급의 이해관계에 따라 조정된다.
한미 FTA가 이번 호의 여전한 특집이다. 새로운 내용은 별로 없다. 확인할 뿐이다. 김종철 선생님의 권두언이 본질을 찌른다. ‘국익’이라는 환상을 지적한 것이다. 기득권자의 이익을 국익으로 포장해 잘도 팔아먹었다. 그래도 여전히 속는다. “‘자유무역협정’이라는 것은 자본주의의 가차없는 팽창과 확대를 위해서 고안된 최신의 메커니즘”일 뿐이데 그저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사기를 치고 있다. “국익이란 기실 아무런 실체가 없는 공허한 정치 선동적 용어에 불과한데도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아직도 엄청난 위력을 가진 개념이기 때문이다. 황우석 사태도 결국 ‘국익’이라는 말이 부리는 요술 때문에 빚어진 희비극”이었다. 이건 “오늘날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얼마나 비이성적이고, 무분별한 개인적, 집단적 자기 확대 욕망에 빠져 있는가를 알려주는 단적인 기호”이다. “국익이라는 환상에 대한 맹목적 집착, 그리고 그 집착에 근거한 자기기만”이다.
김종철 선생은 우리가 가져야할 대안은 “삶의 근원적 진실”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건 자본 너머의 가치에 있을 것이다. 산업문명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와 새로운 대안의 모색, 거기세서 시작될 수 있다.
이번 호는 여러 가치 있는 내용의 글도 좋았지만, 유별나게 가슴을 뜯게 만드는 표현들이 많아서 나를 붙잡았다. 앞서 김종철의 글에서 ‘자기 확대의 욕망’. 맞다. 현대인들의 특징이다. 그 확대를 통해 얻을 게 과연 무엇인지 성찰하지 않는다.
주요섭의 글에서, ‘시장에 나가면 팔릴 수 있는 인간과 팔리지 않는 인간으로 쫙 갈라지고 있다.’
이계삼의 글에서 ‘혈색은 좋지만 영혼은 죽어버린 사회.’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의 글은 압권이다. 표현 뿐만 아니라 그의 가계에 대해서도 다시 보았다. 예전에 한홍구의 글에서 잠깐 봤던 것인데 당사자 자신이 여기에 풀었다. 한말에서부터 의를 지킨 집안이다. 아버지는 경성콤그룹 이관술 동아리였다고 한다. 그 예비검속에서 돌아가셨다. 아마 대전 골령골에서 1950년 7월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 고통 속에서 살아갈 때 정부는 그를 회유했다. 지금은 그 흔해 빠진 해외연수다. 근데 진보진영의 문인들도 대부분 응했다고 한다. 자신과 어는 원로 문인 한 사람을 빼곤. 그래서인가, 그는 조롱한다. 운동권이 아니라 ‘헬스권’이라고. 뼈아픈 표현이다.
하긴 이완용의 조카 이병도가 우리 역사를 왜곡했고, 그 이병도의 손자들이 서울대 총장과 국립박물관장을 하는 나라이니, 헬스권이 괜히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의 글 마지막 대목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절규였다. 허위 선생의 후손이 외치는 절규가 김성동의 “귀를 물어 뜯었다”는 것이다. 아마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었을 것 같다. 얼마나 절절한 외침이었으면.
김환석의 글에서. 과학사기는 예전에 동료들의 인정을 최고로 삼던 가치에서 외적 보상에 눈이 멀어가는 상황으로의 변화 때문에 생긴 것이라 지적하고 있다. 그러니 학문 세계에서 경쟁이란, 과거엔 ‘지적 경쟁’이었는데 지금은 ‘연구비 타먹기 경쟁’으로 바뀐 것이다. 지식 세계가 이러니 더 할 말이 있을까. 그러니 박승옥의 표현처럼 지식인들은 ‘애매한 수사와 두루뭉술한 제언, 하나마나한 당위의 역설’만을 해 댄다.
박승옥의 글에서. ‘풍요를 주체하는 못해 비만에 갇힌 부자와 기득권 세력의 개기름’이라는 표현. 섬뜩하고 통렬하다.
