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주의자 예수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지음, 이진권 옮김 / 샨티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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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이탈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평화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평화주의자 예수>, 샨티, 2006.




출판사 이름이 샨티다. 내가 요가원에 들어가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범어 중 하나겠다. shanti, 샨스크리트어로 ‘평화’를 말한다. 그런 이름의 출판사에서 낸 책. 요즘 ‘평화’라는 단어는 “단지 티셔츠에 붙여진 문구나 자동차 범퍼 스티커에 인쇄된 또 하나의 문화 상품”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긴 하다. 속된 말로 개나 소나 다 평화를 말한다. 평화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기득권자도, 타락한 엔지오 단체도 모두 평화를 말한다.
다 나름의 평화다. 기득권 세력은 그 기득권 세력이 고요히 유지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걸 평화라 여긴다. 하층 사람들의 고통은 관심이 없다. 그 고통이 분노로 폭발하면 그건 평화를 깨는 소란이다. 타락한 엔지오도 모양내기를 위해서 평화라는 간판이 필요하다. 게바라의 얼굴이 극단적 소비주의에 의해 활용되는 것처럼 ‘평화’ 역시 이처럼 욕을 본다.
그렇다면 진정한 평화란 무엇인가? 어렵다. 물론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우선 경쟁이 제거될 때 평화는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경쟁이 있으면 다툼과 갈등은 필연적이다. 그렇게 되면 평화는 깨진다. 그렇게 단순하게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는 더 깊은 생각을 한다. 피상적 현실 너머의 영적 부분까지 다가간다. 나의 갈증을 채워줄 것 같았다. 그래서 잡았다. 작년 말에 읽기 시작했는데, 진도가 무척이도 더뎠다. 한 구절 한 구절 묵상하고 음미할 게 많아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결과로 내가 영적인 성장을 이룬 것은 아니다. 그래도 성찰을 위해선 상당히 유익했다.
책의 목차는 우선 ‘평화를 찾아서’로부터 시작된다. 서문 격이다. 그 다음이 평화의 의미인데, 단지 전쟁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하는 게 아님을 역설했다. 익숙한 말이다. 무엇보다 나의 내면이 평화로워야 세상이 평화로울 수 있다는 말에 공감하면서 또한 실천하기는 쉽지 않음을 느낀다.
4부엔 그 평화로 다가가기 위한 징검다리들이 소개되어 있다. 단순함, 침묵, 굴복, 기도, 신뢰, 용서, 감사 등등이다. 침묵에서 생각한다. 자신을 변호하고 해명하기 위해 우리는 많은 말들을 한다. 침묵하고 있다간 오해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평화의 신은 이걸 다 해결해 준다. 가만히 있어서 진실은 결국 들어난다. 쓸데없이 말을 하지 않는 것, 내면으로부터 우러나는 말 이외에는 하지 않는 게 평화로 가는 징검다리다. 그 침묵은 단순한 말 없음이 아니라 경청을 배울 수 있다. 또한 “침묵은 거륵한 영의 가장 깊이 잇는 수행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침묵은 더 이상 어떤 자기 정당화도 일어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침묵의 결실 중 하나는 하느님이 우리의 변호인이 되도록 맡기는 것이다. 다른 이들의 오해를 바로잡는 일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감사는 올해 내 삶의 화두로 삼기로 했다. 내 주변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임을 느끼려고 한다. 이건 올해 초에 있었던 새해맞이 단식을 하면서 다가온 생각이다. 나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는다. 그러니 그 분의 모습처럼 살겠다. 내 안에 불성이 있음을 자각할 것이다. 그 불성 그대로 자비심으로 살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고 나니 내 주변이 모두 하느님이다. 최제우가 깨달음을 얻은 후 주변의 노비들에게도 절을 했다. 그들 모두가 곧 하늘이었기 때문이다. 이걸 머리로 알고 가르쳤음에도 나는 여태껏 실천하질 못했다. 이제 실천할 때다. 내 주변 모두가 하느님이다. 공경 받아야 할 사람들이다.
근데 이런 실천은 내가 평화로울 때 가능하다. “그대가 내면의 평화를 누릴 때만 이 세상의 평화를 이룰 수가 있을 것이다.-랍비 심차 부님”
결국 평화는 내 삶의 총체적 영역 속에서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결국 “활동가들이 격분하게 되면 평화를 위한 자신의 활동을 무력화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활동을 열매 맺게 하는 내적 지혜의 뿌리를 죽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렵다. 그러기에 주변 모든 사람을 하느님으로 보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물론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화가 날 때가 많다. 근데 예수님은 달랐다. 그는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자세,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근데 그렇다고 해서 개인 차원에서 평화는 완성되지 않는다. 저자는 “전쟁의 뿌리인 사적 소유와 자본주의를 손에 쥔 채로 입으로만 떠드는 반전주의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는 경쟁의 배제, 나눔과 섬김과 연대라는 사고와 같은 것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평화는 단지 전쟁 같은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건 아니다. “어떤 것의 부재라기보다는 있을 수 있는 것을 궁극적으로 긍정하는 것”을 말한다.
궁극적으로 평화는 세속적 가치와 병존하긴 힘들다. “오직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이탈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그리고 그건 “우리 모두가 얼마나 지극한 선으로 부름 받았는지 깊이 생각하면”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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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난 세상 - 대한민국 인권의 현주소를 찾아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박영희 외 지음, 김윤섭 사진 / 우리교육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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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속도, 인권의 속도

