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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화신문 엮음 / 평화방송.평화신문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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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구술, 평화신문 엮음,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화방송.

 

작년(2008년) 평화신문 구독자 모집의 일환으로 우리 신제주성당에 어떤 분이 오셨다. 그때 나는 평화신문 구독신청을 했다. 도움이 되는 신문이다. 근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김수환 추기경님 일대기를 다룬 책이 있다며 권했다.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아마 조용귀 목사 책이 나왔다고 하면 순복음교회 모든 신도가 다 그 책을 구입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 말 때문이다. 그 말 때문에 의무감에서 샀다. 그리곤 책장에 꽂아 두었다.

 

얼마 전 그 김수환 추기경님이 선종하셨다. 선종 소식을 들은 건 월요일 성경공부가 끝나갈 무렵이다. 교구청에 근무하시는 분이 강우일 주교님이 서둘러 서울로 가셨는데, 추기경님이 위독하시다는 소식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책을 한 번 읽어야겠다 싶었다. 읽고 나서 한 마디로 느낌을 적으면,

"이렇게 좋은 책을 책장에 꽂아만 두었다니"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 추기경님의 훌륭함을 그리고 이 책의 뛰어남을 몰랐다.

 

김수환 추기경님, 내가 고등학교 시절 이시돌에 피정 갔을 때 직접 뵌 적이 있었다. 그때는 신학교 진학해서 신부가 될까, 아니면 나중에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고 살까 하던 시절이다. 마침 내가 어느 신성여고 학생을 좋아하게 될 무렵이라 나는 후자를 택했다. 그런 시절에 그분을 직접 뵈었을 뿐, 나머지는 사진 속에서 뵌 분이다.

 

대학 시절, 그 전까지만해도 사회적 발언을 많이 하셨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인가 그게 줄었다. 주위에서는 이상한 루머도 있었다. 가톨릭의 부패 때문에 추기경님이 발목잡히셔서 그렇다는 둥.

물론 나는 그때 신앙을 버리고 살 때여서, 가톨릭이 더 강한 사회적 발언을 해주시지 않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 다른 생각은 없이 살았다.

 

근데 이 책을 읽으니 추기경님의 고뇌를 눈앞에서 보는 것 같았다. 교회의 분열을 막기 위해 노력하시는 모습, 과격하지 않고 보수적인듯 하면서도 항상 민주화 운동의 결정적인 대목에서는 필요한 발언을 잊지 않으셨던 분. 그 분의 이야길 읽었다.

 

어린 시절부터 사목에서 물러선 뒤의 일까지. 근데 그 분도 나처럼 결혼해서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노라고 한다. 나와 다른 분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깜짝 놀랄 신비적 체험도 없었다고 한다. 성령기도회에 가면 그렇게 많은 기적들과 증언들이 쏟아지는데, 추기경님은 그런 적이 없었다고 한다.

"위대는 평범이외다"

중학교 국어 시간에 읽었던 구절이 여기서 떠오른다. 정말 튀는 구석이라곤 전혀 없으신 분이다. 그런데도 한국 가톨릭을, 뿐만 아니라 사회를 이끌어 오신 분이다. 너무도 평범했기에, 나와 다름이 없는 분이시기에 편안하게 그분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가 그렇게 평범하게 다가왔던 것은 그분의 겸손 때문일 것이다. 항상 낮은 곳을 지향하고, 항상 자신의 죄인임을, 비겁한 사람임을 고백하는 대목에서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사실 그분이 왜 대단한 구석이 없겠는가. 어찌 비범함이 없겠는가. 그런데도 그분은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으신다.

 

내가 본받을 많은 점들, 그 중에서도 특히 남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면서 뭔가 잘 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어리석은 모습들. 추기경님의 선종 소식과 함께 나를 돌아볼 기회를 준 고마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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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민족의식이 만날 때
황종렬 지음 / 분도출판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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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종렬, <신앙과 민족의식이 만날 때>, 분도출판사, 2000.