박진의 글에서. ‘활동가로 산다는 것은 때로 현실과 동떨어진 고립무원의 섬에 있는 적막감을 안겨준다.’ 괴롭게 공감한다. ‘현실은 너무나 잔인해서, 내가 기억하는 슬픔과 분노가 모두 거짓은 아닐까 의심하게 만든다. 암시랑토 않은 세월, 한미 FTA가 어떻든, 대추리가 어디든 그저 상관없이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스타벅스 커피와 던킨 도너츠를 소비하는 이들을 본다.’ ‘물신에 눈이 먼 천박한 교양으로 똥칠한 고상한 인간들을 구별해내는 혜안.’이라는 표현들.

이번 호에선 이러저런 고민과 함께 적확한 표현 익히기 공부도 함께 했다. 하긴 그 표현이라는 게, 상황에 대한 공감과 분노와 연민이 있기에 가능했을 터. 다시 말해 글은 몸으로 쓰라는 말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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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07년 3~4월 - 통권 93호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민주주의와 미신

<녹색평론> 93호 2007년 3·4월호.



내 삶에 위안을 주는 거의 유일한 잡지다. 물론 <한겨레 21> 같은 재치 있고 감각 뛰어난 시사 잡지도 좋아한다. 하지만 <녹색평론>은 그 울림이 다르다. 근원을 성찰케 한다. 그러기에 말도 안 되는 천박한 요즘의 세태에서도 나를 견디게 한다.
그런데 한편으론 그 따스함이 어쩌면 시대의 뒤 칸을 넘어가는 낡은 세력들의 넋두리는 아닐까 하면서 두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다들 앞을 향해 달려가는데, 나만 아니 이 <녹색평론> 그룹만 뭔가 과거의 향수에 빠져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두려움 말이다. 유소림의 에세이 ‘겨우살이’와 유영미의 ‘교사도 우울하다’를 읽을 때면 그런 생각이 더 든다. 이들의 호소력 있는 문장과 글귀에 가슴 아리며 끄덕끄덕 고개를 흔들지만, 한편으론 그 옛날 좋았던 시절에 대한 대책 없는 향수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유영미의 말 그대로 요즘 애들은 예전의 학생들이 아니다. “그냥 부모가 지목하는 길, 현실지향적인 출세 성공의 길로 아주 순순히 따라간다.” “억압을 억압이라고 느낄 수조차 없는 아이들의 정서가 정말 심각한 문제다.” “사춘기의 반항은 아이들이 세계에서 이제 사라져버리고 있다. 지금 아이들에겐 인생에 대한 고민 같은 건 할 시간도 없고 그럴 여건도 안 된다. 아이들도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풍요로운 소비’를 통한 자기과시가 최고의 가치인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니 돈 많이 버는 직업을 원하는 부모의 요구에 아이들이 ‘반항’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어른들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아이들은 거기에 대해 절망하고 반항하고 몸부림쳐야 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 거창한 이상을 품고, 나아가 자신이 몸담은 사회와 이 사회의 역사를 볼 줄 아는 시각을 가지게 되고, 기성세대의 이기적이고 현실 타협적인 모습에 실망을 느끼고 정직하게 괴로워하며 그에 대한 고민으로 나름대로 자기 인생의 탈출구를 찾아 헤매는 것이 젊은 날의 초상”이지 않느냐는 그의 한탄에 공감을 한다. “한창 꿈을 갖고 자유를 열망할 나이에, 부모의 현실적인 감각을 재빠르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부모와 아무런 갈등도 없이 현실적인 목표에 얄미우리만치 자신을 적응시키는 이 아이들은” 도대체 뭐냐며 한탄 넘어 절망까지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렇게 만든 게 우리 어른들이지 않은가. 아무리 괴롭다 해도 애들 탓할 건 아니다. 나도 그들이 때론 ‘얄미우리만치’ 무섭다. 그러나 그것 역시 ‘영혼이 없는, 계산만 할 줄 아는 인간들’로 가득 찬 기성세대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교육이 따로 홀로 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회 변화 없이 교육만 아무리 개혁해 봐도 헛일이다. 아니 되질 않는다.
물론 유영미도 애들을 탓한 게 아니다. 이런 ‘죽은 교육’, ‘바보 같음’을 계속하는 이 사회의 시스템에 대해 분노하고 그 시스템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가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가 보기에 우리 교육의 이 바보짓은 ‘계산된’ 바보짓이라는 것이다. “이 사회의 지배계층에겐 지금의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이 바로 이 ‘죽은 교육’이었던 것이다. 사고가 자유로워 사회의 부조리를 꿰뚫어볼 줄 알며, 자신보다 공동의 문제에 더 관심이 많고, 자신의 이익추구보다는 다른 사람의 불행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소비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않는 인간형이 사회에 배출된다면 현재의 이 체제는 영락없이 붕괴해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 시스템의 어느 한 코너에서 맡은 바 직분(?)을 다하고 있다. 그들을 위해. 그런 생각을 하면 괴롭다.
