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2007년 3~4월 - 통권 93호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민주주의와 미신

<녹색평론> 93호 2007년 3·4월호.



내 삶에 위안을 주는 거의 유일한 잡지다. 물론 <한겨레 21> 같은 재치 있고 감각 뛰어난 시사 잡지도 좋아한다. 하지만 <녹색평론>은 그 울림이 다르다. 근원을 성찰케 한다. 그러기에 말도 안 되는 천박한 요즘의 세태에서도 나를 견디게 한다.
그런데 한편으론 그 따스함이 어쩌면 시대의 뒤 칸을 넘어가는 낡은 세력들의 넋두리는 아닐까 하면서 두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다들 앞을 향해 달려가는데, 나만 아니 이 <녹색평론> 그룹만 뭔가 과거의 향수에 빠져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두려움 말이다. 유소림의 에세이 ‘겨우살이’와 유영미의 ‘교사도 우울하다’를 읽을 때면 그런 생각이 더 든다. 이들의 호소력 있는 문장과 글귀에 가슴 아리며 끄덕끄덕 고개를 흔들지만, 한편으론 그 옛날 좋았던 시절에 대한 대책 없는 향수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유영미의 말 그대로 요즘 애들은 예전의 학생들이 아니다. “그냥 부모가 지목하는 길, 현실지향적인 출세 성공의 길로 아주 순순히 따라간다.” “억압을 억압이라고 느낄 수조차 없는 아이들의 정서가 정말 심각한 문제다.” “사춘기의 반항은 아이들이 세계에서 이제 사라져버리고 있다. 지금 아이들에겐 인생에 대한 고민 같은 건 할 시간도 없고 그럴 여건도 안 된다. 아이들도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풍요로운 소비’를 통한 자기과시가 최고의 가치인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니 돈 많이 버는 직업을 원하는 부모의 요구에 아이들이 ‘반항’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어른들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아이들은 거기에 대해 절망하고 반항하고 몸부림쳐야 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 거창한 이상을 품고, 나아가 자신이 몸담은 사회와 이 사회의 역사를 볼 줄 아는 시각을 가지게 되고, 기성세대의 이기적이고 현실 타협적인 모습에 실망을 느끼고 정직하게 괴로워하며 그에 대한 고민으로 나름대로 자기 인생의 탈출구를 찾아 헤매는 것이 젊은 날의 초상”이지 않느냐는 그의 한탄에 공감을 한다. “한창 꿈을 갖고 자유를 열망할 나이에, 부모의 현실적인 감각을 재빠르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부모와 아무런 갈등도 없이 현실적인 목표에 얄미우리만치 자신을 적응시키는 이 아이들은” 도대체 뭐냐며 한탄 넘어 절망까지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렇게 만든 게 우리 어른들이지 않은가. 아무리 괴롭다 해도 애들 탓할 건 아니다. 나도 그들이 때론 ‘얄미우리만치’ 무섭다. 그러나 그것 역시 ‘영혼이 없는, 계산만 할 줄 아는 인간들’로 가득 찬 기성세대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교육이 따로 홀로 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회 변화 없이 교육만 아무리 개혁해 봐도 헛일이다. 아니 되질 않는다.
물론 유영미도 애들을 탓한 게 아니다. 이런 ‘죽은 교육’, ‘바보 같음’을 계속하는 이 사회의 시스템에 대해 분노하고 그 시스템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가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가 보기에 우리 교육의 이 바보짓은 ‘계산된’ 바보짓이라는 것이다. “이 사회의 지배계층에겐 지금의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이 바로 이 ‘죽은 교육’이었던 것이다. 사고가 자유로워 사회의 부조리를 꿰뚫어볼 줄 알며, 자신보다 공동의 문제에 더 관심이 많고, 자신의 이익추구보다는 다른 사람의 불행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소비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않는 인간형이 사회에 배출된다면 현재의 이 체제는 영락없이 붕괴해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 시스템의 어느 한 코너에서 맡은 바 직분(?)을 다하고 있다. 그들을 위해. 그런 생각을 하면 괴롭다.
어쨌거나 아무리 내가 발버둥을 쳐도 아이들은 ‘소비에서만 삶의 의미를 찾는 로봇 같은 인간형’으로 생산되고 있다. ‘소비생활로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고, 남들과의 권력구도에서 우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영혼이 빈 아이들’로 육성된 이들은 오로지 ‘물질적 풍요’ 속에 자신의 영혼을 파묻는다.
