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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무도 말하지 않은 이야기 - 일본에 대한 체험적·역사적·인문학적 보고서
이규배 지음 / 시사일본어사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이규배, <일본, 아무도 말하지 않은 이야기>, 시사일본어사. 2006.




규배 형이 책을 보내왔다. 책 안 표지엔 '사랑하는 영권에게'라고 글을 써서 보내왔다. 우리 마누라 왈 "왠 사랑하는, 킥킥킥". 그랬지만 사실 규배 형은 나를 솔찬히 챙겨준다. 고마운 사람이다. 주변에서야 이러저런 말을 많이 하지만, 암튼 지금까지 나 개인에겐 세심한 관심으로 살펴준다. 이 책을 받고 바로 읽은 것도 그런 애정과 관심에 대한 답일 수도 있다.

규배 형은 일본 유학파다. 그런 만큼 나름의 일본관이 있다. 전에도 일본 관련 책을 두 권 냈다. 이번이 세번째 책이다. 전에 언젠가 나보고 네가 벌써 3권을 냈으니 본인이 더 늦었다며 분발하겠다고 했다. 부끄럽게스리.

암튼 재미있게 읽었다. 규배 형도 이번엔 상당히 대중성에 신경을 쓴 모양이다. 서문에서도 그는"독자들이 가능하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문장의 손질에 적지 않은 공을 들였다. 이런 공력이 물거품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라고 했다. 서문을 통해서가 아니라 본문에서도 그의 그런 노력을 읽을 수 있었다. 어휘 선택에 있어서도 과감히 대중적 언어를 찾았다. 내 입장에서야 그게 별 문제가 아니겠지만, 지금까지 학자적 글쓰기만을 해왔던 그로서는 대단한 변화이자 의지였겠다 싶다. 그래서인지 글은 한 번 잡으면 끝까지 간다. 물론 깊이가 얕다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식인 풍습이 한국에는 없었다고 했는데, 그건 그렇지 않다. 한국에서도 굶주림이 심했을 때 죽은 자식을 잡아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건 일본만의 특징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통해 일본을 다시 보게 된 게 적지 않다. 일단 그가 민족주의적 시각을 바탕에 깔고,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일본의 장점에 대해 담담하게 써 내려간 게 마음에 들었다. 일본은 그리 만만한 나라가 아니다. 어찌보면 저럴 수 있나 싶게 황당하고 괴씸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그러나 하나하나 작은 면모를 볼 땐 감탄을 하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아이를 키우는 데 있어서도 자기 잘못을 깨우치는 방식으로 교육을 하지 잘못의 탓을 남에게로 돌리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명예심과 수치심을 알게 하는 교육을 한다. 어찌 보면 할복 자살도 그 때문에 나온 것일 수도 있겠다 싶다.

슬퍼도 울지 않는 일본인의 특징은 워낙 슬픈 일이 많았기 때문에, 그리고 무사도의 덕목 때문에 그랬다는 것이다. 또 그들의 질서 의식은 중세 때 조그만 범법을 해도 사형시켰던 공포와 지도자들의 솔선수범적 준법 실천이 지금의 일본을 만들었다고 한다. 역시 공감할 대목이다.

메이지 유신 전까지 일본이 육식을 금했었다고 하는 건 신선한 지식이다. 그래서 키가 작아 왜놈이었다는 것이다. 메이지 때 유럽을 따라잡겠다고 육식을 강화했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 포악해진 것인가. 샤브샤브라는 음식도 그런 과정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한국 말로 하면 '잠방 잠방'이라고 할까. 얇게 썬 고기를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치는 과정에서 나는 의성어. 그게 바로 샤브샤브라고 한다. 육식을 하지 않던 사람들이 육식을 하게 되면서 탄생한 새로운 요리법.