어쨌거나 아무리 내가 발버둥을 쳐도 아이들은 ‘소비에서만 삶의 의미를 찾는 로봇 같은 인간형’으로 생산되고 있다. ‘소비생활로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고, 남들과의 권력구도에서 우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영혼이 빈 아이들’로 육성된 이들은 오로지 ‘물질적 풍요’ 속에 자신의 영혼을 파묻는다.
유소림의 에세이 ‘겨우살이’에서도 이 천박한 세태에 대한 지적은 이어진다. “사람들은 상전에게 모진 구박을 받다 고생 끝에 드디어 옛 상전 앞에서 돈자랑을 하게 된 종놈들처럼”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앞의 유영미가 “환경 파괴보다 더 무서운 것이 경제성장으로 인한 인간성 파괴”라고 걱정하시던 김종철 선생님의 말을 인용했는데, 그 김종철 선생님은 서문에서 그것을 민주주의와 연결시켜 말씀하신다. 단적으로 말하면 그 동안 우리는 미신 속에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 미신이라는 것은 경제가 성장해야 민주주의가 제대로 꽃 필 수 있다는 신화다. 경제성장이 민주주의를 촉진하는 것 말이다.
그러나 이제 따져 보면 그것 거꾸로다. 경제성장은 차별과 격차만을 불러왔다. 애당초 골고루 성장하는 경제 성장은 없었다. 성장은 누군가를 차별화하고 배제하고 눌러놔야만 가능했다. 그러기에 경제성장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요소다.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행복하지 못할 것인가’라는 책 제목처럼 우린 그 동안 오로지 경제성장만을 향해 달려왔다. 그것이 곧 신앙이다. 예전에 빨갱이를 때려잡듯 이성도 신비함도 관용도 없다. 오로지 그것만이 진리다. “그러니까 정말 문제는 한미 FTA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고, ‘성공’을 해야 한다는 이 사회에 팽배해 있는 밑도 끝도 없는 욕망이다.” 김종철의 진단이다. 실제 그렇다. 한미 FTA 그 자체는 문제가 안 될 수도 있다. 사람들이 정신이 제대로 돌아온다면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는 조약이다. 그러나 분노하는 감귤 농가도 사실 따져보면 모두 다 경제 성장에 미쳐있다. 물론 이들만을 탓할 순 없다. 다들 그렇게 미쳤는데, 나만 미치지 않으면 살아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박승옥이 ‘진보는 없다’며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소위 한국사회의 진보도 기실 따져 보면 ‘성장’을 앞세우는 ‘개발주의자’들과 다르지 않다. 마르크스 역시 분배를 이야기했지만, ‘생산력’이라는 그의 용어에서도 보듯이 일단 성장 그 자체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았다. ‘필요한 만큼 소비’할 수 있게끔 생산력을 높이는 것이 기본적으로 그의 이론엔 깔려 있다. 그러기에 우리의 진보도 그렇게 달려왔다. “역대 민주정부가 박정희식 개발성장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채택한 것은 타협의 결과라기보다 달리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정책과 비전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박승옥의 진단은 그런 맥락에서 충분히 타당성을 갖는다. 하는 짓이 똑같다. 게다가 요즘엔 도덕성에서도 별로 앞서지 못한다. 그러니 욕먹는 것이다. 운동권 전체를 욕보게 하는, 근원적 성찰이 부족한 386들이 지금 그러고 있다. 근원적 성찰이 부족한 것이다. “진보가 여전히 낡은 성장과 발전의 환상에만 젖어있다면” 그건 재앙일 수 있다.
대안에 대해 박승옥은 우애와 협동을 말한다. 시장경쟁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협력과 협동이라는 것이다. 이건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아닌가. 아나키즘의 핵심적 내용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아나키즘을 발설하지 않는다. 내용은 그것이면서도, 왜 그럴까. 아직 발설할 때가 아닌가.
하승수의 글은 사법권력에 대한 문제제기다. 말로만 듣던 전관예우, 그런 것이 있기에 세상은 사법부를 ‘잠재적인 법률사업자’로 여긴다. 다만 그의 글에서 아쉬운 건, 당위성에 그친 추상적 주장으로 일관한다는 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사법권력을 해체할 방안을 내놨으면 좋겠다.