 

지식인의 관심 경향도 하나의 흐름이 있는 것인가. 내 삶의 중심 테마는 역사였다. 현직 역사교사이기도 하고. 그리고 심장 고동치던 그 80년대를 지탱하게 한 힘도 그 역사였다.

 

그러나 3년전부터 심하게 앓았고 그러면서 내 삶을 돌이켜 보는 시간이 있었다. 물론 그 이전부터 이젠 생태적 가치관을 앞에 내세우고 살아야겠다고 생각도 했다. 그 과정에 이 책의 저자 황종렬이라는 분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아마 <평화신문>에서였지 싶다. 그 분의 이름과 또 한 분, 잘 기억나진 않는데 이동훈 신부님인가 하시는 분께서 생태 영성에 대한 책을 냈다는 기사였던 것 같다. 책 제목을 가지고 여러 인터넷 서점을 돌아다녀도 구할 수가 없었다. 아마 영세한 출판사에서 찍어 중앙 무대에까지는 가지 않은 것 같았다. 아쉬웠지만 훗날을 기약했다.

 

근데 그 인터넷 서점에서 황종렬이라는 분이 쓴 책이 몇 권 있음을 알게 되고서 일단 생태영성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 책을 쓰신 분의 다른 책도 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2권 주문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책이다. 한 동안 책꽂이에 장식물로 있었다. 그러다가 순서대로 꺼낸다고 꺼낸 것이 이 책이다. 표지에 안중근의사의 손도장, 그리고 마지막 쓰신 글이 실려 있다. 려순 감옥에서 쓰신 글이다. 책의 부제가 -안중근 토마스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관한 신학적 응답-이다.

 

내가 어쩌면 살짝 멀리 놓아둔 역사를 신앙과 접목시킨 책이겠다 싶었다. 저자 소개를 보니 해방신학에 대한 연구도 많이 하신 분  같다. 나 역시 대학시절 해방신학에서 희망을 보고자 했다. 그러다가 아예 신앙을 놔버리기도 했었다.

 

그래서인가 더 친연성이 느껴지는 분이라 생각하며 읽었다. 서문에서 그 분이 밝히기를 "역사와 사회와 신학을 통합시켜 갈 신학 방법론이 나의 주전공 분야이다." 라고 하셨는데, 나는 대학을 역사 전공, 석박사 과정을 사회학, 그리고 40대 중반에 들어 다시 신앙을 고민하는 모습이라 그분의 입장이 괜히 반갑게 다가왔다. 물론 요즘 세태에서 이런 책이 환영받을 것 같지는 않지만 정직하게 한 시대를 증언하는 책이라 생각한다.

 

과거 일제 강점기 가톨릭이 정치적으로 상당히 타협적이었다는, 아니 어쩌면 진정한 신앙에서 벗어나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동조했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안중근의 의거를 둘러싼 교회의 적나라한 모습을 이 책에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실망이 컸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이렇게 역사와 함께 나중에 드러나기도 하는가 보다 싶었다. 저자의 말처럼 현재 정의구현사제단의 모습이 그런 계승이 아니겠나 싶었다.

 

책의 시작은 전래 동화 '해와 달이 된 오누이'로부터다. 이렇게 글을 끌어가는 솜씨도 탁월하고 또 그런 동화 속에 역사와 신학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고개고개의 지루함이라고 느껴졌던 것도 그 만큼 당시 민중들의 고달픈 삶이 반영되어 있음이라고 한 것도 탁월한 분석이었다.

 