유소림의 에세이 ‘겨우살이’에서도 이 천박한 세태에 대한 지적은 이어진다. “사람들은 상전에게 모진 구박을 받다 고생 끝에 드디어 옛 상전 앞에서 돈자랑을 하게 된 종놈들처럼”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앞의 유영미가 “환경 파괴보다 더 무서운 것이 경제성장으로 인한 인간성 파괴”라고 걱정하시던 김종철 선생님의 말을 인용했는데, 그 김종철 선생님은 서문에서 그것을 민주주의와 연결시켜 말씀하신다. 단적으로 말하면 그 동안 우리는 미신 속에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 미신이라는 것은 경제가 성장해야 민주주의가 제대로 꽃 필 수 있다는 신화다. 경제성장이 민주주의를 촉진하는 것 말이다.
그러나 이제 따져 보면 그것 거꾸로다. 경제성장은 차별과 격차만을 불러왔다. 애당초 골고루 성장하는 경제 성장은 없었다. 성장은 누군가를 차별화하고 배제하고 눌러놔야만 가능했다. 그러기에 경제성장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요소다.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행복하지 못할 것인가’라는 책 제목처럼 우린 그 동안 오로지 경제성장만을 향해 달려왔다. 그것이 곧 신앙이다. 예전에 빨갱이를 때려잡듯 이성도 신비함도 관용도 없다. 오로지 그것만이 진리다. “그러니까 정말 문제는 한미 FTA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고, ‘성공’을 해야 한다는 이 사회에 팽배해 있는 밑도 끝도 없는 욕망이다.” 김종철의 진단이다. 실제 그렇다. 한미 FTA 그 자체는 문제가 안 될 수도 있다. 사람들이 정신이 제대로 돌아온다면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는 조약이다. 그러나 분노하는 감귤 농가도 사실 따져보면 모두 다 경제 성장에 미쳐있다. 물론 이들만을 탓할 순 없다. 다들 그렇게 미쳤는데, 나만 미치지 않으면 살아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박승옥이 ‘진보는 없다’며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소위 한국사회의 진보도 기실 따져 보면 ‘성장’을 앞세우는 ‘개발주의자’들과 다르지 않다. 마르크스 역시 분배를 이야기했지만, ‘생산력’이라는 그의 용어에서도 보듯이 일단 성장 그 자체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았다. ‘필요한 만큼 소비’할 수 있게끔 생산력을 높이는 것이 기본적으로 그의 이론엔 깔려 있다. 그러기에 우리의 진보도 그렇게 달려왔다. “역대 민주정부가 박정희식 개발성장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채택한 것은 타협의 결과라기보다 달리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정책과 비전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박승옥의 진단은 그런 맥락에서 충분히 타당성을 갖는다. 하는 짓이 똑같다. 게다가 요즘엔 도덕성에서도 별로 앞서지 못한다. 그러니 욕먹는 것이다. 운동권 전체를 욕보게 하는, 근원적 성찰이 부족한 386들이 지금 그러고 있다. 근원적 성찰이 부족한 것이다. “진보가 여전히 낡은 성장과 발전의 환상에만 젖어있다면” 그건 재앙일 수 있다.
대안에 대해 박승옥은 우애와 협동을 말한다. 시장경쟁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협력과 협동이라는 것이다. 이건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아닌가. 아나키즘의 핵심적 내용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아나키즘을 발설하지 않는다. 내용은 그것이면서도, 왜 그럴까. 아직 발설할 때가 아닌가.
하승수의 글은 사법권력에 대한 문제제기다. 말로만 듣던 전관예우, 그런 것이 있기에 세상은 사법부를 ‘잠재적인 법률사업자’로 여긴다. 다만 그의 글에서 아쉬운 건, 당위성에 그친 추상적 주장으로 일관한다는 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사법권력을 해체할 방안을 내놨으면 좋겠다.
강수돌 교수가 마을 이장 질을 한다는 걸 최근 알았다. 그런데 그게 다 사연이 있었다. ‘개발동맹에 맞서는 풀뿌리 투쟁’을 내실 있게 하다 보니 그랬다. 근데 그게 장난이 아닌 모양이다. 개발세력으로부터의 협박이 거의 목숨까지 내놓게 할 정도라 한다. 지긋지긋하다. 더러운 놈들. 이런 놈들에겐 대화나 이성이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 점잖은 교수가 이장 노릇까지 하며 마을을 지키는 것이다.
서글프다. 자본과 소비, 그 소비 속에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안목에 안타까움을 넘어 서글픔을 느끼게 된다.’ 나 역시 그렇다. 그러나 확실히 깨닫는 바는 있다. 민주주의는 경제성장을 통해 촉진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 그 반대라는 것을. 결국 소농 중심의 공동체적 질서를 회복하는 것, 어렵더라도 궁극적으로 가야할 길이다.
그나저나 빨리 지금 벌려 놓은 역사 공부가 끝나야 차분히 아나키즘 공부를 시작할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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