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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주는 부모 치유하는 부모
스즈키 히데코 지음 / 생활성서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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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요즘은 읽는 책이 다양해졌다. 2-3년 전 고통 속에 빠지면서 그 동안 전공과 사회과학서적과 시사관련, 생태 관련 책만 읽던 내가 달라진 것이다.

그 중 하나가 치유, 상처, 내면, 신앙, 심리학, 대화 등의 단어가 들어간 책들이다. 내가 아팠고, 또 그 아픔이 단순히 육체적인 아픔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작년 그러니까 2008년 초 무렵 제주에 있는 바오로 서점에 들렸다가 그냥 집어든 책으로 기억한다. 제목이 다가왔다. 솔직히 말하지면 그 책을 사던 날 아침, 애들 엄마가 애들에게 엄청 상처를 주는 게 아닌가 하는 행동을 봤던 것이 직접적인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근데, 암튼 우리 가족은 지난 2년 동안 너무도 달라졌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애정의 폭이 훨씬 커졌다. 우선 나부터가 집안에서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진 것만으로도 물리적 변화를 볼 수 있다. 공 들인 만큼 변화가 있다.

 

어쨌거나 그 때 사두었던 책을 잡았다. 근데 내 관심이 많이 떠난 탓인지, 아니면 아직도 철이 없어서인지, 책이 팍 꽂히지는 않았다. 그냥 '다 좋은 말이네. 그럼 그럼 애들 입장에서 이해해 주어야지' 이런 생각 정도였다. 나의 책읽기 준비 부족이다.

 

고통은 사람을 성숙시킨다는 것. 의미 없는 고통은 없다는 것. 익히 들었고 내가 직접 체험해던 일이다. 물론 앞으로도 겪을 고통을 생각하면 자신감이 없어지긴 한다.

그래도 좋은 말들이다.  그 중 한 구절만 옮긴다.

 애들이 좋은 일을 했을 때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라는 표현을 집어 넣어서 말한다. 그러나 부정적인말을 해야 할 때에는 그와 정 반대여야 한다. '지금' 너는 기분이 좋지 않구나 라는 식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너는 늘 이 모양'이라는 표현을 쓰면 안 된다고 한다.

쉽게 지나치기 쉬운, 일상 속에서 자주 발견되는 상황이다.

 

그 외에도 어떤 상황을 직접적으로 나무라지 말고, 그에 대한 부모의 감정을 이야기 하라고 한다. '방을 어지럽혀 놓으니까 이 엄마는 마음이 불편하다'라고. 들었던 이야기지만 다시 강화한다.

 

이런 책은 머리보다 가슴과 몸으로 읽어야 하는데, 나는 그게 잘 안 된다.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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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맛 좀 볼래! - 특성화 대안학교 양업고 성공 교육기 그 10년 동안의 생생한 기록
윤병훈 지음 / 다밋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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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훈 신부, <너 맛 좀 볼래!>, 다밋, 2008.

 

대안 교육에 관심을 가진 것, 벌써 10년은 넘었다. 하지만, 항상 머리에서만 맴돌 뿐, 그대로 주저 앉았다. 예전에 돈이 없어서 못할 것 같았는데, 이제는 다른 이유다. 내가 그런 일 할 만한 재목이 못됨을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즘엔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서 어쩌지도 못한다.

 

그런데 애가 커가니, 내가 대안 교육을 하지는 않더라도, 애만큼이라도 제도권 학교에서 빼내어야 함을 생각한다. 지금 한국의 제도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창의성을 말살하고, 인성 교육은 전혀 없고, 그저 점수 많이 따서 서울대 가는 것만이 목적이 되었다.

 

그래서 이리 저리 대안학교를 둘러본다. 지난 겨울엔 석주가 있는 제천 간디학교엘 다녀왔다. 두 가지 목적이었다. 늦게나마 내가 대안교육으리 해 볼까, 여기 제주도에서 하는 생각과 다른 하나는 우리 딸들을 나중에 어느 대안학교에 보낼까 하는 궁리 때문이다.