안중근 관련 인용 기사를 다른 곳에서 잠깐 보긴 했지만 이 책에서 더 많이 확인한 것도 소득이다. 안중근이 빌렘 신부와의 마지막 접견에서 "인생이 있는 이상 죽음 도한 이르든 늦든 면치 못하는 바이다. 믿는 이인 나는 그 하루를 앞서 성단에 오르니 교우의 힘에 의해 한국 독립의 길보를 가져다 주기를 기다릴 뿐이다."라며 신앙인과 역사 속의 시대적 책무를 다한 지성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안중근은 도덕적으로도 훌륭한 사람이다. 그가 적의 포로를 사로잡은 후에 처형을 주장하는 동료와 부하들을 만류하며 "만국공법에 사로잡은 적병을 죽이라는 법은 없다. ...적들이 그렇게 폭행을 자행하는 것은 하느님과 사람을 다함께 분노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마저 저들과 같은 야만적인 행동을 해야만 하겠는가? 또 그대들은 일본의 4천만 인구를 모두 죽인 다음에 국권을 회복하려고 하는가?"라며 어쩌면 비현실적인 포로 석방 조치를 취한다. 그로 인해 독립군이 오히려 곤경에 빠지고 안중근이 독립군 내에서의 위치도 불편해지긴 했지만 그는 확고한 평화의 원칙, 하느님 공법의 원칙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당시 한국 지식층과 교회는 살인자의 죄목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 잘못을 뉘우치기 전까지는 성사를 집행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인지 뮈텔 주교의 성사 거부를 어기고 빌렘 신부는 안중근에게 찾아간다. 물론 빌렘 신부도 안중근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갔다고 한다. 그러나 안중근의 자신의 뜻을 바꾸지는 않았고 그럼에도 빌렘신부로부터 고해성사를 받는다.

 

이해하기 힘든 것은 뮈텔 주교 등의 입장이다. 저자는 이것을 신앙보다는 서구 중심의 근대화론에 뿌리를 둔 제국주의적 식민주의 패러다임을 정상적으로 받아들인 당시 서구 지식인의 보편성에서 찾고 있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나, 시대를 뛰어 넘어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됨의 모습이기에 아쉬움은 남는다.

그게 없었기에 가톨릭에서 신사참배를 허용한 것이다. 1933년 1월 교황대사 에드워드 무니 대주교를 통해 신사참배를 인정했다고 한다.

 

그리 많지 않은 분량의 원고이기는 하나, 상당히 무거운 원고이다. 생태영성을 공부하려다가 다시 나의 옛 테마인 역사로 돌아갔다 왔다. 하지만 단순한 역사가 아니라 신앙과 함께 한 역사 공부라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예전부터 이런 책읽기를 했더라면 내가 영적으로 헤매는 기간이 짧았을 것을...

지금이라도 새롭게 만나게 되는 신앙과 역사, 종종 이런 책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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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도를 살아가는 인간 성서와 인간 10
송봉모 지음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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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봉모, <일상도를 살아가는 인간>, 바오로딸, 2001.

 

2008년 1월에 16쇄 한 책을 구입해서 읽었다. 송봉모 신부님의 성서와 인간 시리즈 10편이다. 포켓북, 그런 책인데도 할 말이 너무 많다. 이곳에 인용할 대목도 너무 많다. 생각 같아서는 책 전체를 옮겨 놓고 싶다. 짧은 글인데도 많은 사람에게 위안을 주고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어쩌면 단순한 이야기다. 삶의 중심축에 예수님을 놓고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아라. 그러면 쓸데 없는 근심걱정으로 인생을 고달프게 살지 않게 된다. 그런 이야기다. 그런데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삶은 쉽지 않다. 계속 걱정이고 근심이다. 기도할 때만 예수님이 내게 와 있고 그렇지 않은 때는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며 허덕거리며 바쁘게 돌아간다. 그러다가 망가진다.

 

나 역시 많이 망가졌었다. 구체적으로는 2년전부터 심하게 앓았다. 근심 걱정 속에,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에 대한 필요 이상의 상념 때문에 몸도 마음도 영도 망가졌다. 마귀는 '내일'이라는 것으로 유혹하여 사람을 걱정 초조 속에 빠뜨린다고 한다. 돌아보면 내가 완전히 그꼴로 마귀한테 당했다. 영적으로도 심한 병을 앓았다. 지나고 나서 이 책을 읽으니 무엇이 문제였는지가 보인다. 내 삶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없었다. 세속적 명예욕만이 가득 찼다. 그리고 그 명예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하루 하루 정말 정신 없이 살았다. 그러나 꿈을 이루면 또 다른 목표가 생기고, 그러면 나는 또 전력 질주, 그러다 보니 걱정과 불안과 초조와 스트레스와 질투심만이 남았다. 마귀는 이것을 바로 활용했다. 완전히 부마 상태가 되어 한 동안 힘들게 보냈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내게 삶의 방향을 제시해줬고 마귀를 몰아내 주셨다. 회심한 인간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분께서 해 주신 일이다.

