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 나의 교육철학
마하트마 K. 간디 지음, 고병헌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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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사 둔 책이다. 내가 언제부터인가 사상적 흐름을 간디 쪽으로 잡으면서 간디 관련 서적이 눈에 띠면 우선 사 두었다. 그러나 항상 책장 장식용이었다.

 

지난 주 육지 나갈 일이 있었다. 공항 대합실, 비행기 안에서 눈 심심한 것 줄이려 이 책을 잡았다. 활자가 크다. 금방 읽겠다 싶었다. 사색 없이 글만 읽어서 그런지 정말 후딱 읽었다. 사색이 없었던 이유는 삶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책 내용처럼 살 자신이 없다. 간디는 말한다. "돈벌이 자체를 위한 삶을 시작했다면 , 그것은 바로 경제적 파탄뿐만 아니라 도덕적 타락을 의미한다"고. 난 요즘 이렇게 살고 있다. 교사이지만 교육을 하지 못한다. 그저 돈벌이로 학교에 출근할 뿐이다. 그러니 이 책을 읽는 게 찬찬히 되지가 않는다. 좋은 내용이다 하면서 건성으로 넘긴다.

 

역자가 후기에서 이렇게 썼다. 시간과 공간이 다른 장소에서 간디의 교육사상이 과연 지금의 한국현실에 들어맞을까 하는 의문이 있다고. 그러면서도 본질은 다르지 않기에 오히려 더 참고할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맞다.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교사는 참으로 자기 학생들에게 어머니 같은 존재라야 한다"라든가, "학생들의 내면에서 최선의 것을 이끌어내는 것, 바로 이것이 진정한 교육이다" 같은 말은 언제 들어도 수긍한다. 다만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하기에 괴로울 뿐이다.

어제도 신문에서 일제고사를 거부했다고 해서 다시 교사를 파면조치 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무기력 뿐이다. 할 말이 없다. 이런 마당에 무슨 교육이 있을까. 사육 뿐이다.

 

이번 나들이에선 대안교육을 실천하는 후배도 만나 보았다. 생각보다 건강하고 뜻이 깊었다. 단순히 대안학교 차원의 고민을 하는 게 아니었다. 마을 공동체를 함께 고민했다. 학교가 마을과 분리되어선 안된다는 것이다. 대안학교라고 해도 그 졸업생들이 다시 도시를 꿈꾸고 현재적 가치에 매몰될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인가 간디 역시 교사는 한 마을에 정착해서 그곳 사람들과 어우러져야 하며, 마을 사람들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게 진짜 교육일 것 같다.

 

암튼 나는 멀다. 이 책과. 간디와. 그러면서도 그를 좋아한다.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멀리서만 그를 좋아한다. 한계. 이 나이 먹도록 실천 없는 삶으로 허비한다. 그래도 책이라도 읽으며 성찰하고 싶다. 그의 교육론 중 기숙사 관련에서 "기도를 위한 시간도 있어야 하고 일과 휴식과 잠에 대한 규칙도 있어야 한다"는 데까지 공감하며, 언제일지 모르지만 한 번쯤은 제대로 된 '교육' 한 번 해보고 삶을 마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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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자왈 아이들과 머털도사
문용포.곶자왈 작은학교 아이들 지음 / 소나무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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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용포 선생님은 내게 처음으로 오름을 가르쳐 준 사람이다. 소박하고 큰 욕심 없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 가득한 사람. 그가 몇 년 전부터 아이들 모아 장난을 하더니 그 폼새가 아름답게 전해진다.

놀이, 자연 속의 놀이, 산다는 게 그 이상의 것일 필요도 없는데, 우리는 너무도 많은 껍질을 쓰고 산다. 그래서인가 이 책에 등장하는 머털도사와 아이들은 결국 우리들이 돌아가야할 세상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다.

