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소금꽃나무 우리시대의 논리 5
김진숙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진숙, 회피하고 싶은 그러나 그럴수록 나를 붙들어 매는 사람>

김진숙, <소금꽃 나무>, 후마니타스, 2007.



김진숙, 그를 보면 나는 아프다. 몹시도 아프다. 작년 그러니까 206년 1월 부산에서 있었던 전국역사교사모임 자주연수에서 그를 처음 봤다. 당당함, 해맑음, 도대체 저런 몸에서 어떻게 그런 깡다구가 나왔을까 싶었다. 고향 강화도에서 돈 벌러 나간 부산. 공장에서, 시내버스 문간에서, 그리고 한진중공업에서, 그 아슬아슬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는 잘도 버텼다. 그 힘이 어디서 나왔을까 싶을 정도로.
그가 안기부에서 취조 받던 이야기, 감옥 안에서 만난 살인범 이야기 등을 듣고 있을 때, 나는 그냥 울기만 했다. 주변에 동료 교사들이 죽 있었건만 전혀 그런 것은 들어오지 않았다. 하염없이 눈물만, 눈물만 흘렀다.
강연을 마치고 강당을 나갈 때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살짝 봤다. 멀리서 보았던 그 생생함만은 아니었다. 멀리서 볼 땐 그렇게도 맑고 어여쁜(?) 사람이더니, 가까이서 보니까 그 맑음 속에 고생 자욱이 가득했다. 그리곤 이내 나는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그를 쳐다볼 용기가 없었다.
부끄러움, 자책, 부채감. 시대의 모순에 누구보다 민감하고 아파하고 해결을 위해 실천적으로 나서야 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모습을 나에게서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제 많이 등이 따뜻해졌고, 배에도 적당히 살이 붙었나 보다. 그를 피하고만 싶었다. “고무 공장에서 신발 밑창에 풀칠을 해대느라 갈라 터진 아내의 손바닥을 볼 때마다 죄스러움으로 외면”하는 심정과 다르면서도 비슷한, 어쩌지 못하는 괴로움 때문에 생긴 기피였다.
그렇게 그를 잊었다. 그런데 올해 그가 쓴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피하고 싶었다. 다시 그 아픔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의 책을 살 수밖에 없었다. 무슨 힘인지 모르겠다. 책을 손에 넣고 읽어 가는데, 아픔은 이전보다 배로 다가왔다. 그때 강연했던 내용도 책에 더러 나왔다. 자꾸만 면도칼이 내 눈 앞을 지나가는 느낌이다. 덮고 싶었으나 그래도 마치긴 했다. 책을 놓고 한 동안 멍할 수밖에 없었다.
강한 사람, 아니 진솔한 사람. 그는 그 험한 현장에서 노동자로써 단련된 줄만 알았는데, 글도 참 잘 썼다. 기교가 아니다. 예쁜 수식어가 아니다. 그저 투박한 언어뿐이다. 그런데도 심장을 향해 날이 팍팍 찍혀 온다. 진실의 힘이다. 진실하게 삶에 대응했기에 나오는 몸의 언어다. 프랑스 지식인들이 말하는 관념으로서의 몸이 아니다. 욕망의 주체로서의 몸이 아니다. 절규다. 생존을 향한, 그리고 최소한의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향한 피울음이었다.
특히 요즘은 비정규직 문제로 노조가 어렵다. 노조가 단결하면 자본은 비정규직으로 갈아 버린다. 비정규직은 노조를 만들기가 어렵다. 이런 제기랄. 정규직은 비정규직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을까봐 경계한다. 거의 두 배의 급여를 받으면서, 아니 받기에 비정규직을 더 멀리한다. 하지만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미래일 뿐이다. 그런데도 자기만 살겠다고 난리다. 이런 현실이 몹시도 그를 아프게 했던 모양이다. ‘비정규직은 울고 정규직은 잔업과 성과급에 영혼을 파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정규직의 적은 비정규직이 아니라 자본입니다. 우리가 맞장을 떠야할 건 약자가 아니라 구조조정이라는 사시미 칼을 든 깡패입니다. 자본의 발밑에 짓밟혀 파들파들 떨고 있는 민들레를 한 번 더 짓밟는 게 아니라 그 발을 치워 줘야 합니다. 민들레에게 너희도 소나무가 되라고 요구할 게 아니라 민들레에게 숨 쉬고 씨앗 흩날릴 영토와 햇볕을 나눠 줘야 합니다. 민들레가 죽어 가는 땅에선 어떤 나무도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구조조정의 끝은 정규직의 비정규직화입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갈라 서로 대립하게 만들고, 자본이 해야 할 말을 같은 노동자가 하게 되는 이 기가 막히는 상황이야말로 신자유주의의 본질일 것입니다.”
“부디 저 고운 영혼들이 꽃보다 먼저 환해지는 봄이길. 봄마저 쟁취해야 하는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그런 봄이 부디 저들의 것이길 간절히 바랍니다.”
“천 원이 남으면 순대 한 봉지에 젓가락 여덟 개가 꽂히던 그 가난한 사랑은 얼마나 눈물겨웠는가. 남루했으나 아무도 부끄럽지 않았고 더러 울기는 했으나 아무도 외롭지 않았던 그 때 우리는 얼마나 당당했는가.” 그래 그 땐 외롭진 않았다. 비록 아프긴 했지만 외롭진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나 역시 많이 외로움을 느낀다. 다들 떠나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루했으나 부끄럽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남루하지 않다. 하지만 많이 너무 많이도 부끄럽게 산다. 그래서 나는 김진숙의 글을 피하고 싶었던 게다.
