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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을 바꾼 칭찬 한마디
김홍신 외 31인 지음 / 21세기북스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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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신 외 31인, <내 삶을 바꾼 칭찬 한마디>, 21세기북스, 2008.

 

이런 책 기획 의도는 뻔하다. 그리고 대부분 무난히 경영 성과를 이룬다. 소위 자기 계발서. 어려운 시기 삶에 힘을 주는 책이다. 이 책만 해도 초판은 2004년인데 벌써 2008년에 14쇄다.

뻔한 책인 줄 알면서 샀다. 실용적 이유 때문이다. 직장에서 올해도 맡은 일이 인성교육이다. 그 중 하나가 칭찬의 날 운영인데, 좋은 취지와는 달리 시들해져 있다. 어찌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면서 이런 종류의 책을 많이 사고 읽는다. 이 책보다 더 뻔한, 그러면서도 대히트작이었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역시 사서 봤다. 별 내용 없다. 단 한 줄이면 끝날 책이다. 칭찬하면 힘을 받아 일을 잘하게 된다는 것. 너무도 뻔하고 단순한 이야기다. 그래도 잘 팔린다.

이건 무얼 말하나? 우리 사회가 그 만큼 칭찬에 굶주려 있다는 이야기, 칭찬이 너무도 필요한 사회라는 이야길 것이다.

그래서 우리 학교에서도 칭찬 생활화를 위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김홍신 외 31명, 박지성도 있고, 최불암도 있다. 섬진강의 김용택 시인도 있고. 다들 좋은 말들 하셨다. 그리고 결론적 공통점은 칭찬은 보약이라는 것이다. 돈도 안 드는 보약. 그렇담, 애들에게, 동료 교사들에게 칭찬 정말 많이 해야 되겠다.

물론 안다. 근데 그게 잘 안 된다. 습관이 안 되어서 그렇다. 또한 쉽게 칭찬하면 사람이 너무 가벼워 보일 염려도 있다. 그래도 해야 한다. 진실된 마음을 담아서.

이 책의 주인공 중 특히 눈길을 끌었던 이는 환경음악가라는 이기영 교수다. 음대 교수가 아니다. 자연과학부 교수인데도 환경음악을 한다. 예전에 한겨레신문에서 봤던 것 같다. 다시 보니 반갑다. 저렇게 산다면 참 좋겠다 싶어 부럽기도 했다.

또 하나, 부부가 두 달 동안 하루 한 번 이상 칭찬하는 숙제를 내는 프로그램. 괜찮을 것 같다. 평소엔 그렇게 칭찬할 게 없어 보여도 이런 프로그램에 들어가서 보면 칭찬 거리가 많다고 한다. <칭찬 일기>를 쓰게 하는 것도 좋긴 하겠다.

 

암튼 좋은 책인 줄은 알겠는데, 더 이상 쓸 말은 없다. 다만 금요일마다 있는 칭찬합시다 캠페인에 몇 번 써먹을 소재를 잘 골라내면 본전은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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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 정호승 산문집
정호승 지음 / 비채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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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IMF 이후로 자기 계발서가 흥행에 성공하더니, 이제는 그것마저 약발이 다한 것 같다. 자기 계발해봐도 결국 대한민국의 이런 구조 아래에서는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인가 요즘엔 아예 계발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에 다친 마음, 그 상처들을 치유하는 책들이 유행이다. 힐링이라든가 뭐라든가.

암튼 예전 잘나가던 기준으로 보면 포기다. 더 이상 전진하지 않고 실패한 삶을 살겠다는 것이다. 예전에 그렇게 생각했다. 패배자들의 나약한 자기 합리화라고.

그러나 나 역시 패배했다. 작년 이래로. 인간의 능력으로 어쩌지 못하는 불가항력을 느끼며 패배를 시인했다. 그런데, 그 패배가 패배가 아니었음을, 그것이야 말로 인생을 다시 보게 되는 행복한 성찰의 계기임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그랬구나. 인생은 직선이 아니었구나. 느릿하고 구부러진 그 길이야말로 오히려 여유롭고, 삶의 의미를 다시 느끼는 시간이었다. 무엇 때문에 직선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물음도 못하고 살았던 시간이 처절이 반성되었다.

그리고 주변을 보았더니 정말이지 아픈 사람들이 많았다. 보듬어야 할 인간들이 너무도 많았다. 예전엔 그들을 쉽게 외면했다. 패배자라고. 그러나 이제 내 관점은 완전히 바뀌었다. 함께 보듬고 가야할 사람들임을 알게 된 것이다.