가고 싶으면서도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면서 미루는 현대 도시 사람들. 갈증이 크기에 거꾸로 그 삶을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아니면 역으로 외면하고 만다. 나는 어디인가.

 

암튼 반갑다. 그들의 기록이 책으로 엮어져 나온 게. 봄, 여름, 가을, 겨울 마치 차윤정의 <숲의 생활사>처럼, 숲의 생명 대신 아이들의 생명을 사계절 변화와 함께 담아냈다. 아이들에 대한 지독한 애정, 자연에 대한 경외감. 그런 것이들 함께 어울어져 빚어낸다.

 

나 역시 요즘 다시 고민에 들어갔다. 나의 정체성 문제다. 언제까지나 기웃거리다 끝날 것인가. 2008년 한 해를 마치고 2009년 새해를 시작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우물쭈물이다. 예전에 미친듯이 살았던 삶에는 분명 문제가 있었기에, 이제 가다듬고 갈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만난 이 책은 내게 맑은 기운을 더해준다. 고마문 사람, 고마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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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생활사
차윤정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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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 표지 앞장에 장황하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자존심 상할 정도로. 너 뭐 아냐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나는 정보들 속에서 진정으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잇는 지식은 얼마나 미약한가. '숲'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숲을 찾고, 숲을 좋아하고, 숲과 가까이 지낸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다음 물음에 대해 답을 해 보자. 숲에 들어가면 왜 어두운가? 봄 숲에서 야생화는 왜 꽃부터 피울까?......" 등등.

모른다. 어림잡아 답을 해 보지만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모르는 것은 모르겠다. 부실하게 읽어서 그럴 것이다. 그럼 왜 부실하게 읽었을까? 필드 없이 읽어서 그렇다. 저자의 글 솜씨도 뛰어나고 단순히 숲과 나무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과 철학을 같이 논할 정도로 글 맛이 뛰어난데도 나는 여전히 숲을 모르겠다.

등장하는 여러 나무들. 모르는 게 99%다. 절대 지식이 빈곤한 사람이 그저 숲 좋다고 책을 덮석 잡았다가 헤매며 읽은 것이다. 그래도 좋다. 역동성을 느낄 수 있었다.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또 겨울은 겨울대로 숲은 살아있는 생명이었다. 홀로 생명도 아니고 함께 생명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느끼는 경외감. 작은 씨앗의 싹을 틔우는 것부터.

암튼 쓸 말이 많지 않다. 몰라서 그렇다. 그래도 이 책이 내게 준 것은 '이저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숲으로 가라' 메시지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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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을 사는 인간
송봉모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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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봉모 신부님의 성서와 인간 시리즈6편이다. 늘 그랬지만 이렇게 짧은 글만으로 사람을 휘어잡는다. 제목에 있는 단어처럼 본질로 들어가는 글이어서 그럴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그 만큼 본질과 먼 삶을, 멋부리느라, 주변 시선을 의식하느라, 한참이나 돌고 돌아 살고 있다는 뜻도 된다. 본질이 그립다. 난들 본질과 멀어지고 싶었겠는가. 그러나 그렇질 못했다. 세상의 갖은 욕심에 몸을 팔고 마음을 팔다보니, 본질과는 먼 삶을 살았다.

 

하여 간혹 이렇게 이런 영적인 독서를 하면 다시 나를 가다듬게 된다. 왜 살고 있는지부터,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된다. 그래서 좋다.

 

책 중간에 '그리스도교의 본질'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이 단어는 오히려 유물론자 포이에르바하의 책 제목에 있었던 것이라 익숙하다. 그러나 방향은 정 반대다. 포이에르바하는 기독교의 본질을 인간이 자기 필요에 의해서 만든 신에 다시 인간이 숭배하는 것이라고 했다. 대학 때 나는 포이에르바하를 받아들였었다. 세상에 대해 속았다고 느꼈을 때, 나는 신을 버렸고 유물론을 택했다. 세상에 대한 분노를 가지고 나름의 정의를 실현한다고 싸우고 또 싸웠다.

