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2007년 5~6월 - 통권 94호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귀를 물어뜯는 표현, 표현들

<녹색평론94> 2007년 5-6월호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잡지 <녹색평론>. 이번 호는 늦게야 읽었다. 어찌 그리 바쁜 핑계가 많았는지. 늦은 게 미안스러웠다. 나의 냉대에도 불구, 그는 여전히 나를 아프게 했다. 아니 함께 아파하는 것이겠지. 산업문명 그 자체를 넘어서지 못하면 이 고통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상업화 된 사회, 지식인의 자존심도, 농민의 생존권도 오직 글로벌 자본가 계급의 이해관계에 따라 조정된다.
한미 FTA가 이번 호의 여전한 특집이다. 새로운 내용은 별로 없다. 확인할 뿐이다. 김종철 선생님의 권두언이 본질을 찌른다. ‘국익’이라는 환상을 지적한 것이다. 기득권자의 이익을 국익으로 포장해 잘도 팔아먹었다. 그래도 여전히 속는다. “‘자유무역협정’이라는 것은 자본주의의 가차없는 팽창과 확대를 위해서 고안된 최신의 메커니즘”일 뿐이데 그저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사기를 치고 있다. “국익이란 기실 아무런 실체가 없는 공허한 정치 선동적 용어에 불과한데도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아직도 엄청난 위력을 가진 개념이기 때문이다. 황우석 사태도 결국 ‘국익’이라는 말이 부리는 요술 때문에 빚어진 희비극”이었다. 이건 “오늘날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얼마나 비이성적이고, 무분별한 개인적, 집단적 자기 확대 욕망에 빠져 있는가를 알려주는 단적인 기호”이다. “국익이라는 환상에 대한 맹목적 집착, 그리고 그 집착에 근거한 자기기만”이다.
김종철 선생은 우리가 가져야할 대안은 “삶의 근원적 진실”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건 자본 너머의 가치에 있을 것이다. 산업문명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와 새로운 대안의 모색, 거기세서 시작될 수 있다.
이번 호는 여러 가치 있는 내용의 글도 좋았지만, 유별나게 가슴을 뜯게 만드는 표현들이 많아서 나를 붙잡았다. 앞서 김종철의 글에서 ‘자기 확대의 욕망’. 맞다. 현대인들의 특징이다. 그 확대를 통해 얻을 게 과연 무엇인지 성찰하지 않는다.
주요섭의 글에서, ‘시장에 나가면 팔릴 수 있는 인간과 팔리지 않는 인간으로 쫙 갈라지고 있다.’
이계삼의 글에서 ‘혈색은 좋지만 영혼은 죽어버린 사회.’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의 글은 압권이다. 표현 뿐만 아니라 그의 가계에 대해서도 다시 보았다. 예전에 한홍구의 글에서 잠깐 봤던 것인데 당사자 자신이 여기에 풀었다. 한말에서부터 의를 지킨 집안이다. 아버지는 경성콤그룹 이관술 동아리였다고 한다. 그 예비검속에서 돌아가셨다. 아마 대전 골령골에서 1950년 7월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 고통 속에서 살아갈 때 정부는 그를 회유했다. 지금은 그 흔해 빠진 해외연수다. 근데 진보진영의 문인들도 대부분 응했다고 한다. 자신과 어는 원로 문인 한 사람을 빼곤. 그래서인가, 그는 조롱한다. 운동권이 아니라 ‘헬스권’이라고. 뼈아픈 표현이다.
하긴 이완용의 조카 이병도가 우리 역사를 왜곡했고, 그 이병도의 손자들이 서울대 총장과 국립박물관장을 하는 나라이니, 헬스권이 괜히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의 글 마지막 대목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절규였다. 허위 선생의 후손이 외치는 절규가 김성동의 “귀를 물어 뜯었다”는 것이다. 아마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었을 것 같다. 얼마나 절절한 외침이었으면.
김환석의 글에서. 과학사기는 예전에 동료들의 인정을 최고로 삼던 가치에서 외적 보상에 눈이 멀어가는 상황으로의 변화 때문에 생긴 것이라 지적하고 있다. 그러니 학문 세계에서 경쟁이란, 과거엔 ‘지적 경쟁’이었는데 지금은 ‘연구비 타먹기 경쟁’으로 바뀐 것이다. 지식 세계가 이러니 더 할 말이 있을까. 그러니 박승옥의 표현처럼 지식인들은 ‘애매한 수사와 두루뭉술한 제언, 하나마나한 당위의 역설’만을 해 댄다.
박승옥의 글에서. ‘풍요를 주체하는 못해 비만에 갇힌 부자와 기득권 세력의 개기름’이라는 표현. 섬뜩하고 통렬하다.
박진의 글에서. ‘활동가로 산다는 것은 때로 현실과 동떨어진 고립무원의 섬에 있는 적막감을 안겨준다.’ 괴롭게 공감한다. ‘현실은 너무나 잔인해서, 내가 기억하는 슬픔과 분노가 모두 거짓은 아닐까 의심하게 만든다. 암시랑토 않은 세월, 한미 FTA가 어떻든, 대추리가 어디든 그저 상관없이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스타벅스 커피와 던킨 도너츠를 소비하는 이들을 본다.’ ‘물신에 눈이 먼 천박한 교양으로 똥칠한 고상한 인간들을 구별해내는 혜안.’이라는 표현들.

이번 호에선 이러저런 고민과 함께 적확한 표현 익히기 공부도 함께 했다. 하긴 그 표현이라는 게, 상황에 대한 공감과 분노와 연민이 있기에 가능했을 터. 다시 말해 글은 몸으로 쓰라는 말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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