물론 그 때문에 이 책을 잡은 것은 아니다. 내가 맡은 일이 명상의 시간을 지도하는 일이라서 그랬다. 좋은 글, 사람을 달래주는 글, 용기를 주는 글을 찾다가 만난 책이다. 이름만 들어봤지, 그의 시집을 읽어보지도 않았던 경우다. 그래도 좋았다. 그냥 좋았다. 사실 뻔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어차피 인생은 뻔한 것이다. 유치한 것이고. 그러나 그 유치함이 때로는 사람을 울린다. 그래, 인간은 그 정도 밖에 안 된다. 아니, 그 정도이기에 인간이다.

여러 좋은 이야기가 이 책에 있다. 그래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인생은 직선이 아니고 곡선이라는 말이겠다. 그리고 오히려 직선보다 곡선이 내게는 더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실패 없는 인생은 현실에 존재하지도 않으면 설혹 존재한다 하여도 오히려 매마른 인생일 뿐이다. 실패가 삶을 풍요롭게 한다. 그러니 우리는 십자가의 고통보다도 십자가의 사랑에 주목할 수 있다. 남들이 나를 뭐라 흉봐도 연연하지 않을 수 있다. 신께서 주신 재는은 더욱더 노력해서 살리지만, 주시지 않은 것에 대해서 탐내거나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다. 나를 더욱 크게 세워 멀리 갈 걸음 준비해주시느라 나를 쓰러뜨린 신을 이해할 수 있다. 내 그릇의 작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인정할 수 있다. 헬렌켈러의 말처럼 눈 앞의 문이 닫혀 있을 때 뒤의 문이 열려 있음을 안다. 남에게 질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게 행복이다. 곡선이야말로 아름답다. 오히려 직선일 때 천박하다. 오늘, 그 곡선의 아름다움을 절절히 느낀다.

아 참, 글 마치기 전에 안치환의 노래였나, "그대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하는 <수선화에게>라는 시가 정호승의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또 하나 정호승의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를 좋아하시던 허찬란 신부님의 어머님을 떠올렸다. 그 연세에 이런 시집을 다 읽으셨다니..... 내가 부끄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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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07년 7~8월 - 통권 95호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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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엇을 위한 성실함인가

