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을 사는 인간
송봉모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송봉모 신부님의 성서와 인간 시리즈6편이다. 늘 그랬지만 이렇게 짧은 글만으로 사람을 휘어잡는다. 제목에 있는 단어처럼 본질로 들어가는 글이어서 그럴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그 만큼 본질과 먼 삶을, 멋부리느라, 주변 시선을 의식하느라, 한참이나 돌고 돌아 살고 있다는 뜻도 된다. 본질이 그립다. 난들 본질과 멀어지고 싶었겠는가. 그러나 그렇질 못했다. 세상의 갖은 욕심에 몸을 팔고 마음을 팔다보니, 본질과는 먼 삶을 살았다.

 

하여 간혹 이렇게 이런 영적인 독서를 하면 다시 나를 가다듬게 된다. 왜 살고 있는지부터,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된다. 그래서 좋다.

 

책 중간에 '그리스도교의 본질'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이 단어는 오히려 유물론자 포이에르바하의 책 제목에 있었던 것이라 익숙하다. 그러나 방향은 정 반대다. 포이에르바하는 기독교의 본질을 인간이 자기 필요에 의해서 만든 신에 다시 인간이 숭배하는 것이라고 했다. 대학 때 나는 포이에르바하를 받아들였었다. 세상에 대해 속았다고 느꼈을 때, 나는 신을 버렸고 유물론을 택했다. 세상에 대한 분노를 가지고 나름의 정의를 실현한다고 싸우고 또 싸웠다.

 

그러나 이제 다시 하느님 앞에 무릎 꿇게 되면서 다시 만난 기독교의 본질, 이것이 이제 나를 사로 잡는다. 지식이나 신학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 진짜 만나려면 미쳐야 한다. 예수님에게. 나는 뜨뜻 미지근하다.

저자인 송신부님도 한때 불교적 교리에 많이 심취했었다고 한다. 나 역시 그랬다. 불교적 교리가 참으로 멋있다. 특히 지식인들에게는. 근데 문제는 그 경지에 가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그 경지에 가지 못하면 자칫 허무에 빠지기 쉽다. 근데 다시 예수님을 만나니 지식인적 수행도 아니고 아주 어린애 같은 믿음과 가쁨으로 삶을 만들 수 있음을 본다. 이게 본질이다. 머리로 하는 신학이 아니고 가슴으로 만나는 신앙. 신부님은 신앙의 지성화와 신앙의 조직화라는 폐해가 생겼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실존은 순수한 실존이란 없으며 느낌이 있는 실존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거듭 공감한다. 철학적 분석이나 교의가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 인격적 만남이 있을 때 이게 본질적이고 살아있는 신앙이 된다. 그래서 불교적 차분함을 넘어서 가슴 벅참의 신앙으로, 그 신앙에 바탕을 둔 삶으로 나갈 수 있는 근거를 본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제자다. 제자는 두 가지 본질을 가지는데, 하나는 주님과 함께 머무르는 것, 그 다음은 파견받아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근데, 급해질 때 사람들은 머무름을 제외하고 그저 일만 하려고 한다. 주님께 받은 은총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더 열심히 뛴다. 하지만 이는 위험할 수 있다. 주님과 함께 머무르지 못하고 일에만 매달릴 때, 그 일은 자칫 주님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 되기 쉽다. 그래서 신부님은 '비즉응성'을 강조하신다. 이 비즉응성을 놓치면 우리는 파견받은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파견한 사람이 되기 쉽다. 이는 아주 위험하다. 좋은 일을 한다는 선의를 가지고 시작했으나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일을 하게 된다. 이건 내가 신앙을 벗어나 학생운동, 사회운동에 매달리면서 직접 겪었던 바다. 분명 처음에 민중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적에 대한 분노만 남게 되고, 언제부터인가는 나의 명예를 탐하고 있었다. 중심을 놓쳤기 때문이다. 그 중심이 하느님임은 더 말할 이유도 없다.

신부님은 이런 현상을 '구원 도착증', '구세주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이 경우 순수한 봉사 정신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정신 없이 뛰어다니다가 사업가 정신만으로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일 중심, 이해 중심으로 살아가게 된다. 실제 쉽게 접하는 사례다.

이를 고든 맥도날드는 '불림받은 자'와 '쫒겨 다니는 자'로 구분해서 설명했다.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다. 게다가 나의 지난 시간이 그 '쫓겨 다니는 자'라는 이름에 오버랩이 된다. 씁쓸하다. 웃음도 나오고. 그 쫓겨 다니는 자는 1) 오직 성취만은 목적으로 삼는다. 항시 두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다. 멍청하게 있는 시간을 용납하지 않으며 항시 책을 읽거나 연구를 한다. 2) 자신의 평판에 무척 신경을 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다른 이들이 알아주여야 하고, 자기 분야의 전문가나 권위자와 연결을 가지려고 한다. 3) 절제 없는 팽창욕에 사로 잡혀 있기에, 자기가 이룩해 놓은 성취를 기뻐할 시간도 없다. 더 능동적인 방법, 더 좋은 결과, 더 길은 영적 체험들을 갈망하면서 긴장과 조바심 가운데 살아간다. 더 많은 자료를 수집해야 하고 더 많은 일들을 벌여 놓아야 한다. 4) 경쟁적인 경향이 아주 심하다. 반대나 불신에 부딪히게 되면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격렬한 분노를 품는다. 사람들이 자기 의견에 동의하지 않거나 비판을 하면 분노한다. 5) 비정상적으로 바쁘다. 그들은 너무 바빠서 부부관계, 가족관계, 친구관계 같은 일상적인 관계는 물론이고 하느님과의 관계와 자기 자신과의 관계마저 돌볼 겨를이 없다.

