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희망 유재현 온더로드 6
유재현 지음 / 그린비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의 걸음으로

유재현, <느린 희망>, 그린비, 2006.


가능한 일일까? 시장경제의 사회적 부재가. 쿠바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 현실에서 말이다. 하긴 쿠바라고 해서 처음부터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 바로 코 밑. 가장 퇴폐적인 양키 문화로 찌들었던 아바나를 떠올린다면, 우리라고 해서 꿈만은 아닐 성도 싶다.
“시장경제의 사회적 부재는 경재의 부재 또는 극적인 순화를 의미했다.” 극적인 순화라....
트랙터 대신 소들이 땅을 갈고, 마차가 곡물을 운반하는 모습, 자동차 대신 자전거가. 낭만이 아니다. 현실적인 불편이며 더하면 고통이다. 이걸 우린 선택할 수 있을까. 물론 그들도 처음엔 자발적으로 선택한 게 아니었다. 소련과 동유럽이 무너지기 전까지만 해도 잘나가는 플랜테이션 농업지대였으며 화학비료로 땅을 목욕시킬 정도의 지역이었다.
하지만 동구권 붕괴 이후 사회주의 연대 경제가 붕괴되자 그야말로 그들은 고립되어 버렸다. 연계경제 체제 하에서 단절은 곧 죽음이다. 그러나 피텔 카스트로는 이 어려움을 역전시킨다. 발상의 전환을 한 것이다. 위기를 기회로.
“외채가 아니라 생태에 진 빚을 갚자.” 그가 1992년 브라질 리우회의에서 행한 연설 중의 일부다. “불평등한 무역, 보호주의, 외채가 생태를 공격하고 환경의 파괴를 조장하고 있다. 우리가 인류를 이 같은 자기 파괴에서 구해내려 한다면 세계의 부와 기술을 더 많이 나누어야 한다. 일부 국가들은 덜 사치스럽고 덜 소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럼으로 세계의 대다수가 덜 빈곤하고 덜 굶주리게 될 것이다. 제3세계는 더 이상 환경을 파괴하는 생활양식과 소비관습을 이전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을 보다 합리적으로 만들자. 정의로운 국가경제지서를 만들자. 모든 과학지식을 환경오염이 아닌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사용하자.”
하긴 피델이 연설에서 나온 그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그건 사기다. 개발론자가 환경론자를 잠재우기 위해 창조한 형용모순이다. 지속가능과 발전은 애당초 함께 갈 수가 없다. 그래서인가 저자 유재현은 주변 사람들의 딴죽에 대해 재치 있게 답한다. 저자가 지속가능한 사회의 모델로서 쿠바에 대해 열심히 떠들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누군가가 그건 “지속가능한 후퇴 아니에요?”라며 제법 똑똑하게 면박을 주었던 모양이다. 실제 쿠바는 초라하다. 허름한 건물, 남루한 옷차림, 그을린 얼굴, 물건 없는 상점으로 대표되듯이 90년대 이후 쿠바는 몹시 후퇴했다고 한다. 그랬기에 이에 대한 저자의 답, “그러니 묻건대, 후퇴하지 않고 지속가능한 사회가 될 수 있는 다른 어떤 방법이 있단 말인가? 지속불가능한 발전을 포기하지 않고서야 지속가능한 사회를 일굴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있단 말인가?”
그래서 책 제목이 ‘느린 희망’인가 보다. “시장과 경쟁의 수레바퀴를 매달지 않는” 사회, 그래서 “인간의 걸음으로 천천히 움직이는” 그런 사회. 그야말로 극적인 순화이겠다.
어렵게 말할 것 없다. 지금 당장 30년 전 혹은 50년 전의 사회로 돌아간다면 선택하겠느냐는 질문이 왔을 때, 나는 주저 없이 “그렇다”라고 말하겠다. 더 이상의 경쟁은 인간을 피폐하게 만들 뿐이다. 그 경쟁의 끝이 행복이 아니라 속이 허해진 과시욕이기에, 주변의 눈을 의식하며 사는 비주체적인 삶이기에,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삶이기에. 나는 내릴 수 있다면 바로 내릴 것이다.
하지만 사회는 여전히 미친 질주를 한다. 쿠바처럼 상황이 닥쳐오기 전에는 결코 멈출 것 같지가 않다. 그래서 때론 그냥 둬라 싶기도 하다. 때가 되어야 한다. 그 전에 아무리 떠들어도 알아듣지 못한다. 귀가 있어도 못 듣고 눈이 있어도 못 보는 사회는 어쩔 수 없다. 상황이 닥쳐야, 때가 되어야 변화가 가능할 것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피델의 추진력은 무의미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게바라의 피도 결코 헛된 것은 아니다. 시대의 소명에 맞춰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은 깨어있는 인간의 의무이기도 하다. 게바라의 글 <대장의 접시>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는 단 한 사람의 호감을 얻기 위해 많은 사람들의 평등을 모독했다.” 새로 온 취사병이 게바라에게 음식을 더 얹어주자 호통을 치곤 썼던 글이다.
‘평등을 모독했다’ 이 대목. ‘모독’이라는 단어가 사람을 휘잡는다. 우린 요즘 이 단어를 기억하고 사는가. 자본의 달콤함에 기꺼이 몸을 던지면서 그것이 ‘모독’스런 행위인지를 느끼긴 하는가. 지식인들이라고 떠드는 놈들이 이런 모독이라는 단어를 알긴 하는가. 부끄러움이 없어진 사회에서.
아주대 전자공학과 출신의 소설가 유재현. 그의 글은 항상 긴장이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그 긴장과 함께 시대에 대한 조롱이 있어 구미가 당긴다. 물론 그 조롱은 아픔에서 나온 것이다. 더하여 이 책엔 사진이 있어서 한결 더 좋다. 가보지 못하는 쿠바의 모습을, 그것도 과장되거나 천편일률적인 뻔한 그림이 아니라, 그가 만난 그저그런 쿠바 사람들을 담아서 그런가, 더욱 좋다.
아 또 하나. 미군의 관타나모 해군기지, 왜 그 이슬람 포로들을 수감했다고 하는 그 해군기지가 쿠바 섬에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것도 미국 가까운 북부가 아니라 남부에. 원 그런 경우도 있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