<녹색평론>95호 207. 7-8월호




몸이 아프다. 예전 같지가 않다. 예전엔 며칠 쉬면 거뜬히 일어났는데, 이젠 그게 안 된다. 많이 쉬어도 회복이 어렵다. 책 읽는 횟수도 시간도 줄어든 건 당연하다. 책을 읽기만 해도 위산이 역류한다. 그냥 쓰러져 잔다.
‘내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마라’ 아함경에 나온 구절이었던가. 병이 있어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 오만한 인간이 스스로들 돌아보는 기회가 된다. 그러기에 병은 축복이라고 한다. 성찰하기 싫어도 돌아볼 수밖에 없다. 그게 아니고선 할 게 없다. 고마운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열심히 살았다. 부지런히 살았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이 꼴이다. 그러니 다시 살펴본다. 성실한 것은 맞는데, 무엇을 위한 성실이었나를 생각한다. 그것이다. 나 자신의 내면을 위한 게 아니었다.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시선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서 열심히 했노라고 하지만 사실 그 밑바탕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우선이었을지 모른다. 하여 다시 묻는다. 나는 왜 무엇 때문에 성실하게 살았던가.
어쩌면 나의 성실함이나 현재 한국사회의 맹목적 개발주의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강수돌이 맑스의 공산당 선언을 패러디한 표현(209쪽) “오늘날 한국을 비롯한 온 세상에는 자신감 넘치는 하나의 해괴한 망령이 돌아다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개발주의’라는 망령이다”라는 게 결코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본질에서 놓고 보면 같을지도 모른다.
물론 차이는 있다. 나의 성실함이 물질주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경제’가 신앙이 되어 버린 한국사회의 그 맹목적 일중독과는 다르긴 하다. 사실 경제가 신앙이 된 것도 아니다. 돈이다. 무엇을 위한 돈은 중요하지 않다. 그냥 많이 벌어야 한다는 강박이 강할 따름이다. 그러니 내 문제의 본질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무엇을 위한 돈 벌이인가’와 ‘무엇을 위한 성실인가’가 다르지 않다. 본질에서 내면을 중심에 놓은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우선하고 있다는 점에선 같다. 돈을 향해 가는 것도 결국은 남에게 꿀리지 않기 위함이요, 내가 성실한 것도 어쩌면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에 같다. 내가 좋아서 한다고는 하지만, 누구의 신선도 신경쓰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누군가를 의식하는 행위였을지도 모른다. 독자적 개성이 아주 강하다는 인상을 남기려는 의도. 그렇게 남이 나를 인정해주길 바라는 욕망.
이번 호 <녹색평론>에선 그런 내용만이 다가왔다. 사실 표지에도 실렸듯이 이번 호는 권정생 선생님 서거(서거라는 표현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분의 소박함을 생각한다면)가 특집이다. 1937년 생이니까 약 70년의 생을 사셨다. 그리곤 올해 5월 17일 삶을 마치셨다.
그 열정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늘 가난과 병고 속에 있었다. 그분의 노력에 걸맞은 영광이 주어지려고 하면 그는 늘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다. 예수의 참 모습은 왕이 아니라 헐벗고 굶주린 민중이었기에. 그래서 도법 스님마저 그분에게 야단 맞으셨다. 도법 스님의 최근 행보는 결코 부처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이 사시는 곳에 찾아와 예배드리는 사람들에게 “승용차를 타고 오라는 것도 하느님의 뜻인가”라고 직설적으로 묻는다. 기름을 찾아 떠나는 이라크 파병과 승용차 이용은 본질에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항상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 행동이 과연 예수님이 가르친 것과 어긋나진 않는가하고.
근데도 나는 권정생 선생님의 글보다 그리고 김종철 선생님의 탁월한 세상 읽기보다 뒤에 실린 서평에 눈길이 많이 갔다. 내 처지를 반추하는 구절들이 많아서였다. 나 역시 중독이다. 일 중독. “경쟁 노동의 외적 압박을 내면화해 자기자신이 스스로 통제하는 것이 일 중독의 핵심”이다. “쉬운 말로 남들이 시켜서가 아니라 과로사나 자살 등 죽음에 이를 때까지 알아서 기는 것이 일 중독의 핵심”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폭력의 체계적 경험과 내면적 자율성이 결핍에 따라 생기는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한 ‘자기방어’의 수단으로 등장”했다고 한다. 하버마스의 ‘내적 식민지’ 혹은 맑스의 ‘우리 안의 자본’과 일맥상통한 대목이다.
나 자신을 다시 들여다본다. ‘내면적 자율성의 결핍.’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다. 나 스스로 남보다 내면적 자율성이 강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도 않다. ‘인정투쟁’에 지독하게도 매달리고 있었다. 그랬기에 언제나 기준은 밖에 있었던 것이다.
현대 문병의 병폐를 고민하고 지적하고 있는 게 요즘의 나다. 하지만 나 역시 그 함정 안에서 여전히 맴돌고 있었다. 물질 위주의 성장을 향해 앞만 보고 달리는 우리 사회. 역시 남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다. 성장을 앞세우고, 개발을 해 댄다. 남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다. 그게 나의 성실함과 뭐가 다를까.
자발적 가난을 이야기했지만 본질에서 나는 아니었다. 물질적으로 그렇게 떠벌였을 뿐, 정신적인 면에서 그 누구보다 탐욕스러웠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가난해져야 한다. 그게 진짜다. <성경> '산상 수훈'에 있는 그 구절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라는 말이 이제야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병 속에서 다시 생각한다. 나의 성실함. 그건 탐욕이었다. 두려움에 기초한 자기 방어였다. 지금의 나의 병은 그 문제를 다시 성찰하게 하는 약이다. ‘내면의 자유’로 다가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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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답게 산다는 것
안대회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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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답다’는 것?

안대회, <선비답게 산다는 것>, 푸른역사. 2007.



선비, 갑갑한 세상이다 보니, 더욱 다가가고 싶은 단어다. 내가 생각하는 선비는 이렇다. 먼저 글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 글이 곡학아세가 아니다. 수신이 먼저다. 그래서 그 글은 굽지 않는다. 밥 한 그릇, 마실 물 한 병이라 할지라도 도리를 지키는 게 선비다. 혼탁한 세상이라 그래서 더욱 선비가 그리워지는 것일 게다.
겉으로 함부로 말은 못했지만 나 역시 선비의 삶을 꿈꾼다. 지조, 학식, 덕망. 그리고 함부로 할 수 없는 기운. 이런 걸 갖추고 싶다. 그러니 ‘선비’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엔 우선 마음이 간다. 게다가 이번에 그 ‘선비’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 즉 ‘답다’라는 표현이 들어간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 나의 수신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만 같았다.
아, 그러나 웬 걸. 소위 트랜드다. 유행 말이다. 요즘 고전 글공부 좀 한 친구들이 그걸 대중적으로 풀어 편안하게 내 놓는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가장 대표 선수라면 정민, 그 친구 쯤 될 것 같다. 다시 말하지만 나쁘다는 게 아니다. 나 역시 지식의 대중화를 표방하고 있다. 그러니 좋다.
그런데, 내가 실망한 건, 그 대중화가 아니라, ‘선비답다’는 것의 실체다. ‘답’지 못한 책 같다. 그냥 맹맹하다. 강한 끌림이 없다. 이건 선비다운 게 아니라 그냥 조선 시대 글 좀 하는 사람들의 주변 잡기일 뿐이다. 역시 그것조차 나쁠 건 없다. 삶의 이면을, 세세한 일상을 보여주었으니 수작이다. 다만, 내가 기대한 게 아니라는 말일 뿐이다.
어쩌면 내가 너무 경직되었을 수도 있다. 그 ‘다움’, ‘선비다움’에 대한 기대가 강해서 그렇기도 할 것 같다. 이 책에 등장하는 선비의 모습은 꼿꼿한 기개도 하나의 특징이겠지만, 한편으론 한가한 삶이 그들의 특징이기도 하다(진정한 즐거움은 한가한 삶에 있나니眞樂在閒居)고 말한다. 배워야 할 부분이다. 난 여전히 이런 책 읽기도 전투적이다. 무언가 내 삶에 직접 도움이 될 것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여유가 없다. 이건 선비답지 못한 것인가.