강수돌 교수가 마을 이장 질을 한다는 걸 최근 알았다. 그런데 그게 다 사연이 있었다. ‘개발동맹에 맞서는 풀뿌리 투쟁’을 내실 있게 하다 보니 그랬다. 근데 그게 장난이 아닌 모양이다. 개발세력으로부터의 협박이 거의 목숨까지 내놓게 할 정도라 한다. 지긋지긋하다. 더러운 놈들. 이런 놈들에겐 대화나 이성이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 점잖은 교수가 이장 노릇까지 하며 마을을 지키는 것이다.
서글프다. 자본과 소비, 그 소비 속에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안목에 안타까움을 넘어 서글픔을 느끼게 된다.’ 나 역시 그렇다. 그러나 확실히 깨닫는 바는 있다. 민주주의는 경제성장을 통해 촉진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 그 반대라는 것을. 결국 소농 중심의 공동체적 질서를 회복하는 것, 어렵더라도 궁극적으로 가야할 길이다.
그나저나 빨리 지금 벌려 놓은 역사 공부가 끝나야 차분히 아나키즘 공부를 시작할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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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07년 1~2월 - 통권 92호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이윤이냐 생명이냐
<녹색평론> 2007년 1-2월호(통권 92호)


신년호인데, 힘이 없다. 그럴 수밖에. 지난 해 우리는 모든 싸움에서 졌다. 자본과 탐욕의 질주는 무섭다. 그 어느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 새만금이 그랬고 천성산이 또 그랬다. 낙동강 하구 살리기 역시 그렇다. 물론 내가 살고 있는 제주도 역시 그렇다. 모든 싸움에서 졌다. 그래서 2006년 작년 한 해는 ‘우리나라 환경운동사에 절망의 해’로 기록될 것 같다고까지 한다.
절망. 그람시가 그랬다.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고. 참 대단한 사람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해대는 걸 보면. 그러나 어찌 할 도리가 없지 않은가. 의지로 낙관이라고 할 수밖에.
이번 호에는 김해창이 쓴 취재기가 눈길을 끌었다. 지난 2006년 12춸 15일 부산의 ‘공간 초록’에서 열린 ‘생명의 대안은 없다: 제3차 전국 토론회’의 취재기다. 전국에서 모여든 패자 70여 명이 모여 ‘부활의 희망’을 갖기 위해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여기서 김종철은 지난해 여러 패배를 통해 사람들이 더욱 성숙해졌다고 했다. ‘그런 일 속에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남을 것이고, 그것이 또 다음 일을 위한 희망이 아니겠느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람시하고 비슷하다. 절망인데 희망이라고 한다.
박중록은 여러 소송 과정을 보면서 그 ‘전문가’는 ‘자신의 밥그릇 챙기기 전문가’에 불과함을 알았다고 한다. 실제 그렇다. 법관이나 무책임한 언론이나 생각 없는 공무원이나 한 가지다.
지율은 또 말한다. “청성산과 을숙도에 대한 법원 판결의 결과는 이 시대를 역설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권 관련 소송에서 법정에 선 것은 ‘자연’이 아니라, 이 ‘사회’이며 판결의 결과는 자연의 위기가 아니라 ‘사회의 위기’ 곧 자연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인간의 위기를 그대로 보여 준다”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생명의 대안은 없다. 그 자체가 질문이고 답이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런데도 우리는 생명에 앞서 이윤을 찾아 나선다. 특히 한미 FTA협상에서 의약품 협상에서 보이는 우려는 더욱 심각하다. 그들은 건강보다 약을 팔아 버는 이윤이 중요하다. 빨린 낫는 약보단 오래 지속해서 먹는 약을 개발한다.
하긴 현재의 교육제도에선 그것이 정당화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정선희의 글에서 지적했듯이 “지배층의 입장에서 보자면 학교제도를 통해 배출되는 사람들은 실제 그들이 통치하고 지배하는 데 적합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크게 두 부류로 분류될 수 있다. 기능적으로 유능하고 영리하지만 총체적이고 비판적인 지성은 부족한 전문가 집단(혹은 엘리트 집단-이것은 앞에 말한 자기 밥그릇 챙기기 전문가일 뿐이다)과 획일적인 욕망을 가진 무비판적 대중이다.” 똑바로 정신 차리지 않으면 그 두 부류 중의 하나로 전락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물론 전자를 향해 매진하다. 무엇이 진정 삶의 근본인지도 생각지 않으면서.