암튼 일본은 우리를 속속들이 잘 안다. 반면 우리는 그들을 잘 모른다. 온갖 편견 속에 숭배나 멸시, 두 종류의 시각이 강할 뿐이다. "일본의 모습은 아직도 두터운 외투 속에 감춰져 있다"고 이규배는 말한다. 알아야 한다.
언제부터였던가. 일본은 차근차근 내게 가까이 다가온다. 좋아함과 싫어함, 그런 감정과는 무관하게 일본은 한 발짝씩 다가온다. 한 때는 지긋하게 그곳에서 몇 년 동안 공부했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왜 그런지 몇 년쯤은 생활해 보고 싶은 땅이다. 혹시 사람 일이 어찌 될 지 모르니, 차분차분히 일본에 다가가는 그런 책읽기도 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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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파시즘 - 시사인물사전 11
강준만 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0년 12월
평점 :
품절


강준만 외, <부드러운 파시즘>, 2000, 인물과사상사.

<인간은 왜 그렇게도 쉽게 복종하는가?>




보너스 북으로 무엇을 선택할까 고민했다. 많이, 근데 인물과사상사의 책을 대충 섭렵한 처지라 딱히 고를 게 없는 듯도 했다. 게다가 이 <부드러운 파시즘>은 2000년에 나온 책이라 이미 그 따끈한 맛도 없을 듯 했다. 그래도 그걸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그 주제가 당길 것 같아서다.

한동안 임지현, 문부식 류가 주장한 '일상적 파시즘'과 유사할 게 아닌가 걱정도 되었지만, 그들과 다른 코드를 가진 강준만이라 뭔가 다른 게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보니 분명 달랐다. 임지현 류의 일상적 파시즘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그건 자칫 '우리 모두가 죄인이다'라고 하며 책임 소재의 본질을 흐릴 우려가 있다. 강준만의 부드러운 파시즘은 그것과 다르다. 책임 소재는 분명하다. 다만 그것이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빠져든다는 점이 다르다. 그렇기에 부드럽다고 했던 것 같다.

이 책은 우선 파시즘의 원조라고 할 만한 뭇솔리니와 히틀러에 대한 분석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들이야 워낙 많이 다뤄지는 인물들이라 특별한 것은 없었다. 물론 요즘 부쩍 그런 생각이 들지만, 히틀러 뭇솔리니 그 자체도 문제지만 그들을 떠받친 민중들의 심리구조, 그것이 어쩌면 더 큰 문제라는 것 말이다. 물론 이것은 일상적 파시즘과 맥이 통한다.

그런데 그런 심리적 구조를 아주 정확히 분석한 사람은 에리히 프롬이라고 한다. 솔직히 에리히 프롬에 대해 책 표지만을 봤을 뿐, 그에 대해 잘 몰랐다. 근데 이번에 강준만의 글을 통해 그를 접하자 바짝 그를 만나고 싶어졌다. 조만간에 사서 봐야겠다. <소유냐 삶이냐>, <자유로부터의 도피>, <불복종에 대하여> 정도는 꼭 봐야겠다. 그래서 일단 이번 글은 강준만이 골라낸 프롬의 글을 그대로 옮겨 적는다.

"압도적으로 강한 권력 속에 해소시켜서 그런 힘과 영광에 참여하려는 것"

그는 대중이 지배를 당하는 데서 느끼는 만족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대중이 바라는 것은 강자의 승리요, 약자의 절멸이 아니면 무조건 항복이다."
"파시즘의 공통점은 원자처럼 세분된 개개의 인간에게 새로운 피난처와 안전을 제공해 주었다는 점이며, 이러한 체제는 소외의 궁극적 결과라고 말한다."
"항상 자신이 무력하고 무의미하다고 느끼도록 돼 있는 개인은 그가 복종하고 숭배해야 하는 지도자, 국가, 조극에 모든 힘을 바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개인은 자유로부터 새로운 우상 숭배로 도피하는 것이다."
"근대인은 아직도 모든 종류의 독재자들에게 자신의 자유를 넘겨주도록 갈망되고 있거나 유혹 당하고 있다. 아니면 기계 속의 하나의 작은 톱니바퀴로 자신을 변화시킴으로써 자유를 상실하고 있으며, 잘 먹고 잘 입고있긴 하나 자유인이 아닌 자동인형이 되고 말았다."