 

이 책 읽으면서 공감하는 대목들을 중심으로 옮긴다. 간단한 코멘트와 함께.

 

"문제는 우리가 목표를 향해 계속해서 달려갈 뿐이지, 오늘이라는 현실적 단계를 즐기며 살아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시선이 항시 내일을 향해 고정되어 있기에 무엇을 성취했다 하더라도 즐길 시간이 없다. 인생이란 무대 위에 성취한 그 무엇을 올려놓고 진득하게 즐길 시간이 없다. 하나의 목표를 성취하고 나면 또 다른 목표를 만들어 끊임없이 달리는 것이다. 이렇게 일하는 인간, 아니 일의 노예가 되어 내일을 향해 뛰어가는 동안 우리의 인생은 어느새 황혼기에 접어들고 만다. 그리하여 삶은 마치 먼발치에서 구경만  하다 끝나버린 허망한 인생살이로 다가온다."

현재를 즐겨라. 내가 이룬 성과를 즐겨라. 나는 그렇질 못했다. 참으로 억울한 노릇이다. 그냥 달리기만 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나마 내 삶이 황혼기에 접어들기 전에 이런 깨달음을 받은 것이 다행이다. 먼 발치에서 구경만 하다가 끝나버린 삶이 되지 않기 위해서 오늘 행복해야겠다. 각각의 단계를 즐기면서 충만하게 살아가야 겠다. "승자는 과정을 위해서 살고, 패자는 결과를 위해서 산다. 승자는 달리는 도중에 이미 행복하나, 패자는 경주가 끝나야만 행복이 결정된다." 이 또한 중요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게 쉬운가. 현실에서 예상치도 못한 고난이 다가오는데, 그걸 즐길 수가 있는가. 송신부님은 이렇게 답하신다. "고통은 더 이상 하느님의 진노에서 나오는 저주나 죄에 대한 심판의 표지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를 단련시키기 위한 아버지의 사랑이다." 그러면서 그는 성서 구절을 인용한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견책하시고, 당신이 받아들이시는 모든 아들에게 매를 드신다."(히브 12, 6)

"내가 사랑하는 자일수록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묵시 3, 19)

"여러분은 견책을 받거든 참아내십시오. 하느님은 여러분을 아들처럼 대하십니다. 아버지가 견책하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겠습니까?"(히브 12, 7)

 

사실 따지고 보면 고통도 오늘 고통일 뿐이다. 내일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러니 그냥 오늘 고통만 견딜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된다. 그리고 실제 하느님은 우리에게 오늘 하루의 고통을 견딜 힘을 주신다. 그러나 우리가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삶이 힘겨운 것은 우리 앞에 놓여진 모든 걱정을 미리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견딜 수 있다. 견딜 수 없는 것은 내일이다."

"오늘 하루만 사랑으로 살고, 오늘 하루만 화내지 않고 온유하게 살겠다고 결심한다면 삶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맞다. 매일 그렇게 생각하며 살 일이다.

"하지만 오늘이 아닌 앞날을 바라보면서 '도대체 언제까지 이것을 해야 하나?'라고 생각한다면 하루하루가 힘든 것은 물론이요." 중환자를 오래 간호하면서도 그렇게 생각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견디기 힘든 것은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예견 때문이다. 그런 예견은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오늘 이타적이고 순수하게 살아갈 수 있으면 된다.

"정신건강과 영혼건강에 가장 해로운 것은 내일 일을 오늘 걱정하는 것이다. 정신건강과 영혼건강에 가장 이로운 것은 내일 할 일은 내일 생각하는 것이다." "내일 일을 걱정하게 하는 것은 마귀의 주전략이다. 하느님은 당신 속성상 오늘을 살게 하시지만 마귀는 내일을 살도록 이끈다."