그는 그래서 말한다. “민들레에게 올라오라고 할 게 아니라 기꺼이 몸을 낮추는 게 연대입니다. 낮아져야 평평해지고 평평해져야 넓어집니다.” 그는 선생님들에게도 비정규직에 대해 관심 가지라며 어려운 충고를 한다. ‘아이들에게 인사도 채 못하고 떠나는 기간제 선생님의 소리 없는 눈물에는 상처를 받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주변의 기간제 선생님께 전혀 관심을 못 가졌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아프게 하는 글들은 많았다. 특히 노동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에서 나는 한 동안 멍하니 하늘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있던 포철 학교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간혹 접하긴 한다. 워낙 큰 규모의 작업장이라 사고가 났다 하면 말 그대로 ‘뼈도 못 추리는’ 대형 사고다. 형체 자체가 없어진다. 그런 사고가 늘 있었다. 수업을 하다가 갑자가 담임이 어느 학생을 부른다. 가방을 싸고 나오라는 부름이다. 순간 교실은 싸늘해진다. 대개가 그런 사고를 당한 노동자의 아들의 경우다. “누군가는 어이없는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면, 그 원인에 대해 사고보고서보다 더 정확하게 알고, 그 원인에 분노하며, 남일 같지 않은 죽음 앞에 가슴 쓸어내리며, 마누라에게도 차마 말 못할 자기 설움을 술잔에나 털어 부으며 꺼이꺼이 기막혀 했을 사람들.” 맞다. 그런 설움은 마누라에게도 말 못한다. 그저 꺼이꺼이 기막혀 하는 게 고작이다. 김현승 시인이 그리 말했다던가. “아버지의 눈에 눈물은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잔의 절반은 눈물이다”라고.
희생자의 자식들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백인의 열사보다 단 하나의 아빠가 아직은 더 절실한 아이들”이기에 그 고통과 아픔은 감당하기 어렵다. 이 아이들이 컸을 때 무슨 생각을 할까. 자기의 아빠에 대해, 그리고 그 시대에 대해, 그리고 그 시대의 지식인들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할까. 혹시라도 그 자식 중 하나가 훗날 내게 당신은 뭘 했냐고 한다면 나는 뭐라 답할까.
절망감만 밀려온다. “분노가 조직이 되지 못하는 현실, 통곡조차 투쟁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현실, 모여 있는 동안은 동지지만 흩어져 일하는 대부분의 시간은 적이 되고, 경쟁 상대가 되는 현실” 이 현실 앞에 우리는 한 없이 작아져만 왔다. 그저 제 살길 찾아 나서기 만에 급급해 왔다.
이건 부채감이다. 그도 그랬다고 한다. “말당을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을지 모를 일이나 나를 여기까지 꾸역꾸역 떠메고 온 9할은 사실 부채감이었다. 저들이 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내가 먼저 떠날 수는 없는, 그러면 어디 가서 뭔 일을 하고 살더라도 필시 응징을 당하고야 말 것 같은·····.” 나 역시 부채감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김진숙을 외면하지 못하는 건 단지 부채감 때문만은 아니다. 그에게서 희망을 보기 때문이다. “이제 아무도 기적을 말하지 않을 때 온 몸으로 기적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 우리가 단지 역사를 추억할 때 스스로 역사가 되어 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눈물이 남아 있다는 건 아직 열정이 남아 있다는 증거다”라고.
그도 그 스스로의 나약함을 말한다. 그런 고백 속에 오히려 더 강하게 태어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법정에 섰을 때의 글이다. “사법부가 권력의 시녀니 어쩌니 해도 전 막상 법 앞에 서면 겉으론 안 그런 척 해도 속으론 많이 떨려요.” 그러면서 그는 “법이 곧 정의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같이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사람들이 배가 등가죽에 붙어 가면서 정의를 소리 높여 외치지 않더라도 그저 법이 정의이기만 한다면. 그렇다면······.”라고.
“20년 가까이 초지일관 불굴의 신념으로만 버텼겠습니까? 그 폭력 앞에서 한 없이 비굴해지던, 살려만 준다면 글마들 발톱의 때라도 핥을 만큼 비굴해지던 스물여섯의 제 모습이 떠오르면 지금도 소름 끼칩니다. 오히려 그런 모습들 때문에 용기라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용기야 말로 얼마나 찬란한 자유인지, 뼈가 시리지요.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지지 않는 것. 그것만큼 소중한 게 또 있을까요.”
다시 나를 추스른다. 거창한 일 못해도, 그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 이렇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
천규석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천규석은 거울이다>