정확한 지적이다. 자유를 스스로 반납하고 자유인인 아니라 자동인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러나 이들은 그러면서도 자기 스스로를 주체적 존재라고 착각하면서 산다. 세상에 대해 다 안다고 말하면서. 그걸 프롬은 이렇게 본질을 밝혀낸다.
"보통 사람은 박물관에 가서 렘브란트와 같은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보면 아름답고 인상적인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판단을 분석해 보면 그는 그 그림에 대해 어떤 특별한 내적 반응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그림이 일반에게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그 그림도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우리는 본다."

그렇게 사람들은 자아라는 무거운 짐을 제거함으로써 안정감을 얻고자 한다. 어떤 강력한 집단에 소속되거나 그 집단과 동일시 되는 효과를 추구함으로써 무언가 안전하고 포근한 기분을 느낀 적이 있다며 그게 바로 프롬이 말하는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서 자기를 상실하는 일' 또는 '자유라는 짐에서 벗어나는 일'과 통하는 것이다-이건 강준만의 단 토.
역시 강준만이 붙인 말. "한국인의 다수가 권위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무조건 둥글게 둥글게 사는 게 좋다고 믿는 사람,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걸 확신하고 그걸 그대로 실천에 옮기는 사람, 자기보다 힘이 강한 사람에 대해선 무한대의 인내심을 발휘하며 복종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모두 다 권위주의적 성격의 소유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프롬. "왜 인간은 그다지도 쉽게 복종하는가? 그리고 불복종하는 것은 왜 그렇게도 어려운가? 스스로 국가나 교회 혹은 일반적인 여론에 복종하고 있는 동안에는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래서 황우석 애국주의에 우르르 편승했던 것이다. 자유인이 아니라 자동인형들, 그들은 무력감과 불안감을 느낀다. 그래서 개인은 자신에게 안전감을 주고 회의로부터 자신을 구해주는 새로운 권위에 쉽게 굴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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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바이러스
진중권 지음 / 아웃사이더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진중권, <빨간 바이러스>, 2004, 아웃사이더.




<부조리한 현실에 날리는 통렬한 비웃음, 그리고 그 이후>

진중권,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의 천재적 머리에는 경탄했지만, 왠지 인간미는 느낄 수 없는 사람, 그렇게 여겼다. 그를 만난 것도 벌써 5년 전인 것 같다. 사람이라는 게 그런가. 글로 만날 때와 달리 실제 직접 만나니 그 역시 피가 흐르는 인간임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목사였다는 사실 역시 새로운 충격이었다. 목사 아들이 저렇게도 사람을 잘 긁어대고, 빈정대는가 하는 그런 감정 말이다.

이번 <빨간 바이러스>는 그 동안 그가 각종 매체에 기고했던 글에다 뒤에 몇 꼭지를 더 붙여 펴낸 책이다. 한 마디로 역시 진중권이다를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 번득이는 기지, 어디서 도대체 저런 생각을 뽑아낼 수 있었을까.

그의 특징은 비웃음이다. 부조리한 현실에, 부조리한 권력과 자본에 아주 시니컬한 비웃음을 날려 버리는 것이다. 이건 김어준식의 통쾌한 똥침과도 다르다. 상대를 아주 무기력하게 만들 정도로 비웃어 버리기 때문이다. 잔뜩 긴장하며 나름의 논리를 대며 한 판 붙을 준비를 하고 있는 상대방에게 판 전체를 뒤집어버릴 비웃음으로 제압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는 적이 많다. 소위 운동 진영 안에서도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강준만과도 예전에 책 두 권 분량의 논쟁이 오갔다. 내가 보기에 결국 강준만이 졌다. 왜냐면 그는 진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중권은 진지하지가 않다. 모든 걸 희화시켜 버린다. 그러니 진지하게 폼 잡은 사람은 맥이 빠질 수밖에 없다. 이번 책도 역시 그랬다. 우선 재미있는 대목을 옮긴다.

최병렬에 대한 비판부분이다. "대체 어느 나라 보수정당의 대표가 남의 국기나 불태우는 맹동주의자들의 과격시위를 거들고 앉았는가? 앞으로 철분 섭취 좀 하셔야겠다."