한국의 40대들이 과로로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서도 신부님은 한 마디 하신다. "한꺼번에 생명의 진을 고갈시켰기 때문이다." 내게 딱 들어맞는 말. 깊이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얼마나 바보처럼 살았는지.

"생명을 잘 보존하려면 자연스럽게 살아야 한다. 자연스럽게 산다는 것은 힘들여서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진리는 자연의 움직임을 가만히 바라보면 즉시 알수 있다. 자연은 소란을 피우지도 않고, 진을 빼지도 않고, 최소한의 노력만 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다 보면 인생이 너무 밋밋한 게 아닌가 하고 회의할 수도 있겠다. 내 능력은 많은데, 너무 내가 게을러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역시 어릴적 받은 성실 교육의 효과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가 뭔가 거창한 일을 해야만 인생에 보람이 있을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하셨다. 그러니 그 일을 잘 하면 된다.

"어떤 일이나 자기 소임터인 주방에서 일을 시작할 때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은혜를 구하였다. 그리고 일하는 동안 하느님과 끊임없이 대화를 하면서 하느님이 함께 한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었다."(중략)"나는 프라이팬 위의 오믈렛을 뒤집을 때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했습니다. 하다못해 지푸라기 하나를 줍는 일까지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 사랑하는 법을 찾고 있습니다만, 무슨 일이든 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하면 됩니다." 이건 로렌스 수사님의 말이다. 그렇게 살면 된다.

나는 어떤가. 이 부분 심히 반성되는 부분이다. 나는 항상 거창한 것만 꿈꿨다. 지금 학교 현실이 못마땅하다고, 교육이 완전 붕괴했다고, 더 이상 제도교육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한탄만 했다. 진정 그러하면 뛰쳐나와 대안교육을 해야할 터인데 그렇지도 못한다. 그러면서 불평만이다. 작은 일, 그 작을 일 마다 "하느님의 일로 여기고 정성을 다해서 할 때" 하느님은 함께 하실 터인데 말이다. 어렵지만 항상 고민할 일이다. 집에서 청소할 때도 옆사람에 대한 원망으로 할 것이 아니라, 설겆이를 할 때도, 항상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며 할 일이다. 그러면 삶이 기쁘다.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실 것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모든 일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1고린 10, 31)"라고 말이다. 요즘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숲 만들기, 주님께 헌정하는 마음으로 할 것이다. 이 숲이 나중에 주님의 자녀들을 기쁘게 해주길 기도하면서.

 

또 하나 재미있고 실용적인 고민해소법을 읽었다. 심리학자 로빈 샤르마가 한 말이라고 한다. "걱정을 위한 고정된 시간을 저녁에 잡으십시오. 매일 저녁 30분 고정된 시간을 만들어서 그 시간에 걱정거리에 골몰하십시오. 그 대신 하루 중 나머지 시간에는 그 걱정거리를 잊어버리십시오. 만일 거정거리가 생기면 그것을 메모한 뒤 저녁 걱정하는 시간으로 넘기십시오. 이렇게 하면 점차 걱정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끝내는 걱정하는 습관 자체를 아주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그 걱정하는 시간이 되어 보면 이미 그 고민 거리가 해결된 뒤일 수도 있다. 우리가 하는 걱정이 사실은 이미 끝나버린 과거, 앞으로 오지도 않을 일 등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진짜 우리가 고민해야 될 것은 10%도 되지 않는다는 게 학자들의 견해다. 그런데도 우리는 90% 쓸데 없는 걱정에 짓눌려 살아간다. 벗어날 일이다.

랭크라는 사업가는 앞의 로빈 샤르마 박사의 권고를 받아들여 일주일 동안 고민을 잊고 수요일에 집중적으로 그 문제 해결을 위한 고민을 했다고 한다. 고민 거리가 생기면 즉시 메모하여 고민함에 넣어 두고 그 순간만큼은 잊어버렸다고 수요일에 그 메모지를 꺼내 읽으며 하나씩 해결했다고 한다. 수요일에 꺼내보면 많은 경우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는 사건이 되기도 했다 한다. 이건 정말 실용적인 지혜다. 창조적으로 내게도 적용해볼 만 하다. 일단 메모하고 잊어버릴 것. 그리고 정해진 시간에 집중적으로 고민할 것.