천규석,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 실천문학사, 2006.



유목, 유목적 삶, 폼나게 말해서 ‘노마디즘’. 천박한 세상 흐름에 따르고 싶지 않지만, 그들이 어떤 소리를 하고 사는 지는 알아야하기에 노마디즘을 보려했다. 물론 10여 년 전 불어대던 포스트 광풍이 사라지고 허망하게 남은 식민지 지식인의 추한 꼴을 또 보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 포스트 광풍 속에서도 건질 것은 있었다. 마찬 가지다. 기지촌 지식인의 꼴은 뒤로 하더라도 노마디즘이 뭔지, 왜 떠도는지, 왜 열광하는지, 그 한계가 무엇인지를 봐야 했다. 그리고 지금 준비하는 논문의 방계적 서술을 위해서도 검토하고 싶었다.
바로 가타리와 들뢰즈의 글로 들어갈까 하다가 아무래도 자신도 없었고, 또 한국사람들이 쓴 글에서 친화감을 찾을 것 같기에 잠시 미뤘다. 그럼 이진경의 책, 하지만 그도 왠지 끌리지 않았다. 그래서 천규석을 찾았다.
천규석. 근본주의자. 처음 그의 글을 접했을 때, ‘지독한 사람이다’라는 정도의 인상이었다. 너무한다 싶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의 모순이 쌓여감에 따라 근본으로의 회귀야말로 정답이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나는 그처럼 살 자신은 없다. 그래도 그를 바라본다. 거울이어서 그렇다. 내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그에게 비춰볼 것이다. 그리고 성찰할 것이다. 부끄럽게 살지 않고 싶다. 그러기에 그의 글은 내게 있어 심대한 기준이다.
이 책은 요즘 유행하는 노마디즘의 본질을 나름의 판단으로 지적했다.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라는 게 그의 단호한 결론이다. 아직 노마디즘을 제대로 접하지 못한 나로서는 천규석의 말이 얼마나 옳은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노마디즘이 뭔지는 모르지만 한국사회 현상에 대한 그의 쓴 매는 지독하지만 정당하다.
그에게 매를 맞는 자들은 비단 한국사회의 기득권자만이 아니다. 소위 진보 인사들 사이에 칭송을 받는 사람들도 많이 포함된다. 우선 김지하. 이 사람의 한계는 오래 전에 보았기 때문에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다. 유홍준 역시 그렇다. 그 사람의 천박함이야 오래 전부터 내가 직접 내 눈으로 봐 왔다. 그의 재주를 부러워할망정, 그의 삶에 대해선 나는 전혀 공감하지 않는다. 온갖 폼은 다 잡으면서도, 오히려 운동권이었던 것을 자신의 배경으로 깔아 장사 밑천으로 삼으면서도, 기득권자들이 행하는 못된 버릇은 마찬 가지로 가지고 산다. 역겹다.
그런데 의외였던 건 박원순이다. 박원순에 대한 비판도 매섭다. 괜한 시비가 아니다. 어차피 그들은 주류다. 기득권 세력이다. 기득권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니다. 시민운동 지도자라는 사회적 명예까지 얻었다. 곰곰이 따져보면 정말 그는 밑진 장사를 한 게 아니다. 포기한 게 없다. 게다가 요즘 타락한 현실 정치에 은근히 머리를 들이 미는 것이나, 무슨 연구소인가 하는 걸 차려서 기업으로부터 엄청난 액수의 돈을 받고 있는 모습도 그렇다.
고은 시인 역시 마찬가지다. 디제이 정부 시절 정권 인사들과 사진 찍는 자리에 참 가볍다 싶을 정도로 얼굴을 많이 내밀었다. 천규석은 말한다. 오히려 디제이 때가 농민에 대한 정책은 더 가혹했다. 그런데도 시인이 그런 정권 옆에 가서 놀고 있냐는 질타다. 시인은 그래야 한다. 세상 모순이 없어질 때까지 시대를 증거하고 피를 토해 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고은 시인은 너무 안이하게 사명을 버렸다.