박영희, 오수연, 전성태 글, 김윤섭 사진, <길에서 만난 세상>, 우리교육, 2006.


만남은 우연이었다. 책을 만난 것도. 책을 건넨 사람을 만난 것도. 김윤섭이라는 사람이 내게 선물로 준 것이다. 이 책의 사진을 맡은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이 책을 내게 줬다. 예전엔 국가인권위에서도 일했었다고 한다. 물론 그 때도 사진을 담당했겠지.
우연히 내가 그의 카메라 모델을 좀 했다. 세상 태어나 독사진만 그렇게 많이 찍어본 것도 처음이다. 그런 인연이었다. 그래서 그가 건넨 이 책도 처음엔 사진만 죽 훑었다. 좋았다. 느낌이. 과장하거나 기교가 없이 담담하면서도 애절하다. 사진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본래 애잔하게 다가오는 것인지, 아니면 그의 카메라를 통한 피사체가 그런 것인지는 구분이 되진 않았지만 암튼 아프면서도 뭔가 따뜻함을 주는 사진들이었다.

글을 읽은 것은 나중이다. 글에 주목해서 봤더니 이 원고들은 국가인원위에서 내는 책자에 정기적으로 실렸던 글을 모은 것이다. 우리사회의 주변을 찾아다닌 기록이다. 사회적 약자. 광포한 자본의 바람 앞에 그저 오돌 오돌 떨기만 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었다. 아프다. 어쩌지 못하고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욱 아프다.

글을 쓴 사람들은 문인들이다. 그래서인가 감수성이 많이 살아있다. 그리고 취재 목적으로 만났겠지만 그 대상 선정도 잘 한 것 같다. 비정규직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 어린 엄마들, 수험생, 코시안, 한국인과 결혼한 외국 여성, 도시 노인, 광부, 보안관찰 대상자, 무슬림, 좁은 공간에서 혼자 근무하는 사람, 어부, 농촌 청소년, 소록도의 나환자 등이다. 어쩌면 한결같이 외롭고 고통스럽다. 모두 사회적 약자다. 근데 가만히 보니 모두 경제적 무능력자들이다.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약자는 빈곤층이다. 인종, 직업, 성별 구분에 관계없이 약자들은 모두 경제 무능력자들이었다. 이런 제기랄.