 

한국에 대안학교가 많아졌다. 물론 아직도 부족하긴 하다. 작년 평균 대안학교 지원 경쟁율이 4:1이었다고 하니. 그래서 나 역시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거기다가 요즘은 대안교육도 교육이지만, 그 속에 신앙이 있어야 함을 절절하게 느낀다. 청소년기에 신앙교육이 되지 않으면 인생이 상당히 팍팍해진다. 삶의 의미를 제대로 가르쳐주는 신앙 교육이 들어간 대안 교육, 그걸 하고 싶고, 그런 교육을 우리 애들이 받게 하고 싶다.

 

그러던 중 가톨릭에서도 대안학교를 운영하는 곳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양업고등학교. 청주 쪽에 있나보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이 10년 전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근데 소문을 들으니 말이 가톨릭 대안학교이지, 제도권 교육 탈락자들을 모아 놓은 곳이라고 한다. 이상한 말로 해서 문제아들 모아 놓은 곳이라는 것이다.

 

이건 아닌에, 우리 딸들을 그곳에 보낼 순 없는데, 그러면서도 이 책을 사서 읽었다. 읽어보니 10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시작은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이 학교가 많이 탈대안학교가 된 것 같다. 반가우면서도 아쉽다. 반가운 것은 그만큼 내외적으로 정돈이 되었다는 것, 그래서 안심하고 애를 맡길만 하다는 것, 그러면서도 아쉬운 것은 초창기 같은 정열이나 도전정신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 그래도 솔직히 대한민국에서 여기 말고 애를 맡길 곳이 있나 싶다. 왜냐하면 신앙교육이 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새벽 미사가 있다고 한다. 이것만 있어도 어디인가 싶다.

 

물론 선택은 내 딸들이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가급적 권하고 싶다. 이 학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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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즐거움 - 우리시대 공부달인 30인이 공부의 즐거움을 말하다
김열규.김태길.윤구병.장영희 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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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럽다. 이 책에 실린 공부 달인 30명의 이야기를 읽노라면. 나도 공부하고 싶다. 이붙들처럼. 나는 공부를 잘 못한다. 바뻐서? 핑계다. 아파서? 그건 좀 말이 된다. 그리고 생계가 급해서? 그것도 이유가 조금 되긴 된다. 암튼 나도 공부하고 싶다.

 

이 책에 실린 공부 달인 30명을 읽노라면, 우선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 그리고 다들 좋은 말이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강명관, 고미숙, 박홍규, 이유미, 이희수, 장영희, 장회익의 글은 언제 보아도 좋다. 이분들의 다른 책도 좋지만.

 

30명이 쓴 책이라 30가지 테마를 다 쓸 순 없겠고. 그래서 이유미와 이희수의 공통점으로 쓴다. 이들이 택한 길은 당시로서는 아웃사이더의 길이다. 미래에 대한 보장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곳으로 갔다. 나도 다시 태어난다면 그러고 싶다. 이유미의 말, "그때나 지금이나 난 남들이 많이 몰리는 데 기웃거리는 것을 싫어한다." 동감. 그러나 동감하면서도 생업은 그렇게 하질 못했다. 먹고 사는 문제가 두려워서 안전빵을 택했다. 패기가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이희수 역시 터키로 유학을 갔다. 이슬람을 연구했던 것이다. 근데 요즘은 이 양반 시간이 없다. 너무 바쁘다. 이슬람 전공자가 없어서 그렇다. 그러기에 진작,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갔어야 했다.

 

그건 그렇고. 이 공부 고수들이 정의한 공부란? 공부란 양심선언이다. 공부란 원초적 본능이다. 공부란 즐거운 창조다. 좋다. 하지만 박홍규가 말한 것처럼 그 공부는 우리나라 제도권 공부와는 전혀 다르다. 우리나라 제도권 공부는 죽음이다. 그래서 참담하다.