천규석은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보았을까. 흙냄새 풍기는 초심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농업. 몸으로 하는 농업에서 멀어지면 사람은 타락한다. 잔머리를 굴린다. 이윤에 민감해진다. 양심보다 이권에 눈이 간다. 진실보다 명예를 탐하게 된다. 특히 “전문가는 언제나 강한 자의 편에서 오는 피할 수 없는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 이건 분명 내가 경계로 삼을 문구다.
그는 또 사람들에게 말한다. 도시의 온갖 기득권, 소비문화는 다 누리면서, 자본이 주는 혜택은 다 받아 챙기면서, 그 자본이 만든 온갖 부정적인 폐해는 떠안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쉽게 그의 표현대로 하면 “온갖 기득권은 그것대로 다 누리면서도 납 들어간 조기와 농약에 오염된 썩은 배추 대신 건강한 유기농산물도 먹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인지상적이지만 지나친 욕심이라고 말한다.
유기농 가격이 비싸 도시 노동자들을 조롱하는 물품일 뿐이라는 지적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한다. 그러면, 그렇게 비싸면 유기농 농사꾼들이 돈 좀 된다는 말이니, 이제 도시 노동자들도 도시를 떠나 농촌에 와서 유기농하면 된다는 것이다. 정확한 답이다. 그렇게 많은 노숙자도 농촌엔 안 간다. 그건 뭘 말하는 건가. 농촌이 더 힘들다는 것 아닌가.
여성해방 운동에 대해서도 쓴 소릴 마다 않는다. “주부들은 자신의 가사노동을 외부화함으로써 날로 커가는 그 시장에 다시 자기 노동을 팔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 “가사 노동으로부터는 해방되었을지 모르지만 그 대가는 자기 노동의 시장 예속과 피착취다”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무엇을 위한 해방이었는지가 궁금해진다. 시장 예속과 피착취가 더 무섭지 않은가. 차라리 그래도 가사 노동은 사랑하는 자신의 가족을 위해 쓰인다. 하지만 자본에 의한 착취는? 다시 여성운동을 생각해 볼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생태적으로 지속 불가능한 시장에 예속된 삶으로부터 해방되어 지속 가능한 삶으로 가는 길은 삶의 시장 의존을 최소화하고 그 삶의 범위를 지역공동체화, 마을공동체화하는 것 말고 달리 없다”라고 단언한다.
‘국민의 공복’이라는 공무원에 대한 비판도 매섭다. 국민의 공복이 아니라 국민 지배조직인 국가나 특권 지배층의 공복일 뿐이라는 것이다. 요즘 서귀포시청 공무원들이 해군기지 만들기 위해 싸돌아다니는 행위는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국민의 이름을 빌린 국민 지배기구인 국가, 소수 자본가와 권력자, 고급공무원이 주인인 국가 기구일 뿐이다. 그런 그 지배 기구에 들어가 헌신하는 386들을 뭐라 해야 할까. 어찌 봐줘야 할까. 다 호구지책이니 인정해 달라고. 그래 솔직하게 그렇다고 말하면 가련하지언정 밉지는 않다. 그러나 그 주제에 뭐 국민을 들먹이고 하는 짓들을 보면 역겹다. 구역질이 난다.
또 시민단체에 대한 비판에서 많은 걸 생각한다. 푸른우포사람들 소식지의 글을 한 예로 들었다. 한마디로 “우포늪 생태를 파는 장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여러 환경단체들이 새겨들을 말이다.
천규석의 결론은 하나다. “모두 현재의 자기 기득권을 버리고 제 먹을 농사를 스스로 지어 먹으러 귀농하지 않는 한 이 세상의 파국은 결코 막아내지 못하리라.”
정리하다 보니 정작 유목주의에 대한 말은 거의 못했다. 이건 이진경의 책과 들뢰즈의 책에서 본격적으로 하자. 애당초 천규석을 읽고 싶었던 건, 노마디즘이 아니었다. 그냥 그걸 계기로 그의 삶을 다시 내 삶에 비춰보고자 했을 뿐이다. 기득권이 생길 즈음이면 나는 돌아간다. 전문가란 항상 자본과 권력의 유혹 앞에 노출되어 있는 존재임을 다시 떠올린다. 그리곤 바짝 삶을 죄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혁명을 꿈꾼 시대 - 육성으로 듣는 열정의 20세기
장석준 지음 / 살림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Another world is possible