쓰다 버린 소모품 정도로 다뤄지는 인생........
항상 그랬다. 자본의 속도가 인권, 복지의 속도보단 너무도 빨랐다.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인가. 돈이 사는 세상이지.

사진이 있어서 울림이 더 컸다. 김윤섭. 이 친구 덕에 다시 사진을 더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고 처박아 놓은 내 카메라도 한 번 꺼내 만져 보았다. 니콘 FM2. 고전이자 나의 첫 카메라다. 닦아보기도 했고, 맹수가 사냥감을 노려보듯 피사체를 향해 이리 저리 조리개도 돌려 보았다. 그리곤 철크덕. 이런 필름이 있었네. 몇 년 전에 찍다 남긴 필름이 그대로 감겨 있었구나. 그러다 맥없이 다 낡아 떨어진 카메라 가방에 그 놈을 집어 놓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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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 - 아나키즘의 토대를 마련한 고전! 세계를 뒤흔든 선언 6
하승우 지음 / 그린비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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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를 부정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라면

하승우,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 그린비, 2006.


삶의 근본을 묻고 그에 대한 답을 탐구해가는 대학을 온통 돈벌이 시설로 전락시키려던 총장이 교수들에 의해 불신임 당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고려대학교 총장이다. 근데 어제 옆집 아줌마의 견해를 들으니 안타깝다고 한다. 영어로 수업을 하고, 글로벌 시대에 빨리 적응시켜가려는 훌륭한 총장이 무사안일과 구태를 답습하는 교수들에 의해 거부되었다는 현실이 몹시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근데 그 아줌마의 삶도 팍팍하다. 애들 사교육비로 걱정이 태산이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란다. 그 경쟁이 지독히도 싫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데도 그 아줌만 그 경영형 총장을 추앙한다. 그런 사람이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이끌림에 지쳐 헉헉대면서도 말이다.
신자유주의가 극성스럽게 사람을 내몬다. ‘경쟁’이라는 주술은 그 무엇보다 강력한 단어다.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 경쟁에서만 이긴다면. 왜 경쟁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경쟁을 통해 진정 얻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없다. 그저 경쟁은 선(善)일뿐이다.

그러나 그 경쟁이 인간을 행복하게 했는가. 아니다. 경쟁은 강약을 나누었고, 강자는 약자를 지배했다. 그 과정에서 폭력이 동원되고, 제도가 이용되었다. 합법적 권위든 비합법적 권위든 그 모든 권위는 그렇게, 사람들을 눌렀다.
이제 벗어날 때가 된 것이 아닐까. 맑스도 이 경쟁을 싫어했지만, 결국은 그도 경쟁 속에 해결책을 찾기도 했다. 생산력 발전이라는 경쟁. 하지만 이제 생태계의 위기가 코 앞이다. 더 이상 활용할 화석 자원이 많지도 않다. 이제 생산력은 파괴력일 뿐이다. 천규석의 말처럼 ‘돌아갈 때가 되면 돌아가는 것이 진보’다.