그래도 나의 코드와 일치하는 선비들의 모습도 있다. 나를 강화할 겸해서, 그런 부분들만 중점적으로 옮긴다. 우선 책 시작은 선비들이 쓴 자찬 묘지명이다. 자신이 죽기 전에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써서 무덤에 넣게 했다는 글이다. 많은 울림이 있다. 스스로 죽음을 준비하는 것. 죽음에 끌려가기 전에 한 번 쯤은 고민해 둘 일이다. 19세기 이양연이라는 사람의 글에 “무덤 가는 이 길도 나쁘진 않군.” 그 정도면 대단한 경지다. “한 평생 시름 속에 살아오느라/밝은 달을 봐도 봐도 부족했었지/이제부턴 만년토록 마주 볼 테니”, 그 다음이 앞의 구절이다. 나쁘지 않다는 그 구절 말이다. 나 역시 살아 있을 때 부지런히 일하고 싶다. 그래서 그 바쁨을 벗어나는 길, 그 길을 나쁘지 않게 여기고 싶다. 그 동안 못 보았던 달도 만년토록 마주할 테니까 말이다.
영국의 유명한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자찬 묘지명도 유명하다. 워낙 알려진 것이라 여기에도 잠깐 인용되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한 문장 안에 독설과 자학이 유머러스하게 녹아 있다고 평했다. 여유가 있는 사람이 쓸 수 있는 자학이다.
아무래도 나의 눈이 오래도록 집중해 있는 곳은 지조와 관련된 부분이다. 요즘 세태가 부박해서 더욱 그럴 것이다. 나를 지키기가 그 만큼 힘들어졌으니, 이런 구절을 한 번이라도 더 읽고 싶어지는 것이다.
유몽인이라는 사람. 교과서에서 <어유야담>이라는 책을 쓴 사람으로 배웠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책이 어떤 책인지도 모른다. 그냥 시험 나오면 연결 지을 뿐이다. 근데 그런 그가 참으로 훌륭한 인품을 지녔던 모양이다. 한 평생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산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인조반정을 지지하지 않은 까닭에 벼슬을 내놓고 방랑했고, 그러다가 금강산 한 절에서 <과부의 노래>를 지었다. “칠십 먹은 과부/ 규방을 지키며 단아하게 사는데/ 사람들이 개가를 권하며/ 무궁화처럼 멋진 남자를 소개했네/ 女史의 시를 제법 배운 몸이/ 백발에 젊은 티를 낸다면/ 분가루가 부끄럽지 않겠소.” 새삼스레 인생을 바꿔보겠다고 변절할 수 없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나 역시 분가루가 부끄럽게 살고 싶지는 않다.
역시 주변에서의 계속되는 유혹에 대해, “나는 늙고 망령든 사람이오. 지난해 금강산에 들어간 것은 세상을 가벼이 여겨서가 아니라 산을 좋아해서였고, 올해 금강산을 떠난 것은 관직을 얻고자 해서가 아니라 양식이 떨어졌기 때문이오. 지금 이 산에 머무는 것은 산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식량이 흔하기 때문이오. 사물이 오래되면 神이 들리고, 사람이 늙으면 기운이 빠지는 법이오. 6년 전에 미리 화를 피한 것은 신이 들려서고, 이익을 보고도 달려가지 않는 것은 기력이 노쇠한 때문이라오. 작년에 금강산에 머물렀던 것은 고상한 데가 있지만 올해 야산에 들어온 것은 속된 데가 있소. 진흙탕에 뒹굴어도 몸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 결백한 행동이고, 먹을 것이 있다고 마구 달려드는 것은 비루한 짓이오.”
폼을 잡고 있지 않다. ‘이익을 보고도 달려가지 않는 이유’를 청렴해서 그렇다고 말하지 않고, ‘노쇠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배울 점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진흙탕에 뒹굴지언정’ 그리하며 저 낮은 곳에서 살아간다고 할지언정, 헛되이 재물과 명예를 탐하지 말라고 한다. 새겨들을 일이다.
그런 그였기에 “그들의 냉혹함이 얼음장 같다 해도 나는 떨지 않고, 그 뜨거움이 대지를 태운다고 해도 나는 타지 않는다.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이, 오직 내 마음 가는 대로 쫓아갈 것이다. 내 마음이 찾아가는 곳은 오직 나 자신일 뿐이다. 그러니 거취가 느긋하여 여유가 있지 않겠는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나 역시 여유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가만 보니 그 여유는 바로 ‘오직 나 자신’에만 기댈 뿐, 남의 그 냉혹함과 뜨거움에 휘둘리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주체를 제대로 세우는 것. 선비가 우선 할 일이다. 요즘은 대학 교수들도 그저 줄서기에 바쁜 판이다. 그 냉혹함과 뜨거움에 견딜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 더 나가 이권에 목을 달기 때문이다. 그런 마당에 나는 “나는 혼자다 余獨也”를 외치며 홀로 서기를 해야 한다. 그게 선비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강직한 외톨이’, 나의 표현으로는 ‘자발적 왕따’, 그러나 나는 그 삶이 아름답다고 믿는다.