장석준 쓰고 엮음, <혁명을 꿈꾼 시대>, 살림, 2007.



혁명가들의 육성을 들려준 책이다. 20세기 혁명가. 헨렌 켈러에서부터 우고 차베스에 이르기까지. 20세기와 21세기의 대화 형식을 빌고, 또 그 혁명가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 뒤에 그들의 연설문을 모았다. 연설문이라 직접적이라는 맛이 있어서 좋았고, 또 생소함을 덜어주기 위한 해설도 좋았다. 무엇보다 이 책 하나가 그대로 20세기 세계사를 보여주는 것 같아 세계사 보충 교재로서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물론 연설문 중 일부는 보편성보다 그 상황의 특수성이 많아 이해가 어려운 곳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흠이 아니라 오히려 장점일 수 있다. 더 많은 이해를 요구했으니까.
테마는 전쟁, 자본주의, 제국주의, 인종주의, 파시즘, 남성중심 사회, 자본의 세계화를 넘어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연설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새로운 지향이 그래도 우리 인류를 야만 단계에서 구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어쩌면 여전히 그들의 꿈이 실현된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야만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들은 여전히 ‘다른 세상’을 꿈꾼다. 그 꿈이 있기에 나 역시 지금까지 숨을 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늘 무너지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이 구절을 떠올린다. 2001년 세계사회포럼에서 외쳤다는 그 구호, “Another world is possible", 물론 그 다른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는 모른다. 여전히 모색 중이다. 다만 지금 이대로라면 절멸뿐이다. 그러니 경쟁이 아니라 협력 밖에 방법은 없다. 가능할 것인지는 따로 묻지 않는다. 가능하기 때문에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옳기 때문에 그 길을 가는 것이다.
우고 차베스의 연설에서 “보건, 교육, 물, 에너지, 대중교통, 이런 공공서비스를 사적 자본의 탐욕에 넘겨선 안 됩니다. 이건 민중의 권리를 부정하는 짓이에요. 이건 노예제로 가는 길입니다. 자본주의는 노예제도입니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대로 우리 현실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 기본적인 사회재마저 자본주의에 맡기면 파멸이다. 노예화 밖에 남지 않는다. 그것이 그의 말대로 사회주의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자본주의의 병폐는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그 극복은 ‘우리’라는 경계 짓기로는 어림없어 보인다. 경계를 지으면 필연적으로 경쟁을 한다. 물론 연대를 전제로 한 자연스러운 우리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민족으로 인종으로 뭉치면 이는 재앙이다.
그래서인가 헬렌 켈러의 목소리가 다가온다. 우리는 헬렌 켈러를 시각과 청각을 잃은 난관 속에서 훌륭한 사회사업가로 성장했다는 정도만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 이후의 활동이 사실은 더욱 주목받을 만 하다. 그는 미국의 혁명적 좌파였다. 그는 기독교도이면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제게는 세계 전체가 저의 조국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전쟁도 제게는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같은 민중끼리 서로 죽이는 동족상잔의 공포로 다가옵니다. 