 

그러나 이제 다시 하느님 앞에 무릎 꿇게 되면서 다시 만난 기독교의 본질, 이것이 이제 나를 사로 잡는다. 지식이나 신학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 진짜 만나려면 미쳐야 한다. 예수님에게. 나는 뜨뜻 미지근하다.

저자인 송신부님도 한때 불교적 교리에 많이 심취했었다고 한다. 나 역시 그랬다. 불교적 교리가 참으로 멋있다. 특히 지식인들에게는. 근데 문제는 그 경지에 가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그 경지에 가지 못하면 자칫 허무에 빠지기 쉽다. 근데 다시 예수님을 만나니 지식인적 수행도 아니고 아주 어린애 같은 믿음과 가쁨으로 삶을 만들 수 있음을 본다. 이게 본질이다. 머리로 하는 신학이 아니고 가슴으로 만나는 신앙. 신부님은 신앙의 지성화와 신앙의 조직화라는 폐해가 생겼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실존은 순수한 실존이란 없으며 느낌이 있는 실존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거듭 공감한다. 철학적 분석이나 교의가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 인격적 만남이 있을 때 이게 본질적이고 살아있는 신앙이 된다. 그래서 불교적 차분함을 넘어서 가슴 벅참의 신앙으로, 그 신앙에 바탕을 둔 삶으로 나갈 수 있는 근거를 본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제자다. 제자는 두 가지 본질을 가지는데, 하나는 주님과 함께 머무르는 것, 그 다음은 파견받아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근데, 급해질 때 사람들은 머무름을 제외하고 그저 일만 하려고 한다. 주님께 받은 은총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더 열심히 뛴다. 하지만 이는 위험할 수 있다. 주님과 함께 머무르지 못하고 일에만 매달릴 때, 그 일은 자칫 주님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 되기 쉽다. 그래서 신부님은 '비즉응성'을 강조하신다. 이 비즉응성을 놓치면 우리는 파견받은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파견한 사람이 되기 쉽다. 이는 아주 위험하다. 좋은 일을 한다는 선의를 가지고 시작했으나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일을 하게 된다. 이건 내가 신앙을 벗어나 학생운동, 사회운동에 매달리면서 직접 겪었던 바다. 분명 처음에 민중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적에 대한 분노만 남게 되고, 언제부터인가는 나의 명예를 탐하고 있었다. 중심을 놓쳤기 때문이다. 그 중심이 하느님임은 더 말할 이유도 없다.

신부님은 이런 현상을 '구원 도착증', '구세주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이 경우 순수한 봉사 정신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정신 없이 뛰어다니다가 사업가 정신만으로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일 중심, 이해 중심으로 살아가게 된다. 실제 쉽게 접하는 사례다.

이를 고든 맥도날드는 '불림받은 자'와 '쫒겨 다니는 자'로 구분해서 설명했다.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다. 게다가 나의 지난 시간이 그 '쫓겨 다니는 자'라는 이름에 오버랩이 된다. 씁쓸하다. 웃음도 나오고. 그 쫓겨 다니는 자는 1) 오직 성취만은 목적으로 삼는다. 항시 두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다. 멍청하게 있는 시간을 용납하지 않으며 항시 책을 읽거나 연구를 한다. 2) 자신의 평판에 무척 신경을 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다른 이들이 알아주여야 하고, 자기 분야의 전문가나 권위자와 연결을 가지려고 한다. 3) 절제 없는 팽창욕에 사로 잡혀 있기에, 자기가 이룩해 놓은 성취를 기뻐할 시간도 없다. 더 능동적인 방법, 더 좋은 결과, 더 길은 영적 체험들을 갈망하면서 긴장과 조바심 가운데 살아간다. 더 많은 자료를 수집해야 하고 더 많은 일들을 벌여 놓아야 한다. 4) 경쟁적인 경향이 아주 심하다. 반대나 불신에 부딪히게 되면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격렬한 분노를 품는다. 사람들이 자기 의견에 동의하지 않거나 비판을 하면 분노한다. 5) 비정상적으로 바쁘다. 그들은 너무 바빠서 부부관계, 가족관계, 친구관계 같은 일상적인 관계는 물론이고 하느님과의 관계와 자기 자신과의 관계마저 돌볼 겨를이 없다.