여기 박홍규의 말을 옮기며 그 즐거운 공부가 죽음의 공부로 변한 현실을 개탄한다.

"공부 공화국, 공부로 시작해 공부로 끝나는 나라, 태어나면서부터 공부하라는 말만 듣고 어른이 되어서도 다시 그 말만 하다가 죽는 사람들의 나라. 세상이 온통 학교와 학원으로 뒤덮인 나라. 교육에 돈을 가장 많이 쓰는 사람들의 나라.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결코 착하지도, 성실하지도, 창조적이지도 않은 나라. 특히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더 그렇지 않은 나라."

이런 제기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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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나의 교육철학
마하트마 K. 간디 지음, 고병헌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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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사 둔 책이다. 내가 언제부터인가 사상적 흐름을 간디 쪽으로 잡으면서 간디 관련 서적이 눈에 띠면 우선 사 두었다. 그러나 항상 책장 장식용이었다.

 

지난 주 육지 나갈 일이 있었다. 공항 대합실, 비행기 안에서 눈 심심한 것 줄이려 이 책을 잡았다. 활자가 크다. 금방 읽겠다 싶었다. 사색 없이 글만 읽어서 그런지 정말 후딱 읽었다. 사색이 없었던 이유는 삶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책 내용처럼 살 자신이 없다. 간디는 말한다. "돈벌이 자체를 위한 삶을 시작했다면 , 그것은 바로 경제적 파탄뿐만 아니라 도덕적 타락을 의미한다"고. 난 요즘 이렇게 살고 있다. 교사이지만 교육을 하지 못한다. 그저 돈벌이로 학교에 출근할 뿐이다. 그러니 이 책을 읽는 게 찬찬히 되지가 않는다. 좋은 내용이다 하면서 건성으로 넘긴다.

 

역자가 후기에서 이렇게 썼다. 시간과 공간이 다른 장소에서 간디의 교육사상이 과연 지금의 한국현실에 들어맞을까 하는 의문이 있다고. 그러면서도 본질은 다르지 않기에 오히려 더 참고할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맞다.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교사는 참으로 자기 학생들에게 어머니 같은 존재라야 한다"라든가, "학생들의 내면에서 최선의 것을 이끌어내는 것, 바로 이것이 진정한 교육이다" 같은 말은 언제 들어도 수긍한다. 다만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하기에 괴로울 뿐이다.

어제도 신문에서 일제고사를 거부했다고 해서 다시 교사를 파면조치 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무기력 뿐이다. 할 말이 없다. 이런 마당에 무슨 교육이 있을까. 사육 뿐이다.

 

이번 나들이에선 대안교육을 실천하는 후배도 만나 보았다. 생각보다 건강하고 뜻이 깊었다. 단순히 대안학교 차원의 고민을 하는 게 아니었다. 마을 공동체를 함께 고민했다. 학교가 마을과 분리되어선 안된다는 것이다. 대안학교라고 해도 그 졸업생들이 다시 도시를 꿈꾸고 현재적 가치에 매몰될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인가 간디 역시 교사는 한 마을에 정착해서 그곳 사람들과 어우러져야 하며, 마을 사람들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게 진짜 교육일 것 같다.

 

암튼 나는 멀다. 이 책과. 간디와. 그러면서도 그를 좋아한다.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멀리서만 그를 좋아한다. 한계. 이 나이 먹도록 실천 없는 삶으로 허비한다. 그래도 책이라도 읽으며 성찰하고 싶다. 그의 교육론 중 기숙사 관련에서 "기도를 위한 시간도 있어야 하고 일과 휴식과 잠에 대한 규칙도 있어야 한다"는 데까지 공감하며, 언제일지 모르지만 한 번쯤은 제대로 된 '교육' 한 번 해보고 삶을 마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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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사회 - 사회적 주체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
김상봉 지음 / 한길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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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봉, <학벌사회>, 한길사. 2004.