그린비에서 내는 ‘세계를 뒤흔든 선언’ 시리즈가 몇 년 전부터 선보였다. 선두는 단연 맑스의 공산당 선언이었다. 근데, 이번에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이 나왔다. 나 역시 그의 책을 전부 읽진 않았다. 단편적으로 보았을 뿐이다. 이번 그린비에서 낸 책 역시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다이제스트로 만든 것이다. 시대 배경과 그리고 현재적 전망까지 붙였다. 그러기에 부족한 책이면서도 전체를 조망하기엔 좋다. 물론 우리 조성윤 사부같은 이는 이런 책을 싫어하신다. 원본으로 정직하게 읽어야 진수를 느낀다는 것이다. 그 말도 맞다. 나중엔 분명 그렇게 읽을 것이다.
오늘은 그냥 편하게 맛만 보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달다. 얻을 게 많다.
무정부주의라고 잘못 번역된 아나키즘, 도대체 무엇일까. 사전엔 ‘권위를 부정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나키스트’라고 나와 있다 한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정치권력을 형성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것, 대중이 스스로 결정하고 자율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의사결정구조를 만들 것, 간단히 말해서 대중의 직접행동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것’ 이런 것이 그들의 주장이라고 한다.
물론 그들의 스펙트럼은 대단히 넓다. 극단적 개인주의에서부터 에코 아나키, 집단적 아나키까지. 하지만 크게는 프루동 류의 상호주의, 바큐닌 류의 조합주의 등으로 정리될 수 있다. 물론 간디 같은 사람도 서양적 조류와는 무관하게 철저한 아나키스트이다. 톨스토이도 그렇다.
그들은 역사 속에서 ‘파리 코뮨’을 모범적 선구로 삼는다. 이는 맑스도 그렇다. 그러나 맑스는 그 코퓬이 성공하기 위해선 강력한 프롤레타리아 당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반면 아나키스트은 더 많은 인민자치를 주장한다. 혁명을 위한 당은 또 다시 권위를 가진 억압기구가 되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뭣도 모르면서 프루동의 <빈곤의 철학>을 패러디하면서 비판한 맑스의 <철학의 빈곤>을 추앙했다. 그리고 그 시절엔 맑스가 옳기도 했다. 전두환 독재를 깨려면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인 인민자치보단 강력한 대항권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노무현 정권과 여러 엔지오들의 작태를 보면서는 권력은 권력일 뿐임을 절감한다. 한 개인의 타락으로 설명될 게 아닌 것 같다. 권력은 그 본질적 속성상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그게 내가 아나키스트로 전환한 근본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철저한 비폭력 노선에 공감했기에 맑스에게서 벗어나게 되기도 했다. 그래서 찾은 게 크로포트킨이다.
생존경쟁보다 상호부조를 설파한 그였기에. 제국주의가 창궐하던 19세기 말엔 그야말로 다윈의 진화론이 사회에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온통 약육강식, 적자생존일 뿐이었다. 그래서 1차대전도 합리화되었고, 우리의 항일 투사들도 일본 따라 배우기의 부국강병을 꿈꿨다. 그러나 그 결과는? 환경파괴와 목 조이는 경쟁일 뿐이다. 나누고 싶어도 그런 놈은 우리 사회에서 바보취급을 당할 뿐이다. 아니면, 자기 것은 다 챙기고 제스처로만 해야 한다. 그래야 생존이 가능하다.
하지만 꼭 그러한가. 아니다. “자연선택은 지속적으로 가능한 한 경쟁을 피하는 방법을 추구한다.” 교사들도 교원평가를 거부하고 싶어 한다. 안일 때문이 아니다. 그 경쟁 속에서 교육이 죽기 때문이다. 그런 걸 보면 경쟁은 어쩔 수 없이 우리를 내모는 억압기제일 뿐, 본성은 아닐 수도 있다. 얼마든지 상호부조를 키워낼 수도 있을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그것을 주목했다.