역시 최병렬이 단식할 때 보냈던 야유. "목숨을 건 비극적인 단식투'쟁'이 이제는 뱃살을 건 우스운 단식투'정'으로 반복되고 있지 않은가"

"어차피 열린우리당은 가진 국민의, 가진 국민에 의한, 가진 국민을 위한 정당"

"타오르는 몸뚱이에서 나오는 절규는 못 들어도 골프장 그린에서 오가는 보수층의 잡담에는 민감하다"

"대한민국처럼 자본주의적인 나라도 없다. 그 징그러움을 인간의 얼굴로 가리려는 최소한의 화장술마저 포기했기 때문이다. 사회가 노골적일 때, 인간들은 천박해진다......자연을 '자원'으로 보는 인간들은 나아가 다른 인간 역시 품위를 갖춘 인격이 아니라 생산을 위한 '자원'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 천박한 사고방식을 우리는 정부에서 나서서 권장하고 다닌다......'교육인적자원부'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교육을 담당했다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이렇게 처참할 정도로 무식하다.-참을 수 없는 존재의 천박함"


"생존권보다 소유권이 더 신성한 우리나라....우리 아이가 앞으로 이런 야수들 틈에 섞여 살아야 한다.....2%정당 어쩌고 하는 비아냥거림을 들으며 내가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알량한 자선 대신에 굳건한 연대를 우리사회의 원리로 만들어야 한다."

"아무리 끔찍해도 나올 희망이 있다면, 아직 살 만한 곳이다. 그러나 빠져나올 희망이 없다면, 유황불이 없어도 그곳은 곧 지옥이 된다."

"햐, 하나님은 대체 뭐하시는지 모르겠다. 쌔고 쌘 게 천둥벼락인데, 그 중 하나 아껴두었다가 이런 싸가지 없는 말을 하는 종이 있으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치듯이 실시간으로 바로바로 쌔려버리시지."

"잔인함도 익숙해지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은 우리로 하여금 이 해괴한 당연함을 비로소 잔인함으로 느끼게 해주는 우리 사회의 감수성이다."

"공론의 장을 수호하는 게 소위 지식인의 역살이다. 우리의 지식인들은 상당히 소심하거나 경우에 따라선 기회주의적이다. 이미 200년 전 쉴러는 '지식인은 대중이 듣고 싶어 하는 얘기가 아니라 그들이 들어야 하는 얘기를 해야 한다'라고 했다. "

"인간에게 남은 길은 두 개뿐. 진리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유대의 백성이 되거나,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빌라도가 되거나...."
-여기선 황우석 애국주의를 외치는 우리 백성들과 방폐장 달라고 외치는 주민들이 떠오른다. 진리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그 백성들, 여기도 많다.

"분노가 지나치면 허탈해지는 법. 이 대목에서 참았던 분노가 실없는 웃음이 되어 피식 새어 나온다."

여기까지 읽다보면 그 동안 절필했던 내가 다시 사회적 발언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가끔가끔은 새어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진중권 역시 나중엔 나의 침묵을 정당화하는 글을 쓰고 있다.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보다 공론의 영역, 즉 좌와 우의 차이, 진보와 보수의 차이, 여당과 야당의 차이를 넘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객관성의 영역을 확보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이 공론의 영역이 사라질 때, 어차피 지식인이 할 일은 없어지는 것이다. 공론의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지식인이 할 일을 찾다가는 결국 어느 한 편을 들어 권력에 붙은 어용이 되거나, 권력만도 못한 수구가 되기 쉽다."
"또 하나는 매체의 변화다. ....... 인터넷에서 보는 것은 합리적 논증이나 진지한 토론이 아니라, '쪽수'의 물리량을 동원한 힘과 힘의 원초적인 부딪힘이다. "
"오늘날 지식인은 과거에 누렸던 '권위'를 잃어 버렸다. 이것은 진보적이다. 하지만 그들의 권위가 무너지면서 '논리'의 권위도 사라졌다. 이것은 반동적이다. 오늘날 대중은 과거에 누리지 못한 '힘'을 획득했다. 이것은 진보적이다. 하지만 그 힘은 '논리'로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쪽수의 물리량과 익명성의 보호막 위에 서 있다. 이것은 반동적이다. 하여튼 재미있는 현상이다. 오늘날 인터넷이라는 초현대적인 미디어를 통해 흐르는 것은 논리의 빈곤, 열정의 과잉과 같은 전근대적인 에너지다. 발달한 기술과 미발달한 인성 사이의 간극, 그 간극의 크기만큼 사회는 우주적이다."