 

하나 오해하지 말 것은 미래를 걱정하지 말라고 해서 미래를 설계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미래를 준비하고 계획하고 대비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창조적이어야 하고 즐거워야 하는 것이지, 짓눌리며 할 일은 아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3년은 현재의 우리 삶보다 더 바빴다. 가르침 주고, 병자를 치유하고, 잠도 못 주무시면서 하신 일이다. 그러나 그분의 마음은 평화 그 자체였다. 항상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바쁘게 살 필요는 있다. 다만 그것이 세속적 욕망을 위한 것일 때는 공허감만 남는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 뜻에 맞는 일이며, 주님과 함께 하는 일이라면 영적으로 충만할 것이다.  삶의 중심축에 그분을 항상 놓고 살기만 한다면 말이다.

더 바빠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바쁨은 어제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축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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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속의 인간 성서와 인간 8
송봉모 지음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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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봉모 신부님의 성서와 인간 시리즈 9편이다. 제목만 봤을 때는 인간관계 전반을 신앙 차원에서 다루는 글인 줄 알았다. 근데 보니 부부관계에 국한되어 있다. 구구절절히 옳은 이야기. 

특히 재미 있었던 부분은 창세기 아담과 이브 창조 이야기에서 남녀 차별, 남녀 불평등이 아니라 남녀 평등을 적극적으로 해설한 부분이다. 이를 테면 이브가 아담보다 늦게 그리고 아담의 몸을 재료로 해서 태어났으므로 남성보다 여성이 열등하다는 기존의 견해에 대해, 늦게 만든 것은 그 만큼 완결품이라고 한다. 하느님이 인간보다 하늘과 땅, 동물을 먼저 만들었는데, 선후관계에서 앞의 것이 더 중요한 것이라면 다른 동물이 인간보다 더 귀한 존재인가라며 반문한다. 

재료 문제 역시 흙으로 아담을 빚었지만, 이브는 더욱 완성된 재료인 인간으로 빚었기 때문에 더 귀한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핵심은 부부 사이의 문제이다. 결혼 후 다툼이 큰 부부가 무려 40%를 넘는다고 한다.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그런 경우가 있다. 여기서 송신부님은 "하지만 부부가 자녀에게 첫째로 줄 것은 부부 사이의 사랑이지 자녀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자녀들 편에서도 부모 서로간의 사랑을 통하여 사랑을 받는 것이지, 부모끼리 서로 소원(疏遠)하다면 자녀들은 제대로 사랑받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자녀 사랑의 기본은 부부간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부부가 불화하면서 자녀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상당히 부족하다.  

그러면 어떻게 부부 사이의 간극을 좁힐 것인가. 먼저 다름, 차이를 인정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차이에 감사하라고 말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 차이 때문에 힘들어 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 차이는 내가 갖지 못한 상대방의 장점일 수 있다. 그러기에 감사해야 한다. 테살로니카 1서 5장 16-18절 말씀에 나온 것처럼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삶, 항상 기뻐하는 삶, 항상 기도하는 삶이면 부부관계도 모두 원만하리라. 

아 그리고, 사랑의 3단계도 재미 있게 읽은 구절이다. 1단계가 로맨서의 단계. 2단계는 권력다춤의 단계 그리고 3단계가 협동과 공동 창조의 단계라고 한다. 그냥 머리가 끄덕여진다. 부부 사이에서 권력을 휘둘러 봐야 무슨 필요가 있는가를 깨닫고 나면 자연스럽게 협동과 공동창조로 이어진다. 다만 그 무의미한 권력다툼에서 어느 만큼 빨리 벗어나는가가 중요한 관건 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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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데레사 나의 빛이 되어라
브라이언 콜로디척 신부 엮음, 허진 옮김 / 오래된미래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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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아주 좋아 하는 마더 데레사. 이 분에 관한 책이라면 주저 없이 산다. 이 책도 그랬다. 다만 사 놓고도 안 읽는 버릇은 나의 게으름이다. 새해 시작하면서 그래도 뭔가 영적인 도움을 얻고 싶어 이 책을 책장에서 꺼냈다. 확실히 소득이 많다. 일단 책 내용은 별도로 하고, 읽다가 아, 그래, 올해는 이렇게 살아야지 싶었던 게 몇 있다.