그러한 선비들도 때론 호사를 부린다. 엉터리 선비 말고, 진짜 선비도 말이다. 그들의 호사란 “오로지 문방도구에 사치를 부리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 자기 합리화는 애교스럽게 봐야 한다. 오늘날에 빗대면, 책 값 걱정 하지 않는 것. 이건 기본이고. 또 더 나가서 컴퓨터 값도?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데 왜 그런지 컴퓨터는 자꾸만 인문정신을 갉아먹는 것 같아서 흔쾌히 동의하긴 어렵다. 하긴 그걸 어떻게 쓰는가 하는 게 문제이긴 할 것이다. 컴퓨터 그 자체야 무슨 죄가 있겠나.
어쨌거나 책은 풍부히 보고 가지고 싶다. 박규수도 유숙도의 삶에서 본보기가 될 만한 인생의 의의를 찾아내 제시하고 거기 담긴 의미를 밝히며 다음과 같이 썼다고 한다. 유숙도는 국가의 회계를 맡아보던 사람인데, 그가 남긴 유산이라곤 텅 빈 집 안 구석에 쌓인 책 수천 권 뿐이었다고 한다. 많은 재물을 쌓아 두었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완전 딴판이었던 모양이다. 근데 그의 부인 역시 한 내공 한다. 그 남편을 원망한 게 아니라, 그 모습을 墨莊, 즉 ‘먹글씨가 쌓여 있는 농장’이라고 이름 지었다 한다.
그래서 박규수가 썼다. “전답을 사면 뱃속을 배부르게 하는 데 그치지만, 책을 사면 마음과 몸이 살찐다. 전답을 사면 배부름이 제 몸에 그치지만 책을 사면 나의 자손과 후학, 일가붙이와 마을 사람, 나아가 독서를 좋아하는 천하 사람들이 모두 배를 불리게 된다.”라고 말이다.

박제가의 글에 선비의 여유가 묻어 있는 것도 있다. 이것 또한 내가 부족한 점이다. 묘향산엘 갔다가 쓴 글 중에 “미끄러져서 자빠질 뻔하다가 일어났다. 손으로 진흙을 짚었는데 뒤따라오는 사람의 비웃음거리가 될까 부끄러워 얼른 붉은 단풍잎 하나 주어 들고 그들을 기다렸다.” 내 입가에 부드럽고 가벼운 웃음이 번졌다.
그 글의 마지막 대목, “무릇 유람이란 雅趣가 중요하다. 날짜의 제약을 받지 않고 아름다운 데를 만나면 바로 멈추고, 知己之友를 이끌고 會心處를 찾아야 한다. 복잡하고 떠들썩거리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속된 사람들은 禪房에서 기생을 끼고 시냇물 가에서 풍악을 베푼다. 이야말로 꽃 아래서 향을 피우며 차 앞에 과자를 놓은 꼴이다. 어떤 이는 와서 ‘산중에서 음악을 들으니 어떻던가?’하고 묻는다. 나는 ‘나의 귀는 다만 물소리와 스님의 낙엽 밟는 소리만을 들었노라’고 대답했다.” ‘다만 물소리와 스님의 낙엽 밟는 소리만.’ 다시 읽어도 맑은 기운이 느껴진다. 평소에도 나는 박제가를 좋아했는데, 이 글을 읽으면서는 더욱 그가 살갑다. 이런 친구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좋은 친구를 안방을 함께 쓰지 않는 아내라고 해서 非室之妻, 동기간은 아니지만 형제와 다름없다고 해서 非氣之弟라고 했다 하는데, 그런 사람이 많은 게, 좋은 삶인 것 같다.