한승오가 간디의 책을 읽고 쓴 서평도 볼 만 하다. 그의 말처럼 그 글에는 ‘벼락같은 화두’가 하나 있었다. 간디 역시 밑바닥 절망이 곧 희망이라 외치며 그 길을 갔다고 한다. “그런데 빈틈없이 무장되어 있고 과시적인 힘을 자랑하는 이 세계에서 혼자서 그런 소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대답은 간단하고 명백하다. 소박한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그 시도는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오직 한 개인이나 한 집단만이 노력한다 하더라도.”
이게 핵심이다. 그게(소박한 삶이) 옳다면 그렇게 갈 뿐이다. 주변에서 아무리 화려함으로 유혹하고 협박해도 말이다. 그리고 그 소박한 삶이 비록 혼자 혹은 소수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게 가치 있는 일이라면.
박승옥이 박현채를 추모하며 쓴 민족경제론적 관점에로의 환기도 곰곰이 읽을 만 하다. 많이 달라졌다. 그의 말대로 민족경제론을 주장하면 촌놈 취급 받기 십상이다. 촌놈 정도가 아니라 아주 덜떨어진 놈 취급을 당한다. 과거 민주화운동가들마저도 그런 눈길을 보낸다. 그러니 그것은 배반의 현실에 대한 고통스런 확인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의 표정은 박승옥의 말대로 ‘당당하다 못해 윤기가 너무 흘러 넘’친다. 그들은 이미 ‘흙의 사람들’이 아닌 ‘시장 맹신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은 경제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고 말해도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문제와는 전혀 다르다. ‘농민과 비정규직 노동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와 자연환경에 대한 약탈에 근거한 비윤리적이고 지속 불가능한 경제를 극복하고, 땅과 농의 가치에 기반 한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자립경제 순환경제를 회복하는 문제와는 거리가 멀다’. 그저 맹목적 이윤일 뿐이다.
앞의 김종철의 말처럼 지금의 절망은 우리에겐 성숙의 시간이어야 한다. 겸손과 검소와 나눔과 공동체적 안녕을 생각하면서. 그러기에 더욱 수신할 일이다. 전희식의 표현처럼 ‘술로 돋우는 탁한 취흥’이 아니라 ‘황차나 보이차를 마실 때의 맑디맑은 기운’으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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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희망 유재현 온더로드 6
유재현 지음 / 그린비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의 걸음으로

유재현, <느린 희망>, 그린비, 2006.


가능한 일일까? 시장경제의 사회적 부재가. 쿠바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 현실에서 말이다. 하긴 쿠바라고 해서 처음부터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 바로 코 밑. 가장 퇴폐적인 양키 문화로 찌들었던 아바나를 떠올린다면, 우리라고 해서 꿈만은 아닐 성도 싶다.
“시장경제의 사회적 부재는 경재의 부재 또는 극적인 순화를 의미했다.” 극적인 순화라....
트랙터 대신 소들이 땅을 갈고, 마차가 곡물을 운반하는 모습, 자동차 대신 자전거가. 낭만이 아니다. 현실적인 불편이며 더하면 고통이다. 이걸 우린 선택할 수 있을까. 물론 그들도 처음엔 자발적으로 선택한 게 아니었다. 소련과 동유럽이 무너지기 전까지만 해도 잘나가는 플랜테이션 농업지대였으며 화학비료로 땅을 목욕시킬 정도의 지역이었다.
하지만 동구권 붕괴 이후 사회주의 연대 경제가 붕괴되자 그야말로 그들은 고립되어 버렸다. 연계경제 체제 하에서 단절은 곧 죽음이다. 그러나 피텔 카스트로는 이 어려움을 역전시킨다. 발상의 전환을 한 것이다. 위기를 기회로.
“외채가 아니라 생태에 진 빚을 갚자.” 그가 1992년 브라질 리우회의에서 행한 연설 중의 일부다. “불평등한 무역, 보호주의, 외채가 생태를 공격하고 환경의 파괴를 조장하고 있다. 우리가 인류를 이 같은 자기 파괴에서 구해내려 한다면 세계의 부와 기술을 더 많이 나누어야 한다. 일부 국가들은 덜 사치스럽고 덜 소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럼으로 세계의 대다수가 덜 빈곤하고 덜 굶주리게 될 것이다. 제3세계는 더 이상 환경을 파괴하는 생활양식과 소비관습을 이전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을 보다 합리적으로 만들자. 정의로운 국가경제지서를 만들자. 모든 과학지식을 환경오염이 아닌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사용하자.”
