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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데레사 나의 빛이 되어라
브라이언 콜로디척 신부 엮음, 허진 옮김 / 오래된미래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내가 좋아하는, 아주 좋아 하는 마더 데레사. 이 분에 관한 책이라면 주저 없이 산다. 이 책도 그랬다. 다만 사 놓고도 안 읽는 버릇은 나의 게으름이다. 새해 시작하면서 그래도 뭔가 영적인 도움을 얻고 싶어 이 책을 책장에서 꺼냈다. 확실히 소득이 많다. 일단 책 내용은 별도로 하고, 읽다가 아, 그래, 올해는 이렇게 살아야지 싶었던 게 몇 있다.
우선 올해는 우리 맏이 마르첼리나가 첫 성체 하는 해다. 마더 데레사의 경우,아니 그 때의 이름은 마더 데레사가 아니라 유고슬라비아에 살던 소녀 곤히야다. 그가 첫 영성체 하던 날 각별한 은총을 받았다고 한다. 그 구절 읽으면서 매일 기도에서 우리 맏이 마르첼리나의 첫 영성체를 위해 기도해야되겠다 싶었다.
다음으로 마더 데레사와 같이 있던 수녀님들 평이 마더 데레사는 불평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나는 반대다. 근데 불평했다고 문제가 풀리지는 않았다. 그럼 바보짓 한 게 틀림 없다. 건강한 비판은, 정당한 통로를 통해서 겸허하고 진솔하게 할 것이지만, 전혀 도움되지 않는 불평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올 해 이 책 보면 결심했다.
그리고 세 번째, 마더 데레사는 과도한 일 속에서도 늘 새벽 4시 40분이면 일어나 성체조배를 했다고 한다. 십자가에 입맞춤하고. 이건 못하겠지만 그래도 매일 아침 기도는 빠뜨리지 말아야겠다고 다시 결심했다.
네 번째, 성체조배 때 생각나는 얼굴이 있으면 그를 위해 기도해준다는 것이다. 이건 따라할 수 있겠다. 이 네 가지만으로도 이 책 읽고 건진 소득이다.
근데 사실 책의 중심은 그게 아닐 것이다. 책 광고에 보면 마더 데레사가 하는 말 중에"내 안에는 끔찍한 어둠이 있습니다"라는 게 있다. 이게 뭘까. 마귀?
그건 아니다. 그가 어릴 때부터 사적 서원을 하고 실제 하느님을 만나 '사랑의 수도원' 건립을 계시받고 그랬는데, 그렇게 해서 막상 빈민을 위한 사랑의 실천을 시작했는데, 정작 그 이후로는 하느님을 전혀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말 하느님 부재까지 느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삶과 언어의 역설이다. 이걸 이해하지 못한 천박한 언론인들에 의해 '마더 데레사가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했다. 하느님을 믿지 않은 순간이 있었다'라는 식의 보도를 해 댔다. 나도 처음에 언론에서 읽었을 땐 놀랐다. 근데 이 책을 읽어보니 그것은 대단한 신비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은 마치 바오로의 가시와 같은 것으로 나는 받아들였다. 바오로 사도 역시 그 가시를 빼어달라고 여러 차례 기도했건만 하느님은 응하지 않았다. 그 가시가 있어야만 바오로 사도가 교만에 빠지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마더 데레사가 하느님 부재의 영적 어둠에 놓여 있지 않고, 늘 하느님과 대화하고 일치하고 있었다면 어쩌면 교만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어둠에 놓여 있었기에, 즉 자신은 완전히 비어지고,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껴질 정도의 처지에 놓여 있었기에 그는 항상 교만하지 않고,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어떤 신앙체험을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더니, 부러워 한다. 크게 쓰시려고 그런다고까지 했다. 솔직히 기분이 좋았다. 근데, 그 이후론 맹맹하다. 왜 그런가 했더니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그런 말 천박하게 함부로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만큼 더 낮아져야 하는데, 나는 항상 높아지려고 했다. 비워야 했는데, 채우려고만 했다. 그러니 당연한 결과다. 이게 나 같은 한심한 인간하고 데레사 같은 성인의 차이일 것이다.
그렇게 내적 어둠이 있었기에 그는 가난한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게 마더 데레사가 50년 동안이나 겪은 어둠의 실체이고, 그 어둠을 통한, 다시 말하면 완전한 비움을 통한 영성일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내가 50년간이나 그런 하느님 부재를 느꼈다면 나는 완전히 망가졌을 것이다. 그러니 차이가 있다. 그의 삶과 내 삶에는. 하긴 하느님도 나 같은 인간에겐 그런 단련을 주지도 않으실 것이다. 왜? 견디어 내지 못할 것을 아시니까. 그릇 차이. 이걸 하느님은 잘 아신다.
근데 사실 마더 데레사도 견디기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외로움. 예수님이 겟세마니 동산에서 흘리신 피땀과 또 십자가에서 아버지 하느님께 외치던 절망적 목소리 역시 그 외로움일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은 그 외로움, 그 不在를 통해 일을 '완성'하신다. 슈퍼맨처럼 나타나 일을 '짜잔'하고 해결하지 않으신다. 그 완전한 비움, 그 완전한 없음을 통해 구원 사업을 하신 것이다. 채움이 아니라 비움이다. 왜냐면 예수님은 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되지 않고서는, 죄가 되지 않고서는 구원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니 신적 능력으로의 해결이 아니라 인간적 절망으로 구원을 이루셨다. 마더 데레사 역시 그랬다. 가장 낮은 곳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과 소통하고 있다는 과시욕이 아니라,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는 자부심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자각 속에서 이뤄질 수 있는 일이다.
모든 것을 내려 놓음. 그 내려놓을 수 있는 근거였던 아버지 하느님마저 현존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가질 만큼, 곧 기댈 언덕조차 없어보이는 그 절박함에서 기적은 이뤄진다. 이게 신앙의 신비다.
그건 그렇고. 나는 마더 데레사의 그 겸손에 매번 놀란다. 그는 남들로부터 칭찬 받은 것에 대해 그것은 모두 십자가일 뿐일고 한다.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거꾸로 그는 남들로부터 잊혀지기를, 무시당하기를, 경멸당하기를 오히려 수용한다. 그래야 하느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굴욕은 저에게 가장 달콤한 과자랍니다" 이렇게 말한다. 또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무시다아며, 어떤 인정도 받지 않기를 열심히 기도했습니다"라고 한다. 머리로는 이게 이해가 되는데, 난 도저히 몸으론 안 된다. 나는 오늘도 남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삶을 사는 것 같다. 그러니 항상 내 중심이 아니고 남 중심이 된다. 내 인생인데, 남의 평가를 따라 가는 인생이 된다. 한심한지고.
난 언제면 '굴욕을 가장 달콤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긴 그렇게 해야 나는 작아지고 하느님은 커지실 것이고, 허세는 사라지고 본질만 남을 것일 텐데. 알긴 아는데 실천이 어렵다. 쓸데 없는 자존심. 이걸 어떻게 극복하나. 그래, 이런 책 자주 읽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도움이 될 터이지. 작아지자. 작아지자.
또 하나. 그렇게 내가 작아지면 마더 데레사처럼 '작은 사랑, 작은 희생, 작은 내적 금욕'을 말하게 될 것인가. 그 분은 "큰일을 찾지 말고, 위대한 사랑으로 작은 일을 하십시오"라고 말한다. 이게 맞다. 사실 나는 큰 그릇이 못된다. 그러니 작은 일이라도 잘해야 한다. 근데, 격에 안 맞게 큰 일을 좋아한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칭찬해주면 너무 좋다. 그분은 그것을 십자가라고 하는데....... 그래도 항상 떠올리자. 내가 주변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때마다 마음 속으로는 '이건 나의 십자가임을'
그리고 또 '특별한 시련'을 '더 큰 사랑 실천의 기회'로 받아들이는 자세이다. 이건 제대로 된 신앙인이라면 항상 가져야 할 자세다. 어려워서 그렇지, 머리로는 나도 안다. 그래도 자주 연습하자. 시련은 사랑실천의 기회임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소. 그냥 미소가 아니라 '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달라고 항상 기도하세요 라고 하신다. 그렇게 기도해야겠다. 어린아이 같은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