역사책도 그렇다. “역사가들은 인간의 삶을 투쟁일변도로 과장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폄훼하는 문헌들을 연구한다.” 맞는 말이다. 왜 3국이 전쟁을 벌이는 면에만 초점을 두어 서술했을까. 왜 전쟁 영웅을 그리 조명 못해 안달이었을까. 전 역사를 따져보면 전쟁보다는 평화의 시기가 더 많지 않았던가. 우리 역사 교과서도 마찬가지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싸움에만 눈을 고정하는 획일적 시각. 이젠 새롭게 역사를 서술할 필요도 있다. 평화의 관점에서.
예를 들면 “만일 전쟁으로 내 꿈을 실현할 기회가 온다고 해도 나는 전쟁에 반대할 것이다. 그 누구도 시체더미 위에 인간의 사회를 건설할 수는 없는 법이다”라는 말을 남긴 르쿠앵 같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역사책을 서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그렇게 해서 끊이 없이 대안적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을 조명한다. 유럽의 68혁명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고, 현재 진행되는 다양한 대안적 상상력, 생태 공동체 등에도 주목한다. 교육 분야에도 관심이 많다. “공교육이란 사회정의를 모독하는 제도”라고 한다. 근대학교의 창시자 페레라는 사람의 말이라고 한다. 즉 공교육은 과거에 확립된 사회적 편견을 강화시킬 뿐만 아니라 자율성을 억압하고 중앙정부의 감독 아래 지배이데올로기를 공급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불평등한 현실의 경쟁을 감추는 기만적인 평등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나키스트들이 시험, 처벌, 상장 등의 경쟁을 없애고 자율적인 수업계획을 보장하려 했던 이유는 교육체계가 인성의 자율적 성장을 보장해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교사도 권위를 가진 지배자가 아니라 학생들의 자율성을 키워주는 도우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탈중심화된 네트워크형 민주주의의 가능성’, 최근 거대 엔지오들의 타락도 바로 이런 방법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신도 수가 100명을 넘어서면 바로 조직을 쪼개는 안디옥 교회처럼, 소규모 공동체들끼리의 네트워크라야 건강성이 유지되면 작은 긴장을 품게 된다.
한국 아나키스트 역사를 요약하는 과정에서 제주출신 고순흠의 이야기가 여기에 소개되어 있다. “조선노동공제회를 탈퇴한 아나키스트 중 한 명인 고순흠은 간판과 서류를 불태우면서 점차 볼세비키가 침투케 되자 고질적인 사대주의자가 발생이 되고 공산당 선전비 쟁취에 민족적 추태가 노골화케 되므로 창립책임감에 분노를 금치 못하여 부득이 파괴를 감행했다고 밝혔다.” 반갑다. 괜히.
저자는 앞으로의 아나키즘을 전망하면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도 소개한다. 요즘 한 참 잘나가는 ‘노마디즘’이다. 국내에선 이진경이 그 책을 썼다. 국가와 자본에 포획되지 않는 유목이 핵심이겠다. 물론 나는 아직까지 그 책을 읽지 않았다. 머리가 너무 앞서는 이진경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솔직히 선진적 지식 유통상인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유럽에서 뜨는 경향을 국내에서 가공해서 팔아먹는. 그래서인가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라는 천규석에 더 동의한다.
어쨌든 아나키즘의 모색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나의 사상적 편력도 계속 될 것이다. 하지만 기본만큼은 달라지지 않는다. “가지 않은 또 다른 길”이기에 두려움이 많긴 하다. “무한 경쟁에 길들여진 우리의 몸과 마음이 계속 망설이고 있을 뿐”이라는 저자의 말에 완벽히는 동의하지 않지만, 어쨌든 나 역시 주저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아나키즘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다. 삶이고 실천이기에 차분히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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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길 2010-08-15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내용이네요. 이념과 생각을 싫어하지만....
 