근데 이렇게 옮겨 놓고 보니까, 나는 여전히 쫓겨 다니는 자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직도 피가 더운 것인가, 아직도 정신을 못차린 것인가. 아니 본질을 잃었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내가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놓치고 살기 때문이다. 정신 차려야 한다. 중심이 있으면 남의 평판에 신경쓰지 않을 터인데, 나는 아직도 주변의 눈치 속에 산다. 잘 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이건 나의 삶에 주인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나 라고 여기기 때문에 나온 폐해다. 주님이 주신 만큼만 만족하고 그 범위 안에서 열심히 살면 될 것을. 내가 주인이라고 착각해서 오버하기 때문이다. 유명인사가 되면 더 바빠지기만 하고 주님과 함께 머무를 시간을 갖지 못할 것인데도 나는 바빠지기를, 유명해지기를 원했다.

신클레티가 성녀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드러난 보화가 얼른 쓰여져 없어지듯이 덕행은 유명해지거나 잘 알려지면 쉽사리 사라져 버린다. 밀초가 불에 빨리 녹아버리듯이 영혼도 칭찬을 들으면 텅 비게 되고 견고한 덕을 잃게 된다."

유명해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대로 살아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근데 이렇게 살 게 아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아야 한다. '골방에서 주님과 함께 하면서 강론준비에 집중하는 일'과 '영웅으로 떠받들어주는 대중 앞에 서는 일'에서 무엇이 중요한가 늘 성찰해야 한다. 이 성찰은 내 삶에 주어진 모든 것이 하느님을로부터 오는 선물임을 다시 깨닫은 것이다. '결국 내 자신의 만족과 성취를 위한' 일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선행을 빙자해서 그와 관계된 사람을 이용하여 나를 드러내려는 행위에 불과하다.

"느 누구도 그리스도와 자기 자신을 동시에 증거할 수는 없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잘났다는 것과 그리스도가 주님이라는 것을 동시에 말할 수 없다."

사실 이 때야 인간을 자유로울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항상 명예욕의 노예가 될 뿐이다. 세례자 요한이 "그분은 커져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에서 우리는 파견받은 자의 자유로움을 본다는 송신부님의 지적은 타당하다. 진정 자유롭기 위해서는 내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내 것이라고 착각하는 순간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자유 대신에 시기와 질투, 쓸쓸함과 초라함, 상실감과 우울함에 빠지게 된다.

결국 자기 포기다. '외부와의 줄이 꾾어졌을 때에도 내 삶이 흔들리지 않게' 그렇게 단련해야 한다. 주님 없이 매달리다간 외로움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일임을 항상 자각하고 산다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모든 것을 버려도.

그렇게 성찰 없이, 묵상 없이 뛰어다니다간 다친다. 실제 나는 그렇게 다쳤다. 그러고도 좀 좋아지니까 다시 뛰어다닐 생각만 한다. 또 다칠라. 묵상이 우선이다. 그렇지 않으면 육체적 피로는 물론이고 내적 무질서, 영적 공허감, 좌절감, 원망, 상처, 열정의 상실만 가져온다.

지치면 쉬어야 한다. 육도 영도. 어느 일정 시간은 전화도 받지말고 홀로 내적 고독 속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주변에서 보아온 것처럼 초기에는 순수한 열정으로 일하다가 나중에 피곤하고 짜증스런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안다. 그러니 봉사 후에는 반드시 고독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은 무릎, 젖은 눈, 깨어진 마음" 가지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야 한다. 기도-활동-기도-활동의 고리가 되어야 한다. 기도함으로써 활동하면서 흐트러진 점들을 추스릴 수 있다. 활동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솟아난 인욕이나 갈등을 발견하고 치유해야 한다.

 

그리하여 다시 본질로 가야 한다. 신앙의 본질. 뜨거운 가슴으로 주님을 만나며, 일을 하면서도 항상 주님과 함께 머무르는 시간을 가지는 삶. 그렇게 기도하며 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이것이 2008년 12월 31일에 한 해를 마무리하며 쓰는 나의 독서 일기다. 힘들었지만 그래도 행복하고 기뻤던 2008년을 이제 마치고 새롭게 2009년을 준비한다. 내년에는 보다 더 낮아지고, 아니 할 수만 있다면 비워버려서 그 자리에 나는 없고 나의 하느님만으로 꽉 채워 놓고 싶다. 하느님과의 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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