홍세태라는 선비가 말하는 좋은 시, “시는 성정에서 나와 소리로 표현된다. 기이함과 교묘함에 힘써 험하고 난삽한 말을 지어내 남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을 만들고 그것이 잘 된 작품이라고 주장한다면 시를 아는 자가 아니다.” 똑 부러진 소리다. 저자의 말 그대로 “알기 어려운 난삽한 말만 늘어놓고 시입네 떠드는 양반 시인들의 볼썽사나운 행위를” 정확히 질타한 것이다. 통쾌하다. 더불어 홍세태는 “名利를 훌쩍 벗어던져 마음에 얽매인 것을 없애지 않고선 시다운 시를 짓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엉터리 예술이 난무하는 건 바로, 名利 즉 이름과 이로움에 연연하기 때문이다. 이걸 벗어나야 작품이 나온다.

다음은 이규보가 젊었을 때 톡톡 튀는 상상력으로 쓴 시, “산에 사는 스님이 달빛을 탐내/ 달빛까지 물병에다 뜨고 있구나/ 절에 돌아가서 바야흐로 깨달으리라/ 병 기울이면 달빛조차 간 데 없음을.” 좋다. 참 좋다. 탐미, 탐욕을 이렇게 경계시킬 수도 있구나. ‘병 기울이면 달빛조차 간 데 없음을’,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연 속의 존재들을 자신의 방 안으로 끌어들이느라 정신을 못 차린다. 마니아라든가 뭐라든가 해대면서.

조희룡의 표현에서, “창 모서리에 뜬 봄별을 오이처럼 따다가 답장 편지 속에 넣어 바로 보내고 싶습니다.” 어찌 여기서 ‘오이’를 떠올렸을까. 그 섬세함이 부럽다.

율곡 이이에 대한 이야기. 그가 여덟 살 때 썼다는 시, “산은 외롭게 떠오를 달을 토해내고 山吐孤輪月, 강물은 일만 리를 달릴 바람을 머금었네 江含萬里風.” 그래서 천재라고 하는 걸 게다. 그런데 그 율곡이 한 때 落髮(머리를 깎고 중이 되는 것)을 했던 모양이다. 젊은 때. 근데, 반대당에선 율곡을 그리고 율곡파를 공격하는 좋은 껀 수로 활용했다고 한다. 참 한심한 꼴이라곤. 꼭 하는 짓이 딴나라당을 닮았다.

그냥 휘 하니, 조선시대 선비의 삶을 구경했다. 내가 처음 기대했던 것처럼 ‘답게’에 대한 갈증은 풀어주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런 넉넉함을 가져보는 것만으로도 ‘오이’같은 싱그러움을 느끼고, ‘창 모서리에 뜬 봄별’을 쳐다 본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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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걸으라, 그대 가장 행복한 이여 - 비노바 바베 포토 명상집
비노바 바베 지음, 김진 옮김, 구탐 바자이 사진 / 예담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홀로 걸으라, 그대 가장 행복한 이여

비노바 바베 글, 구탐 바자이 사진, 김진 편역, <홀로 걸으라, 그대 가장 행복한 이여>, 예담, 2006.