환경학과 평화학
토다 키요시 지음, 김원식 옮김 / 녹색평론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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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다 키요시 지음, 김원식 옮김, <환경학과 평화학>, 녹색평론사, 2003.





전국역사교사모임에서 내는 <역사교육> 편집진의 집요한 요구에 못이겨, 얼마 전 나는 나를 대상으로 한 인터뷰에 응했다. 근데 그걸 보고 전남의 김남철 선생님이 우리 모임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근데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좀 황당했다. 김선생님은 내 인터뷰를 보고 갑자기 먹먹해졌다는 것이다. 내공이 어떻고, 또 무슨 꼴통 등의 표현이 있었는데, 암튼 많이 놀랐다는 것 같다.

나는 오히려 김남철 선생님을 볼 때마다 항상 놀라고, 부럽고, 존경스러워 하는데. 그가 나를 보며 충격이었다니 나는 그게 좀 납득이 안 된다. 아마 나의 사고가 아나키스트의 철학을 담고 있다는 것에서 조금 쇼크였던 모양이다.

요사이 부쩍 더 아나키즘을 생각한다. 도대체 국가란 놈이 무엇인가. 이 생각을 하면 그렇다. 맑스가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국가는 유산자들의 위원회일 뿐이다. 그들이 어떻게 하면 적절하게 사회의 부와 권력을 자기들끼리 나누어 먹는가 하는 것을 의논하는 위원회일 뿐이다. 국민의 동의는 매스컴을 통해 만들어진 조작된 여론과 강제 자발적 동의를 기초로 한 헤게모니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니 그건 진정한 여론도 국민의 의사도 아니다. 다만 기득권 층의 이익을 추수하는 것일 뿐이다.

논의되고 있는 한미자유무역협정도, 군사기지 건설도, 국민을 위한 게 아니다. 국가 안에서 기득권을 가진 자들을 위한 것일 뿐이다. 나머진 들러리다. 그러니 국가에 무얼 기대하겠는가. 그러니 아나키즘의 정당함은 뚜렷해진다.

'평화', 요즘엔 이 단어가 '사랑'이라는 말처럼 유행가 가사 이상으로 흔해져 버렸다. 진정 무엇이 평화인지도 모르는 채 사용한다. 그리고 오히려 그 평화를 아주 상업적으로 이용해먹는 놈들도 많다. 솔직히 제주도가 평화의 섬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은 전혀 없다. 장식일 뿐이다. 그래서였나, 나는 한동안 이 좋은 단어를 의도적으로 멀리하기도 했다. 천박해 보여서였다. 그러나 이제 좀 진지하게 다가가고 싶다. 그래서 이 책을 골랐다. 책 제목 그 자체가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좋은 책이다.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선 '평화'라는 말 자체에 대해서 개념적으로라도 정리할 수 있었다. 종래 평화의 대립 개념을 전쟁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1968년 인도의 스가타 다스굽타가 <비평화와 악개발>이라는 논문에서 전쟁이 없는 것만 가지고서는 평화라고 할 수 없으며 기아, 빈곤, 질병, 영양실조, 더러움을 특징으로 하는 고난과 궁핍을 비평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뒤 노르웨이의 요한 갈퉁이 1969년에 <폭력, 평화, 평화 연구>라는 논문에서 폭력과 평화를 재정의했다고 한다. "폭력이란 폭력이 눈앞에 있다는 것으로 인해 인간존재가 어떤 영향을 받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신체적, 정신적 실현이 잠재적 실현 이하에 있는 것과 같은 때이다."라고 했다 한다. 다시 말해 "건강, 생명, 행복, 미, 지성 등에서 자기 실현이 방해받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자기 실현을 방해하고 있는 요인 중에서 피할 수 있는 것이 폭력이"라는 것이다.

갈퉁에 의하면 폭력은 '직접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으로 나뉜다. 직접적 폭력이야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며, 구조적 폭력은 사회 제도, 관습, 경제적 상태나 법률, 개발 등에 의해 천천히 나타나는 폭력을 말한다. 이건 전쟁이 아닌 상태에서 저질러진다. 환경오염에 의해서, 식량 제재에 의해서 등이다.
그리고 그는 '전쟁 부재로서의 평화'를 '소극적 평화'라고 했고, 그에 반해서 '행복이나 복지나 번영이 보장된다는 의미에서의 평화'를 '적극적 평화'라고 했다. 다시 말해 적극적 평화는 '사회정의의 실현이자 인권의 옹호와 확대이며 고난과 궁핍에서의 해방이다."