저는 인류의 형제애와 만인이 만인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애국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구원할 유일한 싸움은 세계가 자유와 정의 그리고 만인의 풍요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싸움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말입니까? 조국의 독립? 이건 지배자 자신들만의 독립을 의미할 뿐입니다. 그럼, 여러분이 더 나은 생활조건을 요구할 때 여러분을 감옥에 처넣는 그 법을 위해? 아니면 國旗? 그 깃발이 여러분이 충분히 자유를 누리며 가정을 꾸리는 그런 나라의 깃발입니까? 혹시 그 깃발이 여러분이 임금 상승과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파업투쟁을 할 때 주먹질을 퍼붓는 그런 나라의 상징은 아닙니까? 여러분은 살인 명령을 받았을 때조차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지배자들의 종교를 위해 싸우고 싶은 겁니까?”라며 국가주의를 비판한다. 전쟁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버트런드 러셀도 같은 맥락의 발언을 한다. “저는 한 명의 영국인이 아니라, 또 한 명의 유럽인, 서방 민주주의 진영에 속한 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인류의 일원, 앞으로도 과연 존속할지 의문스런 인간이라는 종의 일원으로 발언하겠습니다”라고 한다.
빌리 브란트, 2차대전 당시 독일의 만행을 공식으로 사과하고 유태인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를 했던 독일 총리다. 그 역시 “전쟁은 최후의 수단이 아니라, 최후의 무리수입니다”라며 국가간의 갈등을 경계한다. 모두 평화를 향한 발언들이다.
살바도르 아옌데의 마지막 라디오 연설은 가슴을 쥐게 만든다. 죽음에 임박한 절절한 육성이어서 그럴 것이다. “반역자들이 우리에게 강요하려는 이 암울하고 가혹한 순간을 딛고 일어서 또 다른 사람들이 전진할 것”이며 “저는 저의 희생이 헛되지 않으리란 것을 확신합니다. 결국에는 제가 대역죄인과 비겁자 그리고 반역자를 심판할 도덕적 교훈이 될 것임일 확신합니다.” 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하였다. 나머지는 우리들의 몫일 것이다.
저자는 인도의 간디도 책에 넣었다. 그러면서 프랑스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의 발언을 인용한다. ‘21세기 새로운 진보정치의 구성과 그 가능성을 위해선 아마도 레닌과 간디의 만남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구체성은 없지만 대략적인 방향만은 분명 맞다. 간디의 비폭력, 다시 들어도 구구절절 공감하게 만든다. “폭력적인 비협력은 악을 증가시킬 뿐임을, 악이 폭력을 통해서만 지탱할 수 있는 것처럼 악에 대한 지지 철회는 폭력의 완전한 자제를 요구하는 것”이라 한다.
반대로 딱지 붙이기로 타자화하여 억압하던 그 ‘인민의 적’이라는 개념도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게 되었다. 우리 사회엔 영화 제목으로 ‘공공의 적’이라는 표현도 유행했다. 어쨌거나 그런 대상으로 찍히면 철저히 배제된다. 도덕의 이름으로. 근데 그 개념은 스탈린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꿈꾸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제시 잭슨의 말이 아니라도 그 꿈꾸기 마저 없다면 악의 세력에 굴복하게 되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 - 신자유주의와 한미 FTA 그리고 분단체제 뛰어넘기 새사연 신서 1
김문주.김병권.박세길.손석춘.정명수.정희용 지음 / 시대의창 / 200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실성 의심되는 ‘새로운 상상력’