책 읽고 간단히 메모를 하면서도 나는 항상 나의 느낌을 그리고 나의 주관을 쓰고자 했다. 그랬기에 제목을 내가 따로 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 책만큼은 제목을 따로 붙일 수가 없었다. 책 제목 그대로 ‘홀로 걸으라, 그대 가장 행복한 이여’라고 다시 반복해서 썼다. 느낌을 몇 자 적는 것 역시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좋았던 구절을 그냥 옮기고, 그것을 옮기면서 명상하는 것으로 책 읽은 이야기를 마무리 할 것이다. 물론 그래도 몇 자 적고 싶을 때는 적는다. 다만 그것이 비노바 바베의 정신을 훼손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내가 비노바를 처음 접한 건 몇 년 되었다.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인물 평전에서다. 요가에 입문하고서 얼마 되었을 때 그 책을 봤다. 인도에는 간디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간디의 제자이면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사람, 간디는 참 행복하다. 존경스러운 제자를 두고 있었으니.
간디가 벌인 운동은 ‘사티아그라하’ 즉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이때 비노바도 같이 했다. 그리곤 간디가 세상을 떠난 후 비노바는 ‘부단운동’ 즉 토지헌납운동을 다시 벌였다. 20여년 동안 맨발로 인도 전역을 다니면서 지주들에게 땅이 없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6분의 1의 토지를 공유하자고 호소했던 운동이다. 성과가 컸다. 지금 한국사회라면 코웃음치고 끝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책을 읽으며 꼭 그렇지만도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적인 힘이 그만큼 커지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의 말대로 부자를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도로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처음 태어날 때 그 순수했던 영혼을 일깨워 내는 방식인 것이다. “억압과 강제로는 아무 것도 이뤄낼 수 없습니다.....나는 모든 사람에게 선한 뜻을 전하는 겸손한 하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순례 도중에 강도들까지 그에게 자발적으로 찾아와 참회를 하며 재산을 헌납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사진도 곁들여 있다. 하긴 그 강도들도 처음부터 포악했겠나. 태어날 때부터 그렇진 않았을 것이다. 비노바가 믿은 것은 바로 그들에게 내재해 있는 신성(神性)이었던 것이다.
간디의 운동이나 비노바의 운동에는 공통점이 있다. 영성과 사회적 운동을 동시에 이뤄낸 것이다. 개인적 해탈보다 공동체적 깨달음을 중시했다. 영성과 혁명, 개인과 공동체, 신과 인간의 통전을 지향했던 것이다.
주변에서 영성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무관심을 종종 본다. 거꾸로 사회개혁가들 중에 영성적으로 형편없는 사람들도 본다. 이 두 부류의 인간들 모두 부족하다. 그리고 그 부족은 실패로 귀결될 뿐이다. 내가 비노바에게 매료된 것은 물론 이 요인이 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그런 지향을 추구하는 사람은 많다. 비노바 만큼 제대로 실천해내지 못할 뿐이다. 특히나 나는 영성보다 사회개혁 쪽에 치중했던 사람이기에 그에게서 참된 영성과 그 훈련을 더 주의 깊게 바라본다.
하지만 너무도 어렵다. 영성은 가부좌 틀고 폼 잡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가장 기본이 사유재산이다. 자본주의 세상에 살면서 이게 쉬운 게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러 공동체를 이루며 버림과 나눔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 것 같다. 혼자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공동체도 영성이 충만하지 못하면 내부 분란만 커진다. 국내에도 변산 등에서 그런 실패 사례를 볼 수 있다. 그 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그의 가르침을 옮기며 명상할 뿐이다. 지금 나의 단계에서는.
“사회와 괴리된 진아 탐구는 그 가치를 상실한다. 하지만 사회 활동을 아무리 정열적으로 하더라도 진아에 대한 탐구가 동반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결함을 갖게 된다. 또한 자아에 대한 탐구 없는 사회활동이 온전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듯이, 사회활동 없는 진아 탐구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그 둘을 분리하는 것은 그 둘에게 모두 해가 된다.”
토지 기증운동을 벌이며 전국을 순례할 때 그가 했던 말, “나는 구걸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초대하러 왔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계속 말한다. “이 세계에서 일할 때 세 가지 길이 있다. 폭력의 길, 합법의 길 그리고 자비의 길이 그것이다. 폭력의 길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합법의 길은 사람이 지닌 자립적 주체적인 힘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우리가 반드시 택해야 하는 길은 자비와 사랑의 여정이다.”
그가 이 운동은 본격적으로 시작한 게 그의 나이 55세 때라고 한다. 그 나이에 그는 마치 자신이 어린 아이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고 한다. ‘어린 아이의 영혼’, 성경에도 나오는 구절이다.
그 운동의 과정에서 그는 타인을 희생시키지 말고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고 말하다. 그 희생이라는 단어. 너무도 어렵다. ‘끊임없는 희생, 기쁨에 찬 희생’, 비폭력을 실현하려면 집착을 없애야 하며, 동시에 우주적인 사랑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역시 어렵다.
그걸 어떻게 하면 할 수 있을까. “항상 수련하는 사람은 계속 생기가 넘칠 서이다. 또한 늘 새로운 통찰과 생각을 갈구할 것이다....... 부처님은 우리가 매일 목욕하고 집을 청소할 때 깨끗함이 유지되듯이 정신 또한 날마다 수련해야 깨끗하게 지속된다고 하셨다.”
그래서인가 그는 “내면의 혁명 없이 외면의 혁명이 있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 헌신과 마음의 정화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역시 어렵다. 그런 어려운 일을 비노바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건, 신에 대한 믿음의 차이 때문일까. 그는 신을 “영혼의 가장 순수한 형태”라고 말한다. “만약 이 지상에서 우리의 몸이 사라진다 해도 우리를 주도하는 의식은 남아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의 세계인 것처럼 동시에 우리는 보다 큰 세계의 일부분이며 우리의 의식은 더 위대한 전체의 부분입니다. 그 전체가 곧 신입니다.”
인간의 선함을 믿는 것이 신에 대한 믿음의 시작이라고 한다. 그 믿음이 있기에 그의 삶은 가능했던 것 같다. 사람에 대한 믿음? 나는 요즘 이게 많이 사라졌다. 그래서 자꾸만 나 혼자의 세계로 도주한다. 이건 바른 명상이 아니다. 알면서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을 키우지 못해서다.
명상도 한 방법이겠다. 하지만 그는 명상을 따로 폼 잡고 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물론 때론 홀로 떨어져서 자신을 살피는 게 필요하다. 그러나 본질에선 명상과 행동, 지식과 행동, 봉사와 영적 수련 사이에 어떤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행동이 명상의 일부분을 구성할 때 명상의 힘은 발휘된다는 것이다. 사회적인 행동에 헌신하는 일 그 속에서 명상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상은 사회의 온전함을 향해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육체적 노동도 강조한다. “육체적 노동을 통해 신께 예배드린다”라고 말한다. 노동과 예배는 하나라는 것이다.
그는 늘 학생이자 선생이었다. 그래서 선생으로서 세 가지 자질을 말한다. 첫째 학생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사랑을 주는 친구가 되어야 한다. 다음은 끊임없이 지식을 탐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하지만 지식 탐구보단 애정이 먼저다. “사랑이 부족하지만 지식에 대한 지성과 헌신이 뒤따른다면 당신은 철학자나 국가에 크게 기여하는 위대한 사상가는 될 수 있겠지만 결코 선생은 되지 못할 것이다.” 대단하다. 선생을 철학자나 위대한 사상가보다 높이 평가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이어지는 그의 교육관. “교육은 학생들의 머리를 정보로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지식에 대한 갈증을 유발시키는 것”이라 한다. “교사와 학생 모두는 접촉을 통해 서로 배우는 학생일 뿐”이라고도 말한다.
그리고 교육의 목적은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두려움을 모른다 함은 다른 존재를 노예로 만들지 않고, 또 비굴하게 다른 존재에게 굴복하지도 않는 것이다.