고로 지금 내가 이빨로, 글로 할 일은 없다. 당분간 좀 더 침묵 속에서 성찰의 시간을 가지는 게 필요하다. 패러다임의 전환을 고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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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임헌영 대담 / 한길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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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대담 임헌영,<대화-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한길사, 2005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 <우상과 이성>(1977)머리말에서

"인간은 누구나, 더욱이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삼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 설정을 기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으로서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사회에 대한 배신일 뿐만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겨왔다."


내 삶에 있어서 '리영희'는 어떤 존재일까?

1994년 말이었나, 포항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 제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하던 무렵, 난 내 삶의 모델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더 이상 그 분들을 내 삶의 교과서로 삼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장기수 어르신들, 그 혹독한 공작을 다 이겨내고 인간이 신념과 지조를 지키기 위해 온 삶을 다 내어던지신 그 분들, 그 때 이후로 나는 그 선생님들을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나약한 한 인간으로서 나는 그 분들을 욕되게 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내가 지금도 그 분들에게 보내는 존경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을 만큼 크다. 다만 내가 그렇게 살 자신이 없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변명 아닌 다짐을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내 책상 앞에 다른 사진을 붙였다. <말>에 실려 있던 사진을 복사한 사진이다. 컬러 사진이 흑백으로 되어서 오히려 느낌이 더 좋았다. 바로 리영희 선생님 사진이다. '전사'로서의 삶이 아니라 '실천하는 지식인'의 삶으로 살아야겠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하고 다독였던 것이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그지 없다. 그런 다짐만큼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이 물들고, 많이 타락하고, 많이 타협하면서, 이젠 그저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지키며 살겠다고 수세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그런 내 삶인지라 리영희 선생님의 글이라면 다시 긴장을 높이며 읽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이번 <대화>를 읽었다.

그런데 글 시작부분부터 가슴이 아리다.
"긴 세월에 걸친 문필가로서의 나의 인생의 마지막 저술이 될 이 자서전을..."이라는 구절 때문이다. '마지막 저술이 될'이라는 구절 말이다. 이 구절이 나를 더욱 무겁게 한다.



선생님이 내 삶에 미친 영향은 엄청나다. 이건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나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의식 있는 젊은이들이라면 아마 예외가 아닐 것이다. 아니 나보다 한참 앞선 선배 세대들도 그렇다고 한다. '사상의 은사'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닐 것이다.
그래서 글 시작부터 무겁다. 가장 큰 울림의 문장들을 앞에 내새운 건 그 때문이다.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이라, 근데 그게 오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라 한다. 나는 어떠한가. 기교나 부리며서 알맹이 없는 글이나 남발하는 건 아닌가. 짧은 글 하나를 쓰더라도 과연 진실을 추구하기 위함이낙, 아니면 헛된 공명심을 쫓는라 그런 것인가.
항상 나를 성찰케 하는 울림 있는 메시지다. 그가 있기에, 그가 저렇게 거목으로 서 있기에 나 같이 여린 나무들도 의지를 한다. 그리고 다짐을 한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조금이나마 실천할 수 있다면 하고 조심스럽게 자신을 채찍질 한다.
직접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그 분은 분명 나의 스승이다.

너무도 많은 영감과 깨달음 준 분이고, 또 그만큼 쓸 것이 많아서인가 오히려 쓰기가 두렵다. 그냥 책의 몇 구절만을 남긴다.
그 분이 살아온 많은 시절, 그 모든 시절이 다 힘들었겠지만 박통 때는 정말 절망적이었던 모양이다. "오늘보다 더 암담해질 내일을 견디어야 할 절망적 상태를 생각하면서 스스로 삶을 마감해야 하는가 하는 그런 중압감에 시달렸어요" "자살이 유일한 구원으로 다가온 군인정권 30년을 살아온 결과이지"라는 구절이 당시의 상황을 짐작케 한다.