그래서 이젠 '전쟁과 평화'가 아니라 '폭력과 평화'라는 표현이 설득력을 얻는 것 같다. 사실 아프리카 어는 국가에서 어린이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것, 이것 역시 분명한 폭력이다. 세계 인구의 20%가 세계자원의 80%를 소비하는 것, 역시 분명한 폭력이다. 물론 그 소비자들에게는 가해 의사를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의 소비는 누군가에게 가해의 행위가 되고 만다. 그게 바로 구조적 폭력이면 적극적 평화의 결여이다.

이렇게 평화에 대한 개념 정의를 얻은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물론 중요한 건 실천이다. 그래서인가 이 책의 저자 토다 키요시나 번역자이신 김원식 선생님은 그 구체적 실천을 말한다. 특히 번역자이신 김원식 선생은 1923년 생이다. 그 연세에 여전히 평화, 환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계신다. 살아있는 스승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말하는 평화실현은 어떤 방법을 통해서 가능한 것인가. '민주주의와 군대는 모순된다'라는 말에 답이 있다. 이 말은 오다 마코토의 말이다. 어쨌든 이들은 철저히 군대를 부정한다. 군대 그 자체가 폭력의 가능성일 뿐만 아니라 폭력 그 자체라는 것이다

노골적으로 말해 "미국 군대의 개입은 대기업의 이권 확보를 위해서 감행되었다." 이것은 앞서 국가가 가진자들의 위원회라고 했던 데에서 미리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한 폭력일 뿐이다. 문제는 그것이 베버가 말한 것처럼 국가만이 그 폭력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문제다. 국가는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위해 세계 최대의 살인행위를 과감히 저질렀던 것이다.

사람들이 테러는 비난하지만 전쟁은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전은 대부분 테러이다. 1차 대전에선 군인 사망자가 90%였다지만 베트남전만해도 민간인 사망자가 95%였다. 전략적 폭격 때문이다. 군인만 골라서 공격하는 게 아니라 도시 자체를 파괴해버린다. 그러면 민간인의 피해가 극심해진다. 이건 테러다. 전쟁이 아니다. 때문에 국가는 합법적 테러 기구를 보유한 권력인 것이다. 물론 저자는 군대 말고 또 사형제와 담배 판배를 국가에 의해 저질러지는 테러로 규정하고 있다.

최근 미군이 개입하는 대부분의 전쟁은 미국 산업체의 이익을 위해서 만들어졌다. 미국 역시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저자 서문에 있는 표현대로라면 "지구사회의 불평등을 유지하기 위해서 강력한 군대가 필요하다"라는 것이다. 모두가 미국만큼의 소비를 유지할 순 없다. 그러려면 지구가 대 여섯 개가 더 필요할 것이다. 그럼 미국은 자기들만이라도 그런 소비를 유지하고 싶어한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불만을 억압하기 위해 군대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말이 좋아 국토 방위이지, 사실은 기득권자들의 자기 이권 유지가 군대 설치의 목적일 뿐이다. 우리 남한 군대는? 뻔하다. 언제 한 번 독자적인 목소리를 낸 적이 없다. 철저히 미군에 종속적이다. 아니, 광주 때처럼 자신들의 기득권을 확보하기 위해 자국민을 살해하는 경우가 있다. 역시 본질은 하나다. 군대는 국민의 군대가 아니라 권력자의 군대일 뿐이다.

군대가 없는 국가. 꿈이 아니다. 코스타리카는 1871년에 사형제를 폐지했고, 1949년에 군대를 폐지했다. 19세기에 사형제 폐지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서구 선진국 중엔 미국과 일본만이 사형제를 유지하고 있다. 변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21세기엔 전세계적 차원에서 군대 폐지도 꿈꿔볼 만 하다. 군대가 없는 사회.

간디가 "지구는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에는 충분한 크기이지만, 탐욕을 채우기에는 지나치게 작다" 라고 했던 말을 다시금 떠올린다. "단순하고 윤택한 삶", "즐거운 불편"은 이 책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허위의 풍요로움을 버린다면 못이룰 것도 아니다. 그럴 때 군대없는 지구도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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