 

우선 올해는 우리 맏이 마르첼리나가 첫 성체 하는 해다. 마더 데레사의 경우,아니 그 때의 이름은 마더 데레사가 아니라 유고슬라비아에 살던 소녀 곤히야다. 그가 첫 영성체 하던 날 각별한 은총을 받았다고 한다. 그 구절 읽으면서 매일 기도에서 우리 맏이 마르첼리나의  첫 영성체를 위해 기도해야되겠다 싶었다.

다음으로 마더 데레사와 같이 있던 수녀님들 평이 마더 데레사는 불평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나는 반대다. 근데 불평했다고 문제가 풀리지는 않았다. 그럼 바보짓 한 게 틀림 없다. 건강한 비판은, 정당한 통로를 통해서 겸허하고 진솔하게 할 것이지만, 전혀 도움되지 않는 불평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올 해 이 책 보면 결심했다.

그리고 세 번째, 마더 데레사는 과도한 일 속에서도 늘 새벽 4시 40분이면 일어나 성체조배를 했다고 한다. 십자가에 입맞춤하고. 이건 못하겠지만 그래도 매일 아침 기도는 빠뜨리지 말아야겠다고 다시 결심했다.

네 번째, 성체조배 때 생각나는 얼굴이 있으면 그를 위해 기도해준다는 것이다. 이건 따라할 수 있겠다. 이 네 가지만으로도 이 책 읽고 건진 소득이다.

 

근데 사실 책의 중심은 그게 아닐 것이다. 책 광고에 보면 마더 데레사가 하는 말 중에"내 안에는 끔찍한 어둠이 있습니다"라는 게 있다. 이게 뭘까. 마귀?

그건 아니다. 그가 어릴 때부터 사적 서원을 하고 실제 하느님을 만나 '사랑의 수도원' 건립을 계시받고 그랬는데, 그렇게 해서 막상 빈민을 위한 사랑의 실천을 시작했는데, 정작 그 이후로는 하느님을 전혀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말 하느님 부재까지 느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삶과 언어의 역설이다. 이걸 이해하지 못한 천박한 언론인들에 의해 '마더 데레사가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했다. 하느님을 믿지 않은 순간이 있었다'라는 식의 보도를 해 댔다. 나도 처음에 언론에서 읽었을 땐 놀랐다. 근데 이 책을 읽어보니 그것은 대단한 신비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은 마치 바오로의 가시와 같은 것으로 나는 받아들였다. 바오로 사도 역시 그 가시를 빼어달라고 여러 차례 기도했건만 하느님은 응하지 않았다. 그 가시가 있어야만 바오로 사도가 교만에 빠지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마더 데레사가 하느님 부재의 영적 어둠에 놓여 있지 않고, 늘 하느님과 대화하고 일치하고 있었다면 어쩌면 교만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어둠에 놓여 있었기에, 즉 자신은 완전히 비어지고,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껴질 정도의 처지에 놓여 있었기에 그는 항상 교만하지 않고,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어떤 신앙체험을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더니, 부러워 한다. 크게 쓰시려고 그런다고까지 했다. 솔직히 기분이 좋았다. 근데, 그 이후론 맹맹하다. 왜 그런가 했더니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그런 말 천박하게 함부로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만큼 더 낮아져야 하는데, 나는 항상 높아지려고 했다. 비워야 했는데, 채우려고만 했다. 그러니 당연한 결과다. 이게 나 같은 한심한 인간하고 데레사 같은 성인의 차이일 것이다.