김문주 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 시대의 창, 2006.



시간이 많이 지났다. 김문주라는 사람이 나를 만나러 오겠다는 소식을 들은 게. 솔직히 좀 의아했다. 나를 만나서 뭘 할라고. 그의 경력 또한 특이했다. 그 시대, 같은 삶을 살았다. 물론 그는 나보다 선배였고 열렬하게 살았던 사람이라 한다. 그러고 시대가 바뀌어 그는 한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아버리지 않는 사람. 그래서 이렇게 어쩌면 더욱 진보가 필요해진 시점에 새로운 깃발을 올린 사람.
물론 그 혼자만이 아니다. 대표는 손석춘이다. 한겨레 칼럼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칼럼니스트. 그의 문체를 많이 배우고자 했다. 짧고 강단진 그의 문체. 도치법의 적절한 사용으로 힘을 주는 그의 글. 내가 많이 좋아한다. 그런 사람이 가담했다. 이 책의 구성에. 아니 그 이전에 이 책을 나오게 한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그리고 그 연구원을 만든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에. 그런 사람들이 모인 그룹이다.
그런 만큼 기대가 컸다. 그런데, 내가 타락해버린 것인지, 그 분들이 현실감을 잃은 것인지 너무도 막연한 이야기를 신나게 해대는 것 같다. 물론 죄송스런 표현이다.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려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해댈 언사는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읽으면서도 끝까지 믿음이 가질 않았다. 사람에 대한 불신이 아니다. 사람들은 믿는다. 그러나 그들이 그린 비전에 대해선 쉽게 공감하지 못하겠다. 심하게 말하면 꿈꾸는 것만 같다. 아니 어쩌면 내가 이젠 완전히 현실 속에 포섭당해 버린 것일지도 몰라.
그래도 그 취지에 공감하고 지지를 보내면서도 바짝 가까이 다가가질 못하겠다. 그랬기에 올 1월의 만남 무산도 어쩌면 다행이라 생각한다. 만나봐야 내가 그 분들께 드릴 내용이 없다. 그렇게 잊고 있었던 것을 오늘 다시 꺼냈다. 언제부터인가 제주도에서도 민간 싱크 탱크가 필요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고서다. 이석문 선배였다. 그런 제안을 한 사람은. 그러나 나는 지극히 회의적인 답변을 보냈다. 물론 일이 추진된다면 미력하나만 돕겠다. 하지만 그게 과연 가능하겠는가. 그리고 설혹 그런 연구소를 만든다 해도 힘을 가질 수 있겠는가 하고 힘 빼는 이야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준비해 보고 싶어 이 책을 잡았던 것이다. 중앙의 경험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읽어 본 결과는, 이거 쉬운 일 아니다. 자칫하면 뜬 구름 잡다가 허망하게 끝날 수 있겠다 싶었다. 점점 아득해 진다. 가슴만 시커멓게 답답해 온다. 정녕 진보의 길은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어떻게 사회를 인간다운 사회로 만들 수 있는 것인가.
이분들의 주장을 아주 간략히 줄이면 이렇다. 자본, 주주 중심의 경제가 아니라 ‘노동중심 국민경제’, 분단을 이겨낼 ‘통일민족경제’, 그리고 대의제를 넘어서 ‘직접민주주의’.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노동중심 국민경제. 자본주의다. 착각하면 안 된다. 한국은 자본주의 사회 중에서도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다. 종업원주주제도 못하는 마당에 노동중심 경제라. 함께 꿈을 꾸면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그것도 정도 나름 아니겠나. 저자들은 자본과 노동의 관계 역전을 말하고 있다. 정말 꿈같은 얘기다.
통일민족경제 역시 그렇다. 물론 이 부분은 자본을 설득하면서 왜곡되게라도 시도해 볼 만하다. 이분들이 말하는 목표에 초점을 둔 게 아니다. 나는 이렇게 남한 혹은 미국자본에 득이 좀 되더라도 한반도에 긴장을 걷어낼 수단이 된다면 이분들이 말하는 것과는 많이 달라도 통일민족경제를 추진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이것조차도 어렵다.
직접민주주의. 어쩌면 이걸 가장 전면에 내세울 필요가 있고 또 실현가능성이 높은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불안하다. 직접민주주의가 되어도 백성들의 자본지향, 금전지향 심성이 다른 가치들을 압도하는데, 조중동이 시퍼렇게 살아 눈뜨고 민의를 왜곡하는데, 직접민주주의가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내가 이분들을 도울 수는 있어도 함께 하긴 어려울 것 같다. 이분들의 열정에 경의와 존경을 표한다. 특히 손석춘의 살아있는 글빨에는 여전히 감동한다.
“새로운 사회의 새 싹을 아름드리나무로 키우는 일,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과 그 아름다운 숙제를 함께 풀고 싶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충분히 공감한다. 나 역시 새로운 사회의 새 싹을 아름드리나무로 키우고 싶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숙제를 풀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래도 미래는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더욱 답답할 뿐이다.
그래서인가. 몇 년 전부터 주목하는 간디의 삶과 사상이 더욱 가깝게 다가온다. 욕망의 조절, 자발적 가난, 소비의 최소화, 아나키 공동체, 오히려 나는 이 쪽에서 ‘새로운 사회’를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복종에 관하여 범우사상신서 38
에리히 프롬 지음, 문국주 옮김 / 범우사 / 1996년 12월
평점 :
품절


에리히 프롬, <불복종에 관하여>, 범우사, 1987.




프롬, 그 사람 이름을 들은 건 대학시절이었다. 고등학생 때까지 교과서 이외의 책을 별로 읽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대학생활이라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게 없었다. 최소한 1학년 땐.

어찌어찌 동아리 생활을 하며 사회과학 서적을 보기 시작했지만, 천성적 게으름에 익숙치 않은 책보기라 쉽진 않았다. 그 시절 처음 프롬이라는 이름을 접했다. 그러나 그건 형의 책장에 꽂혀 있는 제목이었을 뿐, 정작 내가 그 책을 읽은 건 아니었다.