선생님은 그 어떠한 전쟁도 반대한다. "전쟁의 전투현장에서 전개된 비극보다 오히려 전선 뒤 인민대중의 생활과 그 사회의 구조적 기능적 틀이 겪는 파괴가 더욱 혹독하지요", "어떤 큰 선(善)을 위해서도 전쟁은 반대요, 전쟁은 악(惡)이야. 그것이 나의 신념이요."

딸이 학생운동을 하다가 잡혀 들어갔을 때, 두 번이나 선생님은 딸에게 참다운 아버지로서의 말씀만을 하신다.
"나는 딸에게 네가 무엇을 하든 네 행위에 대해서 반드시 책임을 지는 자세를 견지해라." "어떠한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함께 일하는 동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따위의 비열한 행위만은 하지 마라고만 말하고 발을 돌렸어."
괜히 나의 눈 밑이 짠해 지는 대목이다.

선생님의 생활 자세. "도덕적 결벽증이라고 할까. 딱히 한 마디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시간을 아껴서 독서에 열중하고, 허튼 친구들과의 사귐을 멀리하고 목적 없이 방황하는 식의 인생을 혐오하고, 시간을 아껴서 부족한 지적 교양을 충족해나가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어."
"자가 자신에게 규율을 가하고, 그 규율이 자기 삶에 의미 있는 규율이기 때문에, 기꺼이 그것에 따름으로써 보다 승화된 삶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자유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현실 세계와 안 맞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타협보다는 자기 사상을 지키려면 확고한 자기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껴'

우리나라와 외국관의 관계를 말할 때 "남이 자기를 업수이 여기는 것은 먼저 자기 자신이 자기를 욕되게 했기 때문이다"라는 중국 고전을 인용한다.

근데 그 분의 스승은 누구였을까? 없다. 시대일 뿐이다. 아니 그가 모델로 삼은 사람은 있다. 노신, 아니 루쉰이 그 스승이다. 여기서 나는 부끄러웠다. 노신의 저작을 하나도 못 읽어봤으니....

솔직히 너무도 거대한 인간의 삶이 있는 책이라 오히려 글이 그냥 가볍게 나갔다. 글에 보다 그냥 마음에 담고 싶다. 아니 생활 실천으로 조금이라도 가깝게 다가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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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 7색 21세기를 바꾸는 교양 인터뷰 특강 시리즈 1
홍세화,박노자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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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없음'을 격파하는 유쾌한 교양

박노자 외, <21세기를 바꾸는 교양>, 한겨레신문사, 2004.




보고 싶은 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뤘다. 워낙 스타 필진이 깔려 있어서 보고 싶었던 것이지만, 또한 똑 같은 이유 때문에 미뤘던 것이다. 뻔히 다 아는 이야기이지 않겠느냐는 그런 게으름이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들에게선 배울 게 많다.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도 그렇지만 그들의 삶 그 자체도 내겐 중요한 영감을 주는 소재였다.

먼저 박노자, <한겨레21> 고경태 기자가 쓴 필진들에 대한 소개에서 고경태는 박노자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술은 단 한잔도 입에 못 댄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쾌락을 못 느끼기 때문이다. 아이 보는 일과 산책 이외의 시간엔 오로지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벌레, 연구벌레다.

연구벌레의 글이어서 그런가. 이 책에 실린 다른 글보다 전하는 게 컸다. 아니 사실은 지금의 내 관심에 가장 부합한다고 말하는 게 옳겠다. 홍세화의 물질적 이기심에 대한 질타나 하종강이 전하는 참된 삶의 의미, 한홍구의 희망의 역사 등도 모두 그 깊은 맛이 있었으나 박노자의 그것이 오늘의 내게는 가장 커다란 관심이었다. 그래서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고구러가 강대국이어서가 아니라 개방과 다양성을 띤 나라라서 좋다는 박노자, 그는 근대 이후에 중앙집권적 국가 권력 강화를 위해 만들어진 '민족'의 허상을 밝힌다. 그러면서 근대와 전근대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시정하려 노력한다.
흔히 우리는 전근대를 모자란 것으로 근대를 모범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다 보니 근대를 빨리 이룬 서구의 가치관이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박노자는 이에 의문을 제기한다. 한국사회 학교.군대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폭력은 전근대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조선시대에서 이어온 악습이 아니라 19세기 말 독일 군대의 훈육방식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화되었다가 다시 한국으로 들어온 것이라는 말이다.
한국사회에 만연한 접대문화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확립된 것이라고 한다. 때문에 전근대에 죄를 돌릴 것이 아니라, 근대의 문제부터 들춰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일본의 천황 숭배도 메이지유신의 작품이다. 2600년 전부터 신무천황의 황통을 받았다고 말해지고 있으나 이것은 허구인 것과 마찬가지다. 신문, 군대, 학교 등의 기제가 이런 조작을 강화한다.