그렇게 내적 어둠이 있었기에 그는 가난한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게 마더 데레사가  50년 동안이나 겪은 어둠의 실체이고, 그 어둠을 통한, 다시 말하면 완전한 비움을 통한 영성일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내가 50년간이나 그런 하느님 부재를 느꼈다면 나는 완전히 망가졌을 것이다. 그러니 차이가 있다. 그의 삶과 내 삶에는. 하긴 하느님도 나 같은 인간에겐 그런 단련을 주지도 않으실 것이다. 왜? 견디어 내지 못할 것을 아시니까. 그릇 차이. 이걸 하느님은 잘 아신다.

 

근데 사실 마더 데레사도 견디기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외로움. 예수님이 겟세마니 동산에서 흘리신 피땀과 또 십자가에서 아버지 하느님께 외치던 절망적 목소리 역시 그 외로움일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은 그 외로움, 그 不在를 통해 일을 '완성'하신다. 슈퍼맨처럼 나타나 일을 '짜잔'하고 해결하지 않으신다. 그 완전한 비움, 그 완전한 없음을 통해 구원 사업을 하신 것이다. 채움이 아니라 비움이다. 왜냐면 예수님은 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되지 않고서는, 죄가 되지 않고서는 구원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니 신적 능력으로의 해결이 아니라 인간적 절망으로 구원을 이루셨다. 마더 데레사 역시 그랬다. 가장 낮은 곳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과 소통하고 있다는 과시욕이 아니라,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는 자부심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자각 속에서 이뤄질 수 있는 일이다.

모든 것을 내려 놓음. 그 내려놓을 수 있는 근거였던 아버지 하느님마저 현존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가질 만큼, 곧 기댈 언덕조차 없어보이는 그 절박함에서 기적은 이뤄진다. 이게 신앙의 신비다.

 

그건 그렇고. 나는 마더 데레사의 그 겸손에 매번 놀란다. 그는 남들로부터 칭찬 받은 것에 대해 그것은 모두 십자가일 뿐일고 한다.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거꾸로 그는 남들로부터 잊혀지기를, 무시당하기를, 경멸당하기를 오히려 수용한다. 그래야 하느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굴욕은 저에게 가장 달콤한 과자랍니다" 이렇게 말한다. 또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무시다아며, 어떤 인정도 받지 않기를 열심히 기도했습니다"라고 한다. 머리로는 이게 이해가 되는데, 난 도저히 몸으론 안 된다. 나는 오늘도 남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삶을 사는 것 같다. 그러니 항상 내 중심이 아니고 남 중심이 된다. 내 인생인데, 남의 평가를 따라 가는 인생이 된다. 한심한지고.

난 언제면 '굴욕을 가장 달콤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긴 그렇게 해야 나는 작아지고 하느님은 커지실 것이고, 허세는 사라지고 본질만 남을 것일 텐데. 알긴 아는데 실천이 어렵다. 쓸데 없는 자존심. 이걸 어떻게 극복하나. 그래, 이런 책 자주 읽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도움이 될 터이지. 작아지자. 작아지자.
또 하나. 그렇게 내가 작아지면 마더 데레사처럼 '작은 사랑, 작은 희생, 작은 내적 금욕'을 말하게 될 것인가. 그 분은 "큰일을 찾지 말고, 위대한 사랑으로 작은 일을 하십시오"라고 말한다. 이게 맞다. 사실 나는 큰 그릇이 못된다. 그러니 작은 일이라도 잘해야 한다. 근데, 격에 안 맞게 큰 일을 좋아한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칭찬해주면 너무 좋다. 그분은 그것을 십자가라고 하는데....... 그래도 항상 떠올리자. 내가 주변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때마다 마음 속으로는 '이건 나의 십자가임을'

그리고 또 '특별한 시련'을 '더 큰 사랑 실천의 기회'로 받아들이는 자세이다. 이건 제대로 된 신앙인이라면 항상 가져야 할 자세다. 어려워서 그렇지, 머리로는 나도 안다. 그래도 자주 연습하자. 시련은 사랑실천의 기회임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소. 그냥 미소가 아니라 '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달라고 항상 기도하세요 라고 하신다. 그렇게 기도해야겠다. 어린아이 같은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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