한국사회에 교육은 없다. 다만 권력과 사회적 자본의 획득 도구만이 있었을 뿐이다. 한국사회의 교육열? 그건 거짓말이다. 출세열이다. 이 땅에서의 교육은 자기실현의 기관이 아니다. 보다 높은 서열의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타인과 치열하게 생존투쟁을 벌이는 전쟁터가 되었다.
대학은 이미 학문 연구의 전당이 아니다. 권력을 보장해주는 전쟁터일 뿐이다. 교수들도 학문 연구를 하는 게 아니다. 권력과 부를 얻기 위해 매진할 뿐이다. 학문연구와 교육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팽걔쳐버리고 오직 공동체 구성원들의 복리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한다. '우리'이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가 미쳤다. 온통 돈만이 최고의 가치다. '우리'를 돈 많은 곳으로 이끌어 주는 게 소위 지도층 인사, 그와 더불어 학문 연구자들에게도 최대의 과제이다.

그러한 까닭에 이 땅에 전인 교육은 사라졌다. 이 땅의 학생들은 자기의 자유로운 영혼을 학벌에 팔고 그 대가로 사사로운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밤을 잊고 시험준비에 몰두하고 있다. 대학생들도 추구하는 건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이상이 아니다. 사사로운 욕망과 이기심 그리고 맹목적인 감정일 뿐이다.

하지만 그들을 어떻게 탓하랴. 그리고 그렇게 내몰고 있는 부모의 정성을 어떻게 탓하랴. 그렇기 때문에 한국사회의 학벌 문제가 단지 의식 개혁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제도적 개혁이 없고서는 아무 것도 안된다. 아이들은 불쌍하게도 청춘을 담보잡혀 살아야하고, 또 그 과정에서 아름다움은 사라진다.

본래 참된 교육은 전인 교육이다. 전인교육은 "철학, 도덕, 예술 그리고 체육 교육이 함께 어우러져야 된다. 체육은 몸을 위한 교육이며, 예술은 희노애락의 정서적 감수성을 위한 교육이며, 도덕은 의지를 위한 교육이고 마지막으로 철학은 말과 생각을 위한 교육이다. 건전한 지성과 올바른 의지, 풍부한 정서 그리고 튼튼한 몸이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소질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생각하는 힘'을 길러줘야 한다. 참된 지식은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까닭을 아는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여 사물의 이치를 자기 속에서 승인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교육은 온통 시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시험은 과정일 뿐이다. 그런데 지금은 목적이 되어있다. 완전한 가치전도다. 시험이 결정적인 보상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험이 프랑스식으로 열린 시험이 아니다. 완전히 획일적인 답을 요구하는 닫힌 시험이다. 이 경우 학생들은 더욱 노예적으로 구속될 뿐이다. 자유를 지향하는 것이 교육일진대, 거꾸로 우리의 교육은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엄청나게 많은 지식을 습득해야 하지만 아무것도 스스로 생각할 수 없고 그 결과 타인의 지식과 소외된 진리에 노예적으로 굴종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그 때 인간은 앎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지식과 정보의 노예"가 되고 만다.

그런데도 공부를 잘 하면 훌륭한 사람이 된다니? 우린 어릴 때부터 이 말을 많이 들어왔다. 정확히 말하자. 현재 한국사회에서 공부 잘하면 권력과 자본을 얻는 것이지,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다. 훌륭하다는 말에는 '선'의 가치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기에 이기적 욕망을 위한 성적이 곧바로 선을 확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선한 가치와 거리가 멀어지기 쉽다.

그런데도 왜 우리사회에선 그런 말이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것일까? 학벌을 가진, 즉 권력과 부를 갖춘 사람에게 너무도 주눅들어 살아오면서 그것을 스스로 정당하다고 인정해버린 결과다. 그리고 그것을 추종한다.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고 혼자, 내 자식만이라도 그 대열에 포함시켜 보려고 아둥바둥 거린다. 그러면서 그것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한다.