열린민족주의에 대한 질문에 대해 그는 동남아 노동자들에게 단 1주일만이라도 입국 자유화를 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런 민족주의는 진실성을 가질 것이라고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을 질타하기도 한다. 복제된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할까.

그의 마지막 인사는 매천 황현의 글에서 따왔다. 원문은 생략하고 번역문만 싣는다.
"고고한 현직을 원하지 말고 가난을 싫어하지 마라
그리고 아름다운 나라를 마음대로 거닐면서 계속 천진한 마음을 가져라."

다음으로는 우리시대의 구라, 한홍구.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마음을 가진 국민들이 이라크 파병에 찬성하는 모순을 아프게 지적한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과거의 역사를 얼마나 기억하느냐, 얼마나 많은 실천이 더해지느냐에 따라 역사는 달라진다"고 희망의 역사를 피력한다.
"타인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용기와 실천"
"여러분들의 작은 기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고, 더 확실한 것은 여러분들이 기여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죽었다 깨나도 안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홍세화, 아름다운 사람 홍세화 선생의 글이 이어진다.
"사회문화적 소양을 높이기 위한 긴장보다는 물질적 욕구에 일차적 관심을 갖고 있는"한국사회에 대한 아픈 지적. 그러기에 "물신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의 항체를 갖추"라고 말한다. 공화국에 살면서도 전혀 공(PUBLIC)하지 못한 한국사회, 공공적 요구를 내세우면 곧바로 '빨갱이' 매도가 이어지는 한국사회.
그러나 홍세화는 "진보는 느린 걸음"이라며 계속해서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죽기 전에 무상의료, 무상교육은 볼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후배들이 부끄러워지는 대목이다.
그런 세상을 만들려면, 경쟁과 물신주의 대신 연대의식이 자리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소수가 아무리 혁명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은 다수의 생각을 조금 바꾸는 것보다 혁명적이지 않다"는 그람시의 말을 인용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결국 각자는 자기의 존재 미학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삶들을 살길 그는 희망한다.

'너희가 노동문제를 아느냐'며 질타하는 하종강.
그의 말대로 나는 노동문제를 잘 몰랐다. 시민법과 사회법의 충돌에서 제대로 된 사회라면 사회법이 앞서야 하는데도 우리사회는 약육강식의 시민법만이 절대진리인양 춤을 춘다.

"남사당패에서 줄 타는 광대가 부채 하나만 들고 줄에 올라갑니다. 광대의 부채는 언제나 몸이 기울어지는 반대 방향으로 펼쳐져야 해요. 중립을 지켜야 할 것 아니냐, 똑똑한 척 하고 부채를 가운데로 들면 바로 떨어집니다. 그게 양비론입니다.
자신이 하는 말이 얼마나 옳은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이 우리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 하는 겁니다. 자신의 부채를 어느 쪽으로 펼쳐야 할지 항상 고민하면서 살자는 겁니다. 나는 권력과 자본 그리고 노동자 사이에서 공정하게 중립을 유지할 거야. 이런 건 우리사회에서 불가능합니다. 어느 것이 가치 있는 삶이겠어요?"

정문태, 솔직히 나는 이 사람 이름을 처음 들었다. 국제 분쟁지역 전문기자라고 한다. 전쟁지역을 쫓아다니며 오랜 시간 취재를 했던 사람인 모양이다. 국익을 따라 기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민적 입장에서 기사를 써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종군기자'아 아니라 '전쟁지 기자'가 맞는 것 같다.

뒤에 영화배우 오지혜와 팔레스타인 출신 미국인 다우드 쿠탑의 글이 이어진다. "살람" 그 말 뜻은 평화다.
'살람'으로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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