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 - 아나키즘의 토대를 마련한 고전! 세계를 뒤흔든 선언 6
하승우 지음 / 그린비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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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를 부정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라면

하승우,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 그린비, 2006.


삶의 근본을 묻고 그에 대한 답을 탐구해가는 대학을 온통 돈벌이 시설로 전락시키려던 총장이 교수들에 의해 불신임 당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고려대학교 총장이다. 근데 어제 옆집 아줌마의 견해를 들으니 안타깝다고 한다. 영어로 수업을 하고, 글로벌 시대에 빨리 적응시켜가려는 훌륭한 총장이 무사안일과 구태를 답습하는 교수들에 의해 거부되었다는 현실이 몹시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근데 그 아줌마의 삶도 팍팍하다. 애들 사교육비로 걱정이 태산이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란다. 그 경쟁이 지독히도 싫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데도 그 아줌만 그 경영형 총장을 추앙한다. 그런 사람이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이끌림에 지쳐 헉헉대면서도 말이다.
신자유주의가 극성스럽게 사람을 내몬다. ‘경쟁’이라는 주술은 그 무엇보다 강력한 단어다.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 경쟁에서만 이긴다면. 왜 경쟁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경쟁을 통해 진정 얻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없다. 그저 경쟁은 선(善)일뿐이다.

그러나 그 경쟁이 인간을 행복하게 했는가. 아니다. 경쟁은 강약을 나누었고, 강자는 약자를 지배했다. 그 과정에서 폭력이 동원되고, 제도가 이용되었다. 합법적 권위든 비합법적 권위든 그 모든 권위는 그렇게, 사람들을 눌렀다.
이제 벗어날 때가 된 것이 아닐까. 맑스도 이 경쟁을 싫어했지만, 결국은 그도 경쟁 속에 해결책을 찾기도 했다. 생산력 발전이라는 경쟁. 하지만 이제 생태계의 위기가 코 앞이다. 더 이상 활용할 화석 자원이 많지도 않다. 이제 생산력은 파괴력일 뿐이다. 천규석의 말처럼 ‘돌아갈 때가 되면 돌아가는 것이 진보’다.