근데 이렇게 옮겨 놓고 보니까, 나는 여전히 쫓겨 다니는 자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직도 피가 더운 것인가, 아직도 정신을 못차린 것인가. 아니 본질을 잃었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내가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놓치고 살기 때문이다. 정신 차려야 한다. 중심이 있으면 남의 평판에 신경쓰지 않을 터인데, 나는 아직도 주변의 눈치 속에 산다. 잘 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이건 나의 삶에 주인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나 라고 여기기 때문에 나온 폐해다. 주님이 주신 만큼만 만족하고 그 범위 안에서 열심히 살면 될 것을. 내가 주인이라고 착각해서 오버하기 때문이다. 유명인사가 되면 더 바빠지기만 하고 주님과 함께 머무를 시간을 갖지 못할 것인데도 나는 바빠지기를, 유명해지기를 원했다.

신클레티가 성녀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드러난 보화가 얼른 쓰여져 없어지듯이 덕행은 유명해지거나 잘 알려지면 쉽사리 사라져 버린다. 밀초가 불에 빨리 녹아버리듯이 영혼도 칭찬을 들으면 텅 비게 되고 견고한 덕을 잃게 된다."

유명해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대로 살아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근데 이렇게 살 게 아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아야 한다. '골방에서 주님과 함께 하면서 강론준비에 집중하는 일'과 '영웅으로 떠받들어주는 대중 앞에 서는 일'에서 무엇이 중요한가 늘 성찰해야 한다. 이 성찰은 내 삶에 주어진 모든 것이 하느님을로부터 오는 선물임을 다시 깨닫은 것이다. '결국 내 자신의 만족과 성취를 위한' 일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선행을 빙자해서 그와 관계된 사람을 이용하여 나를 드러내려는 행위에 불과하다.

"느 누구도 그리스도와 자기 자신을 동시에 증거할 수는 없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잘났다는 것과 그리스도가 주님이라는 것을 동시에 말할 수 없다."

사실 이 때야 인간을 자유로울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항상 명예욕의 노예가 될 뿐이다. 세례자 요한이 "그분은 커져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에서 우리는 파견받은 자의 자유로움을 본다는 송신부님의 지적은 타당하다. 진정 자유롭기 위해서는 내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내 것이라고 착각하는 순간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자유 대신에 시기와 질투, 쓸쓸함과 초라함, 상실감과 우울함에 빠지게 된다.

결국 자기 포기다. '외부와의 줄이 꾾어졌을 때에도 내 삶이 흔들리지 않게' 그렇게 단련해야 한다. 주님 없이 매달리다간 외로움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일임을 항상 자각하고 산다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모든 것을 버려도.

그렇게 성찰 없이, 묵상 없이 뛰어다니다간 다친다. 실제 나는 그렇게 다쳤다. 그러고도 좀 좋아지니까 다시 뛰어다닐 생각만 한다. 또 다칠라. 묵상이 우선이다. 그렇지 않으면 육체적 피로는 물론이고 내적 무질서, 영적 공허감, 좌절감, 원망, 상처, 열정의 상실만 가져온다.

지치면 쉬어야 한다. 육도 영도. 어느 일정 시간은 전화도 받지말고 홀로 내적 고독 속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주변에서 보아온 것처럼 초기에는 순수한 열정으로 일하다가 나중에 피곤하고 짜증스런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안다. 그러니 봉사 후에는 반드시 고독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은 무릎, 젖은 눈, 깨어진 마음" 가지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야 한다. 기도-활동-기도-활동의 고리가 되어야 한다. 기도함으로써 활동하면서 흐트러진 점들을 추스릴 수 있다. 활동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솟아난 인욕이나 갈등을 발견하고 치유해야 한다.