하긴 피델이 연설에서 나온 그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그건 사기다. 개발론자가 환경론자를 잠재우기 위해 창조한 형용모순이다. 지속가능과 발전은 애당초 함께 갈 수가 없다. 그래서인가 저자 유재현은 주변 사람들의 딴죽에 대해 재치 있게 답한다. 저자가 지속가능한 사회의 모델로서 쿠바에 대해 열심히 떠들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누군가가 그건 “지속가능한 후퇴 아니에요?”라며 제법 똑똑하게 면박을 주었던 모양이다. 실제 쿠바는 초라하다. 허름한 건물, 남루한 옷차림, 그을린 얼굴, 물건 없는 상점으로 대표되듯이 90년대 이후 쿠바는 몹시 후퇴했다고 한다. 그랬기에 이에 대한 저자의 답, “그러니 묻건대, 후퇴하지 않고 지속가능한 사회가 될 수 있는 다른 어떤 방법이 있단 말인가? 지속불가능한 발전을 포기하지 않고서야 지속가능한 사회를 일굴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있단 말인가?”
그래서 책 제목이 ‘느린 희망’인가 보다. “시장과 경쟁의 수레바퀴를 매달지 않는” 사회, 그래서 “인간의 걸음으로 천천히 움직이는” 그런 사회. 그야말로 극적인 순화이겠다.
어렵게 말할 것 없다. 지금 당장 30년 전 혹은 50년 전의 사회로 돌아간다면 선택하겠느냐는 질문이 왔을 때, 나는 주저 없이 “그렇다”라고 말하겠다. 더 이상의 경쟁은 인간을 피폐하게 만들 뿐이다. 그 경쟁의 끝이 행복이 아니라 속이 허해진 과시욕이기에, 주변의 눈을 의식하며 사는 비주체적인 삶이기에,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삶이기에. 나는 내릴 수 있다면 바로 내릴 것이다.
하지만 사회는 여전히 미친 질주를 한다. 쿠바처럼 상황이 닥쳐오기 전에는 결코 멈출 것 같지가 않다. 그래서 때론 그냥 둬라 싶기도 하다. 때가 되어야 한다. 그 전에 아무리 떠들어도 알아듣지 못한다. 귀가 있어도 못 듣고 눈이 있어도 못 보는 사회는 어쩔 수 없다. 상황이 닥쳐야, 때가 되어야 변화가 가능할 것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피델의 추진력은 무의미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게바라의 피도 결코 헛된 것은 아니다. 시대의 소명에 맞춰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은 깨어있는 인간의 의무이기도 하다. 게바라의 글 <대장의 접시>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는 단 한 사람의 호감을 얻기 위해 많은 사람들의 평등을 모독했다.” 새로 온 취사병이 게바라에게 음식을 더 얹어주자 호통을 치곤 썼던 글이다.
‘평등을 모독했다’ 이 대목. ‘모독’이라는 단어가 사람을 휘잡는다. 우린 요즘 이 단어를 기억하고 사는가. 자본의 달콤함에 기꺼이 몸을 던지면서 그것이 ‘모독’스런 행위인지를 느끼긴 하는가. 지식인들이라고 떠드는 놈들이 이런 모독이라는 단어를 알긴 하는가. 부끄러움이 없어진 사회에서.
아주대 전자공학과 출신의 소설가 유재현. 그의 글은 항상 긴장이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그 긴장과 함께 시대에 대한 조롱이 있어 구미가 당긴다. 물론 그 조롱은 아픔에서 나온 것이다. 더하여 이 책엔 사진이 있어서 한결 더 좋다. 가보지 못하는 쿠바의 모습을, 그것도 과장되거나 천편일률적인 뻔한 그림이 아니라, 그가 만난 그저그런 쿠바 사람들을 담아서 그런가, 더욱 좋다.
아 또 하나. 미군의 관타나모 해군기지, 왜 그 이슬람 포로들을 수감했다고 하는 그 해군기지가 쿠바 섬에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것도 미국 가까운 북부가 아니라 남부에. 원 그런 경우도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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