“나는 산술적 평등을 원치 않는다. 내가 원하는 평등은 다섯 손가락 사이의 평등과 같다. 다섯 개 손가락은 각기 길이가 다르지만 완전히 협동 속에서 수많은 일을 함께 수행해 낸다. 우리는 올바른 분별과 조화로운 평등을 원한다.” 화엄 사상과 통하는 말 같다.

그는 처음 어머니의 가르침을 통해 영적 성숙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다음은 그가 말하는 어머님의 가르침이다.
“베푸는 자는 신이고, 축적하는 자는 악마이다.”
“작음은 좋고 많음은 해롭다는 것을 기억하라.”
“음식은 배를 채우는 정도면 충분하고, 옷은 몸을 가리기만 하면 충분하다.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전부이다.”
“만일 성자들이 몸소 실천하는 금욕의 힘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세상이 어떻게 건재할 수 있었으랴.”
“지혜로운 이들의 말과 신들의 말, 그리고 성자들의 말 이외에는 아무것도 귀담아 듣지 마라.”
이런 가르침이 있어서 그랬나. “내 것이 남아 있는 한 그곳에는 영적인 자유가 있을 수 없다.” “내 것이라는 사고가 우리를 자유가 아닌 노예로 만든다는 사실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무소유하라는 것이다. 가진 것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가 열반에 든 것은 1982년이다. 그는 가기 전에 “나를 잊으라, 그러나 <바가바드 기타>는 기억하라”라는 말을 남겼다. 깊은 내적인 행동의 길로 들어선 사람은 아무 것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드러내려 한다면 그것은 시험을 당하는 것이다.

나는 끊임없이 시험당하며 그리고 매번 그 시험에 넘어가고 있다. 알면서도 그렇다. 에고에 대한 집착이 아직은 많이 남아 있어서다. 그러나 서두름 없이, 가려고 노력한다. 이런 책을 읽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직은 아니지만 늘 염두에 두고 싶다.
“비노바 바베,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 따뜻해지는 사람이여”
그래서 홀로 걷는 모양이다. 가장 행복한 사람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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