그린비에서 내는 ‘세계를 뒤흔든 선언’ 시리즈가 몇 년 전부터 선보였다. 선두는 단연 맑스의 공산당 선언이었다. 근데, 이번에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이 나왔다. 나 역시 그의 책을 전부 읽진 않았다. 단편적으로 보았을 뿐이다. 이번 그린비에서 낸 책 역시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다이제스트로 만든 것이다. 시대 배경과 그리고 현재적 전망까지 붙였다. 그러기에 부족한 책이면서도 전체를 조망하기엔 좋다. 물론 우리 조성윤 사부같은 이는 이런 책을 싫어하신다. 원본으로 정직하게 읽어야 진수를 느낀다는 것이다. 그 말도 맞다. 나중엔 분명 그렇게 읽을 것이다.
오늘은 그냥 편하게 맛만 보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달다. 얻을 게 많다.
무정부주의라고 잘못 번역된 아나키즘, 도대체 무엇일까. 사전엔 ‘권위를 부정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나키스트’라고 나와 있다 한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정치권력을 형성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것, 대중이 스스로 결정하고 자율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의사결정구조를 만들 것, 간단히 말해서 대중의 직접행동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것’ 이런 것이 그들의 주장이라고 한다.
물론 그들의 스펙트럼은 대단히 넓다. 극단적 개인주의에서부터 에코 아나키, 집단적 아나키까지. 하지만 크게는 프루동 류의 상호주의, 바큐닌 류의 조합주의 등으로 정리될 수 있다. 물론 간디 같은 사람도 서양적 조류와는 무관하게 철저한 아나키스트이다. 톨스토이도 그렇다.
그들은 역사 속에서 ‘파리 코뮨’을 모범적 선구로 삼는다. 이는 맑스도 그렇다. 그러나 맑스는 그 코퓬이 성공하기 위해선 강력한 프롤레타리아 당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반면 아나키스트은 더 많은 인민자치를 주장한다. 혁명을 위한 당은 또 다시 권위를 가진 억압기구가 되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뭣도 모르면서 프루동의 <빈곤의 철학>을 패러디하면서 비판한 맑스의 <철학의 빈곤>을 추앙했다. 그리고 그 시절엔 맑스가 옳기도 했다. 전두환 독재를 깨려면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인 인민자치보단 강력한 대항권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노무현 정권과 여러 엔지오들의 작태를 보면서는 권력은 권력일 뿐임을 절감한다. 한 개인의 타락으로 설명될 게 아닌 것 같다. 권력은 그 본질적 속성상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그게 내가 아나키스트로 전환한 근본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철저한 비폭력 노선에 공감했기에 맑스에게서 벗어나게 되기도 했다. 그래서 찾은 게 크로포트킨이다.
생존경쟁보다 상호부조를 설파한 그였기에. 제국주의가 창궐하던 19세기 말엔 그야말로 다윈의 진화론이 사회에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온통 약육강식, 적자생존일 뿐이었다. 그래서 1차대전도 합리화되었고, 우리의 항일 투사들도 일본 따라 배우기의 부국강병을 꿈꿨다. 그러나 그 결과는? 환경파괴와 목 조이는 경쟁일 뿐이다. 나누고 싶어도 그런 놈은 우리 사회에서 바보취급을 당할 뿐이다. 아니면, 자기 것은 다 챙기고 제스처로만 해야 한다. 그래야 생존이 가능하다.
하지만 꼭 그러한가. 아니다. “자연선택은 지속적으로 가능한 한 경쟁을 피하는 방법을 추구한다.” 교사들도 교원평가를 거부하고 싶어 한다. 안일 때문이 아니다. 그 경쟁 속에서 교육이 죽기 때문이다. 그런 걸 보면 경쟁은 어쩔 수 없이 우리를 내모는 억압기제일 뿐, 본성은 아닐 수도 있다. 얼마든지 상호부조를 키워낼 수도 있을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그것을 주목했다.
역사책도 그렇다. “역사가들은 인간의 삶을 투쟁일변도로 과장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폄훼하는 문헌들을 연구한다.” 맞는 말이다. 왜 3국이 전쟁을 벌이는 면에만 초점을 두어 서술했을까. 왜 전쟁 영웅을 그리 조명 못해 안달이었을까. 전 역사를 따져보면 전쟁보다는 평화의 시기가 더 많지 않았던가. 우리 역사 교과서도 마찬가지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싸움에만 눈을 고정하는 획일적 시각. 이젠 새롭게 역사를 서술할 필요도 있다. 평화의 관점에서.
예를 들면 “만일 전쟁으로 내 꿈을 실현할 기회가 온다고 해도 나는 전쟁에 반대할 것이다. 그 누구도 시체더미 위에 인간의 사회를 건설할 수는 없는 법이다”라는 말을 남긴 르쿠앵 같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역사책을 서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그렇게 해서 끊이 없이 대안적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을 조명한다. 유럽의 68혁명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고, 현재 진행되는 다양한 대안적 상상력, 생태 공동체 등에도 주목한다. 교육 분야에도 관심이 많다. “공교육이란 사회정의를 모독하는 제도”라고 한다. 근대학교의 창시자 페레라는 사람의 말이라고 한다. 즉 공교육은 과거에 확립된 사회적 편견을 강화시킬 뿐만 아니라 자율성을 억압하고 중앙정부의 감독 아래 지배이데올로기를 공급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불평등한 현실의 경쟁을 감추는 기만적인 평등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나키스트들이 시험, 처벌, 상장 등의 경쟁을 없애고 자율적인 수업계획을 보장하려 했던 이유는 교육체계가 인성의 자율적 성장을 보장해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교사도 권위를 가진 지배자가 아니라 학생들의 자율성을 키워주는 도우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탈중심화된 네트워크형 민주주의의 가능성’, 최근 거대 엔지오들의 타락도 바로 이런 방법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신도 수가 100명을 넘어서면 바로 조직을 쪼개는 안디옥 교회처럼, 소규모 공동체들끼리의 네트워크라야 건강성이 유지되면 작은 긴장을 품게 된다.
한국 아나키스트 역사를 요약하는 과정에서 제주출신 고순흠의 이야기가 여기에 소개되어 있다. “조선노동공제회를 탈퇴한 아나키스트 중 한 명인 고순흠은 간판과 서류를 불태우면서 점차 볼세비키가 침투케 되자 고질적인 사대주의자가 발생이 되고 공산당 선전비 쟁취에 민족적 추태가 노골화케 되므로 창립책임감에 분노를 금치 못하여 부득이 파괴를 감행했다고 밝혔다.” 반갑다. 괜히.
저자는 앞으로의 아나키즘을 전망하면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도 소개한다. 요즘 한 참 잘나가는 ‘노마디즘’이다. 국내에선 이진경이 그 책을 썼다. 국가와 자본에 포획되지 않는 유목이 핵심이겠다. 물론 나는 아직까지 그 책을 읽지 않았다. 머리가 너무 앞서는 이진경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솔직히 선진적 지식 유통상인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유럽에서 뜨는 경향을 국내에서 가공해서 팔아먹는. 그래서인가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라는 천규석에 더 동의한다.
어쨌든 아나키즘의 모색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나의 사상적 편력도 계속 될 것이다. 하지만 기본만큼은 달라지지 않는다. “가지 않은 또 다른 길”이기에 두려움이 많긴 하다. “무한 경쟁에 길들여진 우리의 몸과 마음이 계속 망설이고 있을 뿐”이라는 저자의 말에 완벽히는 동의하지 않지만, 어쨌든 나 역시 주저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아나키즘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다. 삶이고 실천이기에 차분히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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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길 2010-08-15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내용이네요. 이념과 생각을 싫어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