그리고 잊혀졌던 이름. 근데 강준만에 의해 프롬의 글은 내게 다가왔다. 강준만 왈, 지금이야말로 프롬을 읽을 때라는 것이다. 그래서 책을 구입했는데, 아니게 아니라 이 책도 1987년에 나온 것이다. 내가 대학시절에 해당할 그 때 말이다. 그러니 나는 항상 뒷북 인생이다. 남들이 다 떠들고 지나간 뒤에라야 찾아보는 그런 인생이다.

이 책엔 불복종 문제 외에도 기독교 사상이라든지, 노인 문제라든지, 여러 에세이적 사회비평적 글이 실려 있다. 물론 핵심은 제목 그대로 '불복종'이다.

제목으로 뽑은 '왜 인간은 그다지도 쉽게 복종하는가' 역시 예전에 강준만이 뽑았던 제목이다. 새삼 그의 선별력에 감탄한다. 핵심이다. 왜 사람들이 쉽게 복종하고 마는지.

사실, 기대를 했던 건 아니지만, 역시 이번에도 우리 교무실의 복종 문화는 나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차등성과급, 장차 교사 정리해고의 신호탄인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고 논의하고 반대의견을 모으자는 서명에 우리 교사의 1/5인 11명만이 서명을 했다. 전교조 교사 5명을 빼면 고작 6명의 교사가 동참했을 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복종'했다. 권력에.

참담했다. 전혀 예상치 않은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건 자신들의 신분 불안 문제와 직결된 것이기에, 이렇게까지 처첨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프롬은 이렇게 말한다. "스스로 국가나 교회 혹은 일반적인 여론에 복종하고 있는 동안에는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사실 내가 복종하는 힘이 어떤 것이든 간에 이 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제도 혹은 인간은 언제나 여러 가지 형태의 강제를 사용하고 있으며 스스로 전지전능하다고 거짓된 주장을 한다. 나는 복종을 통해 내가 경배하는 힘의 일부가 되고, 그리하여 스스로 강해진다고 느낀다."

쉽게 말해 옳고 그름에 대한 주체적 판단보다, 내게 이로우냐 불리하냐 하는 생존본능적 영악함이 주로 작동한다는 말이다.
"또 그 힘이 나를 대신해서 결정해 주므로 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고 느낀다. 또한 그 힘이 나를 지켜주기 때문에 결코 외로울 수 없으며 이 권위가 나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도록 도와줄 것이며...". 이것이다. 자기 합리화는 이렇게 일어난다.
그래서 "조직화된 인간은 불복종의 능력을 잃게 되고 심지어 자신이 복종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된다."

하지만 "역사상 이 시점에서 회의하고 비판하고 불복종하는 능력이야말로 인류 문명의 종말을 막을 수 있는 모든 것이리라"

사실 인간은 아담과 이브의 불복종에 의해, 프로메테우스의 불복종에 의해 역사를 만들어갔다. 하지만 우리의 교육현장은 맹목적 성실함을 가장 훌륭한 미덕으로 여긴다. 창의력이 없어진다. 생명이 없다. 그게 모범생이다.

결국 이것을 이겨내는 것은 '로봇처럼 배부른 노예'임을 벗어나 '자유에 따른 책임을 두려워 하지 않는' 그런 주체적 인간이 되는 길밖에 없다. 소유가 아니라 존재가 우선인 것이다. 이걸 잃어버릴 때 지금처럼 "사람들은 더욱 많은 교육을 받고 있지만, 이성, 판단력, 신념은 더욱 쇠퇴하고 있다. 기껏해야 그들의 지식이 축적될 뿐, 사물의 심층을 꿰뚫어 보는 능력과 개인이나 사회의 삶의 근저에 흐르고 있는 힘을 이해하는 능력은 점점 고갈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의 상품성에만 신경을 쓴다. 자신에 대한 가치감이 스스로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남의 판단에 의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남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그의 안전은 순종하는데 있고, 무리 속의 한 마리로 존재하는 데 있다."

그건 인간이 아니다. 무리 속의 한 마리일 뿐이다. 복종의 대가로 얻어지는 그 안락감의 실체는 사실 바로 이것이다. 하긴 그러면 어떠랴, 스스로 한 마리가 됨을 스스럼없이 선택하는 마당인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