김상봉의 책은 이번이 처음이다. 여러 칼럼을 통해 그의 논리의 탁월함과 정당함을 알고 있었기에 주문한 책이다. 그런데, 철학자의 글답게 딱딱하다. 칼럼과는 다르다. 학술적이면서도 대중적이다. 이 정도 써야 탄탄한 글이 될 것이다. 물론 그도 인정했듯이 한국사회의 학벌문제를 제대로 처음 조명했던 건 1996년 강준만이다. 그의 <서울대의 나라>가 정확히 이 문제를 건드리며 사회적 이슈로 떠올렸다. 솔직히 강준만의 글이 쉽고 잘 들어온다. 그러나 나 역시 학문세계를 기웃거리는 처지이기에 김상봉의 글같은 학문적인 글에도 익숙해야 한다.

우선 김상봉은 학벌이 학연이나 학력과 다름을 잘 해설한다. 학력차별은 어떤 면에서 나름의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 능력 차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벌 차별은 다르다. 이건 패거리의 힘이다. 능력은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다만 기득권자들의 패거리가 뿜어내는 능력이기에 부도덕하고 정당성이 없다. 물론 한국사회에선 학력도 그것이 순수하게 학문적이지 못하다 보니 차별을 정당화하기에는 무리다. 시험성적이 학문은 아니기 때문이다.
학연과도 다르다. 학벌은 패거리 권력이기 때문이다. 이건 보이지 않게 작동하므로 자칫 학연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일과 뜻에 따라 모이지 못하고 이권에 따라 뭉치고 헤어지는 학벌은 부도덕하며 미개한 짓이다.
그래서 김상봉은 "학력은 속성이요 학연은 관계다. 그러나 학벌은 속성도 관계도 아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표현해, 주체이다."라고 말한다. 부도덕한 욕망의 주체라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건 그 패거리로 권력과 부를 독점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든 학생과 학부모가 그것을 향해 올인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곳에 들어가는 건 소수다. 뻔한 게임인데도 모두 매달린다. 그 사이에 낭비되는 에너지를 국가 전체로 따진다면 어마어마한 것이다. 자아실현을 위한 에너지가 아니다. 단지 권력과 부를 획득하기 위해 '학업'이라는 외피를 둘러쓰는 것일 뿐이다.

결론 부분에서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이렇다. 우선 서울대 학부의 한정적 폐지다. 그러면 그 이후서부터라도 서울대 학벌은 약화될 기미를 보인다. 그리고서 전국의 모든 국공립 대학의 동시 전형을 통해 이들간의 우열을 없애는 것이다. 그리고 서울대는 대학원 중심으로 전환하고, 이 대학원 입학자격은 국공립대학 출신에게만으로 한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권력독점은 사라지고, 진정 학문을 하려는 자들은 국립지방대와 서울대 대학원의 과정을 밟게 된다.
더하여 모든 고시, 공직자 임용에 있어서 인구비례의 지역 할당제를 실시하는 것이다. 그래야 쏠림 현상을 방지할 수 있다. 이 쏠림이 없다면 그 미친 '교육열'도 사라질 것이다.
또 하나 이력서 안에 학력란을 폐지하는 것이다. 그래야 공정 경쟁이 된다. 학력을 접고 실제 지금의 능력을 평가할 수 있기에 이게 공정한 경쟁이다.

이런 방식들은 국가 권력이 의지만 있으면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권력 역시 서울대 출신이다. 그래서인가 망가져 가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그들의 권력이 영원하기만을 꿈꾼다.
한계까지 가야만 반성할 것인가.

어쨌거나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그리고 교사로서 교육의 본질을 지켜가고 싶다. 출세의 수단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실현 도구로서의 교육, 참된 삶을 배워가는 수단으로서의 교육을 그린다. 성적에 앞서 자아실현을 항상 고민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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