 

그리하여 다시 본질로 가야 한다. 신앙의 본질. 뜨거운 가슴으로 주님을 만나며, 일을 하면서도 항상 주님과 함께 머무르는 시간을 가지는 삶. 그렇게 기도하며 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이것이 2008년 12월 31일에 한 해를 마무리하며 쓰는 나의 독서 일기다. 힘들었지만 그래도 행복하고 기뻤던 2008년을 이제 마치고 새롭게 2009년을 준비한다. 내년에는 보다 더 낮아지고, 아니 할 수만 있다면 비워버려서 그 자리에 나는 없고 나의 하느님만으로 꽉 채워 놓고 싶다. 하느님과의 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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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공지영 지음 / 김영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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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내가 이 책을 손에 잡게되었는지 모르겠다. 인터넷 서점에서 50%할인행사 중에 있었기 때문에 고른 것이 직접적인 이유다. 근데 그것만은 아니겠지. 수도원, 이게 나를 끌었다. 솔직히 작가에겐 미안하지만 다른 사람이 쓴 글이었으면 더 좋겠다 싶었다. 예전에 공 작가의 소설을 몇 권 읽고 내내 마음이 불편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 역시 20 여년 만에 하느님 앞에 돌아와 무릎 꿇고 울며 용서를 빌었던, 아니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였던 처지였기에, 그런 공통점이 나를 위로했다. 하느님을 떠난 동기도 유사했다. 그래서 친근감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80년대, 우린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신을 떠났다. 그리고는 내가 신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나는 심하게 두둘겨 맞았다. 하느님이 보낸 매인데, 이럴 때 쓰는 말이 '사랑의 매'다. <성경>에도 하느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에게 매를 드신다고 했다.

 

근데 읽으면서 작가 특유의 상처를 보면서, 그리고 그 상처를 유난히도 강조하는 모습을 보면서 혀를 찼다. 세상에, 다 살다보면 그 만한 상처들은 다 입고 사는 것인데, 무슨 세상 상처는 혼자 다 받은 것처럼 징징거리는가, 그랬다. 그만한 학벌에, 그만한 유명세에, 그리고 그에 따를 부와 명예에, 뭐가 그리도 부족해서 원망하고 있는가, 뭐가 그리 못마땅해서 그 고통을 유난히 강조하는가. 남들도 다 그래. 아니 남들은 당신보다 더 아파, 그러면서 말이다. 그래서 불편했던 것이다.

근데 그러면서도 내가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부끄러움이 사실은 내 모습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를 피하고 싶었던 것도 어쩌면 그 징징거림이 나의 숨긴 얼굴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말은 그가 그 만큼 대중적인 작가라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솔직하게 써 대는 글. 부끄럽고 숨기고 싶어도 그가 그렇게 까발리니 나도 발가벗는 느낌을 받기에 당혹스럽고, 그러면서도 다시 들춰 보게 되는 그런 모순. 암튼 그래도 나는 불편하다. 좀 더 큰 모습으로 품어가는 모습의 글을 좋아한다.

 

어쨌거나 나도 그런 데를 가 보고 싶다. 근데 돈도 없고, 우리 가족 넷이서 한꺼번에 이동하려면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다 떨궈 놓고 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작가도 말한 것처럼 세상 모든 곳이 수도원이고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수도자이기에, 가보고 싶은 생각은 많아도, 혼자 허영된 마음으로 날아다니고 싶지는 않다. 본능도 중요하지만 컨트롤할 이성도 내겐 중요하다. 그리고 함께 함을 나는 늘 소중히 생각한다.

그래도 가긴 갈 것이다. 돈 좀 모아둬야겠다